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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06
이사야 53장 11절
성경이 말하는 참된 위로를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그 구원에 대하여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구조가 이렇게 세 가지로 되어 있는데, 지난 시간까지 첫째 부분인 죄와 비참함에 대하여 살폈습니다. 이제 그런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살필 차례인데, 10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에 대하여 심히 진노하시며, 이 땅에서 그리고 영원토록 의로운 심판으로 벌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공의의 하나님은 결코 악인을 의롭다고 말씀하시지 법이 없으십니다(출23:7). 물론 11문에서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 아니신가 묻지만 자비로우시면서 도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재차 강조합니다. 즉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죄에 대하여 공의로 벌하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살필 때 언급되겠지만 우리를 향한 자비하심 가운데서도 공의가 없이 자비만 행사되는 법은 없습니다.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반드시 공의를 시행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할 때 사람이 범한 죄에 충족한 형벌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에 대한 만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으로 시작해서 죄만 쌓다가 끝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아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가 누구냐?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대략적인 내용이 이것인데, 우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문부터 보겠습니다.
12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땅에서, 또한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면, 우리가 그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그의 공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창2:17, 출20:5, 23:7, 겔18:4, 마5:26, 살후1:6, 눅16: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다른 이를 통해서든 그것을 완전히 만족시켜야 합니다(롬8:3-4).
일단 질문 자체를 보면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땅에서, 또한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에 대한 표현과,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서 자신의 공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방법은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 그리고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죗값을 치른다고 할 때 질문 두 번째 부분의 내용을 적용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 죗값을 치른다고 할 때 그것이 곧 형벌을 피한다고 할 수 있는가? 또한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죗값을 치른다는 것은 결국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형벌을 받는 것으로 그것은 결코 형벌을 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형벌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형벌을 받는데, 거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문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공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신다고 할 때 우리 스스로가 만족시키든 아니면 다른 이를 통해 만족시키든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어지는 질문에서 말하고(13문), 결국 다른 이를 통해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조금 더 세세하게는 다른 이를 통해 만족시켜야 한다고 할 때 피조물 가운데 만족시킬 수 있는 대상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 없다는 것(14문),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이 아닌 다른 이를 통해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15문)으로 설명합니다. 그분이 누구냐?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일단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15문까지의 내용인데, 우선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3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3문. 하지만 과연 우리가 스스로 이를 보상할 수 있습니까?
답. 절대로 보상할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빚을 더 늘려갈 뿐입니다(욥9:2-3, 15:15-16, 4:18-19, 시130:3, 마6:12, 18:25, 16:26).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죄인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합니다. 예를 들어 제물을 드린다든가, 참회를 한다든가, 선행을 한다든가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제물을 드린다고 해서, 참회를 한다고 해서, 선행을 한다고 해서 자신의 죗값을 치를 수 있는가? 없습니다.
실제로 가톨릭에는 보속이라는 교리가 있는데, 보속은 죄를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보속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들이 말하는 회개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는데, 저들에게 회개는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심령의 통회이고, 두 번째는 입으로 하는 고백이고, 세 번째는 행위로 하는 보속입니다(기독교강요, 1559, 3권 4장 2).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세 번째 부분에서 저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과거의 악행을 그치고 행실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하며, 그가 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속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보속으로 눈물과 금식, 예물과 자선 행위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방법들로 주의 노여움을 풀며, 하나님의 의에 대한 빚을 갚으며, 범행에 대한 보상을 치르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기독교강요, 1559, 3권 4장 25). 요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우리의 범행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행위 공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행위를 통해 보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눈물을 흘리더라도, 거기에 금식을 하고, 예물을 드리고, 자선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 선이 과거의 죄를 보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죗값을 치르기보다는 죄에 죄를 더하는 자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에 앞에서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자로 있는 게 아니라, 율법을 계속해서 범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원죄, 특별히 전적 부패성은 전적 무능력과 함께 선이 아니라 죄와 악만 더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께 진 빚이라고 할 때 빚이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날이 가면 갈수록 빚을 늘려갈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고 또 지으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더욱 증가시켜나갈 뿐입니다.
이런 인생이기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욥기 9장 1절 이하 3절입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데만 사람 엘리바스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욥기 15장 14절 이하 16절입니다.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다윗 역시 시편 130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130:3)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6:12) 원문은 죄가 아니라 빚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주신 자들이라 할지라도 죄를 짓기 때문에, 그것도 매일 죄를 짓기 때문에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자도 죄에 죄를 더하며 빚에 빚을 더하는 자로 있는데, 그래서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불신자들의 경우 어떠하겠습니까? 더더욱 죄에 죄를 더하지 않겠습니까? 더더욱 빚에 빚을 더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불신자들의 경우 로마서 1장 32절과 같은 자세를 취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그러나 그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로마서 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3-5)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죗값을 보상할 수 있는가? 절대로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빚을 더 늘려갈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죗값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다른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하는데, 14문은 나 아닌 다른 피조물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14문. 우리를 위하여 보상해 줄 수 있는 자를 과연 그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 중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답. 그런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해 다른 피조물을 벌하기를 원치 않으실 것이며(겔18:4, 창3:17, 히2:14-17), 더 나아가서 그저 피조물에 지나지 않은 존재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이들을 거기에서 구원해 낼 수도 없습니다(나1:6, 시130:3).
일단 구약에 보면 죄 사함을 위하여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도록 명하신 규례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보면 다양한 종교들 안에서도 종종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짐승을 통한 대속적 희생을 통해서 속죄가 가능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데,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3-4) 물론 이런 내용 때문에 구약 백성의 죄가 사함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코케이우스라는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구약 백성의 죄 사함은 못 본체 간과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한 방식으로 구원을 베푸신다고 할 때 죄 사함 역시 동일한 방식과 내용으로 있지만, 분명한 것은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해 다른 피조물을 벌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으로 답하고 있는데,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사람이 그 값을 치러야 합니다. 만물의 으뜸인 사람의 죄를 자기보다 못한 피조물이 대신하여 값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를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도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롬3:20)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죄 문제와 관련하여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범했기 때문에(롬3:23) 각 사람은 각자가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죗값을 대신하여 치를 수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여기에 더하여 그저 피조물에 지나지 않은 존재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데,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고 다시금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른 이들을 거기에서 구원해 낼 수도 없다고 말하는데, 혹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가 형벌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속할 만큼의 충족한 위엄과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그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는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할 수가 없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속 받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필수적입니다. 필수적인 이 모든 내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보상해 줄 수 있는 자가 피조물 중 어떤 대상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12문의 답변으로 가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공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다른 이를 통해서든 그것을 완전히 만족시켜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13문). 또한 다른 이를 통해서라고 할 때 나 아닌 다른 어떤 피조물을 통해서도 할 수 없습니다(14문). 그렇다면 12문에서처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땅에서, 또한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가? 그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요 우리의 구원자라고 말씀하는데, 왜 그가 우리의 중보자요 구원자인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을 피하게 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문은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하는가?”를 묻는데,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고 또 나 아닌 다른 어떤 피조물을 통해서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문의 답변을 만족시킨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고 영원토록 형벌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우리의 중보자요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문입니다.
15문.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답. 참 사람이시고(고전15:21, 히2:17), 의로운 분이면서도(고전15:21, 렘33:16, 사53:9, 고후5:21, 히7:26) 모든 피조물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 즉 참 하나님이신 분을 찾아야 합니다(사7:14, 9:6, 렘23:5-6, 눅11:22, 요1:1, 롬8:3-4).
일단 우리가 과연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하는가 할 때 반드시 참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죗값은 사람이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만물의 으뜸인 사람의 죄를 사람보다 못한 피조물이 대신하여 값을 치를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피조물로서 사람은 각자가 자신의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는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누구도 예외 없이 죄인이며, 자신의 죄만으로도 영원한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데 어떻게 죗값을 치르고 형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반드시 참 사람이어야 하지만 죄 있는 피조물이 아니라 죄 없는, 다시 말해 의로운, 그러나 피조물이 아닌, 피조물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피조물보다 능력 있는 분은 오직 참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의 중보자와 구원자는 반드시 참 사람이시고, 의로운 분이면서도 모든 피조물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 즉 참 하나님이신 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누구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의 중보자와 구원자는 누구 밖에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에서 피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53장 11절이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데,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체를 세세하게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4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5절에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 받으시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이유는 죄인 된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 대신하여 그가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6절에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말씀합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처럼 우리의 죄 역시 그리스도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이사야 53장 10절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고난을 받도록 하시는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로 하여금 고난을 받게 하신 주체가 누구시냐?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데, 10절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뜻에 대하여 억지로 끌려가듯 하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길 기뻐하셨다는 겁니다.
특히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린다는 표현이 있는데,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속건제물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속건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린다고 말하기 때문에 영혼까지 죽음에 이른다는 것인가란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한번 시작된 이상 불멸하기 때문입니다. 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을 외치셨는데, 그 의미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뜻입니다. 즉 그가 당한 고난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말씀하실 만큼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고 단절되었다고 말씀하실 만큼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이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는데, 그 고난이 어느 정도냐? 하나님과 단절되고 하나님과 분리될 정도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죄는 그만큼 심각한 문제란 것입니다. 바로 그 죄 때문에 우리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결과가 무엇인가? 10절 중간에 보면 그가 씨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씨를 보게 된다는 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인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요12:24 참조). 이어지는 그의 날은 길 것이라는 말씀은 생명을 얻는 정도가 아니라 영생에 이르기까지 한다는 그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11절로 이어집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죄인 스스로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한다면 영원한 형벌로 끝날 것입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에서 피하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실 때 죄 없으신 분으로 오셨고, 그래서 의로운 종이라고 불릴 수 있으며, 의로운 종이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지실 수 있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피조물이 할 수 없는 일조차 하실 수 있는데, 죄를 대신하여 지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으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그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에서 피하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5문,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하는가 할 때 참 사람이시고, 의로운 분이면서도 모든 피조물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 즉 참 하나님이신 분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6문에서 중보자는 왜 참 사람이셔야 하고, 또한 완전히 의로운 분이셔야 하는가를 묻고, 17문에서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된 하나님이셔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즉 왜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을 충족하시는 분이 누군가 할 때 18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살핀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때문에 다른 이가 우리를 구원해야 하는데, 우리가 아닌 다른 피조물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다른 이라고 할 때는 피조물이 아닌 대상 그러나 반드시 사람이어야 하기에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보자요 우리의 구원자로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중보자, 구원자는 결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