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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30 처음 사랑이신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
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2:22-25) 참고 말씀(계2:1-7)
롬5:12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
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이 지금 이때는 절대로 어린아이 수준이면 안 됩니다. 여러
분이 믿는다면 이미 믿음의 장성한 때가 돼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로 있으면 망합니다. 지금 이
종말이 가까운 이때 하나님께서는 믿은 지 오래되었느냐? 오래되지 않았느냐? 물으시는 것이 아니
라, 지금은 어린아이로 있는 것이 용납되는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이것을
해야 하느냐, 하지 않아야 하느냐? 이것도 버려야 하느냐? 하는 것을 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믿음이 돼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알 수 있어야 함에도 일일이 묻는 것이면 '하라,
하지 말라'를 여전히 지적받는 것이면, 솔직히 고전14:38의 말씀,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알지 못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자로 그냥 버려두라고 하신 것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염려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
게 이르렀다'하는 이것은 처음 사람 아담에게만 해당한다고 했습니까? 아닌 것 분명합니까? 내가
아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우리가 다 아담입니다. 그러면 아담은 누구
와 연결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과 연결된다고 말씀드렸어요. 내가 곧 아담이요 아담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예수님을 예표 하는 자로 지음을 받았으니 만일에 우리도 아담이 아
니면 예수님과 연결될까요? 아담이 아니면 예수님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연결이 될 수가
없습니다. 관계될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은 우리가 다 아담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예수님과 관계
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첫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죄로 인해, 그 죄의
값을 치르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곧 아담이요 아담이 지은 죄는 내가 지은 죄라는 것이
백 퍼센트 인정이 돼야 예수님이 자기의 죄 때문에 오신 것이요, 피 흘려 죗값을 치르신 것이 곧
자기의 죄를 갚아주셨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은 예수님을 예표 하는 사람이라고 하
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신 뒤에 결정된 것이라 했습니까? 창조 전에, 사람을 짓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다는 것, 여러분이 다 믿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왕이면 성경 구절까
지 알면 좋겠습니다. 엡1:3-5와 딤후1:9-10입니다. 창세 전에 뜻을 두셨다는 것을 말씀한 성경 구
절을 알고 계시면 좋겠다는 말이죠.
엡1:3-5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영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딤후1:9-10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
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
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
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 얼마나 멋지고 귀하신 일입니까? 할렐루야!!!
그러면 아담의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끊어졌다는 것입니까? 아담 안
에 사망이 들어왔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아담을 떠나셨거나 아담과 관계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것
여러분이 알게 됐고 이것을 또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선악과의 죄를 지은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임재에 거하기만 하면 죄의 문제, 사망의 문제는 어련히 아시고 해결하십니다. 사
람이 선악과의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간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을 따라 사는 것이 지음을 받은 이유요, 뜻이요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왜 아담을 죄짓게
해서 죄인이라고 하느냐?''아담은 왜 죄를 지었느냐?'라고 불평하고 따질 이유 없다는 것, 명백하
잖습니까? 원래 사람이 지음을 받은 목적대로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살면 되지,
예수님을 믿어 영생 얻으면 되지, 여기 다른 이유 갖다 붙여 불평할 일 없다는 것, 명백하지 않느
냐 말입니다. 그러면 죄인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지 않으시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아담이 지은 죄는 이미 어련히 아셔서
깨끗이 처리하실 것으로 하시고, 처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 사단에
게는 비밀로 가진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하나님의 숨은 뜻을 가지고 '합력하여 선
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죄를 지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
으신 목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찬송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 하셨으니, 절대로 하나님께 딱 붙어
서 살아야 하는 것, 인간이 여기에 핑계할 수 없고, 불평할 수 없다는 것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니 왜 죄지었느냐며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누가 지은 것입니까? 내가 지은 것
입니다. 곧 내가 아담입니다. 만일 자기가 아담이라는 것, 연결하지 않으면 예수님 만날 수 없습니
다. 처음 사람 아담이 지은 죄로만 보여 그렇게 말하고, 그 죄를 아담에게만 돌리고 있다면, 그것
은 자기와 예수님과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아담이다'라고 하시는데 자꾸 처음 사람만 아담
인 줄 알고 그 아담이 지은 죄라는 것만 말한다면, 결국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정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만날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 예수님이 둘째 아담으로 오
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네가 정죄하면 네가 정죄 받는다고, 그것은 자기 자신을 정
죄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아담이 지은 죄로만 보는 사람들 다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다 여기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죄가 들어
왔고 아담의 죄 때문에 자기도 덩달아 죄인 취급받는 정도로만 취급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
니 이 관계를 자신에게 연결하여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연결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정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인도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께로 인도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
니까 다 '주여! 주님!'으로 연결해주는 것이잖습니까? 이것을 알아듣지 못하면 여러분의 믿음도
문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 이후 가인이 살인죄를 짓고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
담의 죄는 땅에 저주가 들어오는 것이었지만, 가인의 범죄는 자기 자신(사람)이 저주받는 것이 됐
습니다. 저주라고 하는 것은 사단에게 자신을 내주었으므로 사단에게 속하여, 사단의 성품이 되고
사단을 주인으로 섬기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입니다. 사단의 성품으로
자란 죄악의 종자입니다. 이같이 가인의 길에 있는 우리까지라도 구원하시려고 하신 것이 바로 하
나님의 사랑입니다. 처음 사람은 영적 죄만 가졌지 악은 갖지 않았습니다. 악은 누구입니까? 악은
사단입니다. 그래서 죄악에 빠진 우리까지도 구하여 내시려고 예수님께 죄의 짐, 죄악의 짐을 다
지우셨습니다. 사단에게 자신을 내준 가인의 후손을 사단의 손에서 건져 사단은 멸하고 사람은 구
원하신다는 뜻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17:11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는 말씀대로 이 뜻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시는 날까지 구약 백성에게는 죄를 모르는 흠
없는 소나 양에게 죄를 전가하여 죽여 피 흘려 죄가 속함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양 잡고 소 잡아 피 흘리던 것은 온전한 속죄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실 것에 대
한 예표요, 죄 없는 소나 양 등이 매일 제물로 죽어야 했던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같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세상의 구주로 오시게 되었는가를 구약을 통해서 열심히 가르쳐주고 알려주셨습니다. 혹자
는 말하기를 구약을 짜면 흠 없는 소나 양 등의 피가 나올 것이고, 신약을 짜면 예수님의 피가 끝
없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죄로 인하여 피 흘리는 역사요 피의 책입니다.
피 흘리고 그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오시기 위
한 피 흘림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피를 왜 흘리시고 죽으셔야 했는지 알지 못하면,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것은 그와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죄악과 연결하여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
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죄와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삶의 문제들을 위해 믿
는다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많은 간증을 듣고 읽은 것 중에도, 자기 삶의 문제를 위해 믿는 것
이 돼 있었습니다. 자기 삶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다.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사업이 부도가 나고, 그 고난 가운데 새벽 기도를 작정하여서 했더니,
금식 기도를 작정했더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
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즉 '네가 부르짖어 기도하면 무
너진 네 사업 일으켜주고, 네 가산을 세워주겠다'는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처럼 말하는 그런 간증
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또는 '너는 내 것이라'하는 그 말씀으로 응답을 참 하나님이 주셨느
냐 할 때 참 하나님은 먹고사는 문제에, 잘 안 풀리는 사업에 그렇게 '부르짖으라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참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면, 그에게 지금 먹
고사는 것, 사업에 부도 위기 된 그런 육의 것 때문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
으면 안 되는 더 근원적인 일, 다시 말해 하나님이 왜 그 말씀을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는지부
터 철저히 깨닫고 자기 자신부터 보고 적용하라고 주셨을 것이요,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모두가 다 '하나님이 응답하셨다'하는 것도 아니다 하는 것, 솔직히 말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처럼 죽음에 내주시기 위해 그같이 수천 년 동안을 준비하신 하나
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기까지 죽으셔야 했던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알도록 기록하시고, 그
같이 죄와 사망과 생명의 문제로 핍박과 죽음도 불사하고 선지자들로 외치게 하셨을 것을, 예수님
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는가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먹고사는 것 가지고 응답해줄 것이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겠는가 하는 것, 좀 지각이 있다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오셔서 죄인을 부르셨고 죄인을 찾으셨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가 되신 하나
님은 죄인을 찾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필요 없다고, 의롭다 함을 받은 죄 없는 자
만 부르십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은 죄인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죄 없는 자(물두멍
의 죄를 씻은 자)만 만나십니다. 성영님께서도 죄 사함 받은 예수님의 피로 죄가 처리된 거룩한 자
안에만 임하십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사람들이 죄의 문제보다는 자기의 생활과 육의 문제들을 훨씬
더 큰 것으로 보는 눈만 가졌습니다. 그렇기에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는 것도 죄는 문제는 보이지 않고, 복 주시고 부르짖으면
응답하리라는 것만 보이니, 악한 자 사단의 영들이 그렇게 '부르짖으라 응답해줄께, 너는 내 것이
다'하는 음성을 들려주고 자기의 밥으로 삼아, 주여 주님만 찾도록 이끌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기 원하면 먹고사는 문제가 아무리 급하고 크다 해도, 하나님께서 당신 하나
먹이고 입히지 못하시는 분 아니니 그것으로 예수님(주님)을 부르고 찾는 것 금하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인, 죄악으로 나간, 사망의 길로 나간, 망할 사단의 종자라는, 그래서 영원한 유황
불못으로 떨어지게 된 자기의 처한 처지부터 보는 것이 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죄악의 짐과
저주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생명의 피를 내놓아 죽음으로 죄를 청산해 주신 그 사랑을 보
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먼저 확실히 깨닫고 보는 것
부터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몰라도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에 예
수님의 피를 모르면 그것은 자기의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모르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보이겠습니까?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피를 모르는 사람이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 있
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신다는 것 이미 말씀드렸습
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그 피를 사랑하는 자가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그 피의 증거를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받으시
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흘려주신 피가 무엇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예수님
을 믿는다는 자기를 위해 흘려주신 피가 무엇 무엇인지 아는가 말입니다. 그 피가 자기를 살리신
피로, 얼마나 영과 혼과 몸에 흔적을 가진 믿음으로, 자기에게 능력이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은 순종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라 하
는 동산에 올라가셔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담의 죄는 땅에 저주가 들어왔
고, 가인의 죄악은 인간에게 저주가 들어와 찌르는 가시와 할퀴는 엉겅퀴와 육체의 질병들과 이기
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살인과 거짓 등등 이 같은 온갖 부정한 악의 노예가 되고, 정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야 하는 명을 받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그 고난의 때가 눈 앞에 오자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비통한 마음으로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힐 그 일
이 너무나 큰 짐이 되어 짓눌리는 영혼의 고통으로, 두렵고 고민이 되어 마음이 심히 괴로우셨습
니다. 스스로 의인이 되어 자기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기 백성에게 자신이 '오리라 언약했던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셨으나 오히려 사단의 자식들으로 돌아간 그들에게 죄인으로 정죄당하여
침 뱉음을 받고, 뺨을 맞으시고, 발길질과 채찍의 맞음과 온갖 모욕으로 수치를 당하고, 죄인처럼
십자가에 벌거벗긴 채로 달려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달려야 하는 일 등으로 예수님의 마음은 심히
고민되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인류의 죄와 죄악의 짐을 다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일이었습니
다. 그 짐은 너무나 크게 몰려와 영혼이 짓눌려 감당할 수 없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
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죄악과 저주의 짐을 지워 사단에게 내주셔야 했습니다. 영과 혼과 육체에
죄와 저주를 지고 흉악한 죄인처럼 버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람의 영에 들어온 수치와 두려움이
예수님께 온전히 전가되어 겪는 수치요 두려움이었습니다. 영혼을 짓누르는 죄의 무게와 수치와
두려움으로 인해 너무나 고민이 되었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 두려움으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내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하실 수 있으면, 그리하셔도 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
옵소서' 이 때가 자기에게서 그냥 지나갈 수 있다면 지나가게 해주시라고 세 번을 기도하시며 간구
를 올렸습니다. 히5:7에 예수님은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
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에게 넘겨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는
듣지 않으셨습니다. 요12:27에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라고 걷잡을 수 없는 고뇌
의 마음이 들어 심히 괴로우셨으나, 예수님께서는 곧 또 자신이 그 일을 위해 오셨으므로 순종해야
함을 아셨기에,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하시고 아버지께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자신을 내드렸습니다.
하실 수만 있으면 이때를 그냥 지나가기를 세 번(영,혼,육)이나 간구하셨던 만큼 이 일을 순종하시
기가 영,혼,육으로 얼마나 두렵고 힘든 일이었는지 그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
서 그 기도를 드리실 때에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
더라고 했습니다. 순종을 위해 두려움과 맞서 싸우신 기도였습니다. 사람이 사단에게 자신을 지배하
도록 권리를 내주었기에, 예수님께 그 권리로 당당히 맞서는 사단과 싸우셔야 했습니다. 즉 두려움
과 맞서 싸우셔야 하는 예수님의 영.혼.육 전인의 고통으로 인해 배어 나온 땀이, 그렇게 땅에 떨어
지는 핏방울 같이 된 것, 순종하셔야 할 그 일이 얼마나 고민되었던지 힘을 쓰고 애를 써 기도하시
니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흘리신 피가 바로 순종을 열어놓으신 피였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는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우셨
기 때문에 그렇게 처절하게 부르짖은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물론 감각이 살아 있는 육체의 고통도
견딜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이 흉악한 죄인처럼 하나님께
영과 혼과 육체의, 전인이 버림받아야 하는 두려움과 사단의 사망 권세와 맞서 싸워야 하는 그 영
혼의 고통이 예수님께는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하신 예수님의 영과 혼이 겪는 이 영혼의 고통은 보지 못하면서, 그같이
육체의 감각적인 것만 고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모르는 자
기 양심(사단)의 안목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절규하시고 영혼이 떠
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처절한 절규는 예수님의 영혼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의 장소
인 사망의 보좌 가운데로 떨어졌는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나를 버리시기까지 이렇게 사람을 사랑
하셨습니까? 나를 사단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사랑입니까?'라는 절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고통을 감히 짐작해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절규의 외침은 알아들을 수 있어
야 합니다. 자기 죄악의 무게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시고 사단의 사망으로 들어가셔야 할
만큼 크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아는 자만이, 볼 수 있고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께 버림받고 사망으로 들어가야 하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를, 그 영혼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영으
로 느끼는 자만이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죄인만이 영혼의 귀로 들려지는 절규입니다. 죄인의 영혼에 듣게 하신 절규입니다. 네가 죄인
이냐? 죄인이면 내게 오라고, 나를 버리시기까지 죄인을 구원하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너희
가 좀 보라고, 죄인이면 나에게 와서 죄에서 자유를 얻고 영생을 얻으라고 부르시는 외침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죄인이 없어서, 자기 죄를 볼 눈도 없고, 자기 죄에 대한 감각이 없
으니,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고통을 말할 때, 예수님도 사람이라서 못 박힌 것이 너무 아프고, 달
려 계신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우셨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
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처절히 외치셨다고, 육체의 고통에만 초점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육
체로 겪는 고통 외에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알 수도 없는 겁니다. 죄인을 십자가에 달아 못 박는
것이 예수님이 오시기 2백여 년 전부터 행해오던 로마의 처형 법이었어요. 예수님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많은 죄인이 달려 죽었고, 제자 중에도 달려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보다 더 혹독함으로 죽음을 맞은 제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죄인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하면
다 헛소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백 퍼센트 죄인의 구주입니다. 죄인 때문에
그곳에 달리셨습니다. 죄인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죄인만이 예수님의 절규를 알
아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이 피와 같이 땅에 떨어진 것은,
불순종의 대가로 순종의 피를 흘리셔야 했던 것이고, 우리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되게 하셨습니
다. 그래서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죄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아니면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예수님의 의
로 살고자 하는 것이요 성영님이 그 안에 오시니 기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죄 사함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단의 사망 권세 앞에 내어주시고 죄
인처럼 십자가 형틀에 달리도록 하셨습니다. 사단은 자기 후손들과 함께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했
다는 죄목을 씌워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여 사망이 하나님(생명)까지 삼킨 것
과 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실 수 없는, 죄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다시 살아나셨습니
다. 성영님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이제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렸습
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회개하여 예수님께 나오면 그 죄를 없이하시고,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 얻
게 하시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는 죽었고, 사단의 사망 권세는
깨졌고, 생명 얻는 법이 되었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죄를 없이하신 능력이 되었습니다.
요일1:7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죄는 십자가
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서 분명히 살아나셨으니 죽음은 끝났습니다. 십자
가에 죄가 달렸고 저주가 달렸고, 마귀의 사망 권세가 달렸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을 생각하여 감정이 복받쳐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며 눈물을 흘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같이 십자가
에 달려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의미를 확실히 깨달아서 자기에게 적용하여 믿음이 되라는 것
입니다. 그것이 영원 영원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아! 십자가에는 율법의 저주가 달려버렸구나! 십
자가에는 내 죄가 달려버렸구나!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니 십자가에 사단의 사망 권세가 달려버렸구
나! 그럼 나는 죄에서 자유구나! 율법의 정죄가 끝났구나! 죽음으로부터 자유구나! 아! 나는 자유
다!'하는 이 믿음의 외침이 영혼에서 올라와야 합니다. 영으로부터 올라오는 외침, 이 자유를 경험
한 믿음만이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의 복을 소유한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이같이 겟세마네 동산
에서 기도하시며 흘리신 피는 순종의 피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신
피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다음 치료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사53:5-10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가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
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
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
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
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했습니다. 바로 고난당하실 예수님을 이같이 묘사했는데 이
예언 그대로 응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의 채찍에 맞으심이 내가 나음을 입은 것이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니 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빌라도
의 군병들에게 채찍에 맞아 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같이 될만큼 사람의 자아와 사
단과 맞서 싸우시며 순종의 피를 흘리신 뒤 곧 대제사장의 군졸들에게 끌려가 대제사장 가야바 앞
에 세워졌습니다. 그곳에서 심한 멸시와 조롱과 침 뱉음과 천대를 받으시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졌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문초한 후에 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병들에게 끌려가 벌거벗김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갈고리가 달린 채찍으로 예수
님의 가슴과 등허리, 온몸을 후려칩니다. 후려칠 때마다 채찍 끝의 갈고리가 살을 할퀴고 시뻘건
핏 길을 내면서 사정없이 살점을 갈라놓습니다. 채찍에 맞은 상처마다 자국마다 붉은 피가 솟아
흘러 내립니다.
여러분! 로마 군병이 '채찍에 맞음으로'한 이사야의 예언을 알고 채찍으로 때린 것 아닙니다. 말씀
대로 응한 것입니다. 성경은 짝이 있다고 하는 것이 구절하고 똑같은 구절이 또 어디에 있더라가 아
니라, 말씀하셨으면 반드시 응한 것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 외에는 다 헛소립니다. 여호와께서 그
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라고 선지자로 외치게 하시더니 예수님께서
오셔서 채찍에 맞아 상함을 받게 하시고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채찍으로 맞을 때마다 그 몸의
상함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질병 하나하나를 채찍으로 맞아 대신 상함으로 받으셨습니다. 죄악도 저
주도 죽음도 질병도 예수님께로 다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음을 얻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온몸이 상하여 기운이 진하도록 39번의 채찍을 맞아 질고를 당하셨고 우리는 나음을 입었
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 치료가 완전하게 되었음이 증명됐습니다. 예수
님께서 질고를 당하시고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셨으니 우리 영과 혼과 육체가 온전히 나음을 얻게
된것이 증명된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신 뜻입니다. 마8:17에 우리 연
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 죄와 저주를 담당하
시고-연약한 것은 죄와 저주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영과 혼과 육체의 병을 짊어지셨다고 하셨습
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으니 재창조
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 엄청난 복을 알고 믿는 것입니까?
제가 갈수록 크게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는 것의 진짜 본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한
편 이론으로는 안다 해도 실제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영혼에 십자가에서 이루신 복이 없어
자유와 기쁨의 능력이 없음을 여실히 봅니다. 그저 종교심에 의해서 믿는다 하는 것이지 참으로 어
찌 하나님의 의중에 대해서 감도 없고 모릅니다. 몰라! 그러니 영의 구원이 없습니다. 제가 제일
많이 느끼는 것이, 예수님을 진짜 사랑하고 믿는다는 말은 있는데 실제로 과거에 입었던 상처, 과
거의 한(恨)등을 여전히 품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었을 때에 받은 상처들을 그대로 가지고 놓칠
세라 떠날세라 전전긍긍 껴안고 있는 모습들을 제가 자주 보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으면
새것이어야 하는데,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하는데, 재창조된 영의 사람이어야 하는데, 웬일인지 예
수님을 믿는 세월이 수년, 수십 년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옛 과거의 상처들을 붙들고 껴안고, 자기
가 붙들고 있는지 붙들려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옛사람으로 살던 때에 받았던 상처들을 싸안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저주에 묶어 놓고 그 굴레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입니다. 옛 죄인
의 삶을 붙잡고, 지옥을 스스로 붙잡고 놓지 않더란 말입니다. 피해망상에 잡혀서 자기 연민에 빠
져있습니다. 자기 사고방식을 죽어도 내려놓지 않을 기세를 봅니다. 혼이 나음을 얻지 못하니 영
의 저주가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은 죄이기 때문에 아직 스스로가 죄 사함 받지 않았고 죄를 붙
잡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연민이 예수님보다 더 커 진정 마음에서부터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입으로만 믿고 입으로만 죄 사함을
말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다시 산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 것입니다. 과거는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과거에 받은 상
처를 싸안고 있으면서 피해망상에 잡혀 '그 때문에,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하는 것은 사단
의 종이요 지배받고 있는 거예요. 하니 자신의 복을 스스로 막지 말고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놓아
피 흘리시고 "다 이루었다"하신 그 이루신 능력을 자기 영혼으로 깨달아보는 겸손부터 가지십시오.
그런 죄에서 난 쓰레기들로 자기를 굴레 씌우지 말란 말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오늘부터
옛 과거 것들에 사로잡히지 말고, 옛 과거에 묶여있지 말고 다 이루신 그 어마어마한 하늘의 복을
깨달아, 자유의 능력 얻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의 사람과는 사별입니다. 예
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 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벌떡 일어나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제 과거는 내 것이 아니다!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것들을 전부 다 끊어
낸다!'하고 명하여 뒤로 던져버리고 새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앉아 신분을 분명히 하기 바랍니다.
그다음 머리에 가시관 쓰고 피 흘리셨습니다. 가시관 쓴 것은 자기가 중심(하나님)이 되어 머리로
짓고, 생각으로 짓고, 양심으로 짓고, 입으로 지은 모든 죄를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 다 씌운 것
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희롱하며 가시관을 머리에 씌울 때, 가시는 예수님의 머리와 이마를 사
정없이 찔렀습니다. 온몸과 얼굴은 피로 얼룩졌습니다. 가시에 사정없이 찔린 그 고통을 안고 십자
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자기 머리로 판단하여 지은 죄의 저주를 못 박았습니다. 손으로 지은 죄를
못 박았습니다. 발로 지은 죄를 못 박았습니다. 영과 혼과 육체의 죄를 다 못 박았습니다. 그러므
로 이같은 죄들에서 건지시려고 십자가로 올라가 피 흘려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제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능력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우리 영을 치료하신 것이요. 우리 혼을 치료하신 것이요. 우리의 육체를 치
료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치료가 기어코 내게서 나타나야 합니다. 예
수님을 믿는 여러분에게서 기어코 나타나야 합니다. 벧전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고 롬6:14
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하였고
롬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영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가 죽었습니다. 과거 예수님 믿기 전엔 죄가 살아서 나를 죄 안에 가두고 죄에 끌려다니고
죄의 사고를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죄는 죽었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오셨으니 예수님의 사고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시작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피 흘려 생명을
주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본질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준 그 사랑, 그것을 깨닫고 알고 믿는 것이 믿음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 피 흘리신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를 잠시라도 잊을 수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신 순종
의 피, 머리에 가시관 쓰고 저주를 속량하신 피,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힌 손과 발, 옆구리에 창을
찔리시며 흘리신 죄 사함의 피, 채찍에 맞아 질고를 당하시며 흘리신 피를 어떻게 잠시라도 잊을
수가 있습니까?
계시록 2장에 에베소 교회에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러
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갖지 않으면, 회개치 않으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하셨습니다. 너희의 행위가 참으로 올바르고, 수고하고, 옳게 행동하고, 인내하
고, 참고, 악한 자를 용납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견디는 능력이 있고 게으르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것에서는 모자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본질, 너의 처음 사
랑, 즉 하나님께서 너를 만나주시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처음의 조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이
신 증거로 나타내신 그 피 흘리신 사랑을 네가 잊어버리고 너의 열심 가지고 행하였다고 하셨습니
다. 그 처음 행위를 찾지 않으면 촛대를 옮긴다고까지 말씀하시면서 너의 처음 사랑을 찾으라 하셨
습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며 흘리신 피, 십자가에서 손과 발을 못 박고, 옆구리의 창
에 찔리며 흘리신 피, 채찍에 맞으며 흘리신 피, 머리에 가시관 쓰고 흘리신 하나님의 엄청난 그
피 흘리신 사랑을 모른다면, 자기 믿음이 좋다고 봉사하는 것으로 나타내도, 믿음 있다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으로 열심을 내도, 믿음 있다고 선교사로 뛰어 나간다 해도, 믿음이 있다고 밤새우며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성영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그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과 만
나는 처음 사랑의 행위로 보증해주시는 피가 없으면 그 믿음은 허탕입니다. 아무리 수천 명, 수만
명, 수천만 명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피를 흘리셨는지 알지
못하고 믿는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처음 사랑, 피 흘리신 것을 모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교에
서 말하는 하나님과 다를 바 없는 것이요, 무당이 말하는 하나님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열심히 있고, 노력도 수고도 가난한 사람 돕는 것도 새벽 기도도 밤샘기도도 인내도
부지런함도 긍휼도 사랑도 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신을 믿는 것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처
음 사랑의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창조 때부터 피 흘리셨던 것이란 말입니다. '양을 잡아 가
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를 양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피 흘리고 죽으
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십자가에서 나타내시고 부활로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피 흘
려주신 그것, 우리로서는 잠시도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흘려주신 순종의 피
치료의 피, 죄 사하신 피, 저주를 속량하신 피가 우리 믿음이 만나야 할, 하나님과 만나는 처음 맺
은 사랑이 돼야 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흘리신 피, 나를 위해 당하신 고초, 내가 심히 고민하
여 죽게 되었다고,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절규하시기까지 흘려주신 이 하나님의 엄청
난 죽음을 알고 깨닫고 처음 사랑의 행위로 받아들여 영혼에 굳게 맺은 피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이 처음 사랑에 대해서도 아주 망할 자기
눈으로 보는 겁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주어가 되어 해석합니다. 아주 교만한 꼴값들입니다.
자기의 체험한 것들이 처음 사랑이라고, 자기의 경험한 것이 처음 행위라고 하는 겁니다. 병 치료
해주신 것, 기도를 응답해주셨다는 것, 여러 가지 은사 체험을 했다는 것, 신비한 체험을 했다는
것, 음성을 들었다는 것, 기도했더니 사업이 잘되게 해주셨다는 것, 기도했더니 자식을 낳게 해주
셨다는 것, 그래서 너무나 감사해서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했다고, 자기 개인의 체험들로 그것이
하나님을 만난 처음 사랑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처음 사랑을 그것들로 갖다 맞추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과 예수님과는 관계없습니다.
전도한다는 것도, 아기 못 낳는 사람에게 아기 낳게 해주는 하나님을 전하고, 아들을 낳으려 했는
데 딸만 낳은 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아들 낳게 해준다고 전하고, 병 낫게 해주는 예수, 기도하면
모든 것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전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님의 첫인상을 그런 것들로 갖게 하고
있습니다. 죄용서와 생명을 종교를 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믿는다고 나와서 자식 낳게 해달라
아들 낳게 해달라 돈 좀 벌게 해주시라는 등으로 자기의 요구들을 위해 지성으로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복음이라 하고, 그 피 흘리심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
주시는 조건으로 처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같이 성경을 보도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는 눈이 되지 못하고, 다 자기를 통해서 보는 성경이 되어 뜻을 바꿔놓는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계속 잘못 끼우듯 성경 보는 것이 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단과 그 영들은 예수
님의 피에 대한 이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갖지 못하도록, 성경을 보되 자기를 통해서 보게 하는
것으로 아주 열심히 가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피 흘리신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실 것을 순종하신 예수님, 돌과 채찍으로 맞으며 고민이 되어 죽게 된 그 심정으로 죽음
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던 예수님,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당하신 예수님이 나의 구주요 우리들
의 구주십니다. 그분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나로 행복을 알게 하시
고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났고 거룩한 성도
가 되었고 그러므로 영원히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귀한 사실이 우리 믿음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바로 알고 깨달아야 믿음의 길을 바로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
거, 그 사랑을 확증하신 일, 바로 독생자에게 피 흘리게 하신 것, 그래서 구주이시고 예수 내 구
주가 되신 이것이 우리를 만나주신 처음 행위의 사랑이요, 우리가 일생 잊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
님의 그 피 흘리신 사랑을 받아들여 내가 또 사랑할 때 영원한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처음 사랑에 감사하며 봉사하고, 성도 됨을 기뻐하는 자마다 생명을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사람은 예수님의 피로만 살게 되어 있기 때
문에, 그래서 종교라고 하면, 그는 예수님과 전혀 관계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지옥이냐 천국이
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므로,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라 하지 않고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
다. 아멘입니까?
이로써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처음 사랑을 나타내신 예수님의 피 흘려주신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로 흘려주신 예수님의 순종의 피, 나음을 얻게 하신 피, 죄를 사하시는
피, 저주를 대속하신 피를 우리 믿음에 알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그 증거를 가진 믿음이 되
어 승리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 성영님께 감사와 찬송을 영원히 올립니다.
아멘!!
13.06.30 처음 사랑이신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p151-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