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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애 - 뜻길에 서서 - 6. 선생님 주위에서 생활하다 1 1966년 9월 초순에 나는 수택리 공장으로 올라왔다. 총개머리를 닦는 일을 도와 주다가 선생님 식당에서 일하는 덕자(德子)씨를 따라 장자못으로 선생님 점심을 가져갔다. 밤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얘기했는데 선생님께서 “순애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내게 물으셨다. 2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이 약해서 뜻 일 하는데 지장이 많으므로 “건강이 제일 소원이예요” 하고 말씀 드렸더니 “여기서 생활하면 건강해질테니 여기에 있으라”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도 불의의 일이라 당황하였다. 3 그러나 어머님께서도 여기서 생활하라고 하셔서 죄송하지만 대답을 하였다. 나는 곧 준비해올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기뻤다. 밤이 깊었을 때 선생님과 효진씨는 천막으로 들어가시고 남은 사람들은 노숙을 하였다. 4 나는 매일같이 자연 속에서 낮에는 선생님을 뵙고 애기님들을 모시고 생활하며 밤에는 고요한 세계에서 신선한 나날을 보내게 되어 병도 다 낫게 되었고 건강이 차차 회복되어 갔다. 어느날 선생님께서는 지구장회의를 장자못에서 하기로 하시고는 일찍부터 오셔서 투망으로 고기를 밤까지 잡으시니 한 바케스가 되었다. 5 그리고 인삼과 잉어를 사오게 하셔서 잉어는 고아서 인삼을 가루로 하여 넣게 하시고 생선은 매운탕을 하게 하셔서 잔치를 벌이셨다. 또 누군가가 산탄총으로 산비둘기와 꿩을 잡아 와서 밤에는 털을 뜯고 장작불에 구어서 소금을 찍어 먹으니 별미였다. 6 나는 겨울이 되어서 장자못 옆의 노란집으로 옮겼다가 불편하여 공장 뒤에다 전세로 방을 하나 얻어서 생활하던 중 선생님의 식사를 마련하는 식당을 책임지게 되었다. 나는 여자 청년 식구 1명을 데리고 있는 정성과 머리를 다 짜서 선생님께 식사를 해 올렸다. 점심식사 후에는 매일 계피팥찹쌀경단을 해드렸는데 맛있게 잡수셨다. 7 1967년 2월 중순부터 수택리 제2공장을 중축하게 되어 선생님은 매일 6시경에 오셨다. 그리고는 밤 11시까지 계시다가 가셨다. 나는 있는 정성을 다하여 진지를 올리고는 진지를 다 잡수신 날에는 상을 들고 나와서는 뛰면서 기뻐하였다. 수택리의 선생님 방은 초가집에 있었지만 그 후 조그마한 기와집으로 옮기셨다. 8 1968년 2월 5일에는 선생님께서 하사하신 공로상을 받게 되어 참으로 기뻤다. 며칠 후에 김원필(金元弼) 선생께서 놀랐다고 하시면서 “강순애(姜淳愛) 씨는 선생님께서 직접 추천하셨다”라고 하셔서 더욱 놀라고 죄송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여름에는 청평에 많이 가 계셨으므로 나는 수택리에서 부식조달에 열심이었다. 9 청평에서 선생님은 열심히 고기를 낚으시기도 하고 방울 낚시로 잉어도 낚으시면서 깊은 생각을 하셨다. 달밤에는 늦도록 낚시질을 하며 자연의 향취에 젖으시기도 하셨다. 어머님과 효진님은 옆에서 재미롭게 해드리기도 하시며 식사를 대하실 때에는 소박한 찬이지만 맛있게 잡수시고는 “잘 먹었다”라고 하시면 참으로 기뻤다. 10 한 두 차례는 홍수 때문에 텐트를 몇 번씩 옮기기도 했다. 나는 뜻이 아니면 이 생활은 도저히 맛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며 감사하고 황공할 뿐이었다. 그때 본부에서는 서울지구를 확장하고 여자지역장을 선출했는데 나에게도 명령이 내려서 동대문지구의 대학생 지도위원을 맡게 되었다. 11 오후 5시경이면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다가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강의를 듣게 했으며 원리연구회 대학생들에게는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4개월이 흘러서 수택리 공장에서는 기숙사가 완공되어 낙성식을 하는 날이었다. 이날 심우회(心友會)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별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12 어머님께서 나에게 선생님 상(床)에서 음식을 먹으라고 하시면서 고기를 자꾸만 주시고 그간의 못 뵈온 정을 다 풀어 주셨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나에게 ‘신축한 기숙사에 와서 있으라’라고 하신다는 전갈이 왔다. 한때 수택리에서 고통을 받고 죽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었는데 또 그곳에 가야 하다니 기쁨이 되지 않았다. 13 그리하여 본부에 갔다가 선생님을 뵙고 “제가 가야합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즉시 가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아니 갈 수가 없어서 짐을 가지고 수택리로 왔다. 여기에는 한군자(韓君子) 씨가 있었다. 나는 또 서투른 양식(洋食)을 만들었다. 14 1971년 5월 27일 선생님께서는 돌연히 협회장과 각 부장을 청평에 보내시고 나에게도 청평에 가라고 하셔서 미니버스에 간단히 준비하고 출발하여 도착하자 김준구씨 댁에서 점심준비를 해 가지고 선생님이 계신 천막으로 배를 타고 갔다. 15 선생님이 천막을 쳐 놓으신 곳(3평 가량)만 땅이고 나머지는 물가의 산이었다. 이 산을 선생님께서 맨 처음으로 곡괭이질을 하시고 다음에 부장들이 시작하였다. 약 1주일간 작업을 하고 나서 건설단을 조직하여 36명이 오게 되었다. 16 선생님께서는 완공할 때까지 감독하시며 지휘하셨고, 힘을 주시며 때로는 다과를 베푸시면서 일을 시키셨고 어머님께서도 맛있는 과일과 고기를 자주 사주셔서 모두 힘을 내서 일을 한 결과 15일만에 대지(垈地)를 만들고 8일 후에는 비를 맞아 가며 건물을 완공하였다. 17 그 후 첫 집회로 1971년 9월 12일에 하계목사수양회를 베푸셨다. 청평은 공기 좋고 물과 산이 좋은데다 음식도 극진히 대접하니 모두 기뻐하면서 새말씀을 들으니 영육 아울러 충만한 은사를 받고 돌아갔다. 18 다음에 대학생 240명이 캠핑생활을 하였는데 며칠이 지난 후 한 학생이 나를 향하여 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11년 전에 떼어 놓고 나온 막내아들이었다. “엄마” 하면서 달려 오는데 나도 깜짝 놀랐다. 이제는 엄마 품을 안 떠나겠다는 것이다. 약해진 모습을 보니 가슴아팠다. 19 사정을 자세히 물으니 누나가 도미(渡美)한 후 군에 입대가 되지 않아서 유리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결심을 하고 이번에 붙잡아 주지 않으면 자결을 할지 모른다는 느낌이 가서 여하간 머무르라 해 놓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허락하셨다. 20 그리하여 나는 감사와 기쁨을 억제하고 맨 밑창에서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돼지밥 주고 물통으로 밥을 나르며 개밥 주기와 닭기르기에서부터 밭갈이까지 하게 하였고 고추밭도 매게 했다. 21 그러면서 대학생 캠핑 때는 동참케 하였더니 원리를 새로 깨닫고 더욱 굳게 서기 시작하여 선생님과 애기님들을 모시는 데까지 나를 협조하였다. 이때 다른 식구를 그같이 시켰다면 나를 얼마나 원망하였을까 생각하니 새삼 혈통의 고마움이 느껴졌다. 22 나는 이 뜻이 아니었다면 어지러운 사바세계를 헤치고 늠늠히 나갈 수가 없었을 것이며 어지러운 세계 운세를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천지운세는 하늘편으로 돌아나가며 역사의 방향성을 알게 되니 마음의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같은 모든 점을 생각할 때마다 이 큰 은사를 어떻게 보답할까 하는 생각 뿐이다. 이 뜻이 정녕코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기꺼이 나가는 바이다. |
姜淳愛 - み旨の道に立ちて ⑥ - 先生のお側での生活 一九六五年九月初旬に、私は水澤里工場に行きました。そこで工場の仕事を手伝いながら、先生の食堂で働く徳子氏に付いて長子池に、先生の昼食を運んでいきました。夜には群がり集まって、先生の回りに座って話をしましたが、先生が「淳愛、願いは何なの?」と私に聞かれました。私は体が弱くみ旨をするのに支障が多いので我知らず「健康が第一の願いです]とお答えすると、「ここで生活すれば健康になるから、ここにいなさい」と言われました。私はあまりにも思いがけないことに当惑しました。しかし、お母様までが「ここで生活しなさい」と言ってくださったのが申し訳ないと思いましたが、お受けすることにしました。私はうれしくてうれしくて、どうすることもできませんでした。夜が深まったとき、先生と孝進様は天幕に入られ、残った者たちは野宿しました。 私は毎日のように自然の中で、昼は先生にお会いし、子女様たちに仕えて生活し、夜は静かな世界で新鮮な日々を送るようになり、病気もすっかり良くなって、健康も徐々に回復していきました。 冬になって私は長子池の横の黄色い屋根の家に移りましたが、不便なので工場の裏に部屋を一つ借りて生活しているうち、先生の食事を準備する食堂の責任をもつようになりました。昼食の後毎日、桂皮あずきもと米団子を作って差し上げましたが、とてもおいしかったとみえ、喜んでくださいました。 一九六七年二月中旬から、水澤里の第二工場を増築するようになり、先生は毎日六時頃に来られ、夜十一時までおられました。私はありったけの誠をこめてお食事を捧げました。そしてお食事をすべて召し上がってくださったときには、テーブルを持ったまま、走りながら喜んだものです。 水澤里の先生の部屋はわらぶきの家でしたが、その後やや小さな瓦ぶきの家に移られました。 一九六八年二月五日、私は先生が下賜された功労賞を受けるようになり、本当にうれしく思いました。数日後に、金元弼先生が驚いた様子で、「姜淳愛氏は先生が直接推薦されたのです」と言われ、一層驚き、もったいなく思いました。 先生は夏になると清平に多く行っておられたので、私は水澤里で副食の調達に励みました。先生は清平で熱心に魚釣りをされ、鰯の釣り針で鯉も釣られたりして、深い考えをされました。特に月の夜には遠くまで釣りをされ、自然の香りに浸られることもありました。お母様と孝進様は横でご覧になっておられましたので、食事をもてなすと、質素な食事ですが、おいしく召し上がってくださり、「ごちそうさま」と言われると、本当に嬉しく思いました。ときに一、二度は洪水のために、テントを何度か移すことにしました。私はみ旨でなければこの生活はとうてい味わうことができないだろうといつも思い、感謝し恐縮するだけでした。 そのとき本部では、ソウル地区を拡張し、女性地域長を選出しましたが、私にも命令がくだって、東大門地区の大学生指導委員を引き受けるようになりました。午後五時頃になると、バスの停留所で待って、中、高等学生を連れて講義を聞かせ、原理研究会の大学生たちには、日本語を教えました。 それから四ヵ月が流れ、水澤里の工場では寄宿舎が完工し、落成式をする日を迎えました。 この日、心友会で先生を招き別館で集まりをもちました。ご主人が私に「先生のテーブルで食事をしなさい」と言われ、魚をしきりに私にくださり、その間お会いできなかった情をすべて解いてくださいました。その後何日か過ぎて、私に「新築した寄宿舎に来ているように」という伝言がきました。一時、水澤里で苦痛を受け死にたい境地になったことがあったので、またそこ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思うと、気が重くなり、本部に行って先生にお会いし、「どうしても私が行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とうかがうと、「どうしても行って欲しい」と言われるのです。 先生がそのようにおっしゃったのだからと思って、荷物を持って水澤里に行きました。そこには韓君子氏がいました。私はまた慣れない洋食を作りました。 一九七一年五月二十七日、先生は突然、協会員と各部長を清平に送られ、私にも清平に行けと言われ、簡単に準備したミニバスで出発しました。到着するや、金ジュング氏の家で昼食の準備をし、先生のいらっしゃる天幕まで船に乗って行きました。先生が天幕を張っておかれたところ(三坪ほど)が平地であり、残りは岸辺の山でした。この山で、先生は初めてつるはしを上げられ、次に部長たちが始めました。約一週間作業をしてから建設団を組織し、三十六名が来るようになりました。先生は完工するときまで監督され、指揮をされて、力を与え、ときには菓子をふるまわれながら仕事をさせ、ご夫人もおいしい果物と魚を絶えず買い与えられ、一同、力を出して働いた結果、十五日ぶりに台地を作り、八日後には雨に濡れたりしながらも建物を完工しました。 その後初めての集会として、一九七一年九月十二日に夏季牧師修練会を開かれました。清平は空気が良く、水と山が良い上に、食事も最上のものをもてなすと、みな喜び、新しいみ言葉を聞くと霊肉共に充満する恵みを受けて帰って行きました。 次に大学生二四〇名とキャンピング生活をしましたが、数日たったある日、一人の学生が私の方へ近づいて来たのでよく見ると、一年前に置き去りにし来た末の息子でした。「お母さん!」と言いながら走って来たので私もびっくりしました。「これからはお母さんのそばを離れません」と言うのです。何となく弱っている息子の姿を見て心苦しく思いながら事情を詳しく聞くと、姉さんが渡米した後、軍に入隊せずあちこちさまよっていたのでした。私は決心し、今手放せば自殺するかもしれないと思ったので、とにかく泊まっていくように言い、先生にお話しました。先生が許可してくださったので、私は感謝と喜びで、一番底辺から育て始めました。息子は、犬の餌を与えること、鶏を飼うこと、畑を耕すこと等、いろいろなことをしながら、大学生のキャンプのときには共に参加しました。すると息子は、原理を新しく悟り、さらに固くみ旨に立ち、先生とご子女様たちに仕えるようになり、私を協助しました。このとき他の食口をそのようにさせたとすれば、私はどれだけ恨まれたかと思うと、今さら血統のありがたさを感じさせられました。 このみ旨がなかったら息子は、混乱した娑婆世界を生きていけなかっただろうし、混乱した世界の運勢を推し量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思うのです。このことによって天地の運勢は天の側にかえって行きました。そして私は歴史の方向性を知るようになると、心の安定感を持つことができました。 このようにすべてを思うたびに、私はこの大きな恵みにいかに報いるかという思いでいっぱいです。このみ旨がぜひとも成し遂げられることを願ってやみません。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