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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알고나면 받기 꺼려질 구원>의 줄거리: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말씀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기가막힙니다. 아기 예수가 온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표시가 정말 너무 비천하고 허접하지 않습니까? 이 의미를 살펴봅니다.
알고 나면 받기 꺼려질 구원
(누가복음 2:1~14)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알고 나면 받기 꺼려질 구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알고 나면 받기 꺼려질 구원’
본문의 중심이 되는 구절은 11~12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특별히 주목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아기도 외양간에서 태어나 여물통에 누인 아기는 없을 것이기에 그런 아기가 있다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다가 죽은 뒤에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구원을 꺼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구원받은 자에게서는 살아있는 동안 그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구원은 꺼려질 수도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힙니다. 10절을 보면 천사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바로 온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가 그리스도임을 알아볼 수 있는 표적으로 제시된 사건이 특이합니다.
12절을 보면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합니다. 하층민인 요셉 집안에서 사용하는 헝겊에 싸여서 외양간의 여물통에 뉘었습니다. 이왕이면 궁궐에 있는 황금침대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김유신 장군을 잉태했을 때 그 어머니가 북두칠성이 자기에게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던 것이나,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처럼 신화적인 탄생을 이룰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에는 이러한 화려함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표적을 본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편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탄생으로부터 죽음까지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한 번도 높임을 받아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임을 받는 그 순간에 예수님은 세상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서 이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난센스이며 어불성설입니다.
그렇다면 헝겊에 싸여서 외양간의 여물통에 누인 아기가 세상을 구원할 표시가 될 것이라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떠올려봅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유명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열두 척의 배에 또 다른 한 척을 더해 고작 열세 척의 배로 일본의 수군 133척을 명량에서 무찌르게 됩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열두 척의 배였습니다. 이를 예수님께 적용해봅니다.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여물통에 뉘었다는 것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외양간이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가축이 머무는 장소인 외양간은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세상에서 동떨어진 광야가 아닌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가 없는 곳을 고르라면 외양간이 바로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로써 필요한 것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사시기 위해서는 외양간의 여물통 안에 뉘어 있는 상태면 충분하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흔히들 예수님이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낮아지심이라고 합니다. 물론 세상의 기준에서 보자면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낮아지심의 상태 자체가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사심과 이 세상 전체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역할을 수행하심에 있어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세속화된 기독교와 비교해보자면 냉소적이기까지 합니다. 선민들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젖혀둔 채 세상을 더 좋아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이 그렇게들 세상을 좋아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를 전혀 갖지 않고도 하나님의 일을 다 하실 수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어떠한 가치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구원이란 어떤 것일까요? 저도 이 구절을 대하며 새삼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받았다고 생각하고 이루기 위해 두려움과 떨림으로 진행 중인 구원의 과정이 바로 이런 내용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이 주시려는 구원은 예수님의 처지에 우리를 데려가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교주가 성도들과 자신을 구분지음으로부터 나타납니다. 성도들을 교주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암암리에 각인시켜가는 것입니다. 예배당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구원은 구분이 아닌 동일시였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자리에 우리를 서게 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세상에서 첫 번째 하나님의 아들로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탄생은 바로 외양간에서 태어나 여물통에 뉜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그리스도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외양간이면 충분했고 여물통이면 충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은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가치들이 전혀 없어도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쉽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에는 반드시 증거를 동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외양간에서 태어나 여물통에 뉘인 상태에서도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가치들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이끄신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세상의 가치가 아무것도 없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질문을 바꾸어 봅니다. “내가 외양간의 여물통에 누인 예수님처럼 세상의 가치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써 이루신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 여전히 이 세상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저런 것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일이 많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미래를 바라보며 “5년 뒤 10년 뒤에는 이런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음이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다면 구원은 아직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외양간에서 태어나 여물통에 누인 아기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가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의 장면에서 외양간에 태어나심과 여물통에 누이심을 그리스도의 표시로써 성령의 감동으로 집필한 것은 구원의 내용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새삼스럽고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구원이 이처럼 세상에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기에 꺼려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혹은 재정상태가 좋아지기를 바라며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몸이 아프면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재정상태가 나쁜 상태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 그 자리에서 온전히 만족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적 개선을 바라고 있는 상태에서 진정한 구원은 꺼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으로 태어나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은 실제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외양간에 태어나 여물통에 누인 예수님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지면 어떤 상황에 놓여있더라도 부족할 것이 없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좋아 보이는 가치들을 소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지고도 이 피조의 세계 안에서 더 갖고 싶은 것이 생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지고 계셨기에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갖지 않으시고도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서 만족함을 누릴 때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답답해 보일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는 어떤 발전도 기대할 수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됨이 확실해진다면 하나님의 뜻은 임하게 됩니다. 외양간과 여물통으로 상징되는 조건에서도 나라를 구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주어지는 대로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져가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이처럼 외양간과 여물통이 상징하는 바를 성령의 감동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삼성이나 LG나 현대는 굴지의 대기업으로 불립니다. 이런 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공부를 잘해야 되는 것은 기본이고 상황적응력을 키워야 하며 인성까지도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이를 위해서 취업준비자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스펙을 쌓아야 하고 수많은 자격증을 준비합니다.
이는 비단 대기업 취직뿐만이 아닙니다. 정치에 욕심 있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는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공무원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수 칠 수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혼을 잘해서 멋진 가정을 꾸려보고자 한다면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이상적인 배우자와 충분한 경제력 그리고 태어날 자녀들까지 똑똑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얻고자 한다면 그만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확실히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외양간에 태어나서 여물통에 누인 상태가 상징하는 바대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양간의 여물통에 뉘어서도 아무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상태입니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가 다르게 번역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고 죽기를 소원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어떤 것들도 필요로 하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으로 온전한 만족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외양간과 여물통으로 상징되는 조건하에서도 하나님 한 분 가짐으로써 완전히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문제를 끝장내겠다는 결단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늘 기억해야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살아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 살게 해주시옵소서.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믿음의 길을 가고 있고, 그러한 사람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은 나를 통해 이 세상에서 일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열세 척의 배를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진 상태라면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가졌기에 설령 세상에서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 채로 살다 죽더라도 그것을 결코 부족함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외양간과 여물통으로 상징 되는 조건하에서도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살아가는데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내가 이루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양간과 여물통은 그리스도의 표시입니다. 이 표시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 때에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주인공들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삶의 현장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외양간과 여물통으로 상징되는 의미를 받아들여서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으로 영적 호연지기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