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들어서면 길 입구쪽의 한편 언덕에 현대식 마을이 있고 동쪽편으로 두들마을 고택촌이 있다
주차장에서 가장 가깝게 위치한 곳은 음식디미방 체험관이다
두들마을은 재령이씨 집성촌으로 조선후기 숙종때 문신으로 유명한 갈암 이현일을 중심으로 내용을 알아봐야겠다
먼저 음식디미방을 남겨 유명한 이 장계향이란 정부인은 본관은 안동(安東). 장흥효(張興孝)의 딸로, 이시명(李時明)의 부인이며, 이현일(李玄逸)의 어머니이다.
아버지 장흥효는 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을 사사하고, 뒤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다.
장계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 · 서화에 능하였고, 수리학(數理學)에도 통달하였다. 특히, 10세 전후에 지은 「학발시(鶴髮詩)」 · 「소소음(蕭蕭吟)」 · 「성인음(聖人吟)」 등은 시상이 탁월한 명시로 통한다. 또, 당시의 명필 정윤목(鄭允穆)은 그녀가 쓴 「적벽부(赤壁賦)」를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15세 이후에는 시문 · 서화가 부인의 할 일이 아니라 하여 그만두었다. 19세에 출가하여 남편을 잘 내조하였고, 또 슬하에 현일 등 대학자를 많이 길러내어 송대(宋代) 정호(程顥) · 정이(程頤) 형제를 낳은 후부인(侯夫人)과 이이(李珥)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에 비견되기도 한다.
가장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역시 조선 중기 이후의 요리 방법을 순한글로 기록한 《음식디미방》을 남겼다는 것이다.
음식디미방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며,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궁체로 쓰인 필사본으로, 표지에는 '규곤시의방'이라 이름붙여졌으며, 내용 첫머리에 한글로 '음식디미방'이라 써있다. 음식디미방은 한자어로 그중 '디'는 알 지(知)의 옛말이며, 제목을 풀이하면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을 지닌다.
장계향 일명 정부인 안동 장씨의 남편 이시명이 살던 이곳은 석계고택이다.
이시명은 현감 이함(李涵)의 아들이며, 이조판서 이현일(李玄逸)의 아버지이자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였다.
학행으로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1640년(인조 18)에는 영양의 석보(石保), 1653년(효종 4)에는 영양의 수비(首比), 1672년(현종 13)에는 안동 도솔원(兜率院)으로 옮겨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초서도 잘 썼으며, 특히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에게 이학(理學)을 전수받아 다시 아들 이휘일(李徽逸)·이현일에게 전하여줌으로써 주리학(主理學)의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령(金坽)·조경(趙絅)과 교분이 깊었다.
석계고택에서 남쪽으로 나오면 병암고택과 정부인의 유적비가 있는 조그만 숲이 있다
고풍스런 나무들 사이에 석벽이 아래로 병풍처럼 펼쳐지며 두 개의 하천이 이 두들마을 앞을 감싸 흐른다
병암고택은 130년쯤 된 한옥으로 재령 이씨(載寧李氏) 가문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ㅁ’자 구조의 집이다. 5년 전 개조하고 보수해 한옥 체험관을 시작한 병암고택은 문학관과 음식디미방 체험을 위해 두들마을을 찾는 손님들이 자주 들르는 한옥 중 하나다.
전형적인 ‘ㅁ’자 구조의 한옥에 현대식 화장실과 냉방 시설 등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전통 온돌 방식의 난방을 하고 있다. 대청과 쪽마루가 있어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마당에는 100년 넘은 향나무가 있고, 가옥 앞에는 장계향 선생의 유적비와 상수리나무가 어우러져 있어 볼거리도 많다.
병암고택을 돌아나오면 석천서당과 연결된다
석천서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로 병자호란에 비분강개하고 있던 이시명(李時明)이 1640년(인조 18) 영해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중대(中臺) 위에 터를 잡고 1653년까지 살면서 석계초당(石溪草堂)을 세운 것으로 시작한다.
그 뒤 1676년(숙종 2)에 그의 넷째아들 이숭일(李嵩逸)이 초당에서 강학을 계속하였는데, 그의 학문이 뛰어나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숭일이 죽은 뒤 후손들이 선조의 뜻과 학문을 추앙하여 1831년(순조 31) 서당을 세워서 석천서당이라 이름하였다. 1891년(고종 28) 2칸을 중수하였다.
대산 이상정 선생의 서당기가 강당에 남아있다
이시명의 대훈도 현판으로 새겨있다
갈암 형제들이 같이 수창한 시 현판도 보인다
두들마을 앞을 지나 화매천으로 유입되는 바로 앞 인지천의 모습과 멀리 제방으로 막힌 화매천을 굽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