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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4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5
설교 제목: 그리스도인의 현재 위상
: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4~6
설교를 위한 묵상:
지난 주에는 ‘운명을 결정짓는 마음속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두 번째 설교였다. 사도 바울이 성도의 현재 위상과 신분을 설명할 때 성전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나는 이 주제를 한 번 더 다루면서 에베소서 2장을 본문으로 택했다.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구절, 그리스도인이 함께 하늘에 앉게 된 이 본문은 성도의 현재 위상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본문은 시편 8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우셨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왕관을 쓰고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동시에 그것은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사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포이에마라는 단어는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이 현재 어떤 위상에 있는지를 이 본문이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은 땅을 통치하는 지휘부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주님이 그곳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성도들을 하늘로 올리셔서 그 자리에 앉게 하셨다. 이는 주님의 통치에 동참하라는 위임이며 새로운 창조를 위한 소명이다. 시편 110편에서 하나님이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고 하신 말씀도 생각해 보면 좋겠다. 성도의 위상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통치는 무엇을 위함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톰 라이트는 그것을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소개했다. 그 소명의 세 가지 목적은 성전과 유산, 그리고 십자가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지금 성전과 유산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다음 시간에는 십자가를 소개할 것이다. 그의 용어로는 The Cruciform Life, 즉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다. 그것이 진정한 왕이 하는 일이다. 이번 주에는 우리를 부르신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위상으로 인도하셨는가를 생각해 볼 것이다. 이 설교를 통해서 성도는 다시 한번 자신의 위상과 지위가 어떤 것인지를 마음속에 그려볼 것이다.
이번 주일에는 성찬식이 있는데 그 의미를 이번 주 설교에 비추어 본다면 하나님의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하늘에 앉은 자들은 함께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식탁에 동참할 것이다. 그 식사는 하나님의 가족이 누리는 가장 소중한 친교와 연합의 시간이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통치연합에 동참하게 된다.
설교 개요:
1.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2.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3. 하늘의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4. 새롭게 지으심을 받아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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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주님의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이라고 하니까 우리들의 삶에도 봄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저는 오늘 ‘그리스도인의 현재 위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이 설교는 사실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설교의 연장입니다.
위상이라는 말은 현재 위치를 의미합니다. 개인이나 나라에도 위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고 사용합니다. ‘대한민국의 위상은 지난 1988년도 서울올림픽 이후로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아무개는 승진을 하더니 걸음걸이도 달라졌습니다.’ 이는 그 사람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위상은 사회적 위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위치를 살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위상은 어떻게 결정될까요? 그가 가진 재산이 많으면 그의 위상이 올라가겠지요? 그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업적을 이루었다면 그의 위상도 올라가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산다는 것은 우리의 위상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더 멋진 인생을 살고 싶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인생을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를 더욱 노력하게 하고 인내하고 더욱 헌신하게 합니다.
사회적으로 더 나은 위치에 오르고 더 높은 위상을 갖고자 노력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좋은 일인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가지기에는 재물은 한정적이며, 모든 사람이 승진할 수 있는 자리도 몇 개 안되기 때문입니다. 귀한 것을 얻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오로지 성공을 위한 경쟁으로만 생각하면 거기에는 승자와 패자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사회적 위상이나 지위 또는 자랑거리를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 하면 반드시 경쟁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삶은 더욱 불행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우리의 지위나 위상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사람에게 자신의 위상이 물질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므로 종교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상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그의 위치를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10). 아담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의 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자기 지위를 떠나고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그에게 고난과 역경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여 정리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로마서 5:17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것을 다짐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위상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이전에 아담이 하나님의 질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이 ‘인간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우리의 위상을 물으신다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현재 위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가이드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위상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거기서 만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보혈과 희생을 통해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런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소개해 드린 말씀, 로마서 5장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1~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갑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성경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일을 마치면 집에 돌아가 가정을 축복하고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뜻을 듣고 받고 행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애굽기 19:5~6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복을 주실 때는 제사장을 통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6:19~20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 베드로도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며 거룩한 나라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라. 이는 그의 아름다운 덕을 널리 알리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로 볼 때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기 백성을 자기 앞에 세우시고 그들을 만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세상에 나타내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로 그런 삶을 살지 못하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회복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같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주님의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3. 하늘의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위상에 대하여 여러가지 그림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어둠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신분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에베소서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1~3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도 모르고 그저 욕심 가운데서 살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는 것인줄 것 모르고 살던 삶을 그려주는 그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살기에 가정이 깨지고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다투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도 바울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자기 가문의 이름을 높이려고 욕심에 사로잡히다 보면 자기 자녀들을 망가뜨리는 줄도 모르게 됩니다. 부모도 인륜도 저버립니다. 자기 지위를 지키려고 사람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삶은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만 알고 가족이나 친지 또는 주위 사람들의 형편을 외면하면 수전노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수전노(守錢奴)가 무엇입니까? 돈을 지키는 노예가 아닙니까? 종교는 우리에게 돈의 노예, 욕심의 노예, 사람의 노예, 두려움의 노예, 집착의 노예 등 우리의 예속상태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적 위상이 어디인가를 일깨워주는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회개한 사람은 그 존재가 새롭게 바뀌었다고 소개합니다. 계속 에베소서 2장을 보겠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4~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적인 변화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에서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누가복음 15:32). 주님을 떠나 욕심에 사로잡혀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신분이나 위상에 대한 성경의 설명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8:22
성경에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위상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3:1). 예수님도 어떤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양심이 죽은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산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신자는 누구입니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전의 수전노가 아닙니다. 이전의 고아도 아닙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르고 신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살아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감격하며 기뻐하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것은 마치 살아계신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현재 위상이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즉,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쪽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저는 오래 전부터 이 구절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땅에 있는데 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금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차라리 그리스도와 함께 나중에 하늘에 앉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었으면 달리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이 구절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늘의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말씀은 성경에 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름이 예수님을 가려서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쪽 보좌에 앉아 계신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도들의 설교에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주심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설교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그 의미를 소개했습니다. 그 구절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2:33~36
베드로는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쪽 보좌에 앉으신 것을 확신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약속하시기를 하나님께 가면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셨는데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임한 것을 보고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알았으며, 동시에 그것은 시편 110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오른쪽에 앉게 하셨음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음을 의미하며, 예수님이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도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올라가서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고 말합니다. 하늘에 앉는다는 말은 물론 보좌에 앉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오른쪽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곁에 성도들의 보좌가 있어서 우리도 함께 주님 곁에 앉아 있다는 모습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늘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오른쪽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가 있으며 그 주위에는 성도들의 보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요한계시록 4:2~4
밧모섬의 요한이 하늘에서 본 환상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위에 흰 옷을 입고 금관을 쓴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 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은 신구약의 모든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들려주고 그려주는 우리들의 위상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들은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의 영적인 실상은 하늘에 있는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를 가리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으며 머리에 금관을 쓰고 흰 옷을 입고 있다면 그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시편 8편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위상에 대한 시인의 노래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편 8:4~8
이 말씀을 보면, 현재 그리스도인의 위상이 어떤 모습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전에 우리는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다시 살아났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려져서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머리에는 하나님이 영화와 존귀라는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전에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왕 노릇을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위상입니다.
오래 전에 저는 ‘왕왕왕왕 나는 왕자다’는 찬송을 부르며 자랐습니다. 그것은 주일학교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지금에서야 그 찬양이 무슨 뜻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 위상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신앙생활은 어쩌면 종살이하는 데서 벗어나 왕 노릇 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의 왕 노릇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더 분명히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4. 새롭게 지으심을 받아 일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우리의 위상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많은 설교자들에게 익숙한 구절입니다. 이제 우리의 위상과 관련하여 이 구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20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들의 위상에 대하여 새로운 그림을 그려줍니다. 그것은 창조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는 이 구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작품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비슷한 구절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모양과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는 창세기 1장 27절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말 번역자들도 이 부분을 창세기와 같이 하나님을 ‘따라’(kata)라고 옮겼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새롭게 창조되었음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기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으신 까닭은 만물을 그들에게 맡기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그 선한 일은 만물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리하고 돌보아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위상이며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누군가를 살리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시기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이 전에 예비하셔서 저에게 하라고 하신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저는 가족을 부양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다시 살리려고 일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의 현재 위상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세 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지성소에 들어가 은혜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제사장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려져 보좌에 앉게 된 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환경을 관리하고 돌보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세번째 우리의 현재 위상은 새롭게 지으심을 받아 주님이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하는 새 아담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며 새로운 소명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위상을 성경은 이렇게 들려줍니다. 그 위상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신 그 삶을 향해 더욱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의 위상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