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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위에 세운 집
(24.3.17)
<마7:24~27>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성경은 처음인 창세기부터 마지막인 계시록까지 두 노선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사람의 의냐? 아니면 ㅎ님의 의냐? 사람의 의를 따르면 멸망이고 ㅎ님의 의를 따르면 생명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사람의 의는 육적인 신앙을 말하고 ㅎ님의 의는 영적인 신앙을 말한다. 그래서 ㅎ님처럼 되려는 욕망으로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화와가 에덴에서 추방되어 낳은 아들인 가인과 아벨부터 이 두 노선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언급하는 창4장 3절에는 의미심장한 말이 기록되어있다. ‘세월이 지난 후에~’ 두 사람이 각기 자기방식으로 ㅎ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여기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에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어려서는 ㅎ님의 의도를 잘 몰랐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는 각기 ㅎ님에 대한 지식(앎)이 쌓이게 되어서 그 지식에 따라 ㅎ님께 대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가인의 제사는 기각되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 된다. 왜일까요? 여기에 성경을 여는 key가 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직접적인 이유는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의 이름과 복음의 시각으로 해석해 보면 정답을 얻어 낼 수가 있다. 먼저 가인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보자. 가인은 ‘있음, 혹은 창, 칼’의 이름값을 가진다. ‘있음’이란 존재감을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생명으로 삼는 자라는 말이다. 이게 선악과 정신이다. ㅎ님처럼 된다는 뱀의 독극물인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생산한 처음 열매가 바로 뱀의 영을 가진 자아사랑으로 충만한 가인을 출생했음을 말한다.
이처럼 ‘나 있음’의 존재의식을 가진 자들이 중시하는 것은 내 행복, 내 만족, 내 영광을 꿈꾸는 세상이다. ㅎ님을 섬기는 것도 결국 내 구원 내 행복을 위해서다. 따라서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기에 내가 열심과 정성을 다하면 ㅎ님이 기뻐하신다는 생각으로 신앙을 한다. 신앙의 기준이 자신의 행함에 방점을 두는 율법주의다. 이들의 특징이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여 창과 칼처럼 찌르고 죽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가인 자신이 자아사랑에 매몰된 탐심을 가진 자이기에 그에게서 나오는 그 무엇도 깨끗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반면에 아벨이라는 이름은 ‘없음, 허무, 무효’ 등의 이름값을 가진다. 선악과 먹은 자는 누구든지 자신의 가치 챙기기에 목숨을 건다. 아벨도 예외가 아니다. 처음에는 아벨도 가인과 도찐개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ㅎ님이 안배하신 사건과 환경 속에서 깨지고 부수어져서 자신의 실존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야말로 먼지와 같고 아침 안개와 같이 무능하고 무가치한 죄인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자신에게서는 그 어떤 선도 나오지 않음을 알기에 죽어 마땅한데, 자신이 죽을 자리에 어린양의 피로써 ㅎ님의 긍휼하심의 용서를 구하는 대속의 제사를 드렸다. ㅎ님은 이러한 자기부인의 사람을 기뻐하신다.
그렇다면 아벨은 어떻게 그런 제사를 알게 되었을까? 부모인 아담과 하와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금단의 열매를 먹고 죄 아래 갇혀 ㅎ님을 피해 무서워 떨고 있을 때, ㅎ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범죄함으로 자신들이 죽어야 할 자리에 흠없는 짐승이 대신 죽었음을 알라는 의미에서 ㅎ님이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이다. 자신이 입고 있는 가죽옷을 보면서 늘 ㅎ님의 용서의 은혜와 대신 죽은 어린양에게 감사와 미안함을 갖고 살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물론 가죽옷은 IX의 십자가 복음임을 우리는 안다)
아담과 하와는 그같은 ㅎ님의 용서의 은혜를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가인은 부모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버리고 자기방식으로 욕망을 위해 ㅎ님을 섬기는 자로 살게 되었고, 아벨은 ㅎ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런 정신사상을 두 사람의 제사로 함축해서 표현한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땅에서 나온 것은 하늘과 대비되는 용어이다. 인본주의, 율법주의, 자유주의신학 등을 암시하는 말이다.
대신에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다. 이는 맏물이시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신 IX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한다. 인간의 정성과 열심은 삭제되고 오직 ㅎ님의 것으로 드리는 제사이기에 열납되는 것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부분은 아벨은 양치는 자였다는 점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나 양식으로 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기에, 아벨 당시에는 직업으로 양을 친다는 것은 생활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양을 치면서 살았다는 말은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날마다 오직 ㅎ님의 긍휼만을 사모하며 살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정리한다면, 가인은 사람의 열심과 정성으로 ㅎ님을 섬겨서 인정받으려는 율법주의자의 대표이며 육적인 신자다. 그러니 ㅎ님은 그이 제사를 기각시키신다. 아벨은 자신이야말로 ㅎ님의 말씀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무능과 무력한 존재임을 잘 아는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의 대표이다. 그래서 오직 IX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기에 IX를 믿는 자이다. 이렇게 상한 심령으로 나아오는 자를 ㅎ님은 기뻐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자기부인이 일어날 수가 없다. 자신이 죄로 죽었기에 그 어떠한 선한 것도 행할 수 없다고 자인할 수가 있겠는가? 오직 성령이 오셔야 가능한 일이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아벨이나 가인이나 똑같이 주야장창 자기 의를 추구하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한계이고 운명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아벨 같이 자기 부인이 일어나면 자기의 죄악된 실존에 대해 눈이 떠져서 상한 심령으로 ㅎ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창세전 ㅎ님의 택하심이 있었기에 그들에게 때가 차면 성령을 보내주셔서 IX를 믿게 해서 구원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공로가 전혀 가미될 수 없기에 은혜 구원, 혹은 선물 구원이라고 한다.
(엡2:8~9) 8 너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구원은 은혜로 받은 믿음으로 된 것이지 행함에서 난 것이 아니기에 자랑치 못한다는 말이다. 만일 눈곱만큼이라도 자기공로를 자랑해서 지난주에 나눈 것처럼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였나이다’ 하면, 가인의 노선에 있는 자이다. 인간 자신의 행함에 가치를 두는 육적인 자요, 사람의 의에 붙들린 자로서 ㅎ님의 의를 대적하고 복종치 않는 불법한 자이다. 그날 주님의 재림의 날, 심판의 날에 그가 갈 곳은 불못 지옥이다.
그래서 주여주여 한다고 다 천국가는 게 아니라 ㅎ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할 때에, ㅎ님의 뜻을 행한다는 말은, 어떤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행함이나 윤리도덕적인 반듯한 행동을 실천한다는 말이 아니다. 요6.40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 IX를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라”라고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 주고 있다.
요6장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찾아오자, “너희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하신다. 그러자 그들이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ㅎ님의 일을 하오리까?’ 주님이 대답(ㅎ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ㅎ님의 일이다. 즉 IX를 믿는 것이 ㅎ님의 일이라는 말씀임). 믿는 게 곧 일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차원이다.
사람들은 ‘일하라, 행하라’ 그러면 이마에 땀 흘리고 노력하고 힘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청난 오해일 뿐이다. 그래서 좋은 믿음, 좋은 신앙하면 각종 종교생활에 열심을 내고 십일조나 헌금을 철저히 하고 새벽예배나 철야예배까지 나오는 사람을 좋은 믿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인간 행함에 바탕을 둔 사람의 열심이지 ㅎ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다. 어쩌면 예수가 안 믿어지는데 불안하니까 역작용으로 믿음을 확인 받고 싶어서 외적인 행함에 열심을 내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체면에 걸려 속고 있는 것임)
참된 믿음은 사람의 행함이 아니라 ㅎ님의 언약을 믿는 것을 말한다. 믿으면 구원이라니까, 인간 자신이 예수를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예전에 주변에 IQ 140(멘사코리아 가입)이 넘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싶어서 교회를 계속 다니면서 성경도 읽어보고 주석책도 사서보고 별의 별 짓을 다해 보았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복음이 안 믿어져서 결국은 그만둔 사람이 있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열심을 낸다 해도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 딱 맞아떨어지는 사례를 보았다. 예수 믿는 게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믿음은 무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함)
만일 사람이 자신의 결단과 각오로 힘써서 예수를 믿을 수 있다면 굳이 은혜구원이니 선물 구원이니라는 말이 필요 없다. 인간 자신이 믿었으니 잘 선택하여 결단한 자기 행함에 박수를 보내고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이런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 만일 자기 자랑이 넘치는 자들이 천국에 존재 한다면 거기가 지옥이지 천국이겠는가?
천국은 자기 자랑이 삭제당하고 오직 ㅎ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장아찌처럼 절여진 자들이 가는 나라이다. 게다가 ㅎ님 믿는 일 자체도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ㅎ님이 그런 마음을 주셔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열매 맺음이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내는 게 저절로 되는 것이지, 힘쓰고 애써서 되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그래서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각종 제사의 일을 수종할 때에 세마포 옷을 입었다. 세마포를 입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땀내지 말라는 의미이다. ㅎ님을 섬기는 일은 인간의 열심으로 땀내면서 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메시지이다. ㅎ님의 일은 ㅎ님이 하신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 무슨 수로 스스로 노력하고 애써서 구원을 따낼 수가 있겠는가? 오직 ㅎ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거저 받는 은혜 구원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구원의 상징인 출애굽 때에도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나왔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체적으로 한 일은 전혀 없다. 무슨 독립운동을 했나? 금식기도를 했나? 그저 멍 때리고 있다가 ‘얘들아 이제 나가자’해서 부랴부랴 나온 것이다. 이어서 홍해 앞에서의 광경 역시 마찬가지다. 뒤에는 바로의 군사가 몰려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백성들이 두려워 떠는데 ㅎ님의 말씀은 ‘너희는 가만히 서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하신다.
그렇다! 성도의 할 일은 구원을 주시는 ㅎ님을 바라보는 것뿐이지 우리가 뭔가 해야 할 일은 없다. 이게 자유케 하는 진리의 복음이다. 오직 ㅎ님의 의이신 IX를 믿는 게 유일한 성도의 일이다. 아니 믿음 그것 자체도 ㅎ님이 주셔서 유발되는 것이니 과연 성도 우리가 할 일은 전혀 없는 것이 아닌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고나 할까? IX를 믿는 것이 일인데 실상은 일의 범주에도 들지 않는 은혜 안에서 모든 것들을 누리는 자들이 성도가 갖는 복이다.
오늘 나누는 본문 역시 사람의 의냐, ㅎ님의 의냐의 분별에 대한 것이다. 이것을 반석 위에 짓는 집과 모래 위에 짓는 집으로 비유했을 뿐이다. 세상에 어느 바보가 모래 위에 집을 짓겠는가? 집을 짓기 전에 기초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 깊이 파고 돌로 메우거나, 요즘은 큰크리트에 파일을 박아서 견고케 한 후에 집을 짓는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열심내서 걷고 있는 노선이야말로 단단한 반석 위에 짓는 집이라고 찰떡같이 믿으면서 하겠지요. 그러나 영적인 시각으로 볼 때, 그게 바로 모래 위에 짓는 신앙이라는 고발이다. 얼마 전에 나눈 넓은 문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본문 마7장24~25절만 보자.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반석 위에 짓는 집은 당연히 비와 바람과 창수가 나도 안전하다. 그런데 어디서 문제가 발생하느냐하면, 24절의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한다는 말에서 걸려 넘어진다. 여기서 행한다는 말이 무엇일까? 이 말을 곡해해서 다시금 인간의 열심과 실천을 떠올린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율법주의로 뒤돌아가서 그것을 지키려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동분서주하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대다수의 신자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봐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반석 위에 집짓는 거잖아.. 항변한다)
육적인 자들은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늘의 지혜를 받지 않으면 성경을 다 문자대로 보고 망하는 길로 들어선다. 그럼 진리 안에서 해석을 해보자. 행하라는 말 앞에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가 나온다. 여기서 ‘나의 이 말’이란 바로 앞의 말씀인 지난주에 나눈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이고 거짓선지자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산상수훈 전체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하시고자 하신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아시는가?(???...???)
핵심을 다시 언급하자면, 5장 17절의(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하심이다. 가령 모세의 율법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물리적인 살인을 안하면 다 지킨 것으로 알았는데, 주님의 말씀은 ‘형제를 보고 미워만 해도 살인이야’ 하신다. 살인이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미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에 미움 그 자체가 벌써 살인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간음도 마찬가지다.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벌써 간음이야’라고 하신다. 이게 ㅎ님의 율법의 엄중함이다.
그렇기에 너희들은 모두 살인자요, 간음자인데 너희들이 무슨 선을 행할 수 있느냐는 고발과 폭로가 산상수훈 전체에서 하시는 메시지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이기 때문에 ㅎ님의 율법을 지켜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하는 수단인데 그 율법을 지켜 의인이 되겠다는 발상이 죄악이고 불법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ㅎ님의 뜻을 모르고 인간의 능력을 부추기며 열심과 정성을 다해 ㅎ님을 섬기면 구원도 이루고 복도 받는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고발이 지난주까지 이어져 온 내용이다.
(다시 말)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게 목적이다. 그러면 구원자이신 IX께로 나아가 용서함을 구하라는 것이 ㅎ님의 뜻이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먼저 율법으로 죄를 알게 하고 나중에 복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은, 죄 아래 갇혀서 고통하고 신음하는 체험이 없다면 용서의 은혜의 가치를 모를 테니까, 경륜적으로 율법 아래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기간을 운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때가 차면 은혜로 믿음을 주셔서 복음을 통해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ㅎ님의 지혜요 능력이다.
그러나 이같은 ㅎ님의 창세전 택하심과 무관한 자들은 여전히 자기 가능성에 방점을 찍고 열심과 정성을 다해 ㅎ님을 섬기면서 자기 행함의 마일리지를 쌓는다. 그걸 자기의 자산으로 삼고 종교적 업적에 대한 자랑과 자긍함 속에서 구원을 확신하며 살지만 헛물을 키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거짓을 가르치는 자나 그 거짓에 속아 온 평생 헛된 열심을 부리는 자나 다 사단의 사주를 받아 망하는 길에 있는 자들이다. ㅎ님은 이들로 하여금 거짓 것에 유혹을 받도록 허락하셨다고 하신다.
<살후2:9~15> 9~10절 읽고..(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기적을 나타냄..사단이 자기 종들에게 부여함/ 거짓 기적이란 속임수로 기적을 꾸민다는 말이 아님. 진짜 기적을 일으킴. 심지어는 말기 암도 치유함. 그러나 그게 진리의 복음과는 무관하기에 거짓기적이라는 말임. 10절, 진리의 사랑이란 ㅎ님의 창세전 택하심의 사랑을 말함. 이 택하심을 받지 못하면 유혹에 빠져서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가지는 헛된 신앙을 갖게 된다.
11~12절 읽고, 지난주에도 계13장에서 누가 바다‘짐승(짝퉁 예수)에게 경배하지 않는다고 했나?(창세전 어린양‘생명책에 녹명된 자). 아니면 다 짝통 예수를 너무도 좋아함. => 거짓 것을 믿게 해서 심판하심..왜냐고? 불의를 좋아하니까(불의, 불법, 같은 말-사람의 행함의 의를 의로 여기는 것이 불의를 좋아하는 것임/반대로 행함을 부인하고 ㅎ님의 의이신 IX믿음이 참된 의임)
13절(너희는 누구다?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임. 근거는? ㅎ님이 처음부터 택하셨기에..) 그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하신 것이라는 말임. 그렇지 않으면 주가 우리를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르실 수가 없는 것임. 우리가 어찌 감히 그런 호칭을 받을 수 있겠는가? 지옥가기에 마땅한 죄인들인데...그저 ㅎ님의 택하심의 사랑 때문에 ㅎ님의 자녀된 것이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된 것임. 형제라는 칭호는 단순히 바울이 자기형제라는 차원 넘는 말임..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말임..
롬8.29절에도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록됨.
=>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신 내용이 뭐다? 창세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이 미리 아신 자들이고, 이들을 IX의 피로 구속해서 ㅎ님의 아들삼아 예수의 형제들로 삼겠다는 것을 예정하셨다는 말이다(예수님은 맏아들, 맏형/성도들은 형제인 동생들, 이런 망극한 은혜가? 세상 천지에? / 히2장, 주님이 성도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고 함.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함을 입는 자들이 다 ㅎ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말씀임: ㅎ님만)
14절( 복음으로 부르사...13절에 진리를 믿음으로...같은 말임. 복음이 곧 진리라는 말임) 그래서 IX의 영광을 얻게 하셨다 함. 롬8장에서 확인..예수님의 형제라는 칭호를 받는 신분을 부여받음..이보다 더 큰 영광이 우주 천지에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교회는 집사, 권사, 장로라는 종교적 호칭 버리고 다 형제님이라고 하는 것임. 당신은 주님이 형제로 삼은 귀하신 주님의 형제라는 의미이다.
15절(말로나 편지로 받은 유전? 말도 편지도 다 복음임,, 유전이라는 번역은 오류임. 바른 번역은 교훈임) 그러므로 우리가 고수하며 지켜야 할 것은 십자가 복음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잡는 것이다. 이게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살후3:1~2/6> 1절( 말씀이 달음질~살아 있는 자는 온 몸에 피가 돌아야 하듯이, 성도는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에 온 마음과 생각에 계속 역동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도가 말씀을 등한히 여긴다면 그는 성도가 아니다. 몇날 몇 달이 되도록 말씀 없이도 산다면 그는 ㅎ님의 자녀가 분명 아니다. 말씀으로 주님과의 관계성이 유지되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말을 한다.)
2절(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이란 사회적인 범죄자를 의미하는 게 아님. 사람의 각종 행함으로 구원이 되고 거룩해진다고 여기는 사람의 의를 따르는 자들을 말한다. 이들이 모래 위에 집짓는 자들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IQ140? 그래서 만인 구원론은 오류다. 믿음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가 없다. ㅎ님이 은혜로 주시는 자만 믿음이 생성되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다. 믿음의 하이라이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나를 끌어안고 같이 죽었음이 믿어진다. '다 이루었노라‘ ../그래서 그 언약을 믿고 감격과 감사함 속에서 사는 것이다.)
6절(규모없이 행하는 자들이란 십자가 복음인 진리의 범주를 무시하고 떠나서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두고 사람의 영광을 드높이는 육적 신앙을 말한다. 모두 모래 위에 집짓는 자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사도들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따라 ㅎ님을 섬긴다고 덤비는 자들이기에, 바울은 강력하게 명령한다. 이들 거짓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요!!)
신22장에서도 언급하심: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고,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고,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고요../즉 의와 불법이 함께할 수 없고, 육과 영이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육적인 신자들이 꽉찬 교회가 주님의 교회겠는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인 음녀교회요, 큰성 바벨론이다. 바벨론(진리와 비진리가 섞여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곳에 대한 비유임) 그래서 계18.4절(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노아의 홍수 심판이 무엇을 말하는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한데 섞여서 사망의 큰물이 되었다. 궁창 위의 물은 진리를 상징하고 궁창 아래의 물은 인본주의에서 나온 비진리를 상징한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니 온 세상이 다 섞인 큰 홍수에 잠겨서 기식하는 모든 생물이 수장되었다. 오늘 날도 동일한 일이 계속 된다.
인간의 행함으로 ㅎ님께 나아가려는 큰 성 바벨론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섞인 물인 비진리에 빠져 죽어있는 상태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IX의 부활에 동참한 적이 없기에 그저 무덤 속에 있을 뿐이다. 종교생활에 열심이기에 겉으로는 살아있는 듯하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일 뿐이다. 보는 눈, 듣는 귀, 깨닫는 마음 모든 곳이 다 죽어 있는 감각 없는 자들이다. 이들이 모래 위에 집짓는 자들이다. 그날에 모든 것이 다 불타 소멸될 것이다.
<고전3:10~15> 읽고,
신앙의 터는 IX이시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 여기에 더한다면 사람들이 보기에 가치 있다고 여기는 금은보석이나(행함에 열심 낸 놀라운 업적), 가치 없다고 여기는 짚이나 풀이라도(행함이 부족하여 자신 없어하는 모습), 예외 없이 다 불에 타 소멸될 것이다. 사람이 세운 그 어떤 공력도 남아나질 못한다는 말이다.
금은보석으로 평가되는 것들~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완벽한 행함, 윤리도덕적인 반듯한 삶, 이웃을 위해 온 평생 희생한 자들의 공력은 어떠할까요? 가령, 빈민의 어머니 테레사 여사나 아프리카의 아버지 슈바이쳐 박사,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 같은 구제와 헌신의 달인들은 어떨까? 심판 날에는 아무 쓸 짝에 없는 모래위의 집들이다. 모든 공력이 다 불에 탈 것이다.
그러나 구원 얻을 자는 오직 IX를 믿는 그 신앙으로 겨우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을 테니 IX 터 외에 다른 것을 첨가시키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다.
계20장을 보면, 백보좌 심판대 앞에 두 책이 펼쳐져 있다 행위책들과 생명책이다. 살생부다. 죽이는 자와 살리는 자가 두 책으로 나뉜다. 이 최후의 심판대에서 성도가 구원 얻는 것은 행위가 적힌 책이 아니다. 행위를 내세우는 자는 지난주에도 언급했지만 다 불법을 행하는 죽은 자들이다.
성도의 구원은 행위 책에 기록된 업적 때문이 아니라 생명책 때문이다. 이 생명부가 바로 창세전에 택하여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이다. 자기 공로는 먼지만큼도 없지만 오직 IX를 믿음으로 거듭난 이들이 바로 반석 위에 집짓는 자들이다. 이 은혜에 속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