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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난 자(강해 원고)
<요1:9~13>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전주)에 두 가지에 대해 설교(요한복음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증거자 세례요한에 대하여~), 그런데 동영상에 오류가 생겨서 유튜브에 못 올림(유감)..세례요한은 앞으로도 계속 나오니까 그때 가서 보충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은 요한복음의 특성에 대하여 중요한 부분만 잠깐 설명하고, 오늘 본문으로 이어가자.
만일 성경 66권 중에서 한 권만 허락된다면 요한복음을 고른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유는 요한복음 안에는 ‘ㅎ님의 자기백성 사랑’에 대해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언제 들어도 또 들어도 계속 듣고 싶은 말이 뭐다? ‘ㅎ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이다. (그래서 찬송가도~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이런 찬송이 언제나 은혜스럽다.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곳곳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별명을 붙여서 표현하고 있는데, 실상 알고보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 요한’은 ㅎ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성도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이같은 ㅎ님의 사랑의 원천을 요한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6장에서는 성도들에 대해 ‘ㅎ님의 잃어버린 양’으로 표현하는가하면,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께 보내어 믿게 하는 자’ 라는 등의 표현을 통해 창세전 ㅎ님의 택하심의 사랑에 대해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성경은 이 같은 창세전 ㅎ님의 택하심의 사랑을 ‘처음사랑’이라고 한다. 성도의 신앙은 자기의 행함에 가치를 둔 신앙이 아니라 ㅎ님의 택하심의 사랑에 신앙의 방점을 둘 때에만 담대하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게 된다. 만일 잠깐이라도 ㅎ님의 택하심을 망각하고 내 의지와 결단으로 ㅎ님을 믿었다고 한다면, 인간 자신에게 신앙의 근거를 삼는 그 즉시 실족하여 넘어지게 된다.
사실 IX의 십자가 사건 때에 모든 제자가 다 도망갔지만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밑에까지 가서 마리아와 함께 주님을 지켰던 용기는, 주님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었다(주님이 요한을 보고, ‘보라 네 어머니니라’, 마리아를 향해서는 요한을 지목하며 ‘보세요 아들이니이다’ 하셨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은 자는 주를 위해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의 현장에까지 따라간 것이다. 사랑은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주님의 그 사랑을 알았고 받아 누리던 자였다. 그래서 요13.1절에서도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이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끝까지란 십자가의 죽음까지 불사한 사랑으로 구원한 제자들이 앞으로 주님을 배신하고 저주까지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내포한다. 그리고 요15장에서도,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였다’고 언급하고 있고, 요일 4장에서는 ‘우리가 ㅎ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 ㅎ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주셨다’고 피력한다.
이렇게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은 성도의 신앙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는 생명의 복음서이다. 오늘 본문 역시 그 ㅎ님의 사랑에 기반한 구원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ㅎ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ㅎ님 자신이 택한 자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을 계시할 때에 비로소 믿게 되는 것이다. 이같이 천연적인 인간이 자력으로 ㅎ님을 알 수없는 영적인 실상을 어둠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ㅎ님을 향해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ㅎ님이 택한 자들에게 찾아오심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ㅎ님이 갈대아 우르에~ 아브라함을 찾아 부르심..)
9절에 보면, 영원 전부터 계시던 창조주 ㅎ님이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신 IX를 참빛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자기 백성이 그를 주인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왜일까? 5절에도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한다.’ 이는 자신들이 빛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빛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ㅎ님의 율법을 맡은 세계에서 유일한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교만한 선민의식으로 가득찬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우월의식으로 세뇌되어 이방족속들은 멸망의 종자들인 개나 돼지로 취급하며 살았다. 그들은 모세로부터 주어진 율법지킴과 성막제사를 자신들의 생명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자칭 빛의 자녀들이라고 자긍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으라고 ㅎ님은 매 시대마다 당신의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의 죄악을 경고하며 돌이키라고 외쳤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다. 선지자들의 지적에 대해 무슨 개소리냐고 역정을 내며 오히려 ㅎ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거역과 불순종의 역사를 기록한 곳이 구약의 선지서들이다.
<사1:10~15> 10절=> 유다의 영적인 타락함이 소돔과 고모라 같다는 말임(간음의 도시 소돔이 왜 멸망했는지 정작 모르겠냐는 다그치심이다. ㅎ님만 섬겨야할 자들이 ㅎ님을 우상으로~)
11절=> (짐승의 기름냄새와 피 냄새 싫다.) 성막 제사에서 드려지는 우양의 제물은 자신의 죄 때문에 대신 죽는 속죄의 모형인데 이러한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ㅎ님께 복 받고 문제 해결받기 위한 제사로 변질된 것을 한탄하시는 말씀임
12~14절=> 그런 헛된 제사와 제물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대동소이함, ㅎ님을 섬기는 예배와 각종 절기를 지키는 것, 대회로 모이는 것 등이 다 구원을 바라고 세상 복을 위해서- 사업, 직장, 병고침, 자녀 잘됨을 위한 신앙: 무당잡교로 변질됨) 15절=> 수많은 종교 행위들, 각종 예배, 제사, 작정기도, 금식기도가 헛된 일이라고 하심. 손에 피가 가득하다?(탐욕과 탐심을 가지고 온갖 죄악들을 저지르는 놈들이 무슨 기도냐? 질타)
<사1:2~3>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도 밥 주는 주인을 알건마는 너희 이스라엘은 짐승보다 못한 놈들이라고 질타를 하심(자식을 애지중지 양육하였는데, 아비어미를 몰라보는 후레자식들이라는 말씀임). 이스라엘은 정말 깜도 안되는 자들이다. 신7.7절을 보면 ㅎ님이 그들을 택한 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못나고 부족하고 연약해서였다. 이렇게 못난이들을 택해서 ㅎ님의 구원을 만방에 알림으로 ㅎ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시려는 것인데, 이들은 곡해해서 자신들이 타 족속보다 잘나서 택함 받은 줄로 여겨온 것이다.
시51.17절에 다윗은 고백하기를 ‘ㅎ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ㅎ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찾으신다’고 하고, 호세아서 6.6절에서도 음녀 고멜과도 같은 이스라엘을 향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ㅎ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탄식하심. 그래도 안 듣고 저래도 안들으니 마지막 선지서인 말라기에서는 적나라하게 질타를 하신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내 상에 더러운 떡을 드리는 놈들아~! 했더니, 우리가 언제 그랬냐고 항변하는 악당들아,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쳐 바르겠다 하심(습관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똥과 같다는 질책임~그래서 멸망으로 심판한 것임), ‘누가 저 성전문을 닫았으면 좋겠다. 내가 우양의 기름과 타는 냄새에 질렸도다’ 하심(성전문 좀 닫아?...이스라엘과 더 이상 상종치 아니하겠다는 선언이심). 렘7장(여기가 여호와의 전이라, ..반복..~믿지 마라/계18.2~큰 성 바벨론 음녀교회(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감옥, 귀신의 처소: 매시대 마다)
성막제사는 한마디로 흠 없는 짐승이 피 흘려 죽는 것을 볼 때에 자신의 죄악 때문에 대신 죽는 짐승을 보고 가슴 깊이 회개하며,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짐승이 죽어 줌으로 자신을 용서하시는 ㅎ님의 긍휼하심에 대해 감사하라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이같은 ㅎ님의 의도를 도외시한 채, 그냥 매너리즘에 빠져서 습관적으로 제사를 드려왔고 종국에는 이마저도 변질되어 제사가 복 받는 뇌물로 둔갑되어 ㅎ님과 거래하려는 우상숭배가 되었으니 이렇게 은혜를 망각한 자들을 어떻게 응징해야 했을까? 북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조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그러나 언약의 ㅎ님은 자기백성을 그냥 버려두실 수가 없으셨다. 인간의 행함에 방점을 둔 옛언약은 아무리 오랜 시간 기회를 주어도 안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새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ㅎ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구약이 끝나고 신약이 시작된 것이다.(BC/AD...인류역사의 분기점이 예수로 구분, 예수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메시지인데 사람들은 몰라, 눈뜬장님들) ..
성육신하여 오신 주님이 그때부터 하신 일은 무엇이었나? 당시 유대인들의 훈도요 선생으로 여기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신앙을 부정하고 몰수해 버렸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생명처럼 여겨온 율법 행함의 의와 경건생활을 다 기각시키고, 사람의 율법 행함에서 나오는 의는 다 탐심에서 나오는 외식이고 거짓된 것이라고 질타를 하니까,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율법 지킴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온 자신들이야말로 빛이요 생명이라고 여겨왔는데 웬걸, 이것을 뿌리부터 부인당하고 그게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고 사망이라고 뒤집어 엎어버리니 그 예수가 미워서 마침내는 죽여 버리고 만 것이다.
<요3:18~21>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19절의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20절의 악을 행하는 자란, 일반 사회법인 윤리 도덕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님. 지금까지 언급한 것처럼 종교적 행함과 반듯한 삶, 착하고 좋은 사람을 목적하여 산 것을 의로운 삶이라고 자부하는 그 모든 사람의 의를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고체계를 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게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임. 결국 어두움이란 자기 행함에 가치를 둔 종교적 행위나 인간 선행 전체를 악으로 규정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빛이란 무엇인가?(너희들의 행함으로는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가 없으니까 자신의 무능과 무력함을 깨닫고 용서하시는 ㅎ님께 나아와서 긍휼하심을 의지하라는 것임. 이것을 줄여서 IX를 믿어야 산다는 십자가 복음이 참빛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자기 의가 있는 자들은 죽었다 깨나도 복음을 믿지 않는다. 복음은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에게만 들려지는 은혜이다.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어 ㅎ님의 말씀대로 도저히 살 수 없는 자임을 아는 자만 오직 ㅎ님의 용서의 긍휼만 의지하게 되어 복음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본문의 12절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를 영접하는 자가 예수를 믿는 자이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도 많고 예수 믿는 자들도 차고 넘친다. 과연 그들이 다 예수를 영접하여 예수를 믿는 자들일까? (다시 말) 누가 예수를 믿게 된다구요? 자기 부인이 일어난 자들이 예수를 믿는다. 예수는 자기 의가 끝난 자들만이 믿는다. 그러나 자기에게 뭔가 ㅎ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예수 믿는 게 아니다. 자기가 죽은 자들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게 참이다. 그게 아니면 다 거짓이다. 교회 다닌다고 예수 믿는 게 아니다. 입술로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예수 믿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3주전에 한 산상수훈 결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산 위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인 (마5~7장)산상수훈 전체를 통해 자신의 실체가 발가벗겨지니까 (마8장 1째 사건, 산에서 내려오시자: 산상수훈의 결과에 대한 메시지를 암시) 자신이 문둥병자로 드러나게 되더라는 말이다. 살이 썩어 문드러져도 통증을 못 느끼면서 날마다 사망으로 떠내려가는 자가 문둥병자 아닌가?(천형). 그처럼 주님의 말씀의 빛이 자신을 덮쳐오니 자신이야말로 죄와 허물로 죽은 사망의 존재인 영적인 문둥병자인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서 주님 앞에 나아와 용서를 구하게 되는 자가 있는데 그가 복있는(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8복의 사람이라는 말이 산상수훈의 결론이다.
말씀은 죄인의 실체를 폭로시킨다. (히4:12~ㅎ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해서 ㅎ님의 앞에서 벌거벗기우듯 드러나게 한다)고 하신다. 이게 말씀의 위력이다. 마치 MRI와 같다. X-ray보다도 훨씬 강한 빛이 MRI이다. 스캔하면 빛이 통과되어 뼈속까지 속이 훤히 드러나서 병을 진단하듯이, ㅎ님 말씀이 사람의 내면을 발가벗기는 강력한 빛이라는 말이다.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는 산상수훈의 그 말씀으로 죄인은 더 이상 숨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핵심 구절이 뭐라고 했나? 마5.17절(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 하심. 여기서 완전케 하려고 왔다는 말은 ㅎ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의 목적은 페펙트 하게 지키는 것이지 상대적 지킴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가령 율법이 100개 있다면 99개 지켜도 빵점이고 빵개 지켜도 빵점이라는 말이다. 이거야말로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충격이다. 그래서 약2.10절에서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율법의 전체중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를 어긴 것이 된다고~ 그런데 유대인들은 상대적 개념으로 지켜왔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잘 지키는 자신을 자랑하여 ㅎ님 앞에서 “나 잘했지요? 상주세요” 하는 식이었다.
누가 율법을 잘 지켜낼 수 있는가?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철퇴를 내리셨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범죄하면 그 눈을 빼버리고 온 몸이 지옥 가는 것을 면해야지 않겠니? 만일 네 오는 손이 범죄하면 잘라 버리고 온 몸이 지옥에 가지 않는 게 유익하지 않겠니?(하시는데..). 이게 지키라는 말인가? 아니면 너희는 도저히 지키지 못하니까 포기하고 항복하라는 말씀인가? 항복하라는 말씀인데 이걸 문자대로 지키려고 금욕주의 경건주의 성화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다 다른복음일 뿐이다. 그 대표주자가 간디요 슈바이쳐였다. 당연히 지옥으로 간 자들이다. (확실하다. 그들은 자신의 실천력을 믿었지 예수를 안 믿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이어지는 말씀이 그 유명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다. 수십 년 교회생활을 해도 아직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주변의 신자에게 질문해 보시라). 이 말씀을 보고 오히려 바리새인 보다 더 율법을 잘 지키겠다고 팔 걷어 부치는 자들이 나온다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바리새인의 의는 인간이 낼 수 있는 최고봉의 행함의 의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의로는 천년만년 해도 불가능 하다는 말씀이다.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란 ㅎ님의 의로 오신 IX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의 의다.
<롬3:19~28> 읽으면서 설명(너무도 중요한 내용들이라 다 읽어 보자. 깊이 기억해야 함)
19절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율법 가치를 숭상함, 아직 죄를 해결받지 못한 자들~BC다. 계속 죄가 발각되니 언제나 죄책감으로 갇혀 있으니 함구시키고 심판의 두려움에 떨고 산다)
특히 21절(그러나 이제는~) 번역 누락(그러나~새언약의 시대를 강조하는 접속사이다.) 구약도 새언약(ㅎ님의 의)을 가르키고 있었다는 것임
22절로 귀결(IX를 믿는 의, ㅎ님이 준비하신 의../언제부터? 창세전의 ㅎ님 설계도다, 시나리오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다. ㅎ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약속으로 주어지는 구원이다. 인간은 여기에 개입할 수가 없다. 자격 미달, 능력미달이기 때문이다.) 해서 차별 무다.
=>23~28절 읽으면서 (27~28절 반복)
(잘 이시다시피) 시내산, 모세가 준 옛 언약은 ㅎ님과 사람과의 쌍무언약이었다. ‘인간 너희들이 잘 지키면 구원이고 못지키면 저주다.’ 그랬는데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실패로 증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새언약을 주시는 것이다. 좀 전에 살펴봤던 IX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이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 12절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ㅎ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
그렇다면 다시 누가 이 새언약의 십자가 복음을 믿게 되는가이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오해를 한다. 이 구절을 얼핏 보면 마치 인간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영접할 수 있다는 식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착각 때문에 기독교가 인본주의로 변질된 이유 중의 하나다. ‘나도 내 의지로 믿었으니 남들도 많이 전도해서 예배당을 채우자. 사람의 영혼을 구원시키자.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던데 많이 전도할수록 천국에서 상급이 얼마나 크겠는가?’ ~이러한 발상으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전도에 열을 올린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되고 예배당이 커졌는가? 그러나 빛 좋은 개살구요 거짓교회일 뿐이다.
전도로 유명한 ‘예수 전도단’이라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단체가 있다. 주로 목사나 선교사를 대상으로 전도 훈련하는 기관인데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노방전도를 한다. 하루 전도해야 할 인원수를 채우지 못하면 밤까지도 숙소를 들어올 수가 없단다. 전도의 기준은 그냥 전도지를 나눠주는 게 아니라, 영접까지 시켜야 한다. 그래서 그 증거물로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적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전도지가 4영리 소책자다. 한마디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인데 네가 믿겠다고 결단하여 영접하면 즉시 천국백성이 되는 거구, 거절하면 그냥 지옥간다고 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아멘’하면 한 영혼 구원한 실적이 잡힌다. 그러나 이게 성경적 영접이고 성경적 구원인가? 번지수가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대다수 교회의 전도 방향이 이것과 방불하다. 이런 식으로 전도되어 코가 꿰져서 정작 교회는 다니나 그들이 과연 죄가 무엇인지, 자기부인이 무엇인지나 알고는 있을까?
그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니까, 복도 받는다니까 각종 헌금 내며 봉사하며 교회의 일원이 되어 있을 뿐이다. 거기에 정말 자신의 영적 실체인 ‘나는 죽은 자입니다’/I'm not'g을 절실히 깨닫고, 그런 자신이 십자가 보혈로 값없이 죄를 탕감 받은 그 은혜가 너무도 귀해서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다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온통 가라지 집단은 아닐까? 성경은 이런 자들의 모임을 음녀교회,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한다.
본문 12절만 보면 인간 자신이 IX를 영접하여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정답이 나온다.
12~13절 다시(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IX를 영접하여 믿는 자들은 ㅎ님께로 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앞 뒤 문맥을 따라 읽어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면만 따로 떼서 보게 되거나 그런 설교를 들으면 속아 넘어간다. 영적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혈통~우리 집안은 삼대 째 기독교 집안입네, 우리 부친이 목사고 장로네, 그런 자랑은 헛소리라는 것: 주님은 한 집안 식구가 원수니라 하심. 누가 내 모친이요 형제냐? 반문?(혈통 무관),육정이나 사람의 뜻(지옥 가기 싫고 구원 받고 싶어서 예수를 믿어보려고 하는 의지와 결단을 말한다). 그래서 가족 따라서, 친구 따라서 교회 나가지만 용두사미 꼴이 된다. 처음은 열심을 부리나 나중에는 시들해져서 냉담자됨 byby~ (그런 사람들: 주변에 부지기수다. 다 떨어져 나갔다. 왜일까?) 미혹하는 영의 역사로 인하여 본래의 자리로 간 것임(사단의 부속물 자리)
(<고후4:3~4>)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엡4:8) XI께서 부활 승천하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하심(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십자가로 사망의 문을 깨뜨리시고 다시 사로잡아 ㅎ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이다). (마12.28절에도)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어 구원시키는 것을, 더 강한 자(IX)가 와서 강한 자(마귀)를 결박하여 그 세간을 늑탈한다고 표현하심. 이같이 ㅎ님의 전쟁에서 십자가로 이기심으로 우리로 예수를 영접시켜서 구원되는 것이다.(천국은 침로당하는 선물: 이를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한다.) ㅎ님의 은혜가 쳐들어오면 아무리 거부해도 불가능
그러므로 구원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롬9.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사람의 원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한다고 해서도 아니 된다. 오직 ㅎ님의 긍휼하심으로만 되어 진다). ㅎ님의 긍휼하심은 창세전 ㅎ님의 택하심을 말한다. 이것을 엡1장에서는 (창세전 IX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IX의 피로 구속받아 ㅎ님의 아들들이 되게 예정하셨다고 기록함)
ㅎ님의 구속사 전개는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당여하지 않겠는가? 사람도 무슨 사업을 하고자할 때에 사전에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일을 진행하지 아무 계획도 없이 저지르지 않는다. 하물며 지혜와 총명의 신이신 ㅎ님께서 중차대한 구속사를 전개하시기 전에 당연히 세세한 시나리오를 설계하시고 역사를 운영해 가실 것이다. 그 창세전 택한 자들을 ‘미리 아신 자들’이라고 한다.
<롬8:29~30> 읽고~(ㅎ님의 창조 목적, 택하심, 등등 이처럼 명확하게 말씀해도 사람들은 쉽게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구원이 ㅎ님의 일방적 뜻대로 결정되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는 거부감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인간 자신이 나름대로 가치 있는 존재인데 그걸 깡그리 무시하는 ㅎ님의 처사에 동의할 수 없다는 항변이다. ㅎ님의 신이 떠난 인간 자신의 처움자리-진흙이요 먼지라는 무존재-를 알지 못해서 어거지를 부리는 땡깡이다.
<벧전1.2절>~ㅎ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IX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은혜와 평강은 택하심의 사랑을 알게 될 때에 저절로 임하는 것이지 마음으로 기도-마인드컨트롤- 해서 되는 게 아님)
<벧후1.1~2절>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단다. 믿음은 ㅎ님과 IX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 믿음으로 구원의 효력이 발생하니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함(생명을 주는 믿음이라는 의미).
그래서 엡2.8절에도(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나니 ㅎ님의 선물이라. 행위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행위가 아님을 못 박는다. 자랑을 못하게 하려고~(천국에는 모두 무자격자들이 가는데 어떻게 간다? ㅎ님의 은혜로만, 그래서 차등이 없는 곳이다. 지옥 갈 놈들을 은혜로 데려왔는데 무슨 상을 바라겠는가? 그저 그 은혜만 세세토록 찬송할 뿐이다.-이게 ㅎ님이 바라시는 것 하나 임: 당신을 찬양하는 것)
그러므로 오늘 본문 13절에서, IX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게 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ㅎ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공로는 단1도 없는데, 아니 자격은 고사하고 남들처럼 흙으로 왔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창세전부터 ㅎ님의 택하심을 따라 역사 속에서 부르심을 받고 IX의 십자가 복음을 믿어 의롭게 되고 ㅎ님의 아들로 영화롭게 되었는데 이런 복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우리 성도는 원래부터 ㅎ님 나라에 있었다가 이 지옥 같은 이 세상에 내려와서 구원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다시 천국인 본향으로 가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 세상의 삶이 필요했던 것인가? 은혜를 알고 오라는 ㅎ님의 깊으신 뜻이 있었다. 천사와 구원 받은 성도의 차이가 무엇인가? 천사는 처음부터 천국에서 지음 받아 살던 존재들이지만 육체가 없기에 고난도 없다. 그래서 은혜를 모른다.
인격체인데도 은혜를 모르기에 감사도 없다. 뭔가 온전치가 못하다 그래서 아들이 못되는 거다. 천사는 부리는 종일뿐이다. 그러나 성도는 큰 환란을 통과하는 고난을 체휼한 자들이다. 그 과정 속에서 ㅎ님의 은혜를 뼈속 깊이 아로새긴 자들이 된다. 어느새 은혜 장아찌가 되었다. 이들이 바로 ㅎ님의 자녀요 아들들이다. 은혜의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해서 ㅎ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권세가 주어진고 한다. ㅎ님 아들의 신분에 걸맞는 권위를 말한다. 여기서는 그 영광이 감추어져 있지만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되면 ㅎ님 자녀로서의 권세가 확인될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을 소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본질적이고 영원하고 장엄한 영광을 소망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롬8.18절에서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노래한다. 바울과 같은 시각으로 하늘의 참된 소망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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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김기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