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1월17일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251년 이집트 중부 코마나(Comana)의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20살 되던 해에 부모를 여의고 누이동생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어느 날 성당에 갔다가 우연히 부자 청년에 관한 복음 말씀을 듣게 되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그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할 결심을 한 그는 상속받은 재산 중에서 누이동생을 위해 일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뒤 은수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고향 근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독수 생활(vita anachoretica)을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철저한 금욕 생활을 위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산기슭에 있는 빈 무덤 동굴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악마의 유혹과 싸우며 노동과 기도 그리고 성경 읽기에 전념하는 엄격한 독수 생활을 실천했다.
그 후 그는 이집트 북부 사막, 나일강 하류에 자리한 피스피르(Pispir) 산에 들어갔다가 텅 비어 있는 버려진 요새를 발견하고, 그 입구를 막아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홀로 머물며 약 20년 동안 금욕 생활을 실천했다. 고적한 생활 속에서 그는 때때로 악마로부터 맹렬한 영적 · 육적 유혹을 받아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지만, 더욱 굳은 믿음과 의지와 기도로써 극복해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뛰어난 성덕과 수많은 기적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소망을 간직하고 성 안토니오를 찾아와 충고를 청하고 또 그가 어떻게 사는지 살피러 왔다. 결국 그는 요새에서 나와 은수 생활을 원하는 이들에게 한동안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의 제자가 되고자 했던 많은 사람에 의해 여러 곳에 은수자 집단이 생겼는데, 그중에서 니트리아(Nitria)와 스케티스(Scetis)의 집단이 유명하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 각자 움막에서 살면서 주일이나 축일에 함께 모여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영적 스승인 성 안토니오의 지도를 받았다. 성 안토니오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박해라 할 수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들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발생하자 순교할 각오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돌아가 사형 선고를 받은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박해가 끝난 후 그는 다시 사막으로 돌아왔다.
독수자(獨修者)로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고자 했던 성 안토니오는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홍해 근처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콜짐(Kolzim)이라는 높은 산 속 동굴을 은둔소를 정하고 기도와 수덕 생활에 열중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청하고자 찾아왔고, 그는 영적 사부로서 그들을 환대하였다. 성 안토니오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항하여 정통 교리를 옹호해 달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5월 2일)의 청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간 일 외에는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을 ‘홍해의 성 안토니오 수도원’ 또는 ‘안토니오 산’으로 불렀고, 여기에서 수도자들에게 보내는 여러 편의 서간을 작성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356년 105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성 안토니오에 대해 비교적 생생한 이야기가 전해진 이유는, 그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내던 성 아타나시오 주교가 기록한 “안토니오의 생애”(Vita Antonii)가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 수도원 운동을 처음 소개했을 뿐 아니라 이 운동을 확산 ·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 전기를 보면 사막의 은수자들이 환상에 빠지거나 혹은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람임과 동시에 학문이 뛰어났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이 엄격했다고 한다. 성 안토니오 또한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못해 문맹이었으나 오랜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지혜를 지닌 인물이었다고 전해주었다. 성 안토니오는 생전이나 사후나 그리스도교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최초의 은수자는 아니지만 가장 모범적인 은수자였기 때문에 ‘은수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동시에 ‘모든 수도승의 원조’, ‘사막의 성인’으로 공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처음으로 은수자들을 한데 모아서 다소 산만한 형태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공동생활을 시작했고, 그들에 대해 어떤 권위를 갖고 일정한 규칙을 제공하며 지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고독하고 한적한 독수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월 17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전해주었다. 개정 “로마 순교록”은 성 안토니오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후 이집트의 사막으로 들어가 금욕적 생활을 하고, 박해 중에 신앙의 증거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아리우스파와 맞서는 성 아타나시오를 도와 교회를 지켰고, 수많은 제자로 인해 수도승의 아버지(원조)로 불린다고 기록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유해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6~565년 재위) 때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알렉산드리아의 성 요한 성당에 안장되었다고 언급했다. 그 뒤로 7세기 후반에 이슬람이 이집트를 점령한 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고, 11세기에 프랑스 귀족 조슬랭(Jocelin)이 비잔틴 황제에게 선물로 받아 프랑스 북부 노르(Nord)의 라 모트오부아(La Motte-aux-Bois)로 가져왔다. 그리고 성인의 유해를 모실 성 안토니오 수도원 성당 건립을 시작했고, 13세기 말에 완공되어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성 안토니오는 보통 T자 모양의 지팡이와 함께 수도 규칙을 상징하는 책이나 종을 소지하거나 작은 돼지와 함께 표현된다. 돼지가 등장하는 이유는 성 안토니오가 치유를 청하는 환자들에게 돼지 지방을 이용해 통증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전승에서 시작되었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사막에서 악마가 온갖 맹수와 뱀의 환영으로 그를 괴롭혔는데, 어느 날은 멧돼지의 몸을 빌려 나타났다. 그러나 성 안토니오가 기도로써 악마를 쫓아내고 그 멧돼지를 길들였다는 이야기에서 기인한다. 이런 이유로 세월이 흐르면서 유럽에서 성 안토니오는 돼지는 물론 모든 동물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게 되었고, 동물들의 보호를 위해 마구간 입구나 안에 성 안토니오의 형상을 걸어놓는 전통도 생겼다. 종은 보통 돼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안토니오(Antony)
251-356 대수도원장
20세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깊은 감명을 받아 전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워준 그의 삶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구도적 삶과 매우 흡사하다.
생애의 대붑문을 광야에서 보내며 타락한 세상의 보범이 되고자 철저환 자기 희생과 기도로 이어지는 은수자로 살았다.
안토니오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영적 치유자요, 인돚이기를 원했다.
54세 됟던 해에 마침내 광야에 여기저기 흩어져 은수자들의 거처를 중심으로 수도원을 세움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을
검소하고 절제된 공통 극지생활로 이끌었다.
잘 다듬어진 건물이나 탁자조차 거부할 만큼 철저했던 그의 은수생활은 그릇된 가치로 인간을 유록하는 죄로 가득찬 세상
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가치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의 완전한 헌신을 체험적으로 가르쳐준 것이다
60세때 다시 시작된 로머의 박헤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수난을 당할 때 순교할 것을 바라변서 감옥에갇힌 신자들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움을 배풀었다. 그후 8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원 교회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아리우스파와 기꺼이 투쟁하다 103세에 선종하였다
회화에서는 보통 T 형의 십자가와 돼지, 그리고 책으로서 그의 투쟁적 삶과 살아 행동하는 정신을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