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7세부터 마을 서당(書堂)에서 한문공부를 시작했다. 서당이라 하면 훈장, 접장, 생도로 조직된 우리의 옛 사설 민중교육기관이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서당제도는 조선시대에 최고조로 발달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근대식 학교교육이 이루어졌을 때에도 보통교육의 보조기관으로 존재했고, 산간벽지에도 산재해 있었다.
내가 공부한 원당서당은 인근 지역에서 이름이 난 배움터였다. 그 곳으로부터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다. 훈장은 집안 할아버지 김호현(金浩鉉) 씨였다. 본래 서당에서는 학생모집기간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고 수시로 입학이 가능했다. 철저한 개인교육이라 배우는 학생의 능력에 따라 진도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 1장 내외의 내용을 앞질러 가는 일은 없었다.
서당에 처음 입문하여 접한 책은 천자문(千字文)이었다. 나는 머리가 총명하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천자문을 쉽게 끝냈다. 이어서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 오륜(五倫)을 배웠고, 계몽편(啓蒙篇)에서 새로운 지식과 비평정신을 습득했다.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현인(賢人)의 글을 24편으로 집대성한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는 인생의 생활지침을 터득했다. 소학(小學)은 8세 때 배운 책인데, 그 안에서 예의범절을 익혔다. 또 중국 청나라 때 칙령으로 편찬한 10권짜리 중국 역사서인 통감(通鑑)을 공부했다. 이 과정은 보통 3-4년 동안 진행된다.
그 다음 단계에 가면, 사서(四書)를 익힌다. 논어(論語)는 공자의 언행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편찬한 것으로 20편으로 구성되었다. 이 안에는 감명을 주는 명언들이 참 많다. 대학(大學)은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이 고대 대학교육의 이념을 밝힌 것으로 3강령과 8조목을 제시하였다. 중용(中庸)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작품이다. 이 책은 예기(禮記) 가운데 한 편으로 언행심사(言行心思)가 올바른 도리에 맞도록 가르친다. 맹자(孟子)는 맹자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인의(仁義)사상을 담고 있다. 인의사상은 사단론(四端論)을 중심으로 성선설(性善說)에 입각해 도덕정치를 권장하고 있다. 사서를 마치면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즉 삼경(三經)을 배운다. 옛날에는 장수연(長壽煙)이란 담배 봉지를 이용하여 먹을 친 다음 밀(蜜)을 먹여 필갑(筆匣)을 접어 만들고, 그 안에 색지를 넣어 칸칸을 오린 다음, 배운 글을 읽고 한 칸씩 열고 덮으면서 글을 익혔다. 후일에 학생들에게 「한문석의」를 강의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 배운 한문 실력이 기반이 되었다.
서당공부는 아침 9시에 시작되었다. 서당에 도착하면 학생들은 훈장선생님께 큰 절을 하고 순서에 따라 훈장선생님 앞에 앉아서 그 전날 배웠던 글을 암송했다. 그리고 그 날 새로운 글을 배우게 된다. 먼저 선생님이 글을 읽고 해석해 주면 우리는 그 뜻을 헤아려 마음에 새긴다. 우리는 종일 그 내용들을 쓰고 뜻을 파악하면서 반복해서 익혔다. 글쓰기는 선생님이 먼저 써 주신 글을 모방해서 따라 쓰면 나중에 선생님이 그것을 채점해 주셨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도 있었다. 저녁 6시경에는 선생님 앞에서 그 날 배웠던 글들을 암송하고 그 뜻을 해석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만일 암송을 하지 못하면 할 때까지 반복해서 시켰다. 그래도 제대로 암송하지 못한 학동은 무개나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고 돌아가야 했다.
서당생활은 이런 방식으로 거듭되어 갔다. 매주일 글쓰기대회가 있었고, 한시(漢詩)공부가 있었으며, 연중 1-2회 산유회(山遊會)도 가졌다. 산유회는 20여 리 떨어진 임천면(林川面)에 있는 성흥산성(聖興山城)으로 자주 갔다. 이 산성은 백제 도읍지의 관문으로 요새지였다. 백제 말 계백장군이 한때 이곳에 주둔했던 적이 있었다. 이 산에서 선생님은 역사 강의를 하셨다. 그곳 정자(亭子)에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태극기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여주고 일제의 침략사를 강의하실 때는 어린 나의 가슴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다.
학동마다 책을 뗄 때는 이른바 “책시세”(혹은 책거리)라는 것을 했다. 그때는 학부모가 편을 만들어 와서 조촐한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닷새마다 돌아오는 장날이 되면, 그날 오후는 선생님이 의관을 차리고 시장에 가셨다. 그러면 그 시간은 우리들에게 즐거운 해방의 기쁨이 되기도 했다. 그날은 선생님에게도 매우 즐거운 날이었다. 선생님은 장터에서 많은 제자들을 만나 대접을 받기 때문에 늘 취하여 돌아오셨다. 갓개(笠浦) 장터는 금강 연안에 있는 큰 포구다. 수십 척의 고깃배가 들어와 해물이 풍성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집집마다 가마니며 모시 질삼을 내다 팔고 그것으로 생필품을 샀다. 보통 아침 10시부터 시작하여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인산인해를 이룬다.
서당교육은 지금의 교육제도와 차이가 많다. 외우고 쓰고 해석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그 밑바닥에는 실천을 전제로 해야 한다. 성인(聖人)이 되고자 했던 성현들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기에, 그 안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숨 쉬고 있었다. 말이 앞서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했던 공자의 가르침과, 하늘을 우러러 맡겨진 사명을 다하고자 했던 옛 성현들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이 때 교육받은 인(仁)과 예(禮)의 정신은 그 뒤 기독교의 사랑과 온유의 정신과 만남으로써, 나의 가치관과 인생관으로 형성되어 줄곧 나 자신을 반추하며 추스르게 했다.
학생들에게 강의하기 위해 만든 「한문석의」 속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