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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산 김성탁의 슬픈 노래 「아유가」
이원걸(문학박사)
1. 머리말
제산 김성탁은 능숙한 문장과 덕행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조의 총애를 한 몸에 지니고 출세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론이 치열하던 시대에 스승 갈암의 명예 회복을 위해 변론을 하다가 죄를 덮어쓰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의 학문 연원은 퇴계-학봉-경당-갈암으로 이어지는데, 제산은 밀암 이재와 함께 갈암 학통의 한 학파를 형성하여, 그 학문을 구사당 김낙행 묵헌 이만운에게 전했다. 제산은 가학을 통해 학문을 익히고 퇴계학을 이은 갈암의 문하에 출입하여 정통적인 퇴계학을 계승했다.
이러한 제산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저조한 편이다.1) 특히 그가 남긴 시문학에 대한 논의는 아직 답보적이다.2) 제산의 생애 가운데 11년 유배 생활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제산의 내면세계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와 유배 관련 시와 「아유가」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2. 제산의 슬픈 생애
제산齊山 김성탁金聖鐸(1684-1748)은 1684년(숙종 10) 8월 12일에 영양현 청기리에서 부친 태중泰重과 모친 순천김씨順天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3) 제산은 어려서부터 얼굴 모습이 구슬처럼 맑았으며 총명했다. 그는 7세에 처음으로 학문을 접했는데 매우 총명하여 배운 것을 금방 외웠다. 이어 10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청기에서 안동 천전으로 돌아왔다.
천전으로 돌아온 제산은 11세 때에 종숙부從叔父인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에게 학문을 배웠다. 당시 적암은 그의 재주가 비범함을 보고 칭찬하였다. 이후, 제산은 독서에 열중하였는데, 집안 식구들이 그가 있는 곳을 찾아보면 늘 제산은 서루에 단정히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어 제산은 15세 무렵에 호계서원으로 가서 유생들과 과거 공부를 했는데 늘 뛰어난 성적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17세에는 갈암 이현일의 문하에 가서 배움을 청했다. 이때, 갈암은 광양의 유배지에서 석방되어 돌아와 금양에서 후학들을 가르치자 배우러 오는 제자들이 매우 많았다. 갈암은 제산의 학식과 인품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18세 때에는 무안박씨에게 장가를 들었다. 이후 제산은 갈암을 통해 많은 학문을 익혔으며 21세 때에는 스승 갈암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당했다.
제산은 25세에 적암과 함께 『표은집』을 교정하였다. 그리고 28세인 1711년(숙종 37) 2월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제산은 그해 3월에 스승이며 종숙부인 적암의 초상을 당하였다. 이 당시 제산은 하곡 허봉의 「조천록발」을 지었다. 이후 제산은 왕성한 학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제산은 34세 때에 밀암 이재에게 편지를 올려, 『중용』과 『논어』을 읽고 난 이후의 의문점에 대해 질문하고 자신의 의견도 제시하였다. 제산은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밀암에게 편지를 보내 의문점을 묻고 논변도 하였다. 그리고 제산은 38세인 1721년(경종1)에 는 스승 갈암 이현일의 명예 회복을 위한 상소문을 올리려고 시도했지만, 승정원의 저지로 올리지 못했다. 이러한 제산의 노력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제산은 42세 때에 아버지 초상을 당했다. 45세 때에는 어사 노은 박문수가 그를 찾아왔다. 박문수는 평소 제산의 명성을 익히 들었다가 이때 찾아와 영남의 인재에 대해 물었으나 그는 회답하기를 사양하였다. 제산은 그때 벼슬하지 않은 채 지냈지만 그의 명성이 왕에게까지 알려졌다. 이후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제산은 이들을 토벌할 책략을 의논하고 「토역격문討逆檄文」을 지어 여러 고을에 돌렸다. 이어 47세 때에는 스승 밀암의 초상을 당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만사와 「행장」을 지었다. 그해 8월에는 영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이어 48세 때에는 눌은 이광정과 함께 향교에서 강의하였다.
이듬해에 제산은 『지비록』을 편찬하고, 『퇴계선생언행통록』과 『갈암집』을 교정하였다. 9월에 정릉참봉, 50세에는 용양위부사과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사축서별제에 제수되고, 11월 초에 대궐에 나아가 영조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영조가 학문의 요점을 묻자, 제산은 기강과 명분을 세우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변하였다. 12월에 사복시주부직을 받았다.
이어 제산에게 연이은 벼슬이 주어졌다. 52세 1월에 단성현감에 제수되었는데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어 제산은 그해 윤4월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얼마 뒤에 부사직을 거쳐 11월에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이듬해에 다시 정언에 임명되어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54세 때에는 공조좌랑 겸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5월에 옥당에 뽑혀 들어가 홍문관부수찬에 임명되었다가 이내 교리가 되었다.
이 때 제산에 대한 영조의 신임이 날로 깊어가자 시기하는 무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호남의 선비인 이해로와 영남의 선비 신헌 등이 상소를 올려 제산을 무함하고 제산의 스승 갈암까지 모독하였다.4) 두 사람은 제산이 정언으로 있을 때 올린 상소에서 향곡의 선비들의 관습이 바르지 못하다는 등의 어구가 자기들을 가리킨 것이라고 생각하고 원한을 품었다가 이런 무함을 했다. 제산은 자신이 무함 당하는 것은 고사하고 스승을 모독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 없어 상소하여 갈암의 억울함을 변명하였다. 제산의 상소문 중의 “기사사己巳事”는 민비 폐위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상소문이 승정원에 들어가자 승지 유엄이 영조를 자극하여 제산을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제산은 여섯 차례의 국문鞠問을 당했지만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당당하여 거기에 참여했던 자들은 그의 굳센 기개를 보고 감탄하였다. 이때 조현명이 제산을 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제산은 조현명의 변호에 힘입어 극형을 면하고 옥에 갇힌 지 5개월 만에 제주도 정의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당시 제산의 맏아들 구사당 김낙행이 그와 동행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학문을 논하면서 아버지의 괴로움을 달랬다. 이 당시에 제산은 이 글에서 다룰 「아유가我有歌」 라는 시를 지었다. 이어 제산은 55세인 1733년(영조 14) 6월에 전라도 광양현으로 유배지를 옮겼지만 1개월 뒤에 또 다시 유배지를 옮겨야만 했다. 제산은 그해 7월 2일에 그곳을 떠나 그달 말경에 광양의 섬진에 도착했다. 그곳은 우연하게도 스승이었던 갈암의 유배지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어 제산은 57세인 1740년(영조 16)에 늘 염려하였던 어머니의 초상을 당했다. 제산은 옷을 걸어놓고 슬프게 울었다. 그의 아들 제행이 영조에게 글을 올려 제산이 돌아가 어머니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하여 허락을 받았다. 제산은 2월에 집에 도착하여 4월에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다시 유배지로 돌아왔다. 겨울에 용선암에 임시로 머물렀다가 와룡사 북암 등지로 거주를 옮겼다. 이후 제산은 58세에 다시 섬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2세인 1745년(영조 21) 10월에 해남현 신지도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이듬해 광양으로 다시 유배지를 옮겼다.
제산은 이처럼 유배지에서 기구한 생을 보내고 64세인 1747(영조 23)년 4월에 용선암의 작은 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제산은 11년의 유배 생활 속에서도 독서와 저술을 그만 두지 않았다. 제산은 병이 위독해지자 시중드는 어린 아이를 시켜 고서를 외우게 했고, 운명하기 하루 전날에는 「병중술회」 라는 시를 지어 아들 낙행에게 주었다. 이어 제산의 유배 관련 시와 「아유가」를 정리하기로 한다.
3. 제산의 유배길
『제산집』에는 256수의 시가 실려있다. 그의 시 가운데 유배와 연관된 시를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제산의 유배기에 창작된 시를 살펴보는 것이 제산의 고민과 내면세계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제산이 옥에 갇혔을 때의 심정을 표현한 시를 보기로 한다.
갇힌 곳에 밤은 깊어 사경이 되려 하는데
외로운 죄인에게 작은 등불만 짝이 되었네.
베갯머리 지키는 군사는 머리 맞대고 졸고
문밖 순라꾼들의 방울소리가 귓가를 울리네.
아버님 남겨주신 몸을 다쳤으니 슬프기만 하고
어머님 은혜 보답 못했으니 이 한을 어이할꼬?
나라에 보은하고 스승을 높이려던 뜻이
일시에 허사로 돌아가니 피눈물이 앞을 가리네.
圜土沈沈欲四更 孤囚獨伴小燈明
枕邊守卒交頭睡 門外巡鈴括耳鳴
遺體已傷悲莫大 慈恩未答恨難平
從來報國尊師意 一倂歸虛淚血橫5)
깊은 밤 사경이 되었다. 근심이 가득한 시인은 잠을 이룰 수 없다. 등불만 외로운 시인의 짝이 되었고 옥을 지키는 군사들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잠들고 말았다. 순라꾼들의 방울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다. 시인은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도 모진 고문을 받아 상처를 입히고 말았으며 홀로 계신 어머님의 은혜도 갚지 못한 채 갇힌 신세가 되어 슬픔은 깊어간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바치려는 충절도 수포로 돌아가 한 맺힌 눈물만 앞을 가린다고 하였다. 옥에 갇힌 제산의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그려져 있다. 슬프고 외로운 신세 한탄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런 심정은 제산의 아들이 고문당하는 현장을 찾아왔다는 시에서도 표현되어 있다.
임금께서 임하셨지만 근원을 캐내진 못하셨네.
깊은 밤 옥졸들이 죄인들을 점호하네.
네가 온들 애비를 지켜낼 수 있으랴.
서로 만날 수도 없는데 어찌 말 한 마디 해보랴.
帳殿天臨未見原 夜深邏卒曳殘魂
爾從何處來相護 不敢相看詎敢言6)
제산은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국문하는 뜰에 형구가 차려지고 형틀에 몸이 묶인 채 갖은 고초를 당하고 옥에 갇힌 상태이다. 온몸은 상처를 입고 슬픔에 젖어든 상태이다. 상처투성이인 시인은 육신의 고통과 서러움에 견딜 길이 없다.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헤아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옥졸들은 옥에 갇힌 죄수들을 점호하느라 분주하다.
제산은 이런 상태에서 아들이 아비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즈음 제산은 자식과 만날 수 없는 죄인의 몸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서러움에 말려든다. 육신의 상처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바깥에서 울부짖는 아들을 만날 수 없는 고통이다.
이어 감옥을 나서서 귀양길에 오르는 감회를 표현한 시를 보기로 한다. 이후 제산은 여섯 차례의 국문을 당했고 조현명의 변호에 힘입어 극형을 면하고 옥에 갇힌 지 5개월 만에 제주도 정의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유배 길에 오른 제산은 다음처럼 감회를 술회하였다.
목숨 건져 옥문을 나서니 주상의 은총 크셔라.
엄명 받은 귀양길 호서 호남을 지나가네.
공산의 형세는 반룡처럼 웅장하고
전주 고을 여염집은 웅대하게 모여 있네.
노령에 해 기울어 노을 빛 띠고 있고
금성엔 가을이 깊어 바람소리 들려오네.
아득한 탐라는 남해 밖에 있다는데
가다가 강진에 이르니 육로가 다했네.
生出還門聖渥洪 嚴程繞過兩湖中
公山形勢盤龍壯 完府閭閻撲地雄
蘆嶺日斜衝暮色 錦城秋晩聽高風
耽羅遠在南溟外 行到康津陸路窮7)
제산은 감옥에서 목숨을 건져 유배 길을 떠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다. 제산은 임금의 명에 따라 전라도를 지나가면 자연의 경관을 지켜볼 만큼 마음의 안정도 되찾았다. 전라도 여러 고을과 산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고 전주고을의 우람한 집을 바라보면서 유배 길을 가고 있다. 이 시에서 특이한 것은 행로에 따라 지방의 특색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공산→ 전주→ 노령→ 금성→ 강진까지의 여정을 소개하면서 경물과 감회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이어지는 시는 탐라를 향해 가는 뱃길을 따라 느낀 감회를 표현한 작품이다.
외로운 신하 먼 귀양길 따라 탐라를 향하는데
가는 길은 아득하여 바다 한끝에 이르렀네.
감격스럽게 성은으로 목숨을 보전하여
감히 뱃길이 험난하다고 말하면서 망망대해 건너가네.
들녘 정자엔 가을이 다하여 누런 국화가 시들었네.
바다엔 날씨가 차니 흰 기러기 많아라.
북쪽 고향을 바라보니 구름도 아득해라.
어머님 사실 날 많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孤臣遠謫向耽羅 去路悠悠海一涯
祗感聖恩全性命 敢言危楫渡溟波
野亭秋盡黃花老 水國天寒白雁多
北望鄕關雲杳杳 高堂日暮柰愁何8)
바다를 건너면서 느낀 바를 표현한 것이다. 제산은 목숨을 살려 탐라로 유배를 보낸 주상의 은혜에 감격했다. 계절적 배경도 언급하였다. 가을철이 되어 누런 국화가 피었고 바다에는 흰 기러기가 유유히 날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말미에서는 고향을 등지고 먼 섬 지방으로 떠나가는 고독한 유배객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북쪽 하늘 먼 고향 쪽을 바라보니 구름도 아득하고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슬픔이 밀려온다.
제산은 두고 온 어머니의 생애가 넉넉하지 못한 점 때문에 내내 슬펐다. 팔십 노모의 생명은 촛불처럼 가물거리는데 자신은 돌아올 기약 없이 남쪽 섬나라로 자꾸만 멀리 떠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은 편하지 못하다. 시인은 뱃머리에서 가족들과 이별하였다. 이때 아우와 작은 아들이 육지의 끝까지 따라왔다가 돌아가고, 큰 아들인 낙행이 탐라까지 제산을 모시고 가게 된다. 이어 「아유가」 7수를 살펴보기로 한다.
4. 사랑하는 가족이 그립습니다
「아유가」의 1수는 어머니, 2수는 돌아가신 아버지, 3수는 형제, 4수는 부인, 5수는 아들, 6수는 조카, 7수는 주상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신세를 읊은 것이다. 1수의 늙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다.
내게 여든이신 늙은 어머니가
기력이 쇠하신 채 병석에 계신다오.
생각건대 지난날 급히 옥에 갇힐 때
모신 아이 등에 업혀 문에서 작별하실 때
못난 이 아들의 죄가 중한 것 모르시고
우시며 어서 속히 돌아오라며 당부하셨네.
나는 지금 바다 밖의 외로운 죄인의 몸으로
바닷물이 하늘에 닿아 넘을 수가 없는데
그리운 어머니 아침저녁 문에 기대 기다리사
쓸쓸하신 그 백발 찬바람 맞으시리라.
아, 첫째 노래 슬프고도 한이 되어
푸른 하늘 우러러보니 피눈물이 흘러내립니다.
我有老母年八耋 氣息奄奄在牀褥
憶昨蒼黃就獄日 侍兒背負出門訣
不知愚兒罪犯重 涕泣謂我歸來速
我今海外作孤因 海水連天不可越
喪母朝暮倚門宮 鶴髮蕭蕭映寒日
嗚呼一歌兮歌正悲 仰視蒼天淚成血9)
이는 제산이 제주도 정의현에 도착해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으로, 효심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작품이다. 제산은 옥사와 연루되어 체포될 당시의 정경을 회상하였다. 시인은 팔십 세 노모의 건강이 악화되고 기력이 쇠잔했던 점을 회고하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체포되던 날에 손자의 등에 업혀 자식의 죄가 얼마나 큰 지도 모른 채 어서 갔다가 돌아오라고 울면서 하직 인사를 했다. 제산은 그 어머니의 모습을 내내 잊을 수 없었다.
후반부는 개인 심회의 표현이다. 시인은 그리운 어머니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큰 바다가 놓여 있다. 제산은 큰 바다의 물결을 헤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형편이 아니다. 제산은 국법으로 먼 섬나라에 유배된 신분이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 간절할 뿐이다. 제산은 다시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아들을 먼 곳으로 떠나보낸 어머니는 백발의 노인으로 대문에 기대어 서서 아들의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현실 여건 때문에 피눈물이 나온다고 표현했다. 이는 제산에게 있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그만큼 강렬했다는 것을 의미해 준다. 다음 제2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다. 제산은 자식으로 산소를 돌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담았다.
아버님 산소는 영산에 있는데
숲속에 모신 지 십년이 지났다네.
해마다 늦은 봄과 초겨울에
슬픈 맘으로 성묘하며 산소 앞에 잔 올렸다오.
불초 우매하여 선대 유훈을 저버리고
이처럼 밝은 세상에 하늘 끝으로 쫓겨났네.
송추는 멀리 이 천리나 떨어져 있으니
돌아가 절 올리고 싶지만 마음뿐일세.
떠난 이후 이미 상로절기 지났으니
내년 한식 온다 한들 돌아갈 수 있으랴.
아, 둘째 노래 가락 구슬픈데
바람도 날 위해 슬피 울어주네.
我有先墓在映山 封樹由來踰十年
母年暮春與冬初 上墓哀省酹墓前
不肖愚昧墮先訓 明時放逐天一邊
松楸遠隔二千里 欲歸拜掃何由綠
客中已過霜露節 明歲寒食恐未還
嗚呼二歌兮歌轉 飛風爲我嗚楸然10)
제산의 부친은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한 태중泰重(1661-1726)이며 묘소는 영양英陽의 청기靑杞에 있다. 제산은 42세에 부친을 여의고, 그 후 10년이 지난 52세에는 국법을 어겼다는 죄인의 몸으로 제주도에 유배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제산은 이 당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강박감 때문에 그의 내면 심리가 매우 불안했던 것 같다. 1수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유별했다. 그래서 제산은 1수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표현에 이어 2수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당시 제산의 앞길에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향 땅을 다시는 밟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졌다. 제산은 제주도에서 가을을 맞았다. 가을철이 되어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성묘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어버이에게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자식의 슬픔을 시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제산은 후반부의 시에서 부친을 여윈 것과 매년 봄가을로 아버지 무덤을 찾아가 성묘했던 시절을 회고하였다.
이어 제산은 어버이의 가르침을 잊고 죄인이 되어 버린 자신을 탓했다.11) 아버지 무덤이 있는 영양 고을과 모든 행동에 제약받는 자신과의 공간 거리는 너무나 멀다. 그 가운데 제산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만 쌓여간다. 올해 한식은 이미 지나지만 내년이 돌아온다 해도 돌아갈 기약이 전혀 없기에 제산은 슬프기만 하다. 이 시에 제산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유배지에서 겪는 암담한 심정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 어버이에 불효한 자식의 아픔과 불안한 내면 심리가 표현되어 있다. 이어지는 시는 세 아우와 함께 지냈던 우애의 정을 담고 있다.
세 아우 가운데 끝에 둘은 먼저 가고
한 아우만 남아 근심과 기쁨을 함께했지.
황천으로 간 아우들은 어쩔 수 없다지만
살아남은 아우와 먼 이별 하였다네.
날 떠나보내려고 남해에 이른 때에
형은 배에 아우는 땅에서 슬퍼했다네.
아가위 꽃 흩날리는데 바다하늘 아득하고
산에 올라 먼 곳에 귀양 간 형 기다리리라.
한 침상 쓰고 한 이불에 자는 기약도 아득해라.
하물며 오가는 편지도 오랫동안 끊어졌으니
아, 셋째 노래는 다시 쓰라리고
我有三弟二季亡 一弟獨在共憂樂
亡者已矣隔黃泉 存子又何成遠別
昨者送我至南海 船上船邊兩惻惻
棣鄂分飛海天長 陟岡何處望逐客
聯牀共被杳難期 況復音書久斷絶
嗚呼二歌兮歌更苦 斷雁聲裏頭欲雪14)
제산은 세 아우를 두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아우는 정탁正鐸과 명탁命鐸이다. 그리고 남은 아우는 경탁警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우들은 어쩔 수 없지만 경탁은 자신의 어려운 입장을 보고 동행했던 아우였다. 경탁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는 형을 전송하느라고 남해에까지 따라왔다. 제산은 멀리 떠나는 형을 전송하는 아우의 모습을 회고하였다. 형은 배 위에 아우는 육지에서 형제의 이별을 슬퍼하였다. 아가위 꽃은 『시경』에서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고 있다. 아우는 형을 그리워하며 산에 올라가 돌아 올 기약이 없이 떠난 형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이어지는 시에서는 제산이 아우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표현하였다. 먼 유배지에서 제산은 고향으로 돌아가 아우와 함께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한 이불을 덮고 잠자는 희망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시절이 왔으면 하는 희망 사항을 담고 있다. 그리고 아우와 함께 주고받던 편지도 끊어져 더욱 애절한 심정만 증폭되어 버렸다. 이런 제산의 심정은 말미의 짝 잃고 외롭게 날아가는 기러기를 형상한 데서 드러난다. 외로운 기러기는 고독한 제산을 의미하며 고독한 제산은 백발만 늘어간다고 했다. 고독한 신세 가운데 부질없는 세월만 흘러간다는 것이다. 네 번째 이어지는 시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리운 아내 병들어 수척하고 누런 얼굴
내게 시집 온 지 몇 해나 되었는지
내 명색이 대장부라도 생각이 부족하여
손님접대 조상제사 세금까지 모두 맡겨
가난한 살림에 나물죽도 배불리 못 먹고
부엌과 베틀에서 그 고생이 오죽했으랴.
당시에는 잘 살아보자 말했지만
이제 이처럼 헤어져 살줄이야.
겨울옷 장만해 먼 바다 건너 보내온 날
밤새워 바느질했을 당신이 그립습니다.
아, 넷째 노래 노래조차 구슬프니
북쪽 고향 바라보니 그리움은 끝이 없다네.
我有病妻瘦且黃 結髮入門今幾年
身爲丈夫計迀拙 賓察租賦任獨專
家貧菜糲喫不飽 入廚上機勤苦偏
當年成設共契闊 豈知今者爲失弦
寒衣遠奇渡海日 想得裁縫未應眠
嗚呼二歌兮歌不平 家出北望思綿綿15)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 아내는 병들어 야윈 얼굴을 한 채 고생에 찌들었다고 했다. 제산은 가장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아내에게 손님 접대, 조상 제사, 세금 납부 등 집안 자질구레한 일을 전담시켰던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래서 아내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꾸려 나가느라 고생이 매우 심했을 것이라고 했다. 제산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내의 손을 잡아 주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그러나 이것도 일시적인 환상일 뿐 현실 여건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때로 제산은 아내에게 조금만 참으면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고 격려도 했었다. 그러나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듯이 이처럼 이별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고 했다. 아내의 사랑은 말미에 이르러 극대화되고 있다. 아내는 먼 섬나라로 유배를 떠난 남편의 겨울 솜옷을 정성껏 마련하여 보내온 것이다. 제산은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옷을 지은 아내의 따뜻한 마음과 체온을 느꼈다. 아내의 사랑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말았다.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니 너무 슬퍼진다. 아내가 있는 북쪽 고향을 바라본다. 먼 하늘 끝에 아련한 그리움만 피어난다. 아내에게 못 다한 사랑의 아픔만 남는다. 다음 시는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담긴 것이다.
두 아이 맑고도 여윈 모습
출옥할 때 부축해 귀양길 따라 걸어
큰아이는 나를 따라 바다 건너 남행하고
작은 아이는 나를 떠나 집으로 북행할 때
닻줄 풀어 배 뜨는데 작은 아이 돌아보니
두 줄기의 눈물 삼키는 흐느낌
그때에 귀양으로 쫓겨나는 마음 슬펐네.
그걸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픈 생각 엉켰네.
날은 춥고 길은 먼데 네 탈 말은 병들었지.
며칠 후나 고향 가서 사립문에 들어서리.
아, 다섯째 노래에 생각 깊어
밤비 창에 드니 유배객이 놀라네.
我有二兒淸而癯 扶我出獄追嚴程
大兒隨我南渡海 小兒別我向北行
臨當解纜顧小兒 雙淚落水久呑聲
當時我有竄逐意 見此不覺愁思縈
天寒路遠嬴馬病 幾日間關到柴剕
嗚呼二歌兮歌有思 夜雨入牕離魂驚16)
제산은 효자였으며 아들 역시 아버지에 대해 효성이 지극했다. 제산은 출옥할 당시의 정황을 회상하였다. 큰아들은 자신을 따라 제주도까지 따라왔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유배지로 떠나보내고 고향으로 향했다. 제산은 닻줄을 풀면서 둘째 아들의 두 줄기에 쉼 없이 쏟아지는 눈물과 울음을 삼키며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제산은 막내아들의 슬픔을 읽어낸 것이다. 아들은 먼 섬나라로 아버지와 형을 떠나보내며 슬퍼하였다.
제산은 아들의 눈물을 보고 자신도 매우 슬퍼하였다. 혈육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을 담아내었다. 제산은 자신의 앞길에 어려움이 닥쳐올 것을 염려할 겨를이 없었다. 도리어 막내아들이 돌아갈 길을 염려하였다. 날씨는 춥고 아들이 타고 가야 할 말은 병이 들었다고 했다. 제산은 제주도를 향해 올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시에 담아내었다. 말미에는 시인의 개인적인 서정이 묘사되고 있다. 밤비가 내리고 있다. 밤비가 내리자 유배객은 다시 수심에 젖는다. 다음 6수는 고아로 외롭게 지내는 조카를 돌보아 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것이다.
불쌍한 조카들 일찍이 아비 잃고
모자끼리 의지하니 외롭고 외로워라.
한 아이는 이갈 나이의 어린애고
한 아이인 성장해 배필을 맞이했네.
길러내어 성취할 일 나의 책임인데
배울 시기 놓쳐 아둔해질까 두려워라.
나는 이제 남녘바다 한 끝에 귀양 온 몸
가련한 두 아이를 돌봐 줄 수 없다네.
주리고 추운 생활에 뜻을 잃지나 아니할까
이리저리 노니느라 허송 세월은 아니할까.
아, 여섯째 노래는 더욱 슬퍼지니
두 아우 혼백이 있다면 슬피 울리라.
我有猶子早失怙 各伏母子孤且孑
一子毁齔未成童 一子勝冠初有室
撫養成就是我責 常恐失學終迷劣
我今流落海南涯 可憐二子不得挈
得無飢寒損志業 得無遊嬉銷日月
嗚呼二歌兮歌益哀 二弟有魂應悲咽17)
전반부에서는 아버지를 여의고 외롭게 살아가는 조카의 신세를 읊었다. 어린 조카는 제산의 아우 정탁正鐸의 아들 도행道行이며 이보다 나이가 어린 조카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제산은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외롭게 살아가는 두 조카가 가정을 이루고 완전한 독립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제산의 가족애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제산의 극진한 가족 사랑의 마음이 조카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제산은 아버지를 여윈 조카의 장래를 돌봐주지 못한 채 죄인의 몸으로 먼 섬나라로 유배 온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기만 했다.
후반부에서는 조카들을 돌보지 못하는 제산의 슬픔이 담겨 있다. 제산은 제수씨와 조카들이 생활고를 겪으며 어렵게 지낼 것을 생각하며 슬픔에 젖었다. 이와 함께 제산은 조카들이 학문할 방향을 잃고 어려움에 처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였다. 제산은 일찍 죽은 두 아우를 그리워하며 애통해하였다. 제산은 두 아우의 혼백이 있다면 매우 슬퍼했을 것이라고 했다. 제산의 가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아우들의 남은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였다. 이제 마지막 7수를 보기로 한다. 7수에서는 암담한 현실에 처한 개인의 심회를 표현하고 있다.
대장부로 태어나 품은 뜻 웅대하여
어렸을 때 성현을 따르자고 다짐했었지.
애당초 공부하여 벼슬 누리려 하지 않았는데
늙어서 급제하니 진실로 우연한 일일세.
재주 없는 몸이 지나친 임금의 총애 입어
옥당과18) 금마에 영화도 극진했었지.
마음속에 불빛 같이 맺힌 일19) 을 풀고 싶어
짧은 상소에20) 큰 꾸지람 올 줄 어찌 알았으리.
지난 시절 포부와 지난 일을 생각한들 무엇하랴.
백발의 궁한 인생 만사가 어긋났네.
아, 일곱째 노래로 노래는 끝이 나고
막대 짚고 머리 긁으니 바다 하늘은 검기만 하네.
丈夫生世抱負大 我昔有志追往哲
讀書初不爲于祿 暮年科笫誠偶得
不才過蒙明主渥 玉堂金馬榮何極
寸心耿耿思隕結 尺疏那知嬰大僇
向來志業竟何有 白首途窮萬事裂
嗚呼二歌兮歌欲竟 倚杖搔頭海天黑21)
이 시의 전반부에서는 제산이 어려서부터 벼슬길에 올라 영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회고하였다. 제산은 어려서부터 가학을 통해 터득한 유교적 유풍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실천하겠다고 다짐까지 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늘그막에 벼슬길에 나섰던 것을 후회하였다. 제산은 자신이 본래 추구하던 목적과 어긋나게 벼슬길에서 주상의 은총을 듬뿍 받았지만 시기하는 무리의 참소를 받아 유배를 떠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술회했다.
제산은 이어지는 후반부의 시에서 당시까지 스승 밀암이 죄인으로 취급되고 있는 점을 슬퍼하며 스승의 신원을 위해 상소문을 올렸다가 큰 어려움을 당했던 점을 회고하였다. 이로써 그의 포부와 희망이 무산되고 말았다며 낙담하였다. 이제 제산은 백발의 노인으로 모든 희망과 포부를 접어둔 채 죄인의 몸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마지막 일곱째의 노래가 끝나면서 외로운 늙은이 제산의 고독한 심상이 드러난다. 검푸른 바다하늘은 검게만 보인다고 하였다. 검은 바다와 하늘은 암울한 제산의 심경을 상징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5. 마무리
제산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집안 어른들을 통해 학문을 익힌 뒤 갈암을 통해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웠다. 이후 제산은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밀암에게 편지를 보내 의문점을 묻고 논변하였다. 제산은 스승 갈암의 명예 회복을 위한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렸다.
제산은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연이은 벼슬을 제수받았다. 이후 제산에 대한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지고 이를 시기하는 무리에 의해 모함을 받아 국문에 처해지는 어려움을 당했다. 제산은 조현명의 변호에 힘입어 극형을 면하고 제주도 정의현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이후 제산은 유배지를 전라도 광양, 섬진, 신지도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64세의 일기로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산의 학문은 퇴계-학봉-경당-갈암으로 이어진다. 제산은 밀암 이재와 함께 갈암 학통의 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제산은 가학을 통해 학문을 익히고 퇴계학을 이은 갈암의 문하에 출입하여 정통적인 퇴계학을 계승하였다.
제산의 유배기 가운데 제주도에서 지은 「아유가」를 중심으로 간략히 검토한 결과 제산은 어버이와 자식, 아내에 대한 애정이 깊은 분이었다. 만년에 유배 생활을 통해 겪은 쓰라린 심정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의 정을 시로 표현하였다. 제산의 유배시는 한국 유배문학사의 여타 작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 제산의 인간미와 가족애가 절실하게 담겨 있다.
[안동문화](30집), 안동문화원, 2022.
1) 『동방한문학』 제12집, 동방한문학회, 1996에서 「제산 김성탁의 생애」(이정섭), 「제산 김성탁의 학문관과 영남유림에서의 역할」(허권수), 「제산 시의 일면」(김주한), 「제산 김성탁의 상소문에 대하여」(김시황), 「제산의 언문 간찰」(김윤규)이 다루어졌다.
2) 김주한의 「제산 김성탁 시의 일면」, 『동방한문학』 제12집, 1996에서는 제산의 시를 특정 주제나 특징별로 정리하지 않고 제산의 유가적 측면을 강조한 시를 몇 수 소개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我有歌」 7수 가운데 일곱째 시만 소개했다.
3) 제산의 5代祖는 克 一(密陽 郡守역임. 內資寺正), 4代祖는 澈(進士), 曾祖는 是榲(進士, 號는 瓢隱), 祖父는 邦烈(進士)이다. 어머니 순천김씨의 祖父는 允安(號 東籬)이며, 父親은 如萬(秋潭)이다.
4) 갈암 이현일 : 본관 재령(載寧). 자 익승(翼升). 호 갈암(葛庵). 참봉 시명(時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영 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李滉)의 학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꼽힌다. 저서로는 시문집 《갈암집(葛庵集)》과 중형 휘일(徽逸)과 함께 편찬한 《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5) 「獄中夜吟」.
6) 「自鞫庭下獄聞兒子隨號至門外」.
7) 「謫路紀行二首」(一).
8) 「謫路紀行二首」(二).
9) 「我有歌」(一).
10) 「我有歌」(二).
11) 여기서 제산의 탄식은 자신의 신념대로 올린 스승 갈암 신원을 위한 상소 사건 자체를 후회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제산은 그것으로 인해 유배객이 되어 어버이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뿐이다.
12) 형제의 도타운 우애를 뜻함.
13) 백발이 되어 감.
14) 「我有歌」(三).
15) 「我有歌」(四).
16) 「我有歌」(五).
17) 「我有歌」(六).
18) 제산이 弘文館 副修撰과 校理를 역임했던 사실을 말한다.
19) 당시, 제산의 스승 葛庵이 여전히 罪籍에 있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20) 제산은 「辭司諫院正言疏」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였다.
21) 「我有歌」(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