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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뢰 이야순의 「도산구곡」 창작 배경
이원걸(문학 박사)
1. 머리말
한국의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수많은 구곡시가 창작되었다. 특히, 도산 지역은 이러한 구곡 문화의 발흥지로서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 낙동강이 도산 경내로 흘러 들어와 강을 이루어 도산은 강과 산이 조화된 구곡원림 형성의 최적 조건을 갖추었다.
퇴계 후학들은 퇴계가 강학 활동을 전개하던 도산을 중심으로 하여 구곡을 설정하고, 구곡시 창작 활동을 통해 선조 퇴계의 학문 전통을 이어가며 영남 학맥을 공고히 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퇴계가의 후계 이이순, 광뢰 이야순,1) 하계 이가순의 역할이 매우 주목된다.
이 글에서는 퇴계 가학의 충실한 계승자 후계의 전기적 검토와 사상적 측면을 정리하여 퇴계가 도산구곡 창작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2. 생애
진성 이씨의 선대는 고려조에 縣吏로 발신해 생원시에 합격한 뒤, 밀직사로 추증된 李碩이 시조이다.2) 아들 李子脩는 과거에 급제하고 판전의시사를 역임하고 홍건적을 토벌하였는데 이 공으로 송안군에 봉해졌다. 이로부터 두 대를 지나, 예안 고을 온혜에 터를 잡은 분이 바로 李繼陽이다. 이 분이 예안 고을 입향자로, 아들은 埴이다. 埴은 성균진사를 지내고 左贊成에 증직되었다. 그의 아들이 退溪이다.
퇴계의 아들 寯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막내가 東巖 李詠道이다. 이 분이 곧 광뢰의 7대조로, 원주목사를 거쳐 임란 때 세운 공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증조부는 李守約인데, 정릉참봉을 역임했으며, 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조부는 李世觀으로, 吏曹參議로 증직되었으며 호는 牧牛堂이다. 부친은 李龜恷로, 通德郞을 지냈다. 모친은 全州李氏로, 甁窩 李衡祥의 증손인 李若松의 따님이다.
李野淳(1755-1831)의 본관은 진성, 자는 健之, 호는 廣瀨이다.3) 그는 영조 을해년(1755)에 溪上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으며 단정하고 빼어났다. 어렸을 때, 조부에게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집안의 명성을 떨칠 것이다!”라는 칭찬을 받았으며,4) 族父 緱隱 李龜敬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그는 이구경을 통해 엄격한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뛰어난 암기력을 발휘하였지만 글의 뜻을 깊이 있게 탐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광뢰는 13-14세 무렵부터 암기 위주의 학습 방법에서 벗어나 깊은 사색을 통해 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터득하기 시작했다.
경인년(1770)에 조부상을 당했는데 당시 부친은 숙환을 앓고 있었다. 부친은 執喪하면서 애도하느라 지병이 더욱 중해졌다. 이에 광뢰는 부친을 위해 손수 미음을 끓이고 약을 달이는 정성을 쏟는 한편 잠시라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당시 병고에 시달리던 부친은 광뢰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병이 곧 나을 것 같다고 하며 위안을 삼았다. 이와 함께 부친은 재주가 특출한 광뢰에게 학문 과정상 소홀히 하기 쉬운 부분을 지적해 주며, 신중히 생각하고 부지런히 공부해 주길 당부했다. 이에 힘입은 광뢰는 더욱 분발하여 침착하게 학문에 정진하였다.
당시 광뢰는 몇 년 동안 문장 공부에 치중하였다. 당송팔대가 문장을 비롯하여 명대 전후칠자의 명문장을 두루 섭렵하여 큰 진전을 보였다. 문장 구상력이 크게 향상되어 글의 기상과 품격이 매우 돋보이자, 주위 사람들은 그가 과거 시험에 무난히 합격하리라고 기대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과거 시험을 중히 여기지 않고 도리어 ‘위기지학’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그는 “지난 날 읽은 것은 모두 잡서요 추구한 사업은 모두 外事에 불과하다.”고 단언하였다.5) 그는 자신의 수양 공부에 도움이 되는 공부야 말로 진정한 선비로서 추구해야 할 공부임을 자각하여 “우리 조상께서 남긴 문집이 바로 나의 門路이다”라고 천명하였다.6) 그는 선조 퇴계가 남긴 문집에서 참다운 독서와 학문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그는 선조 퇴계가 남긴 문집을 읽는 재미에 빠져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그는 퇴계의 문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탐독하면서 그 가운데 요긴한 대목을 두 권으로 발췌하여 책상 위에 두고 늘 읽는 자료로 삼았다. 이로써 광뢰는 가학을 천명하겠다는 각오를 하고7) , 도학의 본령을 터득하기 위해 대산 이상정(1710-1781)을 찾아갔다.
그는 퇴계가 손수 그린 「敬齋箴」과 「白鹿洞規」 두 그림을 받들고 가서 인사를 올리고 한 말씀 남겨주길 청하자, 이상정은 작은 발문을 지어주었는데 그 의미가 깊고도 중한 것이었다.8) 이렇게 그는 이상정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2년 뒤에 이상정은 세상을 떠나 그와 깊은 사제 교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위기지학에 전념하기로 작정했던 광뢰였지만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계묘년(1783)에 龍宮의 鄕試에 나아갔다. 그 때 과장에서 서로 빨리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에 의해 짓밟혀 죽는 이가 많았다. 광뢰는 그와 같은 참상을 목도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친에게 “과거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비록 어버이를 드러내는 한 가지 일입니다만 차마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을 가지고 사지를 밟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과장을 사절하고 오로지 도학 공부에 힘쓰는 것이 저의 뜻입니다”라고 하자, 부친은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며 더 이상 과거 응시를 강요하지 않았다.9) 이로써 위기지학에 전념하며 퇴계학 연구에 치중할 수 있었다.
이후 광뢰는 도학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마음을 굳히고 엄정한 독서 과정을 정하고 일상의 언행을 법도에 벗어나지 않게 하였다. 이 당시 이상정 사후 영남의 도학을 주도하고 있던 이상정의 문인 川沙 金宗德(1724-1797)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광뢰는 무신년(1788)에 서찰을 통해 집지하는 예를 올렸다.10) 이로써 광뢰는 퇴계의 학맥을 전승한 이상정과 이상정의 문도 김종덕을 통해 퇴계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기유년(1789)에 부친상을 당해 예제에 맞게 집상을 했다. 당시 김종덕은 편지를 보내어 ‘상중이라고 해서 공부를 그만 두어서는 안 된다’라는 충고를 할 만큼 제자를 극진히 아끼며 지도했다. 이로 인해 광뢰는 더욱 힘을 얻어 거상 중이지만 ‘가훈’과 ‘예설’을 뽑되, 고금의 ‘喪變’을 참작하여 한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퇴계집을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면서 자구가 누락된 부분이나 잘못된 곳이 있으면 표시를 해두었다. 학문을 연찬해 가는 중 중요한 대목에 대한 의혹이 발생하면, 김종덕에게 서찰을 보내 문답하면서 의혹을 풀어나갔다.
신해년(1791년)에 부친상을 마쳤다. 그 이듬해에 막내 아우 李巖淳과 함께 김종덕의 강학소인 儒子亭을 찾아가 『心經』을 배웠다. 이 당시 그는 魯庵 鄭必奎(1760-1831)․俛窩 李秉運(1766-1841) 형제들과 함께 조석으로 강마하며 동문수학하였다. 광뢰에게 『심경』은 선조 퇴계가 매우 尊信했던 책이었다. 이상정에 이어 김종덕을 통해 이 책을 심도 있게 공부하였다.
갑인년(1794)에 조모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면서, 『喪儀』와 『心經講錄』에서 여러 조목을 뽑아내어 김종덕에게 질정을 청하였다. 당시 김종덕은 『心經講錄』을 교정하던 중이었는데,11) 광뢰가 보낸 자료를 보고 교정 작업에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한번은 김종덕이 광뢰의 서찰을 받고 큰 소리로 한두 차례 낭독을 한 뒤에, 그 자리에 있던 子姪과 門生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은 건지 이야순의 서찰이다. 문장 필치가 우리들이 접하기 드물 뿐 아니라, 이런 집안에서 이런 사람을 얻었으니, 크게 기뻐하고 크게 기특하게 여길 일이 아니가?”라고 하였다.12) 이처럼 광뢰는 김종덕과 여러 차례 서찰 내왕을 하면서 학문적 사우 관계를 지속했다. 정사년(1797)에 김종덕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삼년상을 마치기까지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추모의 정을 극진히 하였다.
무오년(1798)에 일월산 아래 거주하는 晩谷 趙述道(1729-1803)를 찾아뵙고 돌아 온 이후, 예의의 變節과 학문의 節度 등에 대해 서찰 내왕을 하면서 의견을 교환하였다.13) 이로써 이들은 망년지교를 맺으며 학문적인 우의를 다졌다.
병자년(1816)에 조정에서 이상정에게 증직이 내려오자, 그는 고산서원의 원장으로서 焚黃하는 예식을 주관하였다. 무인년(1818) 봄에 여강서원의 원장인 葛川 金熙周(1760-1830)가 광뢰를 龜溪書院에 초대하여 향음주례를 행하였다. 이어 유생들이 여강서원에서 강학의 자리를 마련하자, 광뢰는 『大學』을 강론하고, 정해년(1827) 7월에는 孤山講堂 낙성식에 참여하는 등 분주하게 활동하였다.
경신년(1800)에 정조가 승하하자, 절구 30수를 지어 추모의 정을 표했으며, 이어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聖學十圖」와 「箚子」를 만들어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라는 뜻을 진술하여 올리려고 했었다. 무진년(1808)에 경상좌도 암행어사 李愚在가 광뢰가 “성리학에 잠심하여 평생 동안 주자서를 준칙으로 삼았으며, 더욱이 퇴계의 문집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行誼가 순수하고 도타웠고 지식이 해박하였습니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자신의 분수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지 한 고을의 선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라며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듬해 기사년(1809)에 慶基殿 參奉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신사년(1821)에 국상이 나서 國葬 監調官으로 차출되자, 의리상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조령을 넘어 충청도 淸安縣에 이르러 병을 핑계로 삼아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침 그 고을 원으로 재직하던 李秉運을 만나 며칠간 토론을 한 뒤 돌아왔다. 임오년(1822)에 掌樂院 主簿로 부름을 받았지만 사직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광뢰가 초야의 선비로 남아 있기를 고집한 이유는 선조 퇴계의 학문에 전심하고자 하는 책임 의식 때문이었다.
한편 광뢰는 사양하고 받는데 엄격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 물건을 주면, 과일과 포, 삼베, 버선 같은 작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그것이 옳고 그른지를 살펴보고 수용 여부를 결정하였다. 한번은 김희주가 永興 고을 원으로 있을 때, 북쪽에서 생산되는 가는 베로 심의 한 벌을 지어서 수의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 때 광뢰는 곱고 가는 물건은 산야에 있는 자신에게는 마땅하지 않다는 서찰을 보내 사양하고 그것을 돌려보냈다.14) 이 역시 사수 관계에 분명했던 선조 퇴계의 행적을 준행한 사례이다.
병진년(1796)에 紫霞峯 아래 廣瀨 가에 3년 동안 경영하여 漱石亭을 완공했다. 이곳은 퇴계가 일찍이 그 강산의 빼어난 절경을 사랑하여 “자하봉의 승경은 하늘이 열어준 것, 수석정의 터 잡은 지 오래 되었네[紫峯形勝得天開, 漱石亭基已卜來]”라는 시를 지어 정자 터를 잡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시는 이루어졌지만 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詩成屋未就]”라고 한 주자의 시구처럼 실제로 정자는 완공되지 못했었다.
이에 광뢰는 그 곁으로 집을 옮겨 독서하며 노년을 마치고자 계획했다. “천고토록 내려온 가업의 유서를 이지러지게 할까 두려워, 평생토록 산림에서 살기를 맹서하노라[家業懼虧千古緖, 林居誓結一生緣]”라고 표현한 시구가 당시의 심정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퇴계가 자하봉을 두고 지은 작품을 모아 『紫霞帖』이라 이름을 짓고,15) 퇴계의 시어에서 가져 와 자신의 서재를 ‘得天齋’라고 하였다. 그의 호를 ‘廣瀨’․‘霞翁’이라고 칭하게 된 것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평소 광뢰와 친분이 두터웠던 壽靜齋 柳鼎文(1782-1839)의 언급에 의하면, 광뢰는 溪上에서 지낼 때 낡은 의관을 하고 지내면서 유유자적하고 곡한 품위를 잃지 않은 선비였다고 한다.16)
무자년(1828)에 필마로 영동의 쌍계를 유람하고 강릉의 경포대에 이르러, 바다와 산의 승경을 둘러보았다. 손수 퇴계가 지은 「題金伯榮鏡浦圖」17) 두 편의 시를 써서 삼척부사 李廣度로 하여금 판각하여 걸도록 하였다.18) 기축년(1829)에 梅浦 琴汝稷을 데리고 白雲洞에 가서 성현의 유상을 찾아뵙고, 소백산에 들어가 죽계구곡에 있는 石刻이 퇴계가 쓴 글씨가 아님을 확인하고 글을 지어 후인들의 와전을 분변하여 바로 잡았다. 특히, 飛流巖은 퇴계의 발자취가 미쳤던 곳이지만 숨겨져 전하지 않았는데, 광뢰는 당시의 『遊錄』을 참조하여 그 자리를 정확히 고증해 내었다.19) 아울러 감흥을 시로 표현하였으며 퇴계가 한 것처럼 스스로 『遊錄』을 남기려고 하였다.
경인년(1830) 겨울에 溪巖 金坽(1577-1641)의 緬禮에 참석했다가 감기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1년 동안 痞漲을 앓았다. 집 식구들도 당시 광뢰가 이러한 병을 오래 앓고 있던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듬해 신묘년(1831) 8월 6일에 득천재에서 별세했는데 향년 77세였다. 운명하기 전날 밤에 시를 지어 ‘정신이 천천히 사라져도 마음을 놓지는 말아야 한다[情神歸宿遲, 猶勿放心過]’라는 말을 남겼다. 그 해 10월에 霞山 坤方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수석정 근처이다.
그의 첫 부인은 풍산류씨 柳觀春의 따님으로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요절하였다. 이어 맞은 부인은 전주류씨 柳虎文의 따님으로, 두 딸만 남기고 그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다. 두 따님은 柳致潤, 李澂에게 시집을 갔다. 이에 막내 동생 李巖淳의 둘째 아들 李彙政을 후사로 삼았다. 李彙政은 參奉을 지냈고 2남 2녀를 낳았다. 두 아들은 晩馹, 晩驥이며, 두 딸은 柳弘鎭, 權喆淵에게 시집을 갔다.
3. 퇴계 계술 사업
1) 가학 계승의 자임과 실천
그는 평소 과거 공부에 몰두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유학의 본령인 심성 수양과 도학 실천에 무게를 더 두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과거 시험에 응거하여 입신양명하는 것보다는 위기지학을 실천하는 것이 참으로 소중한 길임을 자각했다. 이에 그는 “지난 날 읽은 것은 모두 잡서요 추구한 사업은 모두 外事에 불과하다.”고 분명하게 말했다.20) 하지만 그는 과거를 통해 가문을 일으키길 바라는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계묘년(1783)에 龍宮의 鄕試에 나아갔다. 그 때 과장에서 서로 빨리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에 의해 짓밟혀 죽는 이가 많았다. 광뢰는 그와 같은 참상을 목도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친에게 “과거로 몸을 일으키는 것은 비록 어버이를 드러내는 한 가지 일입니다. 그러나 차마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을 가지고 사지를 밟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과장을 사절하고 오로지 도학 공부에 힘쓰는 것이 저의 뜻입니다”라고 하자, 부친은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며 더 이상 과거 응시를 강요하지 않았다.21) 이로써 위기지학에 전념하며 퇴계학 연구에 치중할 수 있었다.
광뢰는 도학 공부에 전념하기로 작정을 하고 엄정하게 독서 과정을 수립하고 근신하며 자중하였다. 자신의 수양 공부에 도움이 되는 공부야 말로 진정한 선비로서 추구해야 할 공부임을 자각하여 “우리 조상께서 남긴 문집이 바로 나의 門路이다”라고 천명하였다.22) 그는 선조 퇴계가 남긴 문집에서 참다운 독서와 학문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그는 선조 퇴계가 남긴 문집을 읽는 재미에 빠져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그는 퇴계의 문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탐독하면서 그 가운데 요긴한 대목을 두 권으로 발췌하여 책상 위에 두고 늘 읽는 자료로 삼았다. 이로써 광뢰의 가학 계승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23) 이에 그는 도학의 본령을 터득하기 위해 대산 이상정(1710-1781)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퇴계가 손수 그린 「敬齋箴」과 「白鹿洞規」 두 그림을 받들고 가서 인사를 올리고 한 말씀 남겨주길 청하자, 이상정은 작은 발문을 지어주었는데 그 의미가 깊고도 중한 것이었다.24) 이렇게 그는 이상정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2년 뒤에 이상정은 세상을 떠나 그와 깊은 사제 교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광뢰는 도학 공부에 더욱 매진하고자 심지를 견고히 하고 성리학자로서 수양과 학문 연찬의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당시 이상정 사후 영남의 도학을 주도하고 있던 이상정의 문인 川沙 金宗德(1724-1797)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광뢰는 무신년(1788)에 서찰을 통해 집지하는 예를 올렸다.25) 이로써 광뢰는 퇴계의 학맥을 전승한 이상정과 이상정의 문도 김종덕을 통해 퇴계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러한 광뢰의 근실한 최계 가학 계승 실천 노력은 주상에게 성리 학문을 권면하며 올린 글이나 암행어사의 추천을 받은 것에서 확인된다.
경신년(1800)에 정조가 승하하자, 절구 30수를 지어 추모의 정을 표했으며, 이어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聖學十圖」와 「箚子」를 만들어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라는 뜻을 진술하여 올리려고 했었다. 무진년(1808)에 경상좌도 암행어사 李愚在가 광뢰가 “성리학에 잠심하여 평생 동안 주자서를 준칙으로 삼았으며, 더욱이 퇴계의 문집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行誼가 순수하고 도타웠고 지식이 해박하였습니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자신의 분수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지 한 고을의 선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라며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듬해 기사년(1809)에 慶基殿 參奉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신사년(1821)에 국상이 나서 國葬 監調官으로 차출되자, 의리상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조령을 넘어 충청도 淸安縣에 이르러 병을 핑계로 삼아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침 그 고을 원으로 재직하던 李秉運을 만나 며칠간 토론을 한 뒤 돌아왔다. 임오년(1822)에 掌樂院 主簿로 부름을 받았지만 사직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광뢰가 초야의 선비로 남아 있기를 고집한 이유는 선조 퇴계의 학문에 전심하고자 하는 책임 의식 때문이었다. 광뢰가 수석정을 수축하고 만년에 그 곁으로 집을 옮겨 독서하며 노년을 마치고자 계획하면서 남긴 시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천고의 가업 유서를 이지럽힐까 두려워 家業懼虧千古緖
평생 산림에서 살기를 맹서하노라 林居誓結一生緣26)
이처럼 그는 천고에 이어온 선조 퇴계의 가학 연원 전통을 이지러지게 할까 두려워 평생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그 유업을 이어나가길 소망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하계 이이순과 함께 퇴계 가학 계승 및 실천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2) 수석정 중건과 『자하첩』 완성
수석정은 퇴계가 일찍이 그 강산의 빼어난 절경을 사랑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자하봉의 승경은 하늘이 열어준 것 紫峯形勝得天開
수석정의 터 잡은 지 오래 되었네 漱石亭基已卜來
수석정의 위치는 霞山의 아래에 있으며 廣瀨가에 있다. 퇴계가 시로 찬미한 바 있으며, 맑고도 넓어 당시에 그곳을 얻어 매우 기뻐했지만 이루지는 못했다. 이와 함께 퇴께는 정자 터를 잡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시는 이루어졌지만 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詩成屋未就]”라고 한 주자의 시구처럼 실제로 정자는 완공되지 못했었다.27)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광뢰는 선조의 유업을 이어가고자 병진년에 수석정을 중건하였다.28) 이러한 정신 근저에는 선조 퇴계의 학문과 정신을 오롯이 이어가고자 하는 내면 심리가 깊이 작용한 탓이다.
수석정을 애호했던 광뢰는 사후에도 그 옆에 묻혔다.29) 이와 같이 광뢰는 선조 퇴계의 유업을 이어가고자 노력했으며, 평생 이를 실천하고자 다짐했다. 그리고 그는 수석정을 중건하 뒤에, 퇴계가 자하봉을 두고 지은 작품을 모아 『紫霞帖』이라 이름을 짓고,30) 퇴계의 시어에서 가져 와 자신의 서재를 ‘得天齋’라고 하였다. 그의 호를 ‘廣瀨’․‘霞翁’이라고 칭하게 된 것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처럼 선조 퇴계의 자하봉 관련 시를 모아 시첩으로 완성한 배경 역시 선조를 추존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3) 선촉 유람과 추존 활동
광뢰가 남긴 문집에는 선조 퇴계의 시에 화운하거나 집구한 시들이 매우 많다. 이러한 정신 바탕에는 선조 추존 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특히, 선조의 유촉지를 방문하면서 감회를 시로 표현하거나 비교, 분석하여 오류를 바로 잡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에 오류를 바로 잡지 못하면 후대로 갈수록 그러한 오류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기 때문이다.
무자년(1828)에 필마로 영동의 쌍계를 유람하고 강릉의 경포대에 이르러, 바다와 산의 승경을 둘러보았다. 손수 퇴계가 지은 「題金伯榮鏡浦圖」31) 두 편의 시를 써서 삼척부사 李廣度로 하여금 판각하여 걸도록 하였다.32) 선조의 지은 시를 경포대에 게판하도록 하여 선조의 명성이 후대에까지 지속적으로 전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죽계구곡에 새겨진 글씨가 선조의 필적이 아님을 분변하여 시정토록 조치했다. 기축년(1829)에 梅浦 琴汝稷을 데리고 白雲洞에 가서 성현의 유상을 찾아뵙고, 소백산에 들어가 죽계구곡에 있는 石刻이 퇴계가 쓴 글씨가 아님을 확인하고 글을 지어 후인들의 와전을 분변하여 바로 잡았다.33) 특히, 飛類巖은 퇴계의 발자취가 미쳤던 곳이지만 숨겨져 전하지 않았는데, 광뢰는 당시의 『遊錄』을 참조하여 그 자리를 정확히 고증해 내었다. 선조 퇴계의 『遊小白山錄』에 근거하여 선조의 유촉지를 남긴 없이 탐색해 내었다.34) 아울러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감흥을 시로 표현하였으며 퇴계가 한 것처럼 스스로 『遊錄』을 남겼다.35) 선조 퇴계 추존 의식이 선조가 행했던 바와 같이, 기행문 기술로 이어진 것이다.
정리하면, 광뢰는 선조 유촉지를 闡發하기 위해 경포대에 선조의 시를 게판하도록 강릉 선비들과 고을 원의 협조를 얻어 이 사업을 완수했다. 이어 쌍계구곡 석각의 오류를 교정하도록 조치하여 선조의 필적이 아닌 것이 후대로 와전될 것을 미연에 방지했다.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선조의 유촉지를 탐승하면서 비류암을 지리학적으로 근거하여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일련의 선촉 탐방을 통해 오류를 시정하고 발굴해 내는 작업을 거쳐 선조 추존 사업에 이바지했다.
4) 퇴계 서적 편찬
광뢰는 퇴계 추존 사업의 일환으로, 평생 퇴계집을 탐독하였다. 그의 필적 역시 선조 퇴계의 그것을 답습했으며, 선조 문집 연구를 통해 가학 계승을 이어가고자 했다.36) 평소 선조 퇴계가 남긴 행적이나 유촉지 등을 소중히 여겨 기록하고 수집하며 탐색함으로써,37) 가학을 실천하는 기틀을 삼았다.
퇴계집에 대한 상세한 고증 작업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그러므로 『廣瀨集』은 퇴계 문집에 대한 교감 과정과 기존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퇴계의 언행과 관련된 각종 학설이나 주장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되었는지를 연구함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그는 이 문집에 수록된 내용 외에 『퇴계연보』가 소루한 점을 안타깝게 여겨, 『陶山年譜補遺』를 편찬했다.38) 그리고 퇴계 詩藁에 의문점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要存錄』을 편집하였으며,39) 가훈을 모으고 예설을 참고하여 『禮說類編』도 편찬했다.40) 가법 계승과 종친 간의 예법 준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心經講錄刊補論稟」은 퇴계의 『心經附註』 강록에 관한 대표적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덕의 『心經講錄刊補』에 대해 스승에게 질의한 것이다. 문목은 저술 내용의 오류, 고증과 해석의 문제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심경강록간보』를 계기로 영남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심경부주』와 관련된 글이 쏟아져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약 30면에 이르는 이 문목은 퇴계학파의 『심경부주』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4. 도산구곡에 반영된 퇴계 계술 정신
後溪 李頤淳(1754-1832)은 이황이 머물던 陶山을 朱子가 卜築한 武夷와 同一視하였는데,41) 이야순은 1823년 霞溪 李家淳(1768-1844)을 대동하고 良洞에 가서 그 곳의 선비들과 구곡을 倡定하였다.42) 이가순은 이 때 주자의 「武夷九曲棹歌」를 차운하고 「退溪九曲」, 「陶山九曲」, 「玉山九曲」, 「源明九曲」을43) 창작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趙友慤에게 시를 보여주자 조우각이 「武夷九曲棹歌」의 韻으로 다시 차운하였다.44) 조우각의 序詩에
옥산의 수려함 무이 선령과 같고 玉山幷秀武夷靈
천 년을 내린 연원 한 줄기 맑네 千載淵源一脈淸
라고 하여 玉山의 경관을 武夷에 비기고 晦齋 李彦迪(1491-1553)의 학문이 朱子에 연원을 둔 한 줄기 맑은 물이라고 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도산구곡에 대한 시 창작이 활발하게 일어났을 것인데 後溪 李頤淳(1754-1832)을 비롯하여 陶山九曲에 대한 詩作이45) 나타났다.
이야순이 도산구곡시를 짓고 지우들에게 화운을 요청하자, 趙述道․李宗休․姜必孝․柳炳文․柳鼎文․琴詩述․李蓍秀 등이 차운하고 송부하였다. 표를 본다.
표 1 이야순의 「도산구곡」에 대한 작가별 창작계기 및 조치
생몰년대 | 도산구곡시작가 | 작품명 | 창작동기 | 措置 |
(1729-1803) | 晩谷 趙述道 | 「李健之次武夷九曲韻又作陶山九曲詩要余和之次韻却寄」 | 和韻要請 | 却寄 |
(1761-1832) | 下庵 李宗休 | 「瀨石主人李健之次武夷九曲韻仍歌玉山退溪陶山九曲要余追和忘拙步呈」 | 和韻要請 | 贈呈 |
(1764-1848) | 海隱 姜必孝 | 「次漱石翁陶山九曲韻」(1808) | 次韻 | |
(1766-1826) | 素隱 柳炳文 | 「陶山九曲武夷棹歌韻和呈李健之」 | 和韻 | 贈呈 |
(1782-1839) | 壽靜齋 柳鼎文 | 「伏次廣瀨丈寄示陶山棹歌韻」 | 寄示次韻 | |
(1783-1851) | 梅村 琴詩述 | 「謹次廣瀨丈陶山九曲韻」 | 次韻 | |
(1790-1848) | 慕亭 李蓍秀 | 「次廣瀨李丈續陶山九曲歌」 | 次韻 |
표에서 보듯이 조술도는 이야순의 화운요청에 作詩하여 즉각 송부하였고, 이종휴도 요청에 의하여 作詩하여 송부하였다. 류정문은 보여주었기에 차운하였으며, 강필효․금시술․이시수는 단순히 차운하였다. 그런데 소은 류병문은 화운의 요청이 없었으나 作詩하여 송부하였다. 이 점은 류병문이 陶山九曲詩의 창작에 보다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류병문은 무신란 전후 영남지역의 제한된 정계진출의 환경 이후, 정조의 閣臣을 통한 陶山書院의 致祭로 고무된 분위를 느꼈을 것이다. 더구나 성리학을 꽃 피운 영남지역이, 주자학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부여한 기호학파의 擬武夷 공간보다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황과 이상정의 학문을 이은 류병문으로서는 친분이 두터웠던46) 이야순의 「陶山九曲」에 적극 화운하고 송부하였을 것이다.
류병문은 또 退溪九曲에 대한 시도 함께 창작하였는데, 그 시 「又和退溪九曲」이47) 이야순의 「陶山九曲」과 同一 韻으로 차운한 점으로 보아, 류병문의 「陶山九曲武夷棹歌韻和呈李健之」의 창작시기는 이야순이 양동을 방문하던 때와 거의 일치한다고 하겠다. 류병문의 「陶山九曲武夷棹歌韻和呈李健之」가 이야순의 「陶山九曲」에48) 화운하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두 시를 함께 살펴 同異를 본다.
<序詩>
廣瀨
금수와 유리가 이미 영기를 드러내니 錦繡琉璃已炳靈
산은 더욱 높고 높아 물도 더욱 맑네 山增嶷嶷水增淸
대은병과 서로 멀다고 말하지 마시오 休云大隱屛相遠
천 년의 노 젓는 소리 함께 돌아가리 千載同歸一棹聲
序詩에서 이야순은 陶山의 높은 산과 맑은 물이 錦繡같은 山光과 琉璃 같은 水色으로 영기를 밝게 드러내었다며, 大隱屛을 불러 도산을 武夷와 비겨 주자의 「武夷九曲棹歌」와 함께 하는 詩情을 토로하였다.
<雲巖寺曲>
廣瀨
일곡이라 바위의 구름 배를 당기듯 一曲巖雲若挽船
추로향 군자 많다며 오천을 말하네 魯多君子說烏川
단풍과 지는 해 그 누가 이어 읊나 丹楓落日吟誰續
한줄기 푸른 안개 절간에 머무르네 蕭寺靑留一點烟
구름에 쌓인 운암사의 모습을 구름이 배를 끄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야순은 君子들이 많이 태어난 烏川을 상기하고 있다. 이야순의 3구 ‘丹楓落日’과 류병문의 3구 ‘紛紛林月’은 이황의 「遊雲巖寺示金彦遇愼仲惇敍琴夾之壎之趙士敬諸人」의 詩句
석양의 단풍은 읊조리기에 더욱 좋고 落日丹楓吟更好
돌아올 때 숲 그림자 달 빛 어지럽네 歸時林影月紛紛49)
를 전후로 각각 나누어 읊어 이황을 추모하고 있다.
<月川曲>
廣瀨
이곡이라 부용봉 옥녀봉을 깎아서 二曲芙蓉削玉峯
바람 달 열려 자태 시내 가득하네 爲開風月滿川容
십 리 들판 이어져 연원이 넓으니 通郊十里淵源闊
구름안개 한 겹 막혔다 말을 마소 莫道雲煙隔一重
월천은 옛 이름이 率乃였는데 權受益이 1494년에 浮羅村에서 이곳으로 와 개척하고 월천이라고 하였다.50) 이야순은 月川 趙穆(1524-1606)이 거처하던 월천을 ‘십 리나 되는 들판의 연원이 넓으니, 구름안개 한 겹 막힌 것은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晴溪 崔東翼은 「擬陶山九曲用武夷棹歌韻」에서 2곡 월천을 읊으며,51)
<鰲潭曲>
廣瀨
삼곡의 못의 자라 배를 떠받치니 三曲潭鼇爲戴船
吾東의 역학 어느 때 시작되었나 吾東易學昉何年
음이 오래 쌓여 천지가 열였으니 積陰已久乾坤闢
정일재의 달빛 더욱 곱구나 精一齋中月更憐
역동서원이 있던 곳을 사람들이 ‘오담지구(鼇潭之丘)라 하였는데 공자의 諱를 피하여 鼇陵으로 고쳐 불렀다. 精一齋는 역동서원의 正堂인 典敎堂의 東翼이다. 陰陽이 消息하는 循環의 이치로 천지가 열렸다며 정일재를 부각시켰다. 오담에는 觀水臺가 있다. 이야순과 류병문 모두 禹倬(1263-1342)의 역동서원을 기렸다.
<汾川曲>
廣瀨
사곡 귀머거리 바위 물결 부딪치고 四曲偏聾激水巖
바위 구름 푸르게 겹겹이 드리웠네 巖雲重鎖碧毿毿
바위에 거처하던 선백은 어디 있소 巖居仙伯今何處
복사꽃 떨어지고 달빛 못에 비치네 花落蟠桃月在潭
『宣城誌』에 ‘바위가 집 동쪽 1리쯤에 있는데 높이가 두어 길이 넘고 위에 수 십 명이 앉을 수 있다. 앞에 강이 있어 물소리에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분천은 聾巖 李賢輔의 亭舘이 있던 곳으로 이황은 李賢輔(1467-1555)를 老仙伯이라고52) 하였다.
<濯纓潭曲>
廣瀨
오곡이라 탁영담은 깊이 못 헤아리니 五曲纓潭不測深
잠기고 괴여 남은 물결 온 숲 적시네 涵渟餘派遍千林
이처럼 물에는 흐르는 근원이 있어서 如斯有水源源處
고인을 생각하며 내 마음을 가다듬네 思古人惟獲我心
武夷精舍가 武夷九曲의 제 5곡에 위치하듯 陶山九曲의 제 5곡에는 陶山書堂이 있다. 이시수는, ‘이야순이 정한 도산구곡은 운암에서 청량산까지인데 탁영담이 제 5곡에 자리 잡은 것은 武夷九曲에 武夷精舍의 소재처와 똑 같다’고53) 하였다. 이황을 주자와 同一視한 것이다. 두 話者 모두 탁영담의 깊이로 이황의 학문을 기렸지만, 이야순은 물의 연원으로
<川沙曲>
廣瀨
육곡이라 숲 터 옥 물굽이 안고 六曲林墟抱玉灣
피라미와 백조가 좋게 어울리네 鯈魚白鳥好相關
사시던 하명동 저문 꽃 더 고와 更憐花晩霞明處
서쪽 골짜기 일찍이 차지하셨지 西望曾專一壑閒
이야순의 詩語인 피라미[鯈魚]와 白鳥는 이황의 「戲作七臺三曲詩」, <石潭曲> 시구에서54) 소재를 가져온 것인데 ‘鳶飛魚躍’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이야순은 이황의 시구 중에서 적절히 소재를 뽑아 作詩에 재사용하였다. 하명동은 이황이 한 때 복거하던 곳인데,55) 그 뒤에 꿈속에서 노닐었다. 1542년 2월 20일 꿈에, 살던 곳에서 한 고개 넘어 山後村에 이르러 시를 짓다가 깨어났다.56) 그 시에,
하명동에는 처음에 길이 없었는데 霞明洞裏初無路
늦은 봄 산 속 별별 꽃이 다 있네 春晩山中別有花
라 하였다. 이 두 구를 이야순은 ‘사시던 하명동 저문 꽃 더 고와[更憐花晩霞明處]’로 압축하였다.
<丹砂曲>
廣瀨
칠곡이라 여울 감돌아 흐르는데 七曲縈廻一水灘
갈선대와 고세대를 다시 돌아보네 葛仙高世更回看
단사 만 섬은 하늘이 감춘 보배 丹砂萬斛天藏寶
푸른 절벽 구름 일어 차게 비치네 靑壁雲生相暎寒
이야순은 丹砂가 지닌 함의에도 불구하고, 지명이 지닌 의미 이상의 도교적 표현 없이 敍景을 읊고 있다.
<孤山曲>
廣瀨
팔곡의 고산에 맑은 거울 펼쳐져 八曲山孤玉鏡開
성성재의 마음 법 이곳에 맴도네 惺惺心法此沿洄
노래 멈추고 푸른 벼랑에 묻노니 停歌爲向蒼厓問
시 짓고 노닐던 일을 기억하는가 能記題詩杖屨來
이야순은 금난수의 心法을 기리고 당시 노닐던 일을 회상하였다.
<淸凉曲>
廣瀨
구곡이라 산 깊어 형세가 뛰어난데 九曲山深勢絶然
누가 산 속에 시내 흐르는 줄 알랴 山中誰認有斯川
인간세상에 도화 떠 내릴까 두려워 人間可怕桃花浪
갈매기에게 동천 잘 지키라 말하네 分付沙鷗護洞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