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조훈(祖訓)』에 이르길, 조선국은 즉 고려이다. ( ㉠ ) 및 아들 이성계가 홍무 6년(1373)부터 홍무 28년까지 앞뒤로 왕씨 네 왕을 시해하고, 임시로 이를 맡고 있다. … (중략) … 먼저 영락 원년, 그 국왕이 자신의 세계(世系)가 ( ㉠ )의 후손이 아니라고 상주하며, 『조훈(祖訓)』에 기재된 시역의 일을 변호하여 밝히니, 조서를 내려 개정을 허락하였다. 정덕․가정 연간에 여러 차례 요청하였고, 모두 칙서를 내려 장유(獎諭)하였다. ㉡만력 3년(1575), 사신이 다시 이전의 요청을 말하자, 사관(史館)에 조서를 내려 편집하게 하였으니, 지금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이성계는 전주(全州) 출신이다. 원조(遠祖) 한(翰)은 신라에서 사공(司空)이었다. 6대손 긍휴(兢休)는 고려에 들어갔다. 13대손 안사(安社)는 행리(行里)를 낳았고, 행리는 춘(椿)을 낳았고, 춘은 자춘(子春)을 낳으니, 이성계의 아비이다. ( ㉠ )(이)라는 자는 경산부 이장 경(庚)의 후예이다. …(중략)… 공민왕이 폐신 홍륜(洪倫) 등에게 시해되자, ( ㉠ )이/가 조정을 장악하여 홍륜 등을 주살하고, 우를 옹립하였다. ㉢우가 왕위를 이은 지 16년, 장수를 보내 요동을 침범하였다. 이성계는 부장으로 보내졌으나, 압록강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모의하여 병사를 물렸다. 우가 두려워하여 그 아들 창(昌)에게 양위하였다. 이때 공민의 비 안씨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창을 몰아내고, 왕씨 손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옹립했다. 요가 망령되이 살육하자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고, 모두 이성계를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다. 표를 보고 고황제가 국왕으로 명하였고, 이내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었다. - 明會典 - |
<작성 방법> ◦괄호 안의 ㉠에 해당하는 이름과 밑줄 친 ㉡을 통해 마무리된 역사적 사건의 명칭을 순서대로 쓸 것. ◦밑줄 친 ㉢의 직접적 원인을 서술할 것. ◦밑줄 친 ㉣의 명분을 서술할 것. |
[해설]
∙ ㉠이인임 ㉡종계변무사건
∙ ㉢요동정벌 : 철령위 사건
∙ ㉣명분 : 폐가입진(공양왕 즉위)
[세상의 모든 역사 한국사 p.303]
명과의 갈등
∙태조의 아버지를 이인임으로 기록
∙표전 문제
∙여진인 문제
[신뿌 4권 p.25∼26]
요동 정벌은 우왕 14년(1388) 4월에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요동 정벌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 교체를 가져온 결정적 사건이었다. 요동 정벌은 직접적으로는 철령위 설치를 둘러싼 영토 분쟁이었지만, 이로 인해 명과의 대외 관계가 새롭게 정립될 수밖에 없는, 당시로서는 강대국과 약소국이 대처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성을 동시에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25-26쪽>
…
철령위 설치 문제는 우왕 14년(1388) 2월, 사신 설장수가 “철령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한 지역이었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도록 하라.”는 명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면서 대두했다. …
마침내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정벌을 명령했다. 이때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 여름철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 온 나라의 군대를 동원해 원정을 하면 왜구가 그 틈을 노린다는 것,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떨어지고 군사가 질병에 걸린다는 것 등의 ‘4불가론’을 제시하면서 반대했다. <26쪽>
[신뿌 3권 p.162∼163] 폐가입진
우왕 14년 명에서 철령위를 설치해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통고해 오자 고려에서는 크게 반발하고 요동 정벌을 단행했다. 요동 정벌에 대해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고,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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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했고, 마침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 이런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 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단행했다. <162쪽>
우왕 14년 6월 위화도 회군과 최영 제거, 그리고 창왕 즉위는 신흥 유신들이 비로소 재등장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회군 자체가 신흥유신들의 대명(對明) 사대론을 구현한 측면이 있다. 창왕 즉위 이후 정도전은 성균관 대사성, 조준은 사헌부 대사헌, 이행은 좌사의대부, 허응은 우상시, 윤소종은 우사의, 조인옥은 전법판서 등으로 나타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간관과 전법사를 장악했다.
신흥 유신은 정권을 장악한 뒤 개혁을 적극 주장했다. 가장 먼저 개혁을 촉발하고 또 가장 핵심에서 개혁을 이끌어간 것은 조준의 전제 개혁론이었다. 창왕 즉위 직후인 7월에 대사헌 조준은 글을 올려 전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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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관들은 이색 및 그의 측근인 이숭인과 권근을 공격했다. 이때 마침 최영의 조카인 김저(金佇)가 우왕 복위를 꾀했다가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처벌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이성계 등이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창왕을 몰아내고 1389년 11월 공양왕을 옹립했다. <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