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톱
손톱깎이가 입을 쩍 벌리자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장수풍뎅이처럼 팽팽하게 버티던 엄지발톱이 휙 하고 잘려 나갔다. 신문지 위에 맨발을 올리고 잔뜩 웅크렸던 자세를 풀었다. 어려운 숙제 하나를 해치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아랫배가 방만하게 나온 50대 중년에게 발톱 깍기는 이만저만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3주 전에 손톱을 깎고 지금까지 하루 이틀 미루던 터였다. 방바닥 여기저기 흩어진 발톱 조각을 신문지 가운데로 모았다. 잘려 나간 신체 일부가 마른오징어 부스러기처럼 소복이 쌓였다. 땀과 때에 절어 눅진하게 된 발톱 더미에서 노릇한 냄새가 났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조금 집어 비벼보았다. 손끝 사이에 끼어 저마다 까칠하게 몸부리쳤다. 잠시 뒷면 전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날 신세였다. 발톱 조각들은 자신을 낳은 몸과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한평생 노동을 쉬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었다. 집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잘한 수리는 물론 담을 쌓고 벽을 세우고 문을 달았다. 손재주가 좋아 웬만한 공사는 자재를 사서 목수 못지않게 해결했다. 굳은살투성이 손은 닳아서 반들반들할 지경이었다. 장딴지 근육이 특히 발달했다. 발은 거북이 껍질로 만든 양말을 신은 듯 단단했다. 발가락은 튼튼하고 발톱은 무지막지했다. 아버지가 발톱을 깎으면 큼직한 조각이 한 무더기를 이뤘다.
아버지는 발톱을 다 깎고 내 발톱도 깎아주곤 했다. 어린 눈에 커다란 손톱깎이가 다가오면 겁이 나 있는 힘을 다해 발가락을 오므렸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다독이며 왼손으로 발을 잡고 오른손으로 자그마한 발톱을 하나씩 잘라냈다. 불안한 마음과 달리 한 번도 아픈 적은 없었다. 신기하게 발톱만 깔끔하게 도려냈다. 깎기를 마치면 아버지와 아들의 발톱은 한데 섞여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아버지는 방에 굴러다니는 발톱을 금기로 여길 만큼 청결에 신경을 썼다. 평소 거리감이 있었으나 어린 아들이 아플까 조심스레 발톱을 깎을 때는 엄마보다 살가웠다.
20대 후반 부모님 품을 떠나 호주로 이민 왔다. 시드니에서 아내와 아이 넷을 낳아 키웠다. 타국에서 산 30년 세월은 마치 장대비를 뚫고 앞으로 나가는 듯한 긴장과 투쟁이 연속이었다.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청년이던 나는 중년이 됐다. 아버지는 세월이 뿜어 대는 물줄기를 고스란히 맞았다. 몇 년에 한 번 한국에 갈 때마다 눈에 띄게 흐릿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람은 천연색으로 시작해 파스텔톤으로 연해지다가 결국 회색으로 사라지는가 싶었다. 한국을 가서도 바쁜 일정 탓에 곁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호주로 돌아올 때면 늘 아쉬워하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팍팍한 이민 생활은 물질디든 시간이든 쉽사리 부모님을 챙길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릴없이 시간만 흘렀다. 늙어가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 속에 알코올램프 불이 켜진 듯 초조하고 불안했다. 당장 1년에 한두 주라도 그분들과 일상을 함께 할 시간을 만들자고 작정했다.
하필 그런 결심을 한 것 때문인가? 작년 초 아버지가 불치병인 폐섬유화증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코로나19 후유증 때문이라고 했다. 같은 모양이 무한히 되풀이될 것처럼 보이던 생활이 와르르 무너졌다. 언젠가 올 수밖에 엇는, 그럼에도 끝까지 오지 않았으면 했던 일이 일어났다. 칼날 같은 바람이 텅 빈 가슴안을 어지럽게 헤집고 다녔다.
항공권을 끊고 한국으로 향했다. 하루 만에 아버지가 입원한 대구 영남대 병원에 도착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때였다. 병원은 면회를 엄격하게 제한했고 환자를 보는 간병인 한 명만 허용했다. 3일 안에 실시한 코로나 음성 반응 결과를 제출하고 남동생과 간병인 교체를 했다. 병원 행정실에서 출입증을 받고 6층 입원로 올라갔다.
“정연현 환자 간병인입니다. 아버지 어디 계시죠?”
무언가 울컥 솟아오라 목구멍을 채웠다. 간호사가 나를 안내했다. 하얀 커튼을 열어젖히니 침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환자복 아래 다리 부분이 헐렁했다. 그토록 딴딴하던 장딴지 근육이 다 빠졌다. 피부는 줄줄 늘어나 있었다. 공기가 빠져 흐느적거리는 고무튜브 같았다. 아버지는 나는 괜찮다, 하는데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나기 어려워 보였다.
담당 의사는 고령이어서 유일한 치료책인 폐 이식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둘러대는데 결론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눈으로 올려다볼 수 있는 모든 공간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고? 언제나 고향집 그 자리에 그렇게 계셔야 하는 분인데 이젠 어떡하지?
죽음이 다가오는 가운데 열흘 정도 아버지를 돌봤다. 밥을 떠먹이고 옷을 입히고 세수를 시키고 대소변을 도와드렸다. 아버지가 갓난아이 시절 나를 돌본 것처럼 나는 늙은 아기처럼 그분을 돌봤다. 며칠 돌보아 드린 것만으로도 감동했다는 아버지 말에 부끄러움과 감사가 뒤엉켰다. 오랜 세월 자식을 위해 해준 많은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자식이 한 작은 일에 감격하는 연하디 연한 분이었다.
병상 아래쪽에 드러난 두 발은 한 번도 걸은 적이 없는 것처럼 유순해 보였다. 어릴 때 본 거친 거북이 껍질은 흔적도 없었다. 손바닥으로 비벼보니 게살처럼 보들보들했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씻어 드렸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바셀린 크림을 꼼꼼하게 발랐다. 지금까지 봤던 아버지 발 중에서 가장 부드러웠다. 발톱이 제법 길게 자라 있었다. 난생처음 발톱을 깎아드리고 싶었다. 병원 매점에서 손톱깎이를 구해 눅눅한 발톱을 깎았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아버지처럼 발톱도 별다른 저항 없이 쑥쑥 잘렸다. 잘못 깎다가 자칫 맨살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했다. 엄지발톱이 제법 컸지만 역시 힘없이 깎였다. 휴지 위에 모인 발톱 조각에서 노릇한 냄새가 풍겼다. 침대에 떨어진 파편까지 집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렇게 처음이자 마지막 발톱 깎기가 끝났다.
아버지는 발톱이 다시 자랄 때까지 버티지 못했다. 이제 어린 아들의 발톱을 깎아주던 아버지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 홀로 남은 아들의 발톱은 더 이상 아버지 발톱과 한데 어우러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