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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아모스 4장 1-5절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아모스 3장에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겠다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북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이기에 심판하신다고 하시는가? 지난 시간에 살핀 내용에서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에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궁궐에서부터 포학과 겁탈을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바른 일, 옳은 일은 행할 줄 모르고 늘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에 있어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하시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부국강병한 나라의 힘을 쇠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적을 일으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고, 그들을 통해 죄를 끊임없이 쌓고 있는 궁궐을 약탈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런 심판에 있어 벧엘의 제단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암3:14). 궁궐을 약탈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여러 용도로 지은 화려한 궁궐이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과 함께 벧엘의 제단을 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벧엘의 제단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 처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시작부터 여로보암 1세가 백성의 마음을 자신에게 붙들어 놓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시지도 않은 장소에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예배하도록 했는데, 이런 거짓 예배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는데, 1절부터 보시면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서는 ‘들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누구냐?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입니다. 일단 ‘바산의 암소들’은 비옥한 땅 바산 지역의 암소들로 기름지고 살이 찐 자들을 의미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자들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서 살고 있는 잘 먹고 잘 사는 자들, 다시 말해 부유층 혹은 상류층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암소들이라고 말함으로 부유하고 상류층에 속한 여인들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1절 나머지 부분을 보시면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여기서도 우리는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에 대한 죄를 볼 수 있는데,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봐야 할 자들이 오히려 학대하고 압제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느냐? 사마리아에서 살고 있는 부유층, 상류층 여인들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떤 면에서 자기 배만을 채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에 대하여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은 기름지고 살이 찐 상태에 있으면서도 힘 없고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힘 없는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고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가장은 남편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주인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내의 주인이 남편이지만, 남편에게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남편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데, 누구를 통해 그 일을 하고 있는가? 남편을 통해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잠언 31장에 보면 현숙한 여인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0절 이하 12절에 보시면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런 가르침에 따라 남편에서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해야 할 여인들이 도리어 남편에게 선이 아닌 악을 행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절에서는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라고도 말씀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마리아의 부유한 상류층 여인들은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지 않습니다.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것을 빼앗기 위해서 남편을 사주하기까지 합니다.
즉 지금 북이스라엘의 부유층, 상류층의 여인들은 그들의 쾌락과 만족을 위하여 남편들을 조정해 사회적인 부패를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희생되는 사람들은 누군가? 힘 없는 자입니다. 가난한 자입니다. 사회가 돌아봐야 할 대상이지만, 오히려 그들이 피해자가 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2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속성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금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다는 겁니다. 시편 89편 34절과 3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도 나의 거룩함으로 맹세했다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맹세하신다는 것은 언약의 성격처럼 그가 스스로 깨뜨리는 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하나님은 1절의 죄에 대하여 2절로 보응하신다고 하시는데, 그러한 보응은 깨뜨릴 수 없는, 변경할 수 없는,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은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이고,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돌이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택하신 자들에 한해서입니다. 비록 그들이 선민으로 있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만 알았다고 말씀하기도 하시지만,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롬9:7) 혈통으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해서 그들이 다 영적 이스라엘은 아닌 겁니다.
때문에 맹세하심으로 저들의 죄에 대하여 보응하신다고 할 때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리고 그것 자체로도 소망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 북이스라엘의 만연된 죄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죄 때문에 심판하는 일을 결코 변경하거나 돌이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누가 있는가? 북이스라엘 부요층, 상류층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다는 이 부분에서 거룩함보다는 ‘성전’ 혹은 ‘성소’로 번역을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이 이렇게 번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성전(성소)을 두고 맹세하시되...”라고 번역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5:34-36)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6장에서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히6:16)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성전(성소)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성전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이름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보이지 않지만, 구약에서는 성전에서 자신을 만나게 된다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자신의 표면상의 상징인 성전을 가리켜 맹세하고 있다는 것이 칼빈의 해석입니다. 특별히 이 해석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는 것은 본문 앞에 있는 아모스 3장 14절,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 아모스 4장 4절에서 벧엘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가리켜 맹세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이스라엘이 섬기는 거짓된 모든 예배를 거부하였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산에서 바르게 경배받는 분이며, 거기서만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며,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시는 분이시다. 거룩함이 그 자신에게만 있지만, 그의 거룩함의 상징인 예루살렘의 성전을 너희 앞에 세워 놓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모든 예배의식을 거부하시며, 너희의 성소를 매음굴처럼 여기신다.’”
어쨌든 하나님은 지금 자신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맹세하심으로 반드시 그들의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데, 심판의 내용이 무엇인가? 때가 너희에게 이르게 되면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지만 범죄한 사람에 대하여 마치 암소가 갈고리에 끌려가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려 잡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부요층, 상류층에 속하는 여인들에 대하여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행하는 바는 결코 사람답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은 사람보다 못한 짐승 취급을 하시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그들을 짐승으로 대하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남편을 이용합니다. 악한 일에 있어 남편을 사주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채웁니다. 힘 없고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아 자신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남편이 그들의 힘입니다. 남편이 그들에게는 의지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때가 되면 그들은 갈고리에 끌려가는 암소요, 낚시 바늘에 잡히는 물고기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힘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 그래서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람들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힘으로 삼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을 힘으로 삼습니다. 그것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 그것도 모든 만물에 대하여 심판하실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만물 가운데 어떤 것도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이고, 때문에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빨리 깨우쳐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합니까? 소위 세상 사람들이 신뢰할만하다고 여기는 갖가지 것을 왜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합니까? 그리스도 없는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어떤 것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소유해야지만 우리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현재만 볼 뿐 영원을 보지 못합니다. 영원을 본다 하더라도 현재를 놓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으로 영원을 볼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의 쾌락, 지금 현재의 만족, 지금 현재의 안전함 쪽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때가 있습니다. 때가 이르게 되면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만 사람의 사람됨이 있다고 할 때 그 길에서 벗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짐승 취급만 받게 됩니다. 그 말은 지금 기름지고 살이 찐다고 해서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더욱 비참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계속해서 3절을 보시면 좀 더 직접적으로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미 3장 15절에서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궁들이 무너지는가? 대적이 일어남으로 그렇게 됩니다. 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궁이 파괴되고 무너질 정도면 성 자체도 파괴되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있습니다. 그때 바산의 암소들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나가서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그들의 대적의 손을 피해 무너진 성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하르몬에 던져진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그들이 잡혀가게 될 장소로 봅니다. 반면 칼빈은 ‘궁궐로부터’ 혹은 ‘높은 곳으로부터’라고 해석하는데, ‘하르’라는 단어가 산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서, 혹은 궁을 높은 산 위에 짓는다고 할 때 그곳에서 너희는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성이 무너질 때 그들은 무너진 성 사이를 뚫고 도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던져지는 곳은 어디인가? 궁궐로부터 던져진다, 높은 곳으로부터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들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 그리고 그 자리가 그들의 교만이 나타나는 곳인데, 그곳에서부터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떨어져 비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사주해 힘 없는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함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높은 자리에게 끌어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오바댜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바댜는 에돔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인데,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그러니까 바위 틈에 거주하고, 높은 곳에 사는 것 자체가 그들의 교만으로 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적국이 쳐들어온다 할지라도 지리적 요건이 에돔에게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이곳에서 끌어낼 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즉 지금 거기만이 아니라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고, 별 사이에 깃들인다 할지라도, 다시 말해 너희가 보기에 더 유리한 어떤 조건을 갖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로서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은 이런 의미와 같습니다. 비교하자면 에돔은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없습니다. 그에 비해 북이스라엘에는 하나님도 있고, 그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북이스라엘 부유층, 상류층에 있는 자들은 사마리아 성에 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성이 튼튼하기 때문에, 높은 곳에 있어서 더 없이 안전하기 때문에 거기서 끌어내릴 수 있는 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진 권력이면, 내가 가진 돈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인맥이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극악한 교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교만을 꺾으십니다. 독수리처럼 높이 오를지라도, 별 사이에 깃들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서부터 끌어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판에 대한 말씀에 이어 오늘 본문 4절과 5절은 아모스 3장 14절에서 언급한 종교 문제를 다시금 냉소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 처소는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처음부터 여로보암은 백성의 마음을 자신에게 붙잡기 위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길갈이라는 지명도 나오는데, 여로보암이 벧엘과 함께 단에 금송아지를 세웠다면 길갈은 금송아지 신상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만큼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여호수아 시대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진을 쳤던 곳인데, 거기서 요단에서 가지고 온 열 두 돌을 세웠습니다(수4:19- 20). 요단을 건넌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수4:24). 사무엘의 경우 해마다 순회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벧엘, 미스바와 함께 길갈이라는 지역이 포함되기도 했습니다(삼상7:16).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부추기시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을 요구하실지언정 죄를 지으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렇게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너희가 벧엘에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한 것처럼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벧엘’의 뜻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을 우상의 집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길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 시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곳입니다. 사무엘 시대로 하자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기 위해 매 년 방문했던 지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던 곳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말하기는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호9:15).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길갈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악이 길갈에서부터 나온다고 말씀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 그러니까 냉소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내용은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칼빈은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하고, 합법적인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실제로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번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민28:3). 우리말 번역은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도록 번역하고 있지만, 신명기 14장 28절에 근거하면 삼년마다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삼년마다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는 내용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런 십일조가 아니라 또 다른 십일조의 내용인데, 고아가 과부와 나그네를 구제하기 위한 십일조입니다(신26:12). 제2의 십일조라고도 합니다. 히브리어로 ‘날들’로 번역하는 단어는 종종 ‘년들’을 의미하기도 하는데(레25:29, 삿17:10),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삼일이 아니라 삼년마다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제네바 바이블이나 KJV(King James Version) 등 몇몇 성경은 3년으로 번역해 놓기도 합니다. 수은제(酬恩祭)는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제요, 화목제로 다른 모든 제사는 누룩 없는 떡이 드려졌지만 화목제사는 누룩과 함께 드려지기 때문에 합법적이라는 것입니다. 낙헌제(樂獻祭)는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제사로, 이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칼빈은 4절 하반부와 5절 상반부의 말씀을 율법에서 명한 내용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4절 상반부 그 일을 지금 벧엘에서, 길갈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곳에서 그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북이스라엘에는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며, 삼년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도 드리고 있으며, 낙헌제 또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곳에서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곳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할 때(삼상15:22) 제사는 있지만, 십일조와 같이 드리는 것은 있지만 순종이 없는 제사, 순종이 없는 드림만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있는데 하나님께서 명한 방식과는 상관없는 예배로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찬송도 있고, 기도도 있고,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예배의 요소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가 아니라 사람의 고안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0장 1절이 그것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입니다.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입니다. 거룩한 제단의 불을 사용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과 비교해 출애굽기 35장에 보면 성막의 일꾼으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우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30절 이하를 보시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출35:30-35) 그들로 하여금 성막을 짓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주셔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면 그들 스스로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모아서 성막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36장 1절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그래서 출애굽기나 레위기 등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면, 모세는 명령하신 그대로 행했다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어떻게 됩니까?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2)
다시 본문으로 와서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고 하시면서 칼빈의 해석에 따라 율법에서 볼 때 합법적인 내용을 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합법적인 내용이라 할지라도 벧엘에는, 길갈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곳은 이미 하나님의 집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매일을 드리고, 감사로 드리면서 수없이 많은 제물을 가지고 온다 할지라도, 또 율법에 따라 삼년에 한번 십일조를 드려 구제하는 일을 할지라도,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의 예배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시고 난 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장소에 매여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즉 우리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성전으로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성취하셨고, 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 안에서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는 방식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의 고안물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온통 인간의 고안물들입니다. 성령과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진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한 베드로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동하다가 소들이 날뛰게 되었을 때 언약궤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잡은 웃사의 마음은 진심과 먼 것입니까? 분명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이 물러가라고 말씀하실 만큼 책망하셨습니다. 웃사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를 치셔서 죽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물은 결코 만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민4:15). 붙잡지 않으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보다 우리의 급한 마음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맞춥니다. 그래서 변경합니다. 구도자 예배, 경배와 찬양 등 사람에게 맞춰 변경합니다. 명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한 바가 없는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여기에는 이 말씀 외에 들을 말씀이 없습니다.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15:13)
그런데 칼빈의 해석과 달리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하지 않는, 그래서 불법적인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번제물의 경우 매일 드려야 했지만 저들은 일년에 한번 드리는 희생을 매일 드렸다는 것입니다.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를 저들은 삼일마다 드렸다는 것입니다. 누룩을 넣은 떡을 감사제물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율법에 따르면 누룩 넣은 것을 불로 태워 제사는 것은 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러 태워 제사를 했습니다. 낙헌제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소리내어 선포하고 있는 것이 저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는데, 어느 하나 율법에 합당한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칼빈의 해석보다는 이러한 해석이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북이스라엘은 시작부터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울 뿐만 아니라 레위인이 아닌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장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런 해석을 따르자면 북이스라엘의 상태는 더욱 심각합니다. 형식은 남아 있고, 열심도 있습니다. 삼년에 한번 십일조하는 것을 삼일에 한번 한다고 할 때 그것보다 더한 열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다 변경한 것입니다. 어쩌면 삼년에 한번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삼일에 한번 그렇게 가져오도록 한 것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제사장으로 있던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당시 힘 없는 자, 가난한 자는 피해자로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냉소적으로, 마치 조롱하듯 말씀하시는 겁니다.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 너희가 내 명령을 변경하여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는 것처럼 드려봐라.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고,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해 봐라. 그 모든 것이 너희 죄요, 너희 죄를 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해석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느 것도 하나님 앞에서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는 합법적인 것도 불법이 섞이면 불법입니다. 합법적인 것을 조금씩 변경하여 행하는 것, 그것도 불법입니다. 무엇만이 합법적인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령하셨다면 이렇게 순종하는 것, 저렇게 명령하셨다면 저렇게 순종하는 것, 여기에만 합법적인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역순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종교적인 모습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에는 종교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열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없는 거기에는 말씀에 합당한 열매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이 실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는 무엇인가? 5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기뻐하는 바지, 내가 기뻐하는 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기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내가 만족하는 것이 하나님이 만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족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내 기쁨, 내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만족을 내 기쁨, 내 만족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그대로를 내놓는 데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해야만 합니다. 순종만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만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 외에 다른 것을 열매로 가져서는 안 됩니다. 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예배조차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렇게나 올려드리면 되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으로만 예배의 요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때 다른 중보자를 세우는 것, 다 불법이요 거짓예배입니다.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으로만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첫댓글 설교 후 식사 중에 나누었던 내용과 설명을 약간 첨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