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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속으로 믿기, 겉으로 믿기, 안 믿기>의 줄거리:
유일한 '빛'으로, 유일한 '너'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마주하는 인간을 요한복음은 겉과 속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봅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나타나는 변화의 핵심은 이제 더는 하나님이 선민 각자에게서 밖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는 겉으로 믿을 수가 없고 오직 속으로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속으로 믿기, 겉으로 믿기, 안 믿기
(요한복음 2:13~25)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속으로 믿기, 겉으로 믿기, 안 믿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속으로 믿기, 겉으로 믿기, 안 믿기”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이 공생애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인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5절을 보면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이 2장 전체 내용의 중심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정결의식에 사용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뒤에 성전정화 사건이 이어집니다. 이 사건들이 “사람의 속에 있는 것”에 연결이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속으로 믿기, 겉으로 믿기, 안 믿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좀 더 보태자면 “속 믿음이 아닌 바에는 겉 믿음보다 차라리 안 믿음이 더 낫다.”라는 것이 본문의 취지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제목의 “속으로 믿기, 겉으로 믿기, 안 믿기”의 차이점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속으로 믿기”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속에 모셔 들여서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이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게 됩니다. “겉으로 믿기”는 세상이 속에 들어와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밖에 모셔둔 채 겉으로 관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율법이나 계명처럼 밖에 두고 필요에 따라서 받아들이고 지키고자 하는 믿음의 상태입니다. “안 믿기”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간과하고 도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생각하신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는 상태입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히려 안 믿기가 겉으로 믿기보다 희망적일 수 있습니다.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주제가 되는 마지막 부분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5절을 보면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전혀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앞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음에도 정작 예수님께서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보시고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정화 사건을 일으키신 때는 유월절 기간입니다. 유월절은 보통 칠일동안 지켜지게 되는데 준비기간이나 마무리기간을 포함하면 예루살렘에 머무는 기간은 열흘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간에 예루살렘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칭합니다. 말 그대로 표시나 간판이라는 뜻의 표적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이 특별히 예수님의 기적을 가리킬 때 굉장히 선호하는 개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믿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표적으로 대하지 않고 기적으로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통해 드러내시고자 하신 바는 바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저 멀리 천국에나 계신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 앞에서 움직이고 계신 인간 예수님 속에 들어와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하나님께서 자기 속에 들어와 계심을 표적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주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크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이라는 한 인간 속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창조주가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일어나게끔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라는 인간 안에 우주보다 더 크신 창조주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표적인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하고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 지구에서 티끌처럼 작은 예수님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표시를 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렇게 표시를 내신 사건을 사람들은 기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이 기적을 대할 때에 보아야 했던 것은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보았던 것은 예수님을 통해 인생에 형통의 청신호가 켜질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인생에 형통의 청신호로 삼아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24절에서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상황을 보시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으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몸은 그리스도로서 사역을 하시기 위한 몸입니다. 따라서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숙식의 제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겉으로만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이심을 인정받기를 거절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리스도로서 사역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으되 겉으로만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그리스도의 표적으로 보았던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형통을 위한 기적적 능력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로서 인정받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이러한 사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누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올바르게 영접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리스도라 고백했지만 올바르게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영접은 오직 어린 양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영접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영접해야 될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만이 내 의식의 유일한 빛이시며, 나를 규정하는 유일한 너로서만 영접이 되십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고 하여도 사람의 속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속에 채워진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겉으로만 예수님을 영접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만나는 겉으로 드러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 영접은 다시 말해 삶의 조건이나 상황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의해서 바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과 겉을 구분하자면 인격이 속이고 몸은 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도 속과 겉으로 구분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인격 속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몸이 만나는 겉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기적은 몸이 처한 겉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기적의 능력으로 겉의 상황이 바뀌겠다.”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속에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나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표적으로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예수님을 속에 영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줄 알았는데 저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서 들어와 계심이 분명하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다면 내 속에도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속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속에 세상을 담고 있었고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겉의 상황이 바뀌기만을 바랐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몸이 아프면 건강해지기를 바라고,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고, 돈이 잘 벌리기를 바라고, 승진을 바라고, 자녀가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속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상황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속은 이 세상으로 가득 채운 채로 겉의 상황만 예수님을 통해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 속에는 하나님이 들어와 계셨는데 사람들 속에는 남편과 아내가 들어오고 부모가 들어오고 자녀가 들어오고 형제자매가 들어오고 세상에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와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나의 바깥에 모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겉의 상황이 바뀌기를 원하며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겉의 상황에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겉 믿기는 안 믿는 것보다 더 지독한 악덕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악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속으로 영접함으로써 예수님을 의식의 첫 번째 빛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빛이 되신다는 것은 첫 번째의 관심이 대상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하든지 어둠 속에 있던 나에게 예수님은 유일한 빛이 되어주십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첫 번째로 바라볼 때 나는 규정됩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다.”라고 인정할 때에 올바른 예수 영접이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만 세상으로 가득 차있는 내 속의 상태를 보존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겉으로만 모시고자 했던 안 믿는 것보다 못한 상태는 종식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성전정화 사건이 느닷없이 나옵니다. 학자들 간에는 이를 두고 성전정화 사건이 두 차례 있었으리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과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에 행하신 성전정화가 다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전정화 사건이 한 차례 있었으나 요한이 의도적으로 앞에 배치했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성전정화 사건이 한 번인가 두 번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맥락에 담겨진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대할 때에는 요한복음의 맥락을 충실하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본문에 성전정화 사건이 앞에 기록된 이유는 성전의 존재의미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존재했던 이유는 번제의 의미와 일치합니다. 선민들의 속은 몸으로 만나는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지적하셨던 장면을 떠올려보면 그 상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어지는 27절에서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잘 지키던 바리새인들의 속에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있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돈이 내 바깥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저 돈일 뿐입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내 바깥에 머물러 있을 때는 배우자이고 자녀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속으로 들어오면 썩은 시체로 변하게 됩니다. 바깥에 있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내 속에 들어오는 순간 썩은 시체로 변하면서 나의 속 전체를 더럽게 만듭니다. 방금 태어난 아기는 순진무구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그 아기를 속으로 받아들일 때 아기는 부모의 마음을 더럽히는 썩은 시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의 속은 오직 영원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영원 속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삶은 영원 속에 계시는 하나님 생각의 기운에 취해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민들조차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한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겉에 두어야 할 세상을 속에 가득 담게 되었던 것입니다. 속이 영원으로 연결되어 영원함 속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채워진 선민들을 위해 제공하신 것이 바로 구약의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의 번제단에서는 날마다 어린 양이 죽었습니다. 매일 번제로 바쳐지는 어린 양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나를 어린 양으로 규정합니다. 번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은 각이 떠집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조각나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조각난 양은 번제단에 오르고 불살라져 재가 됩니다. 또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불살라져 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속에 담은 세상을 어린 양과 동일시하라고 성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선민들이 세상 것으로 가득 차서 죽은 사람의 시체와 뼈로 채워진 속 상태를 손대려고 고치려고 죽이려는 비판적인 자기 부인의 과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정화 사건을 앞으로 끌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어린 양과 나를 동일시해 몸이 조각나서 불살라지는 것처럼, 세상으로 채워져 있는 내 속이 조각나고 번제단에서 불살라져 없어지고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겉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몸이 만나는 환경과 상황의 개선을 위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 첫 번째 표적으로 제시된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겉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잔칫집의 음식을 먹듯이 속으로 받아들여 먹으라는 것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상황의 개선을 위해 하나님을 염두에 두거나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하나님을 믿으려는 것은 종식되어야 할 겉 믿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도 율법이나 계명처럼, 정결의식의 물처럼 바깥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바깥에 두고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은 몸의 겉을 씻지만 포도주를 마시면 그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인격적 요소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고 겉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본문이 성전정화 사건을 앞당겨서 말씀하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전달해주시고자 하는 바는 절대로 삶의 상황이라는 겉의 차원에 예수님을 모셔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겉의 차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자주 예로 드는 스데반 집사님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순교 현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의 속은 하늘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먹고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겉은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속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우리는 겉의 상황이 개선되기를 바라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겉의 상황이 개선되기를 원할 수 없는 것은 돌에 맞아 죽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속에 임하는 것이지 겉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첫 번째 빛으로 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를 규정하는 첫 번째 너의 자리에 모실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겉으로 만나는 세상이 속에 들어와 있는 상태가 성전의 어린 양처럼 죽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나게 되면 속에는 은혜와 진리가 임하고 겉으로는 좋음과 싫음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겉 믿음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구약의 선민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전부 겉 믿음이었습니다. 겉 차원의 상황이 변화하고 개선되고 형통해지는 것을 원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면서도 이것이 칼로 자르듯이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와 구원과 모든 좋음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겉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으로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든지 다윗처럼 왕이 되든지 그것은 좋음도 싫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필요한 뜻이 이루어져 갈 뿐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이자 장갑으로써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우리가 가져야 할 실질적 좋음으로써의 은혜와 진리와 모든 좋음의 충만함은 오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영접은 겉의 차원이 아닌 속의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요한은 2장 전체를 통해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5절에서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속에 세상이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그리스도로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아버지로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가 우리의 심령에 깊이깊이 박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믿음은 오직 속의 차원에서 좋음을 찾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잔칫집에서 음식을 먹듯이 하나님 아버지를 먹고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겉 차원에서는 돌에 맞아 죽든지 왕이 되든지 오직 아버지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유일한 빛이자 유일한 너의 자리에 영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으로 가득 차서 회칠한 무덤 같았던 우리의 속이 완전히 죽어버리고 새로운 속으로 준비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속이 하나님 아버지로 채워지게 하시고 포도주 기운이 퍼져나가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이 나타날 수 있는 삶이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