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바쁘게 일을 마치고 가방 지퍼도, 우산도 고장난 채로 대전역에 도착했습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우산도, 가방도, 옷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채로 가는 게 맞을까 고민했지만, 열심히 달리는 60번 버스와 함께 호숫가마을도서관으로 향했어요.
60번 버스에서 같이 내린 규민, 준혁과 함께 도서관에 다가가자 아이들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선생님이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떡볶이랑 볶음밥 만들고 있어요! ← 배고팠던 저는 이 말에 '맛있겠다'라고 혼잣말했답니다
도서관 복도에 앉아 어색한 분위기를 푸려 셋이서 대화하고 있던 중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라는 말과 함께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은은한 오렌지색 조명과 난로, 비밀 기지로 딱일 것 같은 아래 공간, 그 주변에 둘러앉은 아이들과 어른들.
저는 1명이 앉을 수 있다는 난로 주변으로 쪼르륵 달려갔습니다.
앉자마자 '와플대학에서 일하면 와플 많이 먹어요?'하는 은성이의 질문에 핸드폰 갤러리의 와플 사진을 주르륵 보여주었습니다.
자주 가던 와플대학이 망해서 이젠 못 먹는다는 민채의 말에 당장이라도 와플을 구워주고 싶었지만 기계가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처음 보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친숙하게 대할 수 있나, 의문이었는데 면접을 시작하기 전 '아이들과 함께 자기소개서를 이틀 동안 분석했다던' 선웅 선생님의 말을 근거로 납득할 수 있었답니다.
면접은 책상에 둘러앉아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시작했어요.
이름과 학년, 좋아하는 것과 이번 여름 방학에 하고 싶은 것까지.
저는 책을 좋아했었고(지금도 좋아하지만), 요즘은 뜨개질을 좋아하고, 여러분과 같이 연기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연기, 연극이라는 말에 밝은 표정을 짓지는 않는 모두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비밀입니다.
좋아하는 색상(두 번이나 잘못 알아들어서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호숫가마을을 알게 된 계기나 이 공간이 좋은 이유, 존경하거나 닮고 싶은 사람, 좋아하는 캐릭터, 동물이나 음식 등등...
딱딱한 면접이면 어쩌지, 말을 잘 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고민했던 저는 소중히 질문하고, 진중하게 답하고, 집중하며 경청하는 모두의 모습에 점점 긴장이 풀렸습니다.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질문을 듣고 떠오른 말을 일부러 더 꾸미지 않고 말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면접에서도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대화를 하는 느낌이 들어 앞으로의 생활도 이런 느낌일까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면접이 끝나고 저는 제 이름을 적어준 아이를 찾아다녔어요.
사실 저는 19살 때 이름을 바꿔서 지금의 이름은 직접 지은 이름이에요. 그런 이름을 예쁘게 꾸며준데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혹시 내 이름 적어준 게 누군지 알아? 고맙다고 하고 싶어.'
이 한 마디에 열심히 찾아준 1학년 친구, 이름을 적어준 친구 모두 고맙습니다.
열심히 이름을 적었다던 친구에게는 감사 인사와 함께 악수를 했어요. (이름을 다 못 외워서 미안해요)
한 명씩 집에 돌아가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민정 선생님의 말에 따라 은성이와 우노를 딱! 한 판만 하고 정리했답니다.
여름방학에 또 오게 되면 누가 더 잘하는지 겨루기로 했어요.
그렇게 숙소에 돌아와 선웅 선생님과 잠시 대화하고, 잠에 들었어요.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대청호를 향해 걸었습니다. 신발이 젖을 거라고 준비해주신 크록스를 신었는데 발이 까졌답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발이 까지진 않았냐고 물어보시고, 그냥 운동화를 신으라고 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하신 선웅 선생님의 말에 감동했어요.
까진 발은 첫 호숫길 트래킹의 훈장, 뭐 그런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복숭아 향이 나는 오설록 녹차와 함께 어제,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를 나누다 선웅 선생님께서 제게 책을 건네주셨습니다.
이제 어디서도 팔지 않아 제게도 얼마 남지 않았다던 책을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학생에게 건네주시는 그 마음이 너무 기뻤어요.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답니다.
호숫가마을에서의 1박 2일은 인정(人情)에 감사하고, 마을에 함께 하기 위해 인정(認定)받는 시간이었다고 느꼈습니다.
앞으로도 인정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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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이가 찍어준 사진 3장과 함께 이 글을 끝냅니다 |
첫댓글 아 좋아라
글을 읽는데 마음이 무지 따뜻해진다..
지안아 환영해 축복해 :-)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던 저녁에 하영이 해준 말 덕분에 맘을 다잡을 수 있었어! 너무 고마워🤗
[인정(人情)에 감사하고, 마을에 함께 하기 위해 인정(認定)받은 호숫가마을에서 꿈같은 1박 2일]
얼마나 좋을까요. 잊지 못할 면접과 아름다운 만남 고맙습니다. 축하합니다.
잘 못 들으시지만 따뜻한 분이로군요 ㅎㅎㅎ (농담…입니다)
동건이 엄마 임은정입니다.
환영합니다.
마을에선 오히려 잘 못 뵐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