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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행 지 : 팔공기맥 5차(자주고개~한티재) 경북 영천시, 대구광역시. 경북 군위군.
산 행 일 : 2023. 06. 10.(토)
산행코스 : 자주고개/잦이재(919번 지방도) ~ 상주영천고속도로 ~ 280봉 ~ 332.3봉 ~ 도립공원 표지석 ~ 505봉 ~ 시루바위 ~ 시루봉(726m) ~ 헬기장(840m, 군사도로) ~ 995봉 ~ 군부대 펜스 ~ 청운대(1122m) ~ 팔공산하늘정원 ~ 떡바위/시루바위/맷돌바위 ~ 비로봉(1193m) ~ 오도재/느지미재 ~ 서봉/삼성봉(1150m) ~ 1087봉 ~ 백운대(암봉) ~ 가마바위봉(1054봉) ~ 마당재 ~ 신무능선분기봉(978m) ~ 장꼬방봉(994m) ~ 파계봉/물불봉(991.2m) ~ 들뫼능선분기봉(935m) ~ 파계재 ~ 한티재갈림봉(834m) ~ 한티재(700m, 79번 지방도) (16km, 9시간 소요)
산행참석 : 17 백두.
▶ 중군(中軍)은 오은사 주차장에서 도로 따라 헬기장으로 이동하여 산행 : 2.2km + 11.4km.
<산행지도>
군위군과 영천군의 경계인 자주고개에서 시작하는 팔공기맥 5차 구간은 우측은 종점인 한티재까지 군위군이 이어지지만, 좌측은 비로봉에서 영천군에서 대구시 동구로 바뀌고, 다시 삼갈래봉에서 칠곡군으로 바뀌어 한티재까지 이어진다.
등로는 자주고개에서 비로봉까지의 1,000m의 고도차를 극복해야 하하는 구간으로 군부대가 자리한 봉우리까지의 등로는 정규 등로가 아니어서 거칠고 잡목과 넝쿨이 많은 곳도 있는데, 상주영천고속도로를 건너는 생태통로 전.후는 어린 나무들이 빼곡하여 길흔적이 보이지 않으므로 야간산행 시에는 주의해야 하고, 시루봉 부근은 밧줄을 잡고 오르내려야 하는 암봉과 절벽을 통과해야 하므로,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군부대가 자리한 주봉은 우측 하늘정원으로 우회하여 통과하는 게 좋으며 이후 종점인 한태재까지는 정규 등산로여서 등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다만 서봉을 지나 가마바위봉까지의 톱날능선은 날카로운 바위 암릉을 통과해야 하므로 체력소모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팔공산이 대구를 품에 안고 우뚝 솟아있어서 날씨가 허락한다면 팔공기맥을 따라 이어지는 봉우리와 암릉에서의 조망이 빼어나며, 특히나 그다지 기대를 갖지 않았던 시루봉은 팔공산의 숨겨진 보석이므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오른다면 멋진 추억으로 남겨질 것이라 생각한다.
16년 전, 2007년에 새해 첫 산행으로 팔공산 산행을 했었는데, 자욱한 안개구름 속에서 상고대가 아름답게 피어난 팔공산 능선을 헤매었던 기억만 있는 산이여서 이번 팔공기맥 산행에서는 필히 청명한 날에 팔공산 능선을 걸어보리라 기대하며 6월 첫 산행으로 팔공기맥 팔공산 구간 산행을 진행하기로 했다. 6월 초순이면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라 날씨가 맑을 확률이 높고, 무더위도 시작되지 않으리라 기대했는데,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5월 초부터 벌써 산행하기에는 덥다고 느껴질 정도로 더위가 일찍 시작되어 금번 팔공산 산행이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산행을 일찍 시작하여 고도를 높이면 기온이 그리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팔공산 주능선에서 펼쳐질 멋진 조망을 기대하며 양재에서 산행 버스에 오른다.
자주고개에서 팔공산 정상까지는 1천 미터의 고도를 극복해야 하고, 자주고개에서 군부대가 차지한 산성봉까지는 등로가 거칠다. 그래서 팔공기맥을 걸어야 하는 이유를 가진 분들은 자주고개에서 출발하고, 조금 여유로운 산행을 하려는 분들은 자주고개가 아닌 대형 버스의 운행이 가능한 오은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군 임도를 따라 하늘정원 입구로 진행하여 팔공기맥 산행에 합류하기로 한다.
양재를 출발하여 쉼없이 달리던 버스가 멈추었다는 느낌에 눈을 뜨니 어느새 자주고개에 도착해 있다. 평소와 달리 곤한 잠에 취해 있던 터라 쉬이 떠지지 않는 눈을 뜨고 산행 준비를 하여 버스를 내리니, 모두 5명이 렌턴을 밝히며 달콤한 새벽잠 대신에 힘겨운 팔공산 뿌리에서 꼭대기까지의 산행에 도전하기로 한다.
자주고개 남쪽으로 구름에서 막 벗어나는 달빛이 상주영천간 고속도로 가로등 불빛과 영역 다툼을 하고 있어서 오늘 산행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하는데,
동산계곡 입구에서 B팀 출발지인 오은사 주차장까지의 임도가 가파르고 굴곡이 심하므로 날이 밝으면 진입하라고 기사님께 부탁하고는, 오은사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분들을 태운채 자주고개 한켠에서 다소곳이 기다리는 버스를 남겨두고,
군위군 산성면과 영천시 신녕면을 잇는 919번 지방도 군위군 표시판 건너편의 자주고개 팔공산 방향 들머리로 가서,
<자주고개(215m)>
경북 군위군 산성면 백학리 갓골과 영천시 신녕면 지산리 동지목골 사이의 고개로, 919번 지방도가 지나가고 상주영천고속도로의 군위영천휴게소가 위치해 있다. 지도에는 '자주고개'로 표기하고 있으나, 인근 마을 사람들은 모두를 '잦이재(잦이고개)'라 하는데, 아마도 '잦이고개'가 변음되어 '자주고개'로 표시된 듯 짐작된다.
치산리(雉山里)는 마을 주위의 지형이 마치 꿩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하며 붙여진 이름이다.
'자주고개' 표지판이 걸린 곳에서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등로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선답자의 산행기에서 봤던 들머리가 기억나서 우측 30미터 지점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 상황이라,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대충의 방향만 잡고 수플을 헤치며 팔공산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팔공산(八公山, 1,213m)>
대구광역시 동구, 군위군,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칠곡군에 걸쳐있는 해발 1,192m의 산으로, 1980년 5월 13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23년 5월 23일 23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팔공산의 옛 이름은 공산(公山)·부악(父岳)이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중악(中岳)에 비겨 중사(中祠)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팔공산은 부악(父岳), 중악(中岳), 공산(公山), 동수산(桐藪山)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원래 명칭은 공산(公山)이었지만, 공산 전투에서 위왕대사(爲王代死)의 고사로 유명한 신숭겸을 비롯하여 김락과 김철, 전이갑, 전의갑 형제와 그 사촌 동생인 전락, 개국 공신 평장사 호원보와 대상 손행을 포함한 8명의 장수가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하여 공산의 명칭이 팔공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팔공산 인근 곳곳에는 당시 전투에서 유래한 지명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오악 중 중악을 담당했으며, 제사의 대상이 되었는데, 신라인들이 "아버지의 산[부악(父岳)]" 또는 "중심이 되는 산[중악(中岳)]"으로 신성시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산이다.
팔공산은 봉황의 모습으로 대구분지를 감싸는 대구의 진산(鎭山)이다. 최고봉인 비로봉(1,192미터)이 봉황의 머리이고, 동봉(1,167미터)과 서봉(1,150미터)이 솟아오른 봉황의 날개라고 한다. 동화사 자리가 봉황의 아기궁이라서, 겨울에도 오동나무 꽃이 필 정도로 따뜻하다.
예로부터 불교문화의 중심지여서 수많은 사찰들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사찰로는 동화사, 은해사, 선본사, 송림사, 파계사, 부인사, 북지장사, 환성사, 거조사, 관암사, 관음사, 삼존석굴사(제2석굴암, 군위석굴암) 등이 있다.
잡초에 덮여 등로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잡목숲을 더듬어 능선 마루로 올라 상주영천고속도로 생태통로를 들어서다가 사진을 찍으려 휴대폰을 찾는데, 있어야 할 앞주머니에 휴대폰이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던 들머리에서 떨어뜨린 것으로 짐작하고 두규형 스마트폰을 빌어 발신을 하며 들머리로 돌아가니, 스마트폰 진동 소리가 들려온다. 천만다행으로 핸드폰을 찾아 상주영천고속도로를 건너는 생태통로로 들어서고,
<상주영천고속도로>
경상북도 상주시와 영천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로, 서산영덕고속도로의 지선으로 노선 번호는 301번이다. 특이하게도 횡축이면서 노선 번호 맨 끝 자리가 짝수인 2가 아니라 홀수인 1인 것은 노선 번호가 30번인 서산영덕고속도로의 지선이므로 30 뒤에 1이 붙어 301번인 것이다. 이 고속도로는 수도권 각지에서 울산, 포항, 경주 등 영남 동해안 도시를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2012년 6월 28일에 착공되었으며, 서산영덕고속도로와의 중첩 구간인 낙동분기점~상주분기점 구간이 2016년 12월 26일에 서산영덕고속도로 상주분기점~영덕나들목 구간과 함께 먼저 개통되었고, 나머지 상주분기점~영천분기점 구간은 2017년 6월 28일에 개통되었다. 사업은 수익형 민간투자사업으로 진행되어 상주영천고속도로주식회사가 건설하였으며 총연장 9km, 총사업비는 2조 2,300억으로, 교량 111개, 터널 6개, 휴게소 2개, 분기점(JCT) 4개, 나들목(IC) 4개 등이 설치되었다.
여담으로 이 고속도로는 927년에 후백제의 왕 견훤이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공격할 때 지나갔던 경로와 비숫하다. 당시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고려군과 신라군은 후백제군의 측면을 공격하였지만, 견훤은 신라의 근품성(지금의 경북 문경시 산양면 일대)을 빼앗은 뒤 경북 북부로 진격하려던 것 같던 군사를 남동쪽으로 돌려 고울부(高鬱府)(지금의 경북 영천시)를 습격하고, 신라의 왕도인 서라벌(지금의 경북 경주시)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서라벌 입성에 성공한 견훤은 신라 국왕이었던 경애왕을 죽이고 대구 팔공산 인근에서 왕건을 만나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대패시킨다. 물론 이때 고속도로 같은 건 없었고 이 길에 있는 산을 다 넘어서 지금의 경주로 쳐들어간 건데, 견훤 입장에선 엄청난 기동전이었다.
우측으로 보이는 군위영천휴게소 영천 방향 불빛.
식재된 소나무와 잡목이 빼곡한 상주영천고속도로 생태통로를 건너 절개지 우측 가장자리를 따라 올라,
절개지 사면 상단에 오르면 우측 능선으로 제법 뚜렷한 길흔적이 이어진다.
캄캄한 숲속에서 그나마 사람의 흔적이라 사뭇 반갑기까지 한 묘지를 한두 차례 지나며,
나무를 베어 꾀나 넓은 공터를 조성해 놓은 271봉에 올라 우측으로 진행하고,
어린 소나무숲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길흔적으로 더듬으며 작은 봉우리를 연속으로 넘는데,
어두운 밤길에서 모처럼 만난 표지기가 무척이나 반갑고,
290봉쯤을 지나면,
우거진 능선으로 사뭇 호젓한 느낌까지 드는 등로가 이어진다.
적막한 숲길에서 만나는 표지기가 반가운 기맥길을 따라,
우측 치산리 방향 사면으로 벌목이 되어 시야가 트이는 능선으로 접어드니,
좌측 공산폭포가 있는 치산계곡 건너편으로 팔공산 신령봉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투구봉이 있는 능선이 멋지게 조망되고,
한때 과수원으로 조성된 넓은 공터로 나서는데, 잡풀이 무성하여 식재된 과수 묘목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고 앞쪽으로는 가야 할 팔공산 산성봉/공산성봉에 자리한 군부대 불빛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묵밭을 지나서 능선을 차지한 모과나무 과수원 좌측으로 이어진 수레길을 따라 오르는데 앞쪽으로 높다랗게 보이는 팔공산 산성봉이 올라야 할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모과나무밭 옆 수레길을 따르면 팔공산둘레길(9,10구간) 이정표가 있는 치산고개 임도를 가로질러 건너편 수레길로 오르게 된다.
<치산고개>
치산고개는 군위군 산성면 백학리와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가 갈리는 시·군 경계이면서 팔공기맥이 지나는 고개이다.
<신녕면(新寧面)>
영천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11법정리 25행정리를 관장하고 있으며, 면 소재지는 화성리이다. 신녕이라는 명칭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지금에까지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쪽은 노고산(老姑山, 560m)을 경계로 화산면(花山面), 서쪽은 팔공산 (八公山, 1,193m)·시루봉 등의 연봉을 사이에 두고 군위군 산성면(山城面), 남쪽은 매산(梅山, 416m)을 경계로 청통면(淸通面)과 대구광역시, 북쪽은 화산(華山, 828m)·갑령(甲嶺) 등을 경계로 군위군 삼국유사면(三國遺事面)에 접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의 주곡농업 외에 신녕 양파가 널리 알려진 특산물이며, 치산리(雉山里) 팔공산 북쪽 기슭의 수도사(修道寺)가 절경을 이루며, 갑령(갑티재)은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의 전승지이다.
<치산리(稚山里)>
신녕면의 서부에 위치하며, 서쪽이 팔공산(八公山)과 시루봉(726m)의 급사면이며, 계곡 사이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합류하여 치산계곡으로 흐르면서 형성한 공산폭포(치산폭포)는 팔공산의 여러 폭포 중 가장 웅장하다고 알려져 있다. 치산리(稚山里)는 마을 주위의 지형이 마치 꿩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하여 ‘치산’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치산리는 치산1리·치산2리·치산3리 등 세 개의 행정리가 있고, 자연 마을로는 신시암·진곡·중리·양지말·동지 마을 등이 있다.
치산고개의 팔공산 둘레길 이정표.
수레길을 따라 묘지를 지나 빼곡한 소나무숲 능선으로 올라,
371봉에서 좌측으로 꺾어 소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팔공산 산성봉의 불빛을 향하면,
김해김공 함장묘와 울창한 소나무 숲 안부를 지나서 오르게 되고,
또 다른 371봉에 올라 좌측으로 휘어져 이어지는 기맥길을 따라 오르면,
이곳부터 팔공산 도립공원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지나 오르게 된다.
<팔공산도립공원(八公山道立公園)>
1980년 5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 122.1㎢(대구(군위군 포함) 52.3㎢, 칠곡군 29.7㎢, 경산시 10.6㎢, 영천시 29.0㎢)로, 팔공산(1,193m)은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缶溪面)과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新寧面)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동봉(東峰, 1,155m)과 서봉(西峰, 1,041m)의 양 날개를 펴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염불봉(念佛峰)·수봉(壽峰)·인봉(印峰)·노적봉(露積峰)·관봉(冠峰) 등이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파계봉(把溪峰)을 넘어 가산(架山)에 이른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9교구 본산(本山)인 동화사(桐華寺)를 비롯하여 은해사(銀海寺) ·파계사 ·부인사(符仁寺) ·송림사(松林寺) ·관암사(冠岩寺) 등이 있고, 비로 ·부도(浮屠) ·양진(養眞) ·염불(念佛) ·거조(居祖) ·백흥(白興) ·운부(雲浮) ·묘봉(妙峰) ·중암(中巖) ·내원(內院) 등의 암자가 산재한다. 국보 제14호인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靈山殿), 국보 제109호인 군위 삼존석불을 비롯하여 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 ·동화사 당간지주의 금당암(金堂庵) 3층석탑 ·비로암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운부암 청동보살좌상 등의 보물 9점, 가산산성(架山山城) 등의 사적 2점, 그 밖에 30개소의 명소가 있다. 팔공산의 북쪽 사면에서는 위천(渭川) ·남천(南川) 등이 발원하고 남쪽 사면에서는 문암천(門岩川)이 흘러 금호강(琴湖江)으로 흐른다. 동화사 근처에는 자연공원이 있어 공중케이블카 등 위락시설을 갖추고 있다.
2023년 5월 23일부로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군위군의 대구 편입으로 인해 팔공산 비로봉 정상이 2023년 7월 1일부터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에 속하게 된다.
묘지를 지나 숲길로 들어 오르다가,
빼곡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춰오는 아침햇살이 거친 기맥길을 더듬느라 심란했던 마음을 말끔하게 씻어주고,
밀양박씨 묘지를 지나 오르면,
이내 준.희 님의 산패가 걸린 501.3봉(개념도 상 505봉)을 지나게 된다.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시루봉이 도전자의 기를 꺾어놓을 요량인 듯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서고,
좌.우로 길흔적이 있는 안부를 지나 원시림의 느낌이 드는 직진의 오름길로 들어서면,
지금까지의 다소간 완만했던 능선 오름길과는 달리 코가 닿을 듯한 급경사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밟으면 아래로 줄줄 미끄러져 내리는 급경사의 쇠석지대를 오르게 되고,
족적이 사방으로 얽혀 혼란스러운 사면에서 잠시 혼선을 겪다가 넝쿨이 우거진 급경사 너덜지대를 통과하여 오르는데,
돌아본 치산리 방향 멀리에서 지난 구간에 지났던 화산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치산리(稚山里)>
치산리(稚山里)는 신녕면의 서부에 위치하며, 서쪽이 팔공산(八公山, 1192.3m)과 시루봉(726m)의 급사면이며, 계곡 사이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합류하여 치산 계곡으로 흐르면서 형성한 공산폭포/치산폭포는 팔공산의 여러 폭포 중 가장 웅장하다고 알려져 있다. 치산리(稚山里)는 마을 주위의 지형이 마치 꿩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하여 ‘치산’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치산리는 치산1리·치산2리·치산3리 등 세 개의 행정리가 있고, 자연 마을로는 신시암·진곡·중리·양지말·동지 마을 등이 있다.
서 있기조차 힘든 가파른 사면을 네 발로 기어오르다가,
막아서는 바위절벽을 만나 빛바랜 표지기에 이끌려 우측으로 진행하면,
가녀린 로프가 드리워진 꾀나 높아 보이는 절벽을 올라야 하고,
혹여 끊어질세라 한 사람씩 조심하여 시루봉인가 하고 올랐는데,
아직 절벽의 중간 정도밖에 오르지 않은 상태인데 바로 오르는 등로가 보이지 않아 희미한 족적을 따라 우측으로 이동하니,
절벽 중간지점에서 다시 절벽 위로 오르는 길 우측의 전망바위 방향으로 많이 걸린 표지기를 따라 나가니,
네댓 명이 앉아서 쉬기에 더없이 좋은 전망바위가 나오기에 잠시 커피를 나누며 쉬어가기로 한다.
잠시 후 오를 헬기장봉에서 북서쪽으로 분기된 매봉분맥의 봉우리들 조망.
동북쪽 산성면 백학리와 조림산 방향.
커피잔을 기울이며 전망을 즐기다가 표지기가 걸린 곳으로 돌아 나와, 드리워진 밧줄을 잡고 한번 더 절벽을 오르면,
시루봉 전위봉인 시루바위에 오르게 되는데, 잘라놓은 듯이 보이는 사각기둥모양 바위 2개가 있는 좌측 가장자리에 서니 지난 구간에 올랐던 화산 위로 아침해가 떠올라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고,
돌아본 치산리와 화산 방향.
작은 암봉 정도로 짐작했던 시루봉 전위봉인 시루바위 정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인 듯 넓은 암반으로 되어 있다.
시루바위 정상부 암반을 가로질러 가면 암봉을 내려서는 밧줄이 메여 있는데, 시루바위에서 내려서는 길은 먼저 약 5m 높이의 직벽 단애를 밧줄을 잡고 내려선 다음에, 다시 절벽 중간 소나무에 메인 밧줄을 잡고 한번 더 내려서야 한다. 두 군데에 설치되어 있는 밧줄을 잡고 내려서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으나, 밧줄을 놓치거나 하면 바로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첫 번째 밧줄을 잡고 한분씩 직벽을 내려서는 백두들.
밧줄 없이 암릉을 약간 내려가다가,
다시 두 번째 밧줄을 잡고 시루바위 직벽을 내려서는 백두들.
시루바위와 시루봉 사이의 바위틈 안부를 지나 절벽 우측을 따라 잠시 진행하다가,
돌아본 시루바위 내림길 절벽 모습.
좌측 바위절벽 사이로 늘어뜨려진 한가닥 밧줄을 잡고 다시 오르면,
시루봉 정상부 숲으로 오르게 되고,
참조팝나무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는 숲길이 이어지는데,
우측으로 바위 절벽을 좀 더 쉽게 오르내릴 수 있을 듯이 보이는 길흔적을 지나면,
비스듬한 시루봉 정상부 중앙에는 묵묘 1기가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 기울어진 시루봉 정상부의 북쪽 가장자리에 오르니, 작은 자연석 정상석이 산꾼을 맞이해 준다.
<시루봉(甑峰, 726m)>
경북 군위군 산성면 백학리와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의 경계인 팔공산 지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모양이 시루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증봉(甑峰)이라고도 한다.
시루봉 정상석.
시루봉 정상에서 본 조림산 방향.
북쪽 의성군의 비봉산과 금성산 방향.
시루봉 정상부를 화원으로 만들고 있는 참조팝나무꽃 군락.
"팔공산의 숨겨진 보석'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멋진 시루봉 정상부를 뒤로하고 녹색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앞쪽으로 오은사에서 출발한 분들과 만나 함께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 매봉분맥 분기점인 헬기장이 조망되며,
우측으로는 헬기장에서 분기한 매봉분맥 능선이 건너다 보이고,
온갖 풀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시루봉 정상부 화원을 가로질러 가장자리로 진행하면,
시루봉 서쪽 가장자리에 공산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담 뒤쪽 절벽을 밧줄을 잡고 내려서게 되는데,
<공산성의 흔적?>
이곳 팔공산은 수많은 전쟁의 아픈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와 후백제의 다툼, 몽고군의 침입,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하여 부산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대구 쪽으로 몰려올 때, 강토를 유린하고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일삼는 왜적을 섬멸하고 조국과 겨레를 지키고자 주변 고을의 선비 사대부들이 팔공산에 모여들어 구국 의병을 일으키기로 맹세한 것이 바로 공산회맹이다. 이때 회맹한 의병장은 대구, 상주, 밀양, 영천, 하양, 흥해, 청송, 청도, 영일, 울산의 수십 명이었다. 임진 7월, 신녕의 권응수 장군은 각 고을 의병장들을 거느리고 군사교통의 요충인 영천성 수복작전을 전개하여 3천5백의 창의정용군이라 이름한 구국충절에 불타는 군대로 영천성을 공격하여 화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 휴정으로부터 팔도의 승려들이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받고 영규, 처영, 사명당 유정 등이 승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용감히 싸웠다. 동화사에는 영남 승군 사령부를 두어 사명당 유정선사가 승군 총섭(사령관)이 되어 승군을 훈련하고 이들을 지휘하여 공산성을 수축하고 이 지역을 수호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들이 재침략했을 때도 이곳 팔공산성은 민초들을 지켜준 곳이다.
팔공산 전쟁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2대 전투가 유명한데, 그 하나는 신라말 후삼국을 통일하는 통일전쟁 시에 신라 수도 경주를 전광석화처럼 함락시키고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세운 후 국보, 인재를 약탈하여 개선길에 오른 후 백제 견훤 군을 맞아 신라 구원군으로 달려온 고려태조 왕건의 5천 기병부대가 팔공산에서 싸운 동수대전이다. 여기서 왕건군은 전멸하고 왕건은 겨우 탈출했다. 이로 인하여 팔공산이 역사적인 전적지로 삼아 파군치, 왕산, 살내, 일인석, 지묘사 등 이 대전과 연관된 많은 지명을 남긴 것은 유명하다. 또 하나는 6·25 때에 북한 공산군의 결정적인 패전이 된 다부동 전투는 전쟁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공산군은 엄청난 전사자를 내어 시산혈해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팔공산 다부동 전투였다. 지금 그곳에는 참혹한 동족상잔의 자취는 없어지고 전적기념비가 서 있어 우리의 심금을 울려준다.
앞쪽에서 팔공산 산성봉을 바라보고 있는 멋들어진 소나무에 매인 밧줄을 잡고,
군 시절에 배운 제대로 된 자세로 절벽을 내려서서,
거대한 암릉 바위를 옆으로 우회하여 지나면,
능선길이 나타나며 이제 어려운 시루봉 구간을 통과하였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잠시 호젓하기까지 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바위 암릉이 있는 제법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면,
이내 다시 완만한 능선 오름길이 이어지고,
다시 또 가팔라지는 능선 오름길을 오르며,
그렇게 어렵잖은 능선길을 따라 고도를 높여 가다가,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교통호를 지나 오르면,
군용 도로 옆 매봉분맥 분기점인 헬기장(840m)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만나 아침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던 백두들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지만, 벌써 산행을 시작한 지가 3시간이나 경과한 상황이라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매봉분맥 분기점 헬기장>
팔공산 비로봉의 직전 봉우리인 산성봉(1,213m)을 차지한 군부대로 올라가는 시멘트 군사도로와 만나는 지점으로 헬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 헬기장은 팔공기맥에서 매봉분맥이 분기하는 지점으로, 매봉분맥은 이곳 군사도로 옆 헬기장에서 분기하여 송골봉, 344.7봉, 박태산, 매봉산을 거쳐 남천이 위천에 합수하는 지점까지 도상거리 약 27.8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곳까지는 대형 버스가 올라올 수 없어서 아래 2.2km 지점의 오은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오르기로 한 군용 임도 전경.
헬기장 옆 나뭇가지에 걸린 반바지님의 매봉분맥분기점 코팅지.
다른 분들은 어디에서 식사를 할까 궁금해하며 아침식사를 하는 백두들.
아침식사를 마치고 헬기장 옆 군 임도를 따라 좌측으로 50여 미티 정도 오르다가,
좌측 가드레일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서면,
거칠지만 제법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며 팔공기맥 산꾼을 응원하는 메시지도 걸려있고,
좌측으로 급경사의 절벽이 이어지는 울창한 소나무숲 암릉길을 따르는데,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지나온 팔공기맥의 화산과 보현산이 아득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암릉구조로 된 제법 가파른 능선 오름길을 오르면,
다소 편평한 작은 쉼터가 있는 955봉을 지나게 되고,
좌측이 가파른 절벽인 다소간 완만해진 울창한 소나무숲 암릉길을 따르다가,
또다시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1,009봉을 좌측으로 우회하여 오르게 되고,
이어지는 바위 암릉 우측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 오르게 된다.
울창한 숲으로 덮인 능선에 조각품인양 놓인 바위들을 감상하며 다소간 완만해진 능선 오름길을 따르면,
금슬 좋은 개구리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의 바위도 지나고,
좌측 치산계곡 건너편의 투구봉 능선이 멋지게 조망되는 조망바위를 지나게 된다.
<치산계곡>
팔광산 치산계곡은 봉화 고선계곡, 영덕 옥계계곡, 영양 수하계곡과 함께 경북 4대 계곡에 꼽히는데, 팔공산 정산인 비로봉에서부터 신령재(도마재)까지 약 3㎞에 달하는 능선에서 북쪽으로 부채꼴로 뻗은 골짜기에서 크고 작은 지류들이 모인 물줄기로 팔공산에서는 수량이 가장 많은 계곡이다. 그중 으뜸인 곳은 공산폭포인데, 3단으로 연결된 폭포는 공산폭포로 불리지만 치산폭포 혹은 수도폭포로도 불린다.
조망바위 우측 사면으로 군부대 정문 아래 도로로 이어질 듯 보이는 제법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지만 좌측 능선길로 오르면,
군부대가 자리한 산성봉/공산성봉 직전의 암릉봉(1097m)에 올라서게 되는데, 앞쪽으로는 개념도에 1,213m로 팔공산 최고봉으로 표기된 산성봉(공산성봉)에 자리한 군부대가 건너다 보이고 동쪽 화산 방향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팔공산의 최고봉은?>
우리가 참고하는 개념도에는 군부대가 자리한 산성봉(공산성봉)의 높이를 1,213m로, 비로봉의 높이를 1,193m로 표시하고 있고, 인터넷 지도에서 등고선을 비교해 보면 비로봉보다 산성봉이 20m 높은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등산 자료나 누군가가 국립지리정보원에 문의하여 얻었다는 자료에 따르면 비로봉이 1,192.9m로 1,190m인 산성봉보다 2.9m 높다고 한다.
국립지리정보원의 답변을 믿어야 할지, 지도에 표시된 등고선을 믿어야 할지, 군부대가 자리한 산성봉을 올라 실측하여 확인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쉬이 결론을 내기가 어려워 보인다.
돌아본 화산과 보현산 방향.
멋진 조망을 선사받은 1,097m 암릉봉은 바로 내려설 수 없어서 우측으로 돌아 내려서서,
절벽을 우회하여 다시 능선에 접속해서는 완만한 능선길을 잠시 따르면,
잠시 후 산성봉을 차지한 군부대 이중 철조망 펜스에 닿는데, 팔공산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산성봉(1,213m)은 신라시대부터 공산성이 자리잡고 있는 천혜의 요새로 지금도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우회하여 지나야 하는 지점이다.
산성봉을 차지한 군부대를 좌.우 어느 방향으로 우회하여도 되지만, 좌측은 철망 펜스를 따라 떡바위를 지나서 군부대 후문 아래 도로로 내려서게 되는데, 과거에는 중간중간 원형철조망이 진행을 막고 있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최근 들어 펜스를 새로이 설치하면서 진행이 다소간 쉬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우측은 펜스를 따라 군부대 정문 도로에 접속하여 하늘정원 탐방로를 따라 우회하여 군부대 후문 도로로 접속하게 되는데, 다소간 더 긴 거리를 우회하게 되지만 청운대와 하늘정원을 둘러볼 수 있고 대부분이 정규 등산로여서 진행하기가 수월해 보인다.
우리는 하늘정원 방향으로 우회하기로 하고 우틀하여 울타리를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다가,
군부대 정문 직전 능선 아래에서 우측으로 이어진 희미한 족적을 따라 숲으로 들어,
빼곡한 잡목과 넝쿨의 방해를 뿌리치며 희미한 길흔적을 따르면,
군부대 정문 앞 도로에 접속하여 건너편 철망울타리를 따라도 되지만,
그냥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다가,
인터넷 지도에 하늘정원 주차장으로 표시된 지점에서 좌측 하늘정원 방향 데크길로 진행한다.
자주고개에서 기맥길로 들어선지 거의 5시간여 만에 처음으로 정규 등산로에 접속하여 하늘정원 방향으로 오르다가,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 110m 떨어져 있는 청운대를 다녀오기로 하고,
직진의 하늘정원 방향 기맥길을 두고 우틀하여 오도암 방향으로 들어서면,
다시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 오도암 방향 714계단 내림길을 두고 우측 직진의 숲길로 들어서서,
돌담 울타리를 우회하여 잠시 더 숲길을 따르면,
오도암 뒤 원효굴이 있는 절벽 꼭대기인 청운대(1,122m)에 도착한다.
청운대에 도착하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팔공산의 정상 비로봉.
<팔공산의 지명 유래>
'공산'은 우리말로 곰뫼 즉 웅산이란 뜻이다. 고대에 곰은 신, 신성의 뜻을 가졌다.
곰나루가 공주가 되듯 '곰'이 '공'자로 표기되었다.
이렇게 '공산'이 팔공산으로 불리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설이 있다.
① 후삼국시대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에 고려 태조가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백제군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만나 포위를 당하였다. 그때 신숭겸(申崇謙)이 태조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태조가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신숭겸과 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였다 하여 팔공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설과,
② 팔공산의 중요한 여덟 봉우리(가산, 파계봉, 서봉, 비로봉, 동봉, 염불봉, 인봉, 관봉) 때문에 팔공산이라 했다 거나, 여덟 고을에 걸친 산이라 해서라는 설,
③ <원효대사 득도설화>로, ‘공산’ 앞에 ‘팔(八)’은 먼저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제자 8인이 공산에서 득도한 이래 팔공산이 됐다’는 설,(당시 공산으로 들어온 원효의 수도승 여덟 명 가운데 셋은 삼성암, 다섯은 오도암에서 득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④ <팔간자(八簡子)>설로, 신라 왕자 출신인 심지대사(心地大師)가 팔간자를 공산 동사(棟寺)에 봉안한 것을 계기로 공산이 팔공산으로 개명됐다는 전설(이 팔간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보살에게 받은 것)이 있다.
그러나 첫번째의 여덟 장군의 순절설을 보면 고려의 통일전쟁 시에 태조 왕건과 후백제 왕 견훤이 동수대전에서 격돌했을 때 신숭겸, 김낙 두 장군 외에 다른 장군의 순절 사실은 없었다 고 하며, 두번째의 여덟 봉우리 또는 여덟 고을에 걸쳐 있었다는 설은 조선초기에 생긴 팔공산의 이름 때문에 생긴 것으로, 조선초기 이후 공산은 해안, 하양, 신녕, 팔거, 부계 등 다섯 고을 즉 현에 걸쳐 있었지만 여덟 고을에 걸쳐 있지는 않았다. 세번째의 8 성인이 득도했다던 설은 원효의 제자 8인이 천성산에서 공산에 들어와 세 스님은 삼성암에서, 다섯 스님은 오도암에서 득도했다는 불교계의 전설이다. 마지막 네번째 팔간자설은 신라 헌덕왕자인 심지대사가 속리산에 가서 진표율사가 미륵보살로부터 받은 팔간자를 받아와서 공산 동사에 봉안한 사실에서 생겨난 불교계의 전설일 뿐이다.
그러면 팔공산 명칭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이것은 사대주의 모화 사상가들이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고 추정된다.
중국 안휘성 봉대현 동남비수의 북, 회수의 남에 위치한 팔공산에서 북조 전진왕 부견과 남조 동진 효무제 사이에 팔공산 비수에서 대전이 전개되어 부견왕이 참패한 고사와 유사성이 있어 그 고사에서 따다가 공산을 팔공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공산을 혹 팔공산이라고도 한다'라고 했다. <삼국사기>에 공산을 일명 부악(父岳)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악이란 '공(公)'자가 '부(父)'자와 닮은 자로 붓으로 베낄 때 혼동된 것이라고 보인다. 2천년간 공산이라 써오던 이름에 팔공산이란 이름이 후세에 생기게 된 것은 중국문화를 숭모해 온 사대주의 모화사상에 젖은 우리의 유학자들이 중국 역사사실의 유사성에서 붙인 명칭이 아닐까 한다.(이곳저곳에서 펌)
서봉에서 서쪽 가마바위봉과 가산 방향으로 이어진 가야 할 팔공기맥 조망.
우아한 모습으로 백척간두 바위절벽 꼭대기를 지키는 소나무가 멋진 청운대를 뒤로하고,
오도암 갈림길로 돌아나와 바로 우측 능선길로 들어서면,
여러 사람이 너끈히 쉬어갈 수 있는 널찍한 마당바위를 지나게 되고,
군부대 헬기장 옆에서 하늘정원 주차장에서 이어오는 정규 등로에 다시 접속하여 하늘정원 방향으로 진행하면,
좌측 화산 방향.
군부대 정문 앞에서 울타리를 따라왔으면 등로에 다시 접속하게 되는 지점에는 원형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고,
임도 수준의 널찍한 등로를 따라 하늘정원의 2층 정자인 중악루로 오르고,
<팔공산 하늘정원>
팔공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는 하늘정원은 6,000㎡의 넓은 공간에 다양한 쉼터를 조성해,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주변에 오도암, 비로봉, 동봉, 서봉 등 팔공산 봉우리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으로, 팔공산 정상 순례길의 출발지와 종착지 역할을 하고 있다.
2009년 비로봉 개방
2014년 하늘정원 준공
2015년 비로봉에서 북쪽 청운대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개방되고, 청운대 위에 ‘하늘정원’이라는 아담한 정원이 조성됐다.
군위군 부계면 동산계곡을 통해 정상 바로 아래까지 올라가는 시멘트 포장도로도 개방되면서 해발 1000m 넘는 지점까지 차로 편하게 올라갈 수 있게 됐다.
하늘정원 전경.
하늘정원 중악루에 올라 잠시 주변 조망을 즐기고는,
돌아본 청운대 방향.
북쪽 의성 비봉산 방향.
동쪽 보현산 방향.
하늘정원 전망대에 도착하여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팔공산의 이모저모를 두루두루 살핀다.
팔공산 하늘전망대에서 본 360도 파노라마.
<팔공산 비로봉에서 서봉(삼성봉)으로 연결되는 팔공산 주능선의 장엄한 산줄기>
“태백산맥은 없다”라는 책을 저술하신 조석필 님은 '산맥'으로 읽지 말고 '산경'(山經, 산줄기)으로 읽어야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산맥은 땅 밑으로 흐르는 지질 구조이고, 산경은 땅 위에 있는 그대로의 산줄기라고 했다. 산줄기 흐름을 족보로 파악한 것이 '산경표'(山經表)라는 저술이고, 그림으로 그린 것이 산경도라고도 했다.
'태백산맥은 없다'에는 산과 물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철리(哲理)를 하나 내걸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둘이 아닌 하나이나 섞일 수는 없다'는 말,
'남과 조화는 하되 혼동하지는 않는(和而不同)' 것이 군자라 했던 공자 말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했던 옛 조사 말씀이 연상됐다.
물이 시작되는 곳이 산 끝나는 곳이노라,
산은 물을 나누는 물가름이 되고(山自分水嶺),
물은 산을 구획 짓는 산가름이 되노라...,
산을 산맥으로서가 아니라 산경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산줄기에는 대간, 정맥, 기맥(岐脈) 등의 등급이 있다.
가장 중요한 맥은 백두산에서 출발해 동해를 따라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남으로 내려오는 백두대간이다.
대간은 태백 즈음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반도의 복부로 들어가 버린다.
대신 동해를 따라 계속 달릴 줄기를 하나 남겨 두니, 그것이 낙동정맥이다.
주왕산 단석산 가지산을 지나 신불산 천성산 금정산에 이른다.
팔공산으로 오는 줄기는 이 낙동정맥의 가지줄기 중 하나이다. 포항 죽장면의 '가사봉'(744m)에서 정맥을 빠져나와 달의령-꼭두방재 맥으로 그 고을을 가로지른다. 베틀봉(934m)~면봉산(1120.6m)을 거치며 죽장의 북부-서부 경계선을 이루고 보현산(1124m)에 도달한다. 팔공산에서 바라봐서 정북(正北) 기준 60도 방향에 허리 부분을 구불구불한 도로 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이 면봉산, 그 바로 앞의 것이 보현산이라고 했다.
거기서부터는 영천 화북면의 북서쪽 경계선을 만들며 갈재~방각산~노귀재를 거쳐 석심산(750m, 군위 고로면)에 이른다. 수기령-방가산(755m)을 지나 화산(824m)으로 오면서 영천과 군위를 경계 짓는다. 갑령재를 거치며 물길을 신령천과 위천으로 나눠 붙인다. 그리고는 드디어 신녕∼부계 사이 도로의 두 고을 경계점에 있는 재(일명 자주고개)를 통해 본격적으로 팔공산 덩어리로 들어선다.
팔공산에서는 그 맥을 받는 배꼽 격인 시루봉(726m)에서 급하게 치솟아 정상에 도달한다.
비로봉, 제왕봉, 혹은 중봉이라 불리는 그것이 주봉이다. 높이 약 1193m, 낙동정맥에서 빠져나온 이 가지줄기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이것이 팔공산의 태생적인 족보이다.
흔히 말하는 팔공산의 주능선은 가산(901m)에서부터 비로봉(1193m)을 거쳐 관봉(852m)에 이르는 구간으로, 도상거리가 약 20여 km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주능선은 그 끝 가산에서 3개의 줄기를 낸다. 한 줄기는 더 서쪽으로 달려 또 하나의 커다란 산군(山群)을 형성한 황학지맥과 북쪽으로 달려 의성 단밀까지 내리 뻗는다 했던 위천지맥이다. (대구매일 기사 펌)
팔공기맥의 비로봉, 서봉, 가마바위봉 한티재 방향.
서쪽 가산과 위천이 낙동강에 흘러드는 팔공기맥의 종점인 새띠 방향.
북동쪽 선암산 방향.
남쪽 군부대가 자리한 산성봉 방향.
팔공은 사방 수백 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정상에 서면 온 세상이 일망무제로 더 올려다볼 것이라고는 오직 하늘뿐이다.
하늘과 만날 수 있는 통로, 하늘의 뜻을 물으려 찾는 자리, 그곳이 팔공산이다.
팔공산은 우리가 수 천년을 기대어 살아온 산, 지금도 그렇게 함께 하는 산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산, 영원히 함께 할 우리의 산이다.
김유신은 거기서 핍박받던 나라 지킬 힘을 빌었고, 원효는 10년을 구도했다.
그렇게 신라는 팔공산에서 국가적인 대제(大祭)를 하늘에 올렸다.
많은 유학자들은 수행처로 삼았다.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품안을 찾아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스님들이 팔공산의 날개 밑을 둥지 삼아 가부좌 틀고 용맹정진 중이다.
그리고, 그렇고 그런 우리 중생들의 마음들도 끊임없이 쉼 없이 팔공산을 향하고 있다.
팔공산은 뭇 생명들을 그 오랜 세월 보듬어 왔고, 그들의 뜻과 고난을 지켜봐 줬다.
몽고군이 처절히 유린할 때는 민초들과 함께 아파했다. 왜군이 짓밟을 때는 의병을 감싸 안았다.
한국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나라를 지켰다.
공비들로 인해 동네가 화염에 휩싸이고 숱한 사람들이 죽어 가는 처절함을 지켜봐 왔고,
홍수와 산사태로 마을이 매몰돼 수십 호가 같은 날 제사를 모셔야 하게 됐던 참혹함에도
팔공산은 말없이 그 아픔을 함께 했다. (세상사는 이야기에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앞서간 백두들을 찾아 구름으로 덮여가는 하늘만 바라봐도 지겹지 않을 전망대를 뒤로하고,
하늘정원으로 내려서서,
군부대 울타리 우측으로 이어진 데크길을 따르면,
돌아본 하늘정원 방향.
앞쪽으로 가야 할 비로봉에서 날개를 펼친듯한 동봉과 서봉이 조망되더니,
<비로봉 가는 등로에서 바라본 동봉(東峰)/(미타봉)~비로봉~서봉 모습>
팔공산 정상부 서봉(삼성봉)~오도재~주봉(비로봉)~장군메기~동봉(미타봉)의 구성은 마치 삼각편대를 연상케 한다. 주봉이 조금 북쪽으로 물러앉았고 양 날개는 남쪽으로 나와 있어 더욱 그렇다. 그 세 봉우리 사이에는 두 개의 재가 있다. 서봉과 주봉 사이의 재는 '오도재'이고, 주봉과 동봉/미타봉 사이에 있는 재는 북사면의 백학마을 사람들은 '생부처메기'라 부르고, 남사면 사람들은 '장군메기'라고 했다. 생부처메기는 그곳에 높다랗게 서 있는 석불상에서 유래한 이름일 터이고, 장군메기라는 호칭에는 이곳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부르던 지역민들의 기억에서 나온 듯하다. 재 북쪽에는 '장군수'라는 샘도 있다고 한다.
이내 부대 후문 도로 접속하여 우측 비로봉으로 이어진 포장도를 따라 진행한다.
산성봉을 차지한 군부대 울타리를 따라 이어진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다가 모퉁이를 휘돌아 내려가서,
산성봉과 비로봉 사이의 안부를 지나 방송과 통신 안테나가 즐비한 비로봉 오름길을 따르면,
비로봉 아래 도로 좌측 편의 'TBC 팔공산 송신소'를 지나게 되고,
이내 'SK텔레콤 팔공산 기지국' 통신탑 앞에서 좌측으로 꺾어,
마침내 팔공산의 주봉인 비로봉으로 오르게 된다.
팔공산 비로봉은 1967년경 군사시설과 방송·통신시설 등 보안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2009년 민간에 개방되었다. 개방된 이후에도 팔공기맥 산꾼들이 진행하는 하늘정원 방향에서의 접근은 막혀있다가, 2015년쯤에 하늘정원에서 이어오는 도로를 막아서던 철망문을 제거하여 팔공기맥 산꾼들의 접근도 정상화되었다.
43년 동안이나 통제되었다가 팔공산 비로봉이 2009년 민간에 개방되었던 신문기사를 보면...
<2009년. 도민과 함께하는 팔공산 정상 비로봉(1192.8m) 개방 축하행사>
대구. 경북지역의 명산인 팔공산 정상 비로봉(1192.8m)이 2009년 11월 1일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한 지 43년 만에 지역민들에게 개방되어 축하행사를 가졌다. 대구시는 지난 6월부터 4개월간 사업비 1억 2천여만 원을 들여 등산객 통행을 위해 100여 미터의 3중으로 둘러쳐진 철조망을 제거하고, 300여 미터의 구간을 안전 휀스, 돌계단, 목재 휀스 설치 등 등산로를 새로 만들었다.
이번 행사는 '팔공산 비로봉 철책선을 걷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면서 팔공산 비로봉 개방의 당위성과 여론의 중심이 되어온 영남일보사와 대한산악연맹 대구시연맹, 대구등산학교가 공동 주최하고, 영남일보, 대구등산학교, 국악회 공동으로 주관하여 열렸다.
정상 개방 축하행사장에는 김범일 대구시장, 공원식 경상북도 정무부지사, 유승민 국회의원, 우병윤 경상북도 해양산림국장, 정해용 대구시의원, 군위군 곽진욱 부군수 등 정 관계자들이 참석하였고,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 히말라야 14좌 완등자 한왕용 씨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산악인 500여명과 천여명의 일반 등산객이 참여했다. 이날 행사는 비로봉 아래 약사여래불입상이 있는 헬기장에서 축하 기념식을 가지고, 철조망제거 퍼포먼스, 비로봉 정상에서 무사안녕의 천신제를 올리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팔공산 비로봉은 지난 1967년경 군사시설과 방송·통신시설 등 보안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던 곳이다.
돌아본 청운대와 하늘정원 방향.
넓은 공터를 가로질러 동봉 방향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가면 좌측으로 비로봉 오름 계단길 옆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비로봉을 향해 바위 계단을 오르는데,
돌아본 서봉 방향.
등로 우측 '팔공산 제천단' 표석 앞에는 등로 보수작업을 하던 분들이 쉼을 하고 있고,
우회하여 지난 공산봉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지만, 이곳 비로봉 정상은 KT 중계소를 비롯하여 KBS, MBC, 등등의 여러 통신과 방송국 중계탑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고,
43년이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2009년에 개방되어 동봉을 제치고 팔공산 최고봉의 지위를 되찾은 비로봉 정상에 도착한다.
<팔공산 비로봉(八公山 毘盧峰, 1,193m)>
대구시 동구와 경북 영천시 신녕면, 군위군 부계면, 칠곡군 가산면에 걸쳐 있는 팔공산은 1980년 도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23년 5월 23일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고, 대구/경북 경계의 팔공산맥(약 20Km)으로 대구분지의 북부를 병풍처럼 가리고 있다. 팔공산의 옛 이름은 부악, 중악, 공산, 동수산이라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중앙에 비겨 중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팔공산의 산세는 중앙에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峰: 帝王峰)이 솟아 있고, 좌우로 미타봉(彌陀峰:동봉)과 삼성봉(三聖峰:서봉)이 있어서 마치 본존불이 좌우로 협시보살을 거느리고 있는 형국을 이루고 있으며, 국토지리 정보원에서 정한 정확한 높이는 팔공산 비로봉은 1,193m, 미타봉은 1,167m, 삼성봉은 1,150m이다.
비로봉은 '모든 곳을 두루 비춘다'라는 뜻의 범어(梵語)인 비로자나(毘盧遮那)에서 따왔다. 비로자나는 부처의 진신(眞身), 즉 법신불(法身佛)의 존칭이며 밀교 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팔공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니만큼 비로자나 부처님을 봉우리 이름으로 부른 듯하다.
마음씨는 물론 얼굴도 고운 낭자가 남겨준 비로봉 인증.
비로봉에서 바라본 동봉(미타봉) 방향.
돌아본 군부대가 차지한 산성봉 방향.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본 팔공산 산성봉>
저곳 팔공산 산성봉이 팔공기맥이 이어오는 원래 기맥길이다. 아직은 의문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팔공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바로 저 산성봉인데,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대접을 못 받는 곳이다. 저 산성봉 아래에 사는 부계 사람들은 '남포루'라 불러왔다고 한다. ‘남쪽에 있는 대포 요새’ 같이 생겼다는 뜻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공군부대가 둥글게 울타리를 치고 포진한 저 봉우리가 바로 옛 ‘공산성(公山城)’이다. 후삼국시대(927년) 고려개국공신 신숭겸이 견훤과의 전투에서 전세가 위급하자 태조(왕건)의 복장으로 변복하고 싸우다 전사했는데, 견훤은 이를 왕건으로 알고 목을 베어 갔다.
‘태조왕건’이라는 TV드라마에서도 본 내용인데, 바로 그 배경이 이곳 ‘공산성 전투’다. 신녕면의 향토자료에도 일제강점기 때 신시암마을의 소작민들이 '남자는 지붕 덮을 억새를 베러', '여자는 밥 대신 먹을 나물을 뜯으러' 하루 두 번씩이나 공산성을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남서쪽 수태골과 대구광역시 방향.
가야 할 서봉(삼성봉)과 그 너머로 이어지는 팔공기맥 방향.
비로봉 정상 아래에 있는 '팔공산 제천단' 표석.
<팔공산 제천단>
『하늘과 땅이 맞닿은 제왕봉은 옛날 조상들이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지이다. 조상들의 얼이 담겨있는 제천단을 자손만대 길이 보존하기 위해 표석을 세운다.』 - 2004년 7월 24일 달구벌 얼 찾는 모임 -
<신라의 오악(五岳) 중에 중악(中岳)이었던 팔공산>
신라에는 삼산 오악이라 하여 나라 최대의 신산영악으로 숭배했는데, 삼산에 지내는 제사는 신라 최대의 제전인 대사라 했다. 오악이란 신라가 중사를 제사 지내던 신라 강역의 다섯 방위에 위치한 성산을 말하는데, 동 토함산, 서 계룡산, 북 태백산, 남 지리산, 중 공산(팔공산)이다. 이 오악은 신라인의 거국적인 숭배를 받았던 신산영악이었고, 이 오악산신은 신라 호국의 신으로 신라의 국운을 진호하고 있었다.
팔공산은 신라의 신령스런 명산 오악 중에서도 신라 국토의 중심에 위치한 중악으로 가장 신령스러운 영산이었다. 이 산 위에는 산신 즉 천신에 제사 지내던 제천단이 있어 국가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산신에게 나라의 안녕과 시절의 조화와 풍요를 기원했던 것이다. 지금 오악 중에서 제천단이 완전하게 근래까지 남아있던 산은 북악 태백산과 중악 팔공산뿐이었다. 애석하게도 팔공산의 제천단은 산정에 레이다 기지의 조성과 TV방송 중계탑 건설 등의 정지공사로 인하여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다.
신라 이래 오악 산신에게는 나라에서 봉작하여 대왕의 칭호를 올렸다. 중악 산신에게는 공산(중악)대왕이라는 작호를 봉했다. 이 중악대왕에 기원하고 제사지내는 전통은 고려말까지 내려왔고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다. 고려말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제공산대왕문, 헌마공산대왕문, 공산대왕사제문이 실려있다. 고려 무신정권 하에서 영남 지방의 민란을 평정한 사실을 공산대왕께 기원하고 감사하는 제사를 올리는 글이다. 이 제문은 이규보가 지은 것이다. 물론 국왕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국가에서 중대한 변고가 있을 때 나라에서 국왕이 몸소 공산 신에 기도드렸고 뒤에는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중악 공산은 영원히 민족의 숭배를 받아온 민족의 신령스런 성산이었고 그것은 영원히 이어지리라!
비로봉 정상을 내려서서 데크목 전망대 우측 동봉.서봉 방향으로 내려가면,
동봉으로 이어질 듯 보이다가 아래로 이어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수태골 방향.
<등로에서 바라본 연무가 드리워진 동화사 계곡과 수태골 모습>
비로봉 남쪽인 서봉에서 동동까지의 능선 남쪽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부채꼴 형상으로 여러 갈래의 지계곡을 만들어 한 곳으로 모아 넣는데 그곳이 바로 수태못이다. 대구매일신문의 개념도를 보면 동봉부터 서쪽으로 국도림골, 주추바위골, 삼성골, 용무골, 보라우골의 물이 오롯이 수태못으로 흘러들어가고, 수태못에서 한줄기로 합한 이후부터 수태골을 만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기를 못 가진 부인이 이 골짜기에서 기도를 하고 수태(受胎)했다는 전설이 있다.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아래로 이어지는 동봉 방향을 두고 이정표의 서봉으로 이어지는 우측 등로로 들어서서 건물지에 돌 의자가 나란히 놓여있는 곳으로 진행하면,
돌아본 동봉 모습.
이중 철조망 울타리를 만나지만 출입문 형태로 넓게 철조망이 절단되어 있어서 통과에 문제가 없다.
철조망 울타리를 통과하여 사면 위로 이어진 나무계단을 올라 능선에 접속하여,
온갖 모양의 기암들이 즐비한 능선을 내려서다가 짧은 데크목 계단을 오르면,
커다란 바위들이 너덜을 이루는 암릉을 지나게 되고,
가야 할 서봉 방향.
우측 동산계곡 방향.
돌아본 비로봉 방향.
좌측으로 보이는 장군메기와 동봉 방향.
동봉과 멀리 환성산 방향.
호젓한 조망처와 기암괴석이 즐기한 능선 내림길을 내려서면,
팔공산 현위치 표시목(091)이 서있는 좌측 석조여래불과 동봉 방향 삼거리에서 우측 서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팔공산 현위치표시 구조목>
팔공산 구간에는 갓바위가 있는 관봉에서 001번이 시작되어, 동봉이 85번, 한티재가 150번, 팔공산 서쪽 끝에 해당하는 가산에 170번이 세워져 있는데, 대략 50~100m 구간마다 하나씩 세워져 있다. 일반적으로 구조목은 500미터 간격으로 세우게 되는데 과잉 행정이 아닐런지 생각해 볼 일이다.
동봉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길로 들어 잠시 내려서면,
좌측으로 수태골 주차장 방향 갈림길이 있는 오도재(느지미재)를 지나는데 서봉까지 0.4km 남았고,
<오도재/느지미재(1,085m)>
대구시 동구 용수동과 경북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사이의 고개다. 옛날 큰 홍수로 온 세상이 물바다였을 때 까마귀 한 마리만 앉을 정도만 남기고 물이 다 차올랐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오늘날에는 해가 오도봉 상봉에 있을 때 한낮이 된다 하여 우두봉(牛頭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른 이름으로 느지미재라고도 불린다.
탐방객들이 많이 찾는 수태골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수태골(水台谷)은 대구시 동구 신무동의 자연부락으로 경주최씨들이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신무동 수태골은 옛날 어떤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노인이 부인사 근처에 있는 이 계곡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리면 아기를 수태할 수 있다고 했다. 부인이 그 노인의 말대로 백일기도를 했더니 아이를 수태했다는 이야기에서 수태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수태골의 물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여 수태(水台)라고 하게 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오도재에서 400미터 남았다는 서봉을 향해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그닥 필요해 보이지 않는 첫번째 데크 계단길을 오르고,
다시 또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따르다가,
두번째 데크목 계단을 올라 지나온 비로봉 방향을 돌아보고,
다시 급하지 않은 능선길을 따라 헬기장을 지나서 봉우리로 오르면,
정상부를 지나는 한티재 방향 직진의 데크길 좌측 암봉 위에 삼성봉과 서봉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다.
첫번째 바위에 대구직할시에서 설치한 삼성봉 정상석.
<서봉/삼성봉(西峰/(三聖峰, 1,147m)>
서봉은 팔공산의 서쪽에 위치한 봉우리라 하여 서봉이라 부른다. 동봉을 미타봉이라고 하듯이 삼성봉이라고도 하는데, 봉우리의 서쪽 비탈면에 과거 삼성암이라는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암 절터는 100여 평에 방향은 정 서남향이며, 우물과 굴도 있었다.
'삼성봉' 정상석 뒷면에는 "신라시대 삼성암에서 3성인이 득도하여 유래된 이름"이라 새겨져 있다.
그 옆에 있는 바위에 1991년 호산등고회·비슬산악회애소 설치한 서봉 정상석.
삼성봉(서봉)에서 조망한 지나 온 비로봉 방향.
동봉 우측으로 관봉 방향으로 펼쳐진 팔공산 능선.
남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동화사와 동화사 시설지구 조망.
신라시대 세 성인이 득도했다는 전설이 있는 이곳 삼성봉은 동쪽으로 동화사까지의 팔공산 주능선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 파계봉까지는 날카로운 기암괴석이 연이어지는 톱날능선이 이어진다. 지금은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있어서 톱날능선 암릉을 어렵잖게 통과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북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우회 등산로를 따라야 했다. 지금도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는 기맥꾼들에게는 암릉 통과보다는 북측 사면의 우회로가 선호되기도 한다.
서봉 정상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 3km 거리의 파계봉을 향하면,
위험한 암릉은 데크목 우회길로 통과하고,
좌측이 가파른 절벽인 암릉길이 이어지며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연이어 나타나더니,
<서봉에서 파계재가는 길은 톱날능선>
등로는 뚜렷하나 갖가지 모양의 기암들이 연이어 나타나며 산객들의 시선을 끌기도 하고, 날카로운 바위들이 암릉을 이루어 지나기가 어려운 암릉 구간도 있다.
팔공산이 어떻게 해서 이런 특징을 갖게 됐었는지를 살펴보면, 약 1억년 전쯤 경상도는 거대한 호수였다. 일본은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는 땅이었고, 그 사이에 '경상도 호수'가 있었고 기본 지질은 퇴적암이었다. 그때는 지질시대 구분상 중생대 백악기로 화산폭발로 산 지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뒤였다. 비슬산과 대구 앞산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그래서 앞산의 바위는 검은 화산암이다. 화산폭발 시기가 너무나 오래되어 그 흔적들이 많지는 않으나, 그곳에서도 기둥모양(柱狀)으로 갈라진(節理) 바위들은 발견된다. 마그마가 식을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1,087봉쯤에 다다르면 정면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고, 등로는 좌측으로 내려서야 한다.
나무계단을 따라 제법 가파르게 내려서다가 다시금 완만해지며 파계봉이 3.2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면,
급경사 데크계단 내림길 초입의 뾰족한 송곳 바위가 있는 곳에 서면 앞쪽으로 가야 할 기맥 능선이 펼쳐져 있고,
가파는 데크계단을 내려서면 다시금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우측 부계면 방향으로 사람들의 손길이 뜸하여 깨끗하고 수량이 풍부한 동산계곡이 내려다 보이고,
이런저런 모양과 무늬의 기암들에 시선을 보내며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갑자기 나타난 데크목 오름길을 오르면,
좌측으로 가드레일이 설치된 암봉에 오르는데, 과거에는 '백운대'라는 정상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돌아본 서봉 방향.
북쪽 부계면 방향 동산계곡과 동산리 조망.
과거에는 백운대로 불렸다는 암봉을 지나면 톱날능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날카로운 바위 암릉이 이어지다가,
좌측 부인사 방향 갈림길과 우측 톱날바위 능선 우회 등로 갈림길을 지나 톱날능선을 따르면,
안전시설이 없었다면 통과가 까다로왔울 바위틈으로 내려서고,
이어지는 날카로운 암릉과 암봉을 어렵잖게 지나,
근래에 설치한 듯 보이는 안전시설에도 불구하고 조마조마한 느낌이 드는 암봉도 지나면,
데크목 우회로 설치공사가 진행중인 병풍재쯤을 지나 제법 가팔라지는 오름길을 오르는데,
좁은 가마바위봉 오름길 등로에서 오은사에서 출발한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기에,
여러 사람이 쉬기에는 장소가 협소하여 조금 더 올라 가마바위봉 직전 전망바위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쉼을 한다.
돌아본 톱날바위와 서봉 방향.
<톱날능선/톱날바위>
팔공산 종주코스 중 마당재에서 서봉으로 가는 능선을 말한다. 발붙이기가 힘들 정도로 이가 어긋난 모양새로 뾰족뾰족 솟아있는 벼랑 바위들이 능선을 이루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나온 톱날바위.
전망바위에서 배낭을 열어 톱날바위를 통과하느라 지친 몸을 보신하며 원기를 회복하고는,
짧은 바위암릉을 오르면 좌측 절벽 위 바위에 뿌리를 박은 멋진 소나무 둥치에 가마바위봉(1,054m) 코팅지가 걸려있다.
<가마바위봉(1,054m)>
대구시 동구 공산동과 경북 군위군 부계면의 경계에 자리한 봉우리로, 정상에 있는 바위가 가마의 형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가마바위봉 정상 이정표.
가야 할 파계봉 방향.
자주고개에서 기맥길로 들어선지 7시간여 만에 오은사에서 출발한 분들과 합류하여 함께 가마바위봉을 내려서서,
완만한 안부를 지나 짧은 데크목 계단길을 오르면,
125번 구조목이 있는 상여바위봉을 지나게 되고,
상여바위봉을 뒤로하고 제법 가파른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좌측 부인사 방향 갈림길이 있고 까다롭던 톱날능선이 끝나는 마당재를 지나게 된다.
<마당재(975m)>
대구시 동구 신무동 수태골과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사이의 고개이다. 해발고도가 높은 팔공산 주요 능선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고갯마루는 상당히 넓은 공터를 이루어 마당재라고 불린다. '대구올레'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구조목 127번이 좌측에 세워져 있다.
마당재 이정표.
마당재에서 잠시 올라 널찍한 헬기장을 지나면,
엇비슷한 높이의 선바위가 쌍둥이인양 서 있는 신무능선 분기봉(978m)을 넘게 되는데,
『978봉에서 남사면으로 중요한 가지 줄기가 내려간다. 동쪽으로 휙 감아 내리면서 용수천골의 상층부를 거의 반분해 놓은 뒤 수태못 서쪽 못둑 역할을 하면서 신무동에서 달리기를 마치니, 거기에 적합한 이름은 '신무능선'일 터이다.』 (팔공산하, 매일신문사)
톱날능선 통과의 고단함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완만한 육산 등로에는 야자메트까지 깔려있고,
파계봉이 9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서,
완만하고 호젓한 능선길을 따라 칼로 베어놓은 듯한 너럭바위를 지나면,
그리 급하지않은 암릉 오름길을 오르게 되는데,
무려 1200미터의 팔공산을 넘는 산행 막바지라 그런지 얕은 오름길에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잠시의 다리쉼을 한다.
급할 게 없는 산행에 예정보다 빠른 진행으로 약간은 여유로운 쉼을 하다가 다시금 기맥길에 들어서면,
좌측으로 팔공산 학생야영장 방향 능선 갈림봉인 장꼬방봉(994m)을 지나고,
『이 봉우리를 주민들은 '장꼬방 말랭이'라고 하였는데, '장꼬방'은 '장독', '말랭이'는 정상(頂上)이라는 뜻으로, 봉우리가 장독을 닮았다는 데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매일신문, 팔공산하)
작은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어 그늘을 드리운 완만한 능선길을 잠시 더 진행하면,
대구 공산산악회에서 2008년에 설치한 오석의 정상석이 있는 파계봉 정상을 지나게 된다.
<파계봉(991m)>
대구시 동구 신무동과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다. 파계봉(991m)은 파계사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파계사(寺)는 '계곡의 물줄기를 잡는다'라는 뜻을 지닌 절로, 원래 절 주위에 아홉 갈래나 되는 물줄기가 흘렀는데, 땅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절 아래에 연못을 파고 물줄기를 한데 모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하지만 파계봉이란 명칭은 지형도에는 없는 이름으로, 파계사도 이곳 봉우리에서 500여 미터 더 진행하면 나오는 능선분기봉인 935봉에서 남쪽 거저산(511.3m)으로 이어지는 들뫼능선 건너편 골짜기에 있는 절로, 꽤나 먼 거리에 있어 파계봉으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이곳 991봉이 파계봉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공원 고시'에 '파계봉'으로 고시되었기 때문인데, 이 봉우리 남쪽 아래 무산마을 사람들은 이 봉우리 일대를 '물불이'로 불러왔기 때문에 '물불봉' 정도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봉우리는 신무동에 위치하고 있고, 파계사는 중대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파계봉으로 옮겨 쓰일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파계봉'으로 굳어져 버려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이런저런 논란에도 이제는 이 봉우리가 파계봉!
파계봉을 내려서서 잠시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금슬 좋아 보이는 노부부가 쉬고 있는 암릉바위 앞에서 잠시 급하게 내려서면,
이내 다시 평탄하고 호젓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남쪽 남쪽 거저산(511.3m) 방향의 들뫼능선 분기봉(935봉)을 지나며 기맥길은 우측 아래로 내려서기 시작한다.
『물불봉과 파계재 사이의 935m 고도에서 매우 길고 우뚝한 가지 산줄기 하나가 내려가 남사면을 확연히 구분 짓는다. 754봉을 거쳐 '들뫼(거저산, 520m)'로 흘러내리면서 서편의 지묘천골과 동편의 용수천골을 나눠 놓은데, '들뫼능선'이란 임시 이름표가 필요할 듯하다.』 (매일신문사 팔공 산하)
935봉 들뫼능선 분기봉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는 나무계단.
길게 이어지던 나무계단길이 파계재가 450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지점에서 완만한 능선길로 내려서고,
걷기 좋은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르니,
여러 개의 이정표가 설치된 사거리 안부인 파계재를 지나게 된다.
<파계재(805m)>
대구시 동구 중대동 파계사와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를 연결하는 옛 길이 마루금을 넘어가는 고개로, 좌.우측 모두 등로가 뚜렷하다. 파계사 뒤쪽 고개라서 파계재인데 파계(把溪)란 이름은 절의 좌우 계곡으로 흐르는 9개의 물줄기를 모은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파계재는 북사면의 파계골과 남사면의 파계사골을 연결하는 고리로 옛날에는 통행하는 이가 많아 재 넘어 부계 쪽 수월정사 부근에 주막촌이 형성될 정도였으며, 부계에서 대구는 50리 길로 옛날엔 한티재나 파계재를 통해 대구의 학교나 서문시장을 넘어 다녔다고 한다. 』 (매일신문 팔공산하)
돌과 나무로 제작된 여러 개의 파계재 이정표. (좌측 파계사 1.3km, 직진 한티재 2.1km, 우측 제2석굴암 5.0km)
<우측 5km 지점의 제2석굴암>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위치한 제2석굴암으로 불리는 석굴사원 삼존석굴은 신라 소지왕 15년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 한다.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삼존석굴은 가파르게 경사진 절벽의 동굴 안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온화한 모습 그대로 전해오는 게 느껴진다. 당초에 석굴 앞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폐허가 되고 주춧돌만 남아있었는데, 사찰 복원사업으로 1989년에 선방, 산신각 등을 증개축하였다고 한다. 주변 경치가 수려하여 관광지로도 유명하지만 고구려 때부터 전해진 신라불교가 팔공산 자락에서 시작되었고, 신라왕도 경주로 전해져 결실을 맺었다고 해서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 곳이라고 한다.
파계재를 지나며 완만한 오름길로 바뀐 기맥길을 따라,
한티재가 1.8km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헬기장을 지나고,
울창한 나무가 드리운 그늘 때문인지 아니면 높은 고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더위에도 기맥길이 시원하게 느껴지는데,
등로 우측 편 공터에 '대구 파계사 원당봉산(願堂封山)' 표석이 세워져 있다.
<대구 파계사 원당봉산(願堂封山) 표석>
팔공산 파계사 원당봉산 표석은 팔공산 파계재에서 한티재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원당봉산(願堂封山)은 "원당"과 "봉산"이란 두 단어를 조합한 것으로, 곁에 설치된 '대구 파계사 원당봉산 안내판'에는 『원당(願堂)은 왕실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던 장소를 뜻하며, 봉산(封山)은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금지한 산을 뜻한다. 1806년 작성된 「파계사원당사적」에 따르면, 파계사는 1696년(조선 숙종 22년) 세자(영조)의 탄신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의 원당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1696년 이후 파계사가 원당으로 지정되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낮에 기온이 올라가면 어쩌나 내심 걱정을 했는데 바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 드는 등로를 따르다가,
좌측 도각봉 방향 갈림길 이정표에서 직진의 한티재 방향 길로 오르면,
넓은 공터봉에 좌측 파계야영장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삼갈래봉(834m)을 지나게 된다.
<삼갈래봉(834m)>
팔공기맥이 지나는 삼갈래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뻗어내린 법성능선은 대구직할시와 칠곡군을 경계하는 능선이며, 팔공기맥 한티재 방향은 우측 능선으로 이어진다.
『834봉에서는 남서쪽으로 긴 곁가지가 하나 뻗어 나가니 '법성능선'이다. 이 법성능선은 일대 지형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먼저 남사면 공간을 '구덕천골'과 '지묘천골'로 양분하여 법성능선의 서북 편으로는 구덕천골이 분포하고, 동남 편으로는 지묘천골이 자리 잡는다. 더욱 중요한 점은 법성 능선의 548봉에서 미약한 가지 줄기가 또 하나 생겨 정남 쪽으로 벗어난 뒤 대왕재를 지나 '도덕산군'을 일궈내다는 점이다.』 (매일신문 팔공산하)
좌측 법성능선 방향 나무둥치에 걸린 '삼갈래봉' 코팅지.
삼갈래봉을 내려서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팔공산 주능선길을 따라,
흩어져 있는 바위덩어리들이 멋진 쉼터를 만들고 있는 봉우리를 지나고,
이런 멋진 숲길이 조금 더 이어지길 바라며 시간을 끌어보지만,
등로변에서 점심을 먹는 산객을 보며 시장끼가 도진 백두들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한티재와의 거리를 좁히다가,
좌측 아래로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150번 구조목이 서 있는 마지막 봉우리를 하는 수 없이 지나니,
이내 앞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한태휴게소로 내려서는 데크 계단길이 나타나고,
데크 계단길을 따라 한티재에 내려서며 팔공기맥 잇기 다섯번째 산행을 마감한다.
<한티재(718m)>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한티순교성지와 칠곡 가산산성이 위치한 큰골과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텃골 사이의 고개로, 팔공산에서 가산으로 이어지는 해발고도 700m 산줄기에 있다. 높고 큰 고개라는 뜻으로 ‘한티’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한자로는 대현(大峴)이라고 표기하였다. 과거에는 칠곡과 군위를 왕래하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였으나, 현재는 팔공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팔공산의 경치와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도로의 굴곡이 아름다워 건설교통부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었다.
고갯마루에는 한티휴게소가 위치해 있다. 팔공기맥 마루금을 지나는 2차선의 79번 지방도가 지나며 팔공산 도립공원 내에 있어서 그런지 휴게소 건물도 멋지고 넓은 주차장도 설치되어 있다.
득명리(得明里)는 파계재에서 가산에 이르는 산등성이 즉 명지등(明智嶝) 아래쪽에 위치하여 득명(得明)이라 하였다.
『한티재는 팔공산에서 가산으로 이어지는 해발고도 700m 산줄기에 있으며,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와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를 잇는 79호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로, 높고 큰 고개라는 뜻으로 ‘한티’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한자로는 대현(大峴)이라고 표기하였다. 과거에는 칠곡과 군위를 왕래하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였으나, 현재는 팔공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팔공산의 경치와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도로의 굴곡이 아름다워 건설교통부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었다.』 (대구매일 기사)
돌아본 한티재 날머리 전경.
한티휴게소 전경.
별다른 수고를 않았는데도 수고했다며 막걸리를 권하는 고마운 백두들.
한티재 가산 방향 들머리 전경.
한티휴게소 전경.
군위군 부계면의 백송스파비스관광호텔에서 땀을 씻고,
부계면 소재지의 팔공산 능선이 바라다 보이는 식당에서 푸짐한 뒤풀이 시간을 가지다가,
쏟아지는 소나기에도 멋진 추억으로 남을 팔공기맥 능선을 뒤로하고 귀갓길에 오른다.
서울 사람들 중에 북한산이나 남산을 오른 분들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학창 시절을 대구에서 보낸 나도 팔공산과 앞산을 오른 기억이 없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것을 혹여 놓치며 살고 있지않나 살펴볼 일이다.
첫댓글 자주고개~하늘정원 산행을 산행기로 대신했습니다. 즐감했습니다.감사 감사 감사 드립니다.
팔공기맥 하이라이트인 팔공산! 그중에 공포의 시루봉, 환상의 청운봉! 무더위에 동봉~서봉~톱날능선을 넘느라 무척 힘들었는데..무사히 지났네요.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