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나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나문사) 원문보기 글쓴이: 志于學士최동군
孔子貧且賎 |
공자는 가난하고 또한 천했다. |
孔子(공자) 貧(가난할 빈) 且(또 차) 賎(천할 천) |
|
- 及長 嘗為 季氏史 料量平
嘗為 司職吏而 畜蕃息
- 由是為 司空 已而去魯 |
- 장성해서 일찍이 계씨(季氏)의 곡식의 출납을 맡아보던 기록관으로 있을 때, 그의 저울질은 공평했고, 그가 일찍이 직리(職吏)의 일을 맡고 있을 때, 가축은 번성했다. - 이로 말미암아 그는 벼슬이 사공(司空)이 되었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노나라를 떠났다. |
及(미칠 급) 長(길 장) 嘗(맛볼 상//일찍이) 為(할 위) 季氏(계씨) 史(역사 사//문인, 기록관) 料(헤아릴 료) 量(헤아릴 량) 平(공평할 평) 嘗(맛볼 상//일찍이) 為(할 위) 司(밑을 사) 職(직분 직) 吏(관리 리) 而(말이을 이) 畜(짐승 축) 蕃(우거질 번) 息(쉴 식) 由(말미암을 유) 是(이 시) 為(할 위) 司(맡을 사) 空(빌 공) 已(이미 이//조금 있다가) 而(말이을 이) 去(갈 거) 魯(노나라 노) |
|
斥乎斉 逐乎宋 衛 困於陳蔡之閒 於是反魯 |
제(齊) 나라에서 배척되고, 송(宋)과 위(衛) 나라에서 축출되고, 진(陳)과 채(蔡) 나라 사이에서 곤궁함에 빠지자 이에 노나라로 되돌아왔다. |
斥(물리칠 척) 乎(어조사 어) 斉(가지런할 제) 逐(쫓을 축) 乎(어조사 어) 宋(송나라 송) 衛(지킬 위) 困(곤할 곤) 於(어조사 어) 陳(베풀 진) 蔡(성씨 채) 之(갈 지//어조사) 閒(한가할 한//사이 간) 於(어조사 어) 是(이 시) 反(돌이킬 반) 魯(노나라 노) |
|
- 孔子 長九尺 有六寸 人皆 謂之長人而 異之 - 魯复善待 由是反魯 |
-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키다리(長人)라고 부르고 그를 괴이하게 여겼다. - 노나라가 다시 그를 잘 대우하니 이로 말미암아 노나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
孔子(공자) 長(길 장) 九(아홉 구) 尺(자 척) 有(있을 유) 六(여섯 육) 寸(마디 촌) 人(사람 인) 皆(모두 개) 謂(이를 위) 之(갈 지//어조사) 長(길 장) 人(사람 인) 而(말이을 이) 異(다를 이) 之(갈 지//어조사, 대명사) 魯(노나라 노) 复(다시 부) 善(착할 선) 待(기다릴 대) 由(말미암을 유) 是(이 시) 反(돌이킬 반) 魯(노나라 노) |
사기에 따르면 공자의 키는 9척6촌이라고 했다. 척도법은 시기에 따라서 당척(唐尺), 한척(漢尺), 주척(周尺) 등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춘추시대의 기록이라면 아마도 주나라의 척도법인 주척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보고 1주척이 207mm 임을 감안하면 공자의 키는 198.7cm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정도라면 지금의 기준으로도 엄청나게 큰 키인데 춘추시대라면 오죽했으랴.
그런데 척도법은 지역에 따라서도 들쭉날쭉 했기 때문에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중국 전역에 걸쳐 군현제의 실시와 더불어 도량형을 통일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이런 도량형의 통일작업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나라도 도량형이 일정하지 않아서 특히 백성들의 삶이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관청에서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빌려줄 때는 작은 자를 쓰다가 되받을 때는 큰 자를 써서 폭리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암행어사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마패> 이외에도 3개가 더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놋쇠로 만든 자>인 <유척(鍮尺)>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2개는 무엇일까? 하나는 봉서(封書)이고 나머지는 사목(事目)이다.
사목은 일의 목록이란 뜻이니 암행어사의 직무를 규정한 책이며, 봉서는 밀봉된 서류라는 뜻인데 말 그대로 누가 어디로 어떤 임무를 띠고 가는지가 철저히 극비로 씌여 있었다. 암행어사로 임명받으면 봉서를 받고 나서 집에도 들르지 못한 채로, 바로 임지로 떠나야 했는데 심지어 암행어사 자신도 봉서를 열기 전까지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봉서의 겉면에는 보통 이런 식으로 쓰여 있었다.
到南大門外開坼 (남대문 밖에 도착하면 열어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