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에서 승리하는 사람
본 문 / 여호수아 5장 13∼15절
주 제 / 어려움 앞에서 기도하고, 응답에 순종함으로써 사면초가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자.
작성일 / 2022년 2월 20일. (№ 22-08)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 5:13∼15)
Ⅰ 사면초가에도 살길이 있다. (눅 11:10)
‘사면초가’(四面楚歌)란 말이 있다. 초나라 ‘항우’가 ‘해하’(垓下)라는 곳에서 한나라 장수 ‘한신’에게 포위되었는데, 포위가 얼마나 촘촘한지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진영을 탈출해서 한나라에 투항하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갔다. 게다가 군량미마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니 남은 병사들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죽는구나.” 생각하니 고향이 그리워졌다. 밤이 되면 아내와 자식들, 부모와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전쟁터로 끌려온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면에서 구슬픈 고향노래가 들려왔다. ‘한신’이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에게 그들의 고향노래 즉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했던 것이다. 사면에서 고향노래가 들리니 초나라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하나 둘씩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그러자 ‘항우’는 처지를 비관하며 자살하고 말았다. ‘사면초가’ 즉 ‘사면에서 들린 초나라노래’에 스스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을 가리켜 ‘사면초가’라 한다.
살면서 ‘사면초가’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때 ‘항우’처럼 길을 찾지 못해 스스로 무너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을 찾아 사면초가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면초가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지난 주 설교본문 중 이런 말씀이 있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10).예수님의 약속이다. 사면초가에 빠졌을지라도 살길을 찾을 수 있다는 약속이다. 사면초가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약속이다. 여러분은 아무리 답답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사면초가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Ⅱ 사면초가에서 길을 찾은 여호수아 (수 5:13-15)
애굽을 떠난 지 40년, 드디어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밟았다. 그런데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여리고성’이 딱 가로막고 있었다. 가나안 최전방에서 외침을 막아내는 성이니 견고했고, 신식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은 용맹했고, 게다가 가족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뿐인가? 주변 여러 성들이 이스라엘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40년 동안 광야를 어슬렁거리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는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들개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으려고 예의주시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여리고’에서 고전하게 되면 순식간에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단강 건너 광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여호수아 5장 11∼12절을 보니,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가나안의 소산을 먹었더니, 그 다음날부터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가 그쳤다고 한다. 광야로 돌아가면 굶어 죽는다.
마지막 남은 길은 ‘애굽’이다. 그런데 이미 지난 40년 동안 자유인으로 살았다. 40세 이하 젊은 층은 종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다. 종으로 살고 싶겠는가? 앞으로 전진 할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면초가’에 빠진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항우’처럼 절망하고 주저앉을까? 사무엘상 31장 4절을 보니, 길보아 전투에서 패하고 부상까지 입은 ‘사울’이 절망하여 자살했다고 한다. ‘항우’와 ‘사울’은 사면초가에서 길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주저앉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러지 않았다. 사면초가를 극복하고 승리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여호수아’가 사면초가에서 어떻게 길을 찾았는지, 어떻게 승리했는지 그것을 배우려고 한다.
첫째, 여호수아는 사면초가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수 5:13∼15a)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수 5:13a).‘길갈’에서 걷다보니 ‘여리고’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눈을 들었다’고 한다. ‘눈을 들었다’는 말은 그동안 머리 숙여 기도했다는 말이다. 사면초가에 빠진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여리고’까지 걷는 동안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면초가에 빠지면 근심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항우’와 ‘사울’처럼 스스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사면초가에서 근심에 사로잡히면 스스로 무너진다는 조언이다. 구하면 얻을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고, 찾으면 찾아진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함께 노래하자! “♬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끓고 간구해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하나님은 항상 자기백성의 기도를 들으신다.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해도 들으시고, 사면초가에서 기도해도 들으신다.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고약한 질병이 있다. “하나님이 들으셨을까? 들으셨다면 왜 응답하지 않으시지?” ‘의심병’이다. 이 의심병이 눈과 귀를 막아서 하나님의 응답을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또 하나, 우리의 신앙에는 ‘미신적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대소변 치워주고, 씻겨주고, 입혀주어야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는 미신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응석을 받아주는 응답’이 아니다. ‘길을 보여주는 응답’이다. “길을 보여줄 것이니 찾아가라”는 것이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수 15:14b).여호수아의 기도는 ‘길’을 묻는 기도이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 5:15b)하나님의 응답은 길을 보여주시는 응답이다. 사면초가에 빠졌다면 우선 성결해야 한다고 응답하신다. ‘성결이 길’이라고 응답하신다.
사면초가에서 근심에 빠지면 뼈가 말라 스스로 주저앉게 된다. 그러나 사면초가에서 기도에 빠지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서 살 길을 보게 된다.
둘째, 여호수아는 응답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수 5:15c)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c).응답을 받고도, 그 응답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 중에는 전술로써 응답하셔야지 성결을 요구하시다니 과연 하나님의 응답일까?” 이렇게 응답을 의심하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한다. ‘자기의 상식’이 ‘하나님의 응답’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하고 불순종한다. 시편 92편 5절에 이런 고백이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시 92:5).하나님은 깊이 생각하시고 큰일을 이루신다는 고백이다. 건성건성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자기의 상식’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응답’을 신뢰한다. 이런 사람이 의심 없이 순종한다. 여호수아가 그런 사람이었다.
여호수아의 순종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길을 제시하신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수 6:3∼5)‘전술’이라기보다 ‘종교예식’이다. 전쟁을 아는 지휘관이라면 순종할 수 없는 응답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순종함으로써 여리고를 정복한다. 사면초가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된다. ‘자기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 ‘자기 상식’보다 ‘하나님의 응답’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 의심 없이 순종하고, 순종의 열매를 먹게 된다.
Ⅲ 사면초가에서 승리자가 되자.
살다보면, 사면초가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이때, 근심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절망 중에 스스로 무너진다. 사면초가에서 기도하는 사람만이 살 길을 찾게 되고, 응답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마침내 사면초가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은 사면초가에 갇혀도 근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응답받으면 자기 생각, 자기 상식 다 내려놓고 의심 없이 순종하는 사람, 그래서 마침내 ‘사면초가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기도>
하나님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 살면서 사면초가를 만나거든 기도하여 길을 찾고, 응답에 의심 없이 순종하여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