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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8일 주일 설교
제목:
“멍에와 굴레”
나는 무슨 멍에를 메고, 어떤 굴레에 매여 있는가?
본문: 예레미야 5:5
1. 거부된 멍에, 무너진 질서
소제목: 지도자들이 꺾어버린 ‘거룩한 멍에’
금요일 저녁에 성경을 읽다가 묵상한 부분입니다: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 예레미야 5:5
이 말씀은 멍에와 결박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기서 멍에와 결박은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시편 2편에서도 세상의 군왕들이 벗어버린 것이 멍에(그 멘 것)와 결박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자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1장에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 그것은 예루살렘에 가서 동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 같은 것 아닐까요?
우리가 메야 하는 멍에는 주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사명이겠지요?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그것을 벗어버린 것이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감동을 외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감으로써 끝까지 자신에게 지워진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에서 저도 저에게 지워진 멍에를 분명히 이해하고 끝까지 따를 것을 다짐하면서 구독자들에게 또는 형제들에게 격려를 하고 싶습니다.
멍에와 결박이라고 표현된 성경의 이 말씀은 본래 어떤 의미였을까요? 우리나라의 문화에서 멍에는 대부분 소 한 마리에 얹는 도구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겨릿소 문화로서 소 두 마리를 한 겨리라고 하는데 그 두 마리가 함께 지는 형태의 일자형 멍에가 사용됩니다. 그 멍에를 소와 묶는 끈이 바로 결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소 문화로서 결박 대신에 코뚜레를 사용합니다. 이것을 굴레라고 부릅니다. 소가 어렸을 때 코를 뚫어 둥근 나무를 끼워 소를 제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멍에와 굴레(코뚜레)라고 부르고, 이스라엘에서는 멍에와 결박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런 표현은 현대인들에게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요. 어쩌면 이것은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의 관용구가 아닐까요? 아니면 봉신관계에 있는 국가들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까요? 구약학자 존 월튼의 관점을 여기에 적용하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월튼은 성경의 시대로 들어가서 그 시대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언어를 이해해 보자는 것입니다.
‘멍에(Yoke)’와 ‘결박(Bond)’은 고대 근동에서 단순한 농기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언약의 상징으로서 봉신(Vassal) 국가가 종주(Suzerain) 국가와 언약을 맺을 때, 그 관계를 ‘멍에’로 표현했습니다. 즉, 멍에를 멘다는 것은 “나는 당신의 통치 아래 있으며, 당신의 법을 지키겠다”는 공적인 충성 맹세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배우고 있는 존 월튼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법(멍에)은 백성을 억압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무질서(Chaos)로부터 지켜주는 ‘우주적 질서’입니다. 예레미야서의 지도자들이 멍에를 꺾었다는 것은, 단순히 법을 안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설계하신 질서를 거부하고 스스로 무법(Chaos)의 상태로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멍에와 결박은 밭을 갈기 위한 농기구로서 생육번성충만, 그리고 통치를 위한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이 농부시라면 멍에와 결박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메는 도구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법과 규례를 준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법이 정의와 자비, 그리고 공평이라는 수단이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바로 그 멍에와 결박을 메어야 합니다. 인간이 멍에를 깨버리고 결박을 벗어버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반역입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다시 혼돈과 공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4장에서 예루살렘이 창조 이전의 상태인 혼돈과 공허로 돌아갔다고 탄식합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4:23~26).
2. 우리가 매여야 할 사랑의 줄
소제목: Obligation, 주님께 자발적으로 매이는 은혜
앞에서 마태복음의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멘 멍에와 짐은 고통이며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그들이 멘 멍에도 나쁜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나쁜 멍에에서 해방되어 올바른 멍에를 메는 백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떤 멍에는 수치와 저주의 멍에라면, 어떤 멍에는 영광과 축복의 멍에입니다.
여기서 멍에를 메는 것과 성령에 매임을 받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둘은 사실 비슷한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성령에 매이는 것은 성령이 계시하신 그 사명을 자신의 삶으로 짊어져야 한다는 다짐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일을 자신의 의무나 사명으로 여길 때 영어에서는 Oblig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obligation’은 라틴어 ‘obligatio’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는 ‘ob-’ (어떤 대상에 대하여)와 ‘ligare’ (묶다, 결속하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obligation’은 무언가에 의해 묶여 있는 상태, 즉 의무나 책임을 의미하게 된 것이죠. 사실 종교라는 말 Religion도 다시(re-) 묶다(ligare)는 의미가 있습니다. 경건한 활동을 통해서 신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묶는 행동이 종교라는 말 속에 있는 의미입니다.
마커스워십의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뿐이네 (Only Jesus)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의 것이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신자는 자신의 삶이 주님께 묶여 있음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선배들은 찬송가 중에 이런 신앙고백을 드렸습니다:
찬송가 380장: 나의 생명 되신 주
(Saviour, More Than Life to Me)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의 흘린 피로써 나를 정케 하사 받아 주소서
(후렴):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 줄로써 나를 굳게 매소서
이렇게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나를 주님께 내어드림으로써 주님께 자발적으로 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주님의 성령이 나를 굳게 잡아 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메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지게 된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사명이 분명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과 굳게 매여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류의 메임도 있습니다. 사람은 탐심과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에 매일 수 있습니다. 그걸 매임은 세상의 풍조를 따르며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탄의 종으로 살아가며 자신을 불의의 병기로 악에게 드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죄의 멍에이며 저주의 결박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에서 지도자들에게서 본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었다고 책망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매인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를 버렸습니다.
3. 시대의 부작위와 공직자의 의무
소제목: 멍에를 벗어버린 이 시대의 예루살렘
최근에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위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경제는 물론 군사력에서 유럽 여러 나라들이 선망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온 세계인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한류나 K컬쳐라고 부르며 배우고 좋아합니다. 금년 2월 1일,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약칭 케데헌)의 OST ‘골든(GOLDEN)’이 제68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시각 매체 최우수 주제가상(Best Song Written For Visual Media)’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K팝 장르 최초의 그래미 수상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동시에 우리나라는 지금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퇴조현상을 보이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독재자를 퇴출시킴으로써 21세기에 민주주의가 가장 생생하게 작동하는 나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수도권 집중화와 지방 소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국을 돌면서 시민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독점적 권력을 누리면서 불의한 기관이 되어버린 검찰을 개혁하기 위하여 검찰청 폐지를 결의한 일은 국회의 큰 성과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사법부의 판결들은 매우 큰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사법개혁이 필요한 이유를 분명히 보여주는 판결들이 최근 잇달아 이어지고 있습니다. 판사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언제나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판사들에게는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 의무를 저버릴 때 그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처럼 국민이 준 멍에와 결박을 벗어버리고 자신들의 탐심과 출세를 보장하는 세력과 결탁하게 됩니다. 그런 사회는 예루살렘에 내린 심판과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멍에와 결박은 오늘날의 말로 하면 의무와 책임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고유한 권리와 함께 각자에게 지워진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가깝게는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그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서울성동경찰서를 방문했더니 벽에 ‘의무 없는 행동을 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말자’는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책임이 없는 일을 강제로 남에게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직권남용강요죄나 공갈죄, 또는 가혹행위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일은 권한을 가진 사람이 낮은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 범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더 큰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가 낮은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 강요가 되지 않을지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에 의무를 하지 않은 죄도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아 성립하는 죄를 법률 용어로 ‘부작위범(不作爲犯)’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재판에서 받은 유죄 판결의 이유 중에 이런 범죄가 있습니다. 2026년 1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형사합의33부 이진관 부장판사)은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징역 23년의 중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습니다.
재판부가 한 전 총리에게 유죄를 선고한 핵심 논리 중 하나가 바로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의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재판부는 한 전 총리가 국무회의 부의장이자 국무총리로서, 대통령의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계엄 선포를 견제하고 막아야 할 헌법적 의무(보증인 지위)가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막지 못한 것을 넘어, 이상민 전 장관과 언론사 단전·단수 조치를 논의하는 등 내란의 실행을 용이하게 도운 점이 ‘중요임무 종사’로 인정되었습니다. 또한 계엄 해제 이후 절차적 하자를 숨기기 위해 ‘사후 계엄선포문’에 서명하고 이를 파기한 행위(허위공문서 작성 및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등도 모두 유죄로 판단되었습니다.
4. 나의 멍에, 나의 영광
소제목: 생후 20,964일, 끝까지 지고 갈 십자가
사도 바울은 가정에서 가족을 위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속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디모데전서 5:8). 우리들은 모두 부모형제들이 가족을 위하여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덕분에 오늘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이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하여 우리가 메는 멍에와 굴레는 무겁기는 하지만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예레미야 5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목회자로서 교회에서 사역을 하다가 사임을 하고 지금은 가정에서 이렇게 생명의바다교회라는 이름으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가사를 돌보기 위해서 일을 하고, 저도 오는 3월부터는 어린이집 차량운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경과 관련한 글을 읽고 영상을 제작하여 유튜브 등으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게 메인 복음전파의 멍에이며 굴레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자랑스럽고 즐겁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비록 교회를 사임하고 아내와 단 둘이서 성경을 읽고 유튜브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우리 부부는 단 한 순간도 주님께 받은 멍에와 굴레를 벗어버리지도 벗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목회자이며 사명을 맡은 주님의 종들입니다. 어린이집 차량의 핸들을 잡는 것과 성경 필사 노트를 펴는 것, 이 둘은 서로 다른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 매인 제게는 두 핸들 모두가 주님의 멍에입니다.
어떤 일은 시작했고 어떤 일은 내려놓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나이가 들고 세월을 보냅니다. 밤에 저희 부부가 필사하는 노트가 있습니다. 그 노트 상단에 우리는 생후 몇일이 되었는지를 날짜와 함께 기록합니다. 어젯밤 저는 ‘생후 20,964일’이라고 적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들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주어진 이 귀한 멍에와 결박을 끝까지 지고 갈 것을 다시금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에게 교묘하게 다가와서 저를 결박하려는 세력이 있음을 기억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 어떤 멍에와 결박이 지워져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멍에를 메고 어떤 결박에 매여 있습니까? 여러분의 직업과 가정은 여러분을 억압하는 굴레입니까, 아니면 주님과 동행하는 영광스러운 멍에입니까? 우리가 이 멍에를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곁에서 함께 메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시다. 배는 닻에 매여 있을 때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고, 연은 줄에 매여 있을 때 비로소 하늘 높이 납니다. 우리가 주님께,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소임에 단단히 매여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유혹과 허무에 휘둘리지 않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멍에를 꺾었을 때 공동체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멍에를 멜 때,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됩니다. 목사로서, 부모로서, 시민으로서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기쁨으로 해내는 것이야말로, 혼돈(Chaos)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질서(Cosmos)를 세우는 가장 강력한 영적 전쟁입니다.
오늘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책망했고 그 결과 예루살렘은 큰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뜨거운 마음은 아마 그가 하나님 앞에서 멘 멍에와 자신에게 매인 결박을 벗어버리지 않고 현실에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용기와 기백을 우리들도 마음에 굳게 새기고 살아갑시다. 그럴 때마다 우리 등에 있는 십자가의 멍에와 결박은 빛나는 면류관과 같이 될 것입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