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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以骨力爲主라 書譜所云衆妙*攸歸라도 務存骨氣也라하니라 余書素惡佻達이라 故於顏柳歐褚及北海書를 日夕參摹이나 未敢以妍媚取悅也라 客曰 君於八法*用筆은 結體已自明하고 悉每嫌骨力多하고 而妍媚少라 故로 時人都不悅君書니라 余曰 惟其骨力多라야 方合古人하고 惟其不悅時目이라야 正是進步니라
글씨는 골력을 주로 삼는다. 『서보』에서는 “온갖 묘법에 귀착하는 것이라도 골기를 보존함에 힘써야 한다”라고 하였다. 나는 글씨가 경박함을 본디 싫어한다. 그러므로 안진경ㆍ유공권ㆍ구양순ㆍ저수량 및 이옹의 글씨를 주야로 본받았으나 감히 연미함으로써 즐거움을 취하지 않았다. 객이 말하기를 “그대는 팔법의 용필에서 결체는 이미 자명하여 매번 모두 골력이 많고 연미함이 적은 것을 싫어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 모두 그대의 글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골력이 많아야 바야흐로 옛사람들과 합하고 오직 그 당시 사람의 눈에 들지 않아야 진실로 이것이 진보이다”라고 여긴다.
*衆妙(중묘) : 온갖 오묘한 것을 이른다.
*八法(팔법) : 글씨 쓰는 여덟 가지 법칙으로 점과 필획의 필법을 말하는 「영자팔법(永字八法)」을 이른다. 장회관(張懷瓘)의 『옥당금경(玉堂禁經)』에 “팔법은 예서[즉 지금의 해서]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후한의 최원에서 종요ㆍ왕희지를 거치며 이미 내려와 8가지 형체에 사용된 것으로 전수되어 모든 글자에 해당되었다. 서예의 이치를 가장 분명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또한 먼저 통달한 이들은 팔법 외에 5가지 필세로 서로 이어 제도를 갖추었다[八法起於隸字之始, 後漢崔子玉, 歷鍾王已下, 傳授所用八體, 該於萬字. 墨道最不可遽明, 又先達八法之外, 更相五勢, 以備制度.]라고 하였다.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卷三에 안진경(顔眞卿)ㆍ유종원(柳宗元)의 「팔법송(八法頌)」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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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軍雜帖은 多任靖*代書라 蓋靖學於右軍하고 大令又學於靖也하니 事見陶宏景*與武帝論書啟니라 然厯代書家傳記에는 多佚靖名이라 可知得傳與否 有幸有不幸이라 當時絕藝로 後世에 湮沒不著者는 固已多矣니라.
왕희지의 잡첩은 대부분이 임정이 대신 쓴 것이다. 임정은 왕희지에게서 배웠다하고 왕헌지는 또 임정에게서 배웠다하니 「도홍경여무제논서계」(도홍경이 무제에게 올린 서예를 논하는 계)에 보인다. 그러나 역대의 서예가 전기에는 대개 임정의 이름이 없어졌다. 전해지는 것과 그렇지 아니한 것은 다행한 것도 있고 불행한 것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뛰어난 예술일지라도 후세에 없어져 드러나지 않는 것은 원래 흔히 있는 일이다.
*任靖(임정)은 동진 목제연간(344-361)의 사람으로 생졸 미상이다. 유견오는 『서품(書品)』에서 “〈급사황문(給事黃門)〉 한 장과 〈치렴력(治廉瀝)〉 한 장은 모두 사안의 위군참군 임정의 글씨이다[右軍書中給事黃門一紙, 治廉瀝一紙凡二篇, 並是靖書.]”라고 하였다.
*陶宏景(도홍경, 456?-536) : 중국 남조시대 양나라 서예가이다. 그는 또한 유불도 삼교에 능통했던 유명 학자였다. 일찍부터 특히 책을 많이 읽어 20세가 되기도 전에 학문이 높아 명성이 자자했다. 양 무제 소연(蕭衍)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국가의 길흉ㆍ정토 등 대사에 자문역할을 하여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불리었다. 宏과 弘은 同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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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臨摹는 須專力一家라 然後에 以各家縱覽揣摩하고 自然胸中이 饜飫*하고 腕下精熟이라 久之眼光廣闊하고 志趣高深하여 集衆長以爲己면 有方得出群境地니라 若未到此境地하고 便冀移情感悟하면 安可得耶리오
임모하려면 한 서예가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후에 각 서예가를 자유롭게 관찰하고 생각하여 가슴 깊이 학문의 깊은 맛을 느낀다면 손의 기량이 정통하고 능숙해질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오래 하면 안목이 넓어지고 의취는 높고 깊어져 여러 서예가의 장점을 모아 자기 것으로 만들면 비로소 무리에서 뛰어난 경지를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아직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서 문득 정취만을 옮겨 감정으로 깨닫기를 원한다면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饜飫(염어) : 음식이 매우 풍성하다, 배부르게 먹다, 책을 두루 많이 읽다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우유염어(優柔饜飫) 즉 학문을 탐구하여 깊은 맛을 느끼는 것을 비유한 말로 두예(杜預)의 『춘추좌씨전서(春秋左氏傳序)』에 “넉넉하고 부드럽게 하여 스스로 구하게 하고 학문을 탐구하여 깊은 맛을 느껴 추구하게 한다[優而柔之, 使自求之, 饜而飫之, 使自趨之]”라고 한 것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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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閒*李待問*字存我는 自許書法出董宗伯*上이라 凡遇寺院하여 有宗伯題額者면 輒另書列其旁하여 欲以爭勝也니라 宗伯聞而往觀之曰 書果佳하나 但有殺氣라 後에 李果以起義하여 陣亡*이라 又傳宗伯以李書留後면 必掩己名하여 乃陰使人으로 以重價收買 得卽焚之니라 故로 李書至今絕少니라 此與趙松雪焚鮮于伯機*書와 正同인데 此必屬附會*之說이라 趙董大家라 天姿學問이 俱可籠罩*一切니라 若沾沾懷忌嫉心이면 則識量淺隘하여 藝必不能精造矣니라
운간의 이대문은 자가 존아인데 스스로 글씨가 동기창 보다 낫다고 자부하였다. 사원에 동기창의 제액이 있으면 문득 따로 글씨를 써서 그 옆에 벌려놓고 승부를 겨루려고 하였다. 동기창이 듣고 가서 보고 말하기를 “글씨는 과연 아름다우나 살기가 있다”라고 하였다. 후에 이대문은 마침내 의병을 일으켰으나 전사하였다. 또 전해지기를 동기창은 이대문의 글씨가 후에 남으면 반드시 자기의 명성을 가릴 것이라고 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비싼 가격으로 사들여 불살라 버렸다. 그러므로 이대문의 글씨가 지금에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이것은 조맹부가 선우추의 글씨를 불살랐다는 것과 같은데, 이는 반드시 견강부회(牽强附會)함에 속한다. 조맹부ㆍ동기창은 대가로서 타고난 자질과 학문을 하나로 이루었다. 만일 경망하여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품었다면 식견과 도량이 좁고 얕아서 서예를 반드시 정진할 수 없었을 것이다.
*雲閒(운간) : 명나라의 지명으로 송강 화정(지금의 上海)이다.
*李待問(이대문, 생졸 미상) : 자는 존아(存我)이다. 명나라 송강 화정 사람으로 숭정연간에 벼슬은 중서사인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
*董宗伯(동종백) : 董은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을 이른다. 예부상서를 지내서 종백이라 한다. 종백은 대가ㆍ거장을 뚯하기도 하고 벼슬 이름을 말하는데 주나라 때에는 육경의 하나로 종묘 제사 등을 맡았다. 곧 후대 예부의 직무이기에 예부상서 대종백 또는 종백이라 하고, 예부시랑을 소종백이라 하였다.
*鮮于伯機(선우백기) : 선우추(鮮于樞, 1256-1301)의 자는 백기(伯機)이고 호는 곤학산민(困學山民)이다. 그는 북경(北京) 또는 하북성(河北省) 출신으로 벼슬은 태상시전부(太常寺典簿)를 지냈다. 유년기 장천석(張天錫)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그는 자신의 글씨가 고대 명인에 못미친다고 생각하여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선우추의 글씨는 필력이 굳세고 기이한 분위기가 있었고 현완법(懸腕法)으로 큰 글씨와 소해서를 잘 소화하여 높게 평가받았다. 원나라 시대 조맹부와 선우추가 각자 독특한 글씨체로 유명하였다. 선우추는 스스로 호를 위순암(委順庵)이라 불렀다. 위순(委順)은 자연에 순응하여 즐기면서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정신 세계는 행서와 해서에 반영되었다. 조맹부는 선우추을 질투하여 선우추의 글씨를 대량으로 사들여서 모두 없앴기 때문에 전해지는 묵적이 적다고 한다
*附會(부회) :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줄임말로 근거가 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맞추는 것이다.
*籠罩(농조) : 덮어씌우다, 한 덩어리로 만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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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墨二字를 時人都不講究니라 要知畫法字法은 本於筆하고 成於墨이라 筆實則墨沉하고 筆浮則墨漂라 倘筆墨을 不能沉着하면 施之金石에 尤弱態畢露矣니라
필묵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서 요즘 사람들은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다. 화법과 서법은 붓을 근본으로 하여 먹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붓이 충실하면 먹빛은 깊어지고 붓이 가벼우면 먹빛은 가볍게 된다. 만약 필묵을 침착하게 할 수 없다면 이를 금석에 새긴다 해도 더욱더 연약한 자태만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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楷法用墨은 欲腴하고 用筆은 欲圓轉而有勁이라 乃墨瀋癡肥하면 絕無鋒穎하여 似龜鼈之縮項足이라 行草須宛轉回向하고 沈着收束이라 乃似枯枿敗蔓縱橫道上하고 而云出自魏武鍾傅顚旭狂素*하면 墮入惡道이니 良可憫也니라
해서 필법에서의 용묵은 풍족해야 하고 용필은 원만하고 굳세어야 한다. 더구나 먹물을 듬뿍 묻히면 붓끝 필세가 거의 없게 되어 거북이나 자라가 목이나 발을 움츠린 것과 같아진다. 행서ㆍ초서는 반드시 부드럽게 돌리면서 방향을 바꾸고 침착하게 거두어 마쳐야 한다. 그런대도 마른 등걸과 죽은 덩굴이 노상에서 자유자재로 흩어진 것과 같으면서 조조ㆍ종요ㆍ장욱ㆍ회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여 나쁜 길로 빠져 들어가니 진실로 민망한 일이다.
*魏武鍾傅顚旭狂素(위무ㆍ종부ㆍ전욱ㆍ광소) : 위무는 위 무제 조조이다. 종부는 태부종요(太傅鍾繇)이다. 전욱(顚旭[장욱])은 술에 취하면 머리와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기에 장전이라고 한다. 광소(狂素[회소])의 글씨는 마치 놀란 뱀이 달아나고 소나기가 몰아치듯 하여 사람들은 광소가 전욱을 계승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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買王得羊*이면 不失所望은 宋齊閒人語也라 買褚得薛*은 不落節은 唐中睿之季人語也니라 蓋時重大令書한데 而羊敬元爲大令門人이니 妙有大令法한데 時重河南*書에 而薛少保는 爲河南甥으로 妙有河南法이라 二事는 可成切對이니 亦可見一脈相傳이라 評騭은 自有公論也니라
‘왕헌지의 글씨를 사려다 양흔의 글씨를 얻어도 바라는 것을 잃은 것은 아니다’고 한 것은 송나라ㆍ제나라 사람들의 말이다. ‘저수량의 글씨를 사려다 설직의 글씨를 얻어도 예절을 떨어뜨린 것은 아니다’고 한 것은 당 중종ㆍ예종 말년의 사람들 말이다. 당시에 왕헌지 글씨를 중히 여겼는데, 양흔은 왕헌지의 문인으로 왕헌지의 법도가 있었다. 당시에 저수량의 글씨를 소중히 여겼는데, 설직은 저수량의 생질로 오묘함이 저수량의 법도가 있었다. 두 가지 일은 모두 상대가 되어 또한 한 맥이 서로 전함을 볼 수 있다. 세상의 평가에는 스스로 공평한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買王得羊(매왕득양) : 王은 왕헌지(王獻之, 344-386)를 이르는 말로, 장회관은 『서단(書斷)』에서 왕헌지의 글씨를 신품에 배열하고 “왕헌지는 특히 초서ㆍ예서(즉 해서)를 잘 썼는데, 어려서 부친에게 배우고 다음은 장지를 익혔다. 이후 제정된 법도를 개변시켜 별도로 그의 법도를 창조하였다. 솔직하고 얽매이지 않는 사사로운 마음은 암암리에 자연의 법도와 부합하였다. 그의 세속을 초탈한 뜻을 보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행서ㆍ초서에서 흥이 합함에 이르면, 외로운 산봉우리가 사방이 끊어져 하늘 밖으로 멀리 나간 것과 같으니, 그것의 가파르고 험준함은 헤아릴 수 없다[尤善草隸, 幼學于父, 次習于張. 後改變制度, 別創其法. 率爾私心, 冥合天矩. 觀其逸志,莫之與京. 至於行草興合, 如孤峰四絕, 迥出天外, 其峭峻不可量也.]”라고 하였다. 羊은 양흔(羊欣, 370-442)를 이르는 말로, 장회관은 『서단』에서 양흔의 글씨를 묘품에 배열하고, “앙상하기는 혹독한 서리가 내린 숲과 같고, 완곡함은 바람에 날리는 눈과 같다. 놀란 날짐승과 달리는 길짐승이 이어서 날거나 달리니, 또한 왕의 충신이고 조정의 원로라 할 만하다. 심약은 ‘양흔은 특히 예서(즉 해서)를 잘 써서 왕헌지 이후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왕헌지의 글씨를 사면 양흔의 글씨를 얻으니, 바라는바를 잃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왕헌지의 글씨에서 풍신이 겁약한 것은 종종 양흔의 것이다[摵若嚴霜之林, 婉似流風之雪. 驚禽走獸, 絡繹飛馳, 亦可謂王之藎臣, 朝之元老. 沈約云, 敬元尤善於隸書, 子敬之後, 可以獨步. 時人云, 買王得羊, 不失所望. 今大令書中, 風神怯者, 往往是羊也.]”라고 하였다.
*買褚得薛(매저득설) : 저수량(褚遂良, 596-658)을 이르는 말로 장회관은 『서단』에서 저수량의 글씨를 묘품에 배열하고, “저수량의 해서는 매우 아리따운 정취를 얻어 아름다운 돈대의 푸른 자물쇠가 멀리 봄 숲에 비치고, 미인의 고운 아름다움을 비단에 맡기지 않음과 같다. 화려함을 더한 얌전하고 아름다운 모양은 구양순ㆍ우세남이 사양할 것이다. 저수량의 행서와 초서의 사이는 곧 구양순ㆍ우세남의 두 사람 뒤에 있다[真書甚得其媚趣, 若瑤臺青鏁, 窅映春林, 美人嬋娟, 不任羅綺. 增華綽約, 歐虞謝之. 其行草之間, 即居二公之後.]”라고 하였다. 薛은 설직(薛稷, 649-713)을 이르는 말로, 장회관은 『서단』에서 설직의 글씨를 능품에 배열하고, “설직은 하동 사람으로 벼슬은 태자소보에 이르렀다. 글씨는 저수량을 배워 더욱 곱고 아름다움을 숭상하였는데, 아름답고 좋은 피부와 살짐은 스승의 반을 얻었다. 저수량의 뛰어난 제자라 할 만하니, 당시 매우 보배롭게 숭상하였다[薛稷, 河東人, 官至太子少保. 書學褚公, 尤尚綺麗, 媚好膚肉, 得師之半, 可謂河南公之高足, 甚爲時所珍尚.]”라고 하였다.
*河南(하남) : 저수량(褚遂良, 596-658)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종 때 하남군공에 책봉되어 저하남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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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楷最不易工이라 元章*但有行押하고 偶一作楷면 亦但妍媚取態耳이니라 每論에 宋楷는 以吳傅朋說*爲第一이요 明楷는 以文衡山*爲第一이라하니라 然畢竟에 子昂得黃庭樂毅法居多니라 邢子愿*謂 右軍以後엔 惟趙吳興*이 得正衣鉢하고 唐宋人皆不及也니라하니라
소해는 공교하게 쓰기가 가장 어렵다. 미불은 다만 행서를 잘 썼고 간혹 해서를 쓰면 연미한 자태를 취하였을 뿐이다. 매번 논하기를 “송대의 해서는 오열을 제일로 삼았고 명대의 해서는 문징명을 제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는 조맹부가 쓴 〈황정경〉ㆍ〈악의론〉의 필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형동은 이르기를 “왕희지 이후에는 오직 조맹부만이 의발을 얻었고 당과 송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元章(원장) : 미불(米芾, 1051-1107)의 자는 원장(元章)이다.
*吳傅朋說(오부붕열) : 오열(吳說, 1092?-1170?)의 자는 부붕(傅朋)이고 호는 연당(練塘)이며 항주 전당(杭州錢塘) 사람으로 벼슬은 상서랑(尚書郎)을 지냈다. 그는 해서ㆍ행서ㆍ초서 및 방서를 고루 잘 썼는데, 소해는 ‘송시제일(宋時第一)’이란 칭호가 있다. 특히 독창적인 일필일행(一筆一行)의 유사서(遊絲書)에 대하여 송 고종 조구(趙構, 1107-1187)는 『한묵지(翰墨志)』에서 “소흥(紹興) 이래 잡서와 유사서는 오직 전당의 오열이다[紹興以來, 雜書遊絲書, 惟錢塘吳說]”라고 하였다. 유사서는 근맥을 서로 연결하는 일종의 행초서이다. 작품은 〈문내성취첩(門內星聚帖)〉과 〈유사서송시(遊絲書宋詩)〉 등이 전한다.
*文衡山(문형산) :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원래 이름은 벽(壁, 또는 璧)이고 자는 징명(徵明)이다. 그러나 42세부터 징명으로 이름을 하고, 자는 징중(徵仲)으로 고쳤다. 그의 조상 관적이 호남 형산(衡山)이기 때문에 스스로 형산거사(衡山居士)라고 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문형산(文衡山)이라고 불렀다. 그의 서예 창작 사상은 그의 스승인 이응정(李應禎)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응정은 일찍이 그에게 말하기를 “공부를 한다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발걸음만 따르는가? 왕희지가 이룬 것만을 배운다면 단지 다른 사람의 글씨일 뿐이다[破卻工夫, 何至隨人腳鍾, 就會學成王羲之, 只是他人書耳]”라고 하였다.
*邢子願(형자원) : 형동(邢侗, 1551-1612)의 자는 자원(子願)이고 임읍(臨邑) 사람으로 벼슬은 행태복시소경(行太僕寺少卿)을 지냈다. 이유정(李維禎)은 『대비산방집(大泌山房集)』에서 “형동의 글씨는 종요ㆍ왕희지ㆍ우세남ㆍ저수량ㆍ미불ㆍ회소를 법으로 하였으며, 왕희지의 정신과 형체를 깊이 얻어 나라 안에서 매우 소중한 대접을 받았다[書法鍾王虞褚轉米禿素, 而深得右軍神體, 極爲海內所珍]”라고 하였다.
*趙吳興(조오흥) : 조맹부(趙孟頫, 1254-1322)는 오흥(吳興) 사람이기에 ‘조오흥(趙吳興)’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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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能多見古人墨蹟이라 惟求佳本碑帖이니 雖殘缺이라도 亦皆可寶니라 趙承旨云 得古人石刻數行을 專心學之하면 何患不名世리요하니라 數行能悟하면 卽千百行이라도 用筆은 一例也니라 觀能書者는 僅得數字라도 揣摩便自成體이니 無他라 專心既久하여 悟其用筆用墨하고 及結體之法하여 供我運用耳이라 世之專求彙帖하고 而棄殘缺不全者하니 徒誇收藏之富하면 焉知古人精神所在哉리오.
옛사람의 묵적은 많이 볼 수 없다. 오직 좋은 비첩을 구한다면 비록 일부분이 떨어져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보배라고 할 수 있다. 조맹부는 “옛사람의 석각 몇 행이라도 얻어서 온 마음을 기울여 그것을 배운다면 어찌 세상에 이름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몇 행을 깨달을 수 있다면 수천 수백 행이라도 용필은 똑같다. 글씨 잘 쓰는 이를 보면 겨우 몇 자를 얻더라도 세심하게 따지고 연구하여 문득 스스로 형체를 이루니 다른 것은 없다. 온 마음을 기울인지 오래되어 용필과 용묵 및 결체의 방법을 깨달으면 자신의 운용하는 법을 갖추게 될 것이다. 세상의 법첩모음집을 전부 구한다면서 일부분이 떨어져 완전하지 못한 것은 버리고, 다만 수장한 것이 풍부하다고 자랑한다면 어찌 옛사람의 정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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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書에는 當悟波折*之法이라 蓋點畫長短에는各有分寸*이라 隨其體하여 而結之*니라 不能泥於成見*이라 倘字本用長하고 而長者不安하니 則就其短하며 而施之字本用短하면 而短者不足하고 則就其長而滿之니라 若執着成見하면 凝滯於胸하여 終不能參以活法*運用이면 必致如書譜所云任筆爲體하고 聚墨成形矣라하니라 雖參活法이나 亦自有一定不易之勢하여 奔放馳驟하여도 不越範圍하나니 所謂師古而不泥於古를 則得之니라
글씨를 쓸 때에는 마땅히 파절법을 깨달아야 한다. 대개 점과 획의 장단에도 각각 적절한 기준이 있으니 그 형체에 따라서 안배해야 한다. 틀에 잡힌 견해에 의해 고집을 세울 수는 없다. 만일 글자가 본디 길게 되었는데 긴 것이 불안하면 짧게 하고, 글자가 본디 짧게 되었는데 짧은 것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길게 하면 된다. 만약 선입견에 집착하면 흉중에 막히거나 걸리게 되어 마침내 활용하는 방법으로 운용할 수가 없으니, 『서보』에서 말한 것처럼 반드시 붓에 맡겨 형체를 만들고 먹을 모아 형세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비록 활용하는 방법을 참고했다 하더라도 또한 스스로 한 번 정한 것은 바뀌지 않는 형세가 있어 자유분방하게 내달려도 법도를 초월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고법을 본받되 고법에 매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얻을 것이다.
*波折(파절) : 가로획을 ‘파’라 한다. ‘절’은 가로획을 쓸 때 필봉을 왼쪽으로 보내고자 하면 먼저 오른쪽으로 향하여 꺾어 내려 머무르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려면 단연코 방향을 바꾸어야 하므로 필획이 모나고 꼿꼿하며 능각이 분명하다. 세로획을 쓸 때 위아래 또한 그렇게 한다. 주이정이 『서학첩요』에서 “모나다는 것은 절법이니 점ㆍ획ㆍ파ㆍ별을 시작하여 마치는 곳이다[方者折法也, 點畫波撆起止處, 是也.]”라고 한 것을 참고할 수 있다.
*分寸(분촌) : 일정한 한도를 이르는 말이다.
*結體(결체) : 점과 필획을 안배하는 법도를 서학에서는 결체라 한다.
*成見(성견) : 이루어져 틀이 잡힌 견해를 이르는 말, 즉 선입견이다.
*活法(활법) : 활용의 방법을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