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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철기시대 여러 나라의 발전
철기의 생산이 가능해져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지각변동을 일으키던 시기,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는 어떤 나라들이 성장하였을까요?
교과서에는 이 시기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그리고 삼한이 성장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는데요, 앞서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국가는 고조선 하나였는데, 철기시대에는 왜 이렇게 많은 나라가 우수수 등장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고조선 역시 이들과 공존하는 시기가 꽤 되지 않았을까요? 위만조선 시기에 철기문화의 본격적인 발달이 이루어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에 철기가 들어왔다는 뜻이고, 부여 등의 국가는 ‘초기’ 철기시대의 국가들이라고 하니까요.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철기’가 인류 사회에 끼친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철기는 기원전 15세기경 히타이트족에 의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세기~기원전 3세기)에 사용되었다고 하죠. 단일광물인 철이 합금인 청동보다도 더 늦게 사용된 까닭은 자연상태에서 철광석, 즉 돌덩어리로 존재하는 철을 녹여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청동기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들(납, 아연, 구리, 주석 등)보다 훨씬 더 높은 온도를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높은 온도를 내는 데에는 송풍관 등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술이 더해져 마침내 철의 제련이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생산과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철은 다른 금속에 비해 비할 수 없이 단단했기 때문에, 이전보다 땅을 깊-이 파는 작업이 가능해졌고요, 따라서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영양분이 풍부한) 흙을 갈아엎어 농사짓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른바 심경(深耕)이 가능해지면서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이죠.
또 철로 만든 무기는 날카롭게 날을 세워도 사람의 뼈를 끊을 수 있을 만큼 강력했고, 청동으로 된 무기를 단숨에 부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철기시대의 도래는 그렇게 청동기의 몰락과 함께 찾아왔고, 고조선을 구심점으로 연합해 있던 세력들 역시 이 변화의 바람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1) 부여
이 시기 가장 먼저 발전하였다고 알려진 나라는 부여입니다. 부여는 우리민족의 조상이라고 여겨지는 예족(濊族)과 맥족(貊族)가운데 (단군을 지도자로 했다고 추정되는) 예족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 같은데, 맥족도 참여했던 것 같습니다.
부여의 기원에 관해서는 예군(濊君) 남려에 대한 기록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요, 후한서에는 위만조선 말기 우거왕 대에 예군(濊君) 남려가 우거를 배반해 28만 명을 이끌고 중국 한(漢)의 무제(武帝)에게 귀속했고, 한(漢)은 그 지역을 창해군으로 만들었다가 곧 폐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예군 남려의 조상은 이미 기원전 2세기 초에 위만의 찬탈에 저항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세력이 아닐까 싶고, 위만조선이 위기에 처한 틈을 타 일부는 남려를 따라 한(漢)에 투항하고, 일부(부조현 포함 영동7현)는 동쪽으로 이동해 낙랑군의 동부도위에 속했던 것 같습니다.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에는 부조현을 제외한 6현은 (동)예를, 부조현은 (동)옥저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옥저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지형이라 북옥저와 남옥저로 나누어 불리는데, 북옥저의 중심지로 알려진 ‘치구루’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부여에 대해 중국측 기록을 통해 알려진 내용은 1) 연(燕)의 북쪽에 있는데 그 남쪽이 고구려와 접해 있다는 것 2)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사회라는 것 3) 중국과 가까이 위치해 ‘왕’이라는 칭호를 일찍부터 사용하는 등 중국 문화의 영향을 빨리 접했다는 것 4) 마가, 우가, 구가, 저가 등 가축의 이름을 딴 우두머리들이 사출도(四出道)라고 불리는 땅을 다스렸는데 우두머리에 대한 호칭을 가축의 이름을 따 지었던 것으로 보아 목축이 중시되었으리라는 것 5) 순장(殉葬)의 규모가 가장 컸던 것으로 보아 중앙을 다스리던 왕의 세력이 가장 컸지만 흉년이 들면 왕이 교체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아 왕권이 절대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는 것 6) 제천행사인 ‘영고(迎鼓)’를 은력 정월에 지냈다는 것 7) 투기하는 여성을 가혹하게 처벌했다는 것 8) 도둑질을 하면 12배를 배상하게 하는 법이 있었다는 것 9) 흉노와 같이 형사취수혼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이 외에 (부여인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고 근엄ㆍ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노략질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구려에 비해) 중국과의 관계가 좋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여의 읍락에는 지배층을 지칭하는 말로 보이는 호민(豪民)이 있었다고 하고, ‘노복(奴僕)’과 같은 처지의 하호(下戶)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때 ‘하호’는 피지배층, 즉 귀족이 아닌 평민을 일컫는 말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동양이든 서양이든) 고대사회에서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대하는 방식에 어떤 규제나 절제를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귀족이 아닌) 평민은 대개 노복과 같은 처지에 있었을 거에요. 따라서 노복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피지배층 전체가 노예 신분이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2) 고구려
부여 다음으로 언급할 나라는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주몽의 건국 설화부터가 부여와 매우 닮아있는데요, 하늘의 조화에 의해 임신한 여성이 아들을 낳고 그 아이를 돼지우리나 마구간같은 곳에 버려두었다는 점, 그렇게 자란 아이가 활을 잘 쏘았고 형제들의 질시를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하자 도망하다가 물고기와 자라 등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는 점, 결국 왕이 되었다는 점 등이 부여의 시조 동명왕과 매우 유사합니다. (물론 전 세계 대부분의 신화들이 대체로 이런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긴 합니다) 다만 차이점은 부여의 시조 동명은 색리국에서 도망을 쳐 부여를 세웠는데,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삼국유사』 북부여조에 따르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땅에 도읍해 졸본부여를 세웠다는 점이죠.
주몽의 설화에는 비류국의 송양왕이 주몽과의 활쏘기 시합에서 패한 뒤 주몽에게 귀부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이때 송양의 집단은 주몽 이전에 왕을 내던 소노부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주몽의 계루부가 왕위를 차지한 뒤에도 소노부의 적통대인이 계속해서 ‘고추가’를 칭했다고 하는데요, 이는 (송양과의 대결 이야기에서 보듯) 소노부가 계루부 이전에 그 지역의 맹주로서 군림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고구려는 지형이 험준해 주변 세력을 정복하며 발전하였습니다. 중국의 사서에서 부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고구려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해서 노략질하기 좋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짐작컨대 주변을 ‘정복’하며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국과의 마찰이 있었던 탓이겠죠.
고구려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빼앗아 먹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을 테니까요. 주몽 설화에는 어머니인 유화가 비둘기를 통해 주몽에게 보리씨를 보내주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당시 농업을 일으키는 일이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었기에 이런 내용이 포함되었던 것 같아요. 모두가 굶주리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곡식의 종자를 전파했다면, 그것만으로도 백성들의 칭송을 받기에 충분했을 테니까요. 농사를 지었으면 그 수확에 대해 하늘에 감사해야죠. 10월에 지낸 ‘동맹’은 추수감사제이면서 주몽집단의 조상신에 대한 제사이기도 했을 겁니다. 이런 제천행사를 통해 주몽집단은 더욱 그 권위를 높여갔을 테고요.
고구려에는 ‘서옥제’라고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남자가 혼인할 여자의 집 뒤에 서옥(사위의 집)을 짓고 살다가 아이를 낳아 장성하면 남자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풍습이었습니다. 노동력이 귀하던 시기에 혼인으로 인해 노동력이 남자 혹은 여자의 집 중 한쪽 집에 치우치게 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만들어진 관습 같은데, 나름 합리적인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3) 옥저와 동예
옥저와 (동)예는 앞서 낙랑군의 동부도위에 속했던 예족집단이 동부도위 폐지(기원후 30년) 후에 형성한 정치체라고 설명했었는데요, 모두 동쪽에 치우쳐 선진문물의 수용이 늦었고 정치적 세력은 약했지만,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어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합니다.
동예의 경우 다른 읍락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는 것을 금하고 이를 어길 경우 노비나 소, 말로 배상하게 하는 ‘책화(責禍)’라는 풍습과, 혼인은 다른 부족과 하는 족외혼의 풍습이 있었는데, 양자 모두 씨족 공동체 사회의 풍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수확기인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도 지냈죠.
옥저에는 10살쯤 된 여자아이를 혼인할 남자의 집에서 데려다가 양육하다가 여자가 장성하면 여자의 집에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데려오는 ‘민며느리제’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민며느리제는 고구려의 서옥제와 마찬가지로 혼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자아이 집의 노동력 손실을 보상하기 위한 풍습이었던 것으로 보이고요, 이 밖에도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해 두었다가 나중에 뼈를 추려 다른 가족들의 뼈와 함께 안치하는 가족공동묘제의 풍습이 있었다고 해요.
옥저와 동예는 모두 국력이 약해 고구려에 농작물과 해산물 등을 공물로 바치며 고구려의 통제를 받다가 고구려 태조왕 시기즈음에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 삼한
삼한에 대해서는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는데요, 정리해보면 대방의 남쪽에 ‘한(韓)’이라 불리는 족속이 살았고, 위만에 의해 쫓겨난 준왕이 그들의 땅에 들어가 스스로 ‘한왕’을 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땅에는 약 80여 개로 추정되는 많은 소국들이 할거하고 있었고, (준왕이 이끌고 온) 기자조선의 이주세력이 토착민인 한족(韓族)을 피지배층으로 삼아 약 12개의 소국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들이 ‘진한(辰韓)’이라 불렸을 것이고요, 변진(弁辰)은 본래 변(弁)이라 불리던 땅에 살던 한족(韓族)의 소국들 가운데 진(辰)에 의해 예속적 상태에 놓이게 된 12개의 소국들을 일컫는 말이었을 겁니다. 본래는 한족의 소국들이었으니 변한(弁韓)이라고도 불렸겠죠.
하지만 진한과 변진에 속한 총 24개의 소국을 제외하고, 50개가 넘는 소국은 끝까지 진국에 복속되지 않았던 것 같고, 이들은 자신들을 진국에 속한 세력(진한+변진=24개 소국)과 구분하기 위해 ‘마한(馬韓)’을 칭한 것 같습니다. 숫자가 많으니 마한에 속한 소국들이 뭉치면 가장 힘이 강했을 테고, 결국 마한의 소국 출신이 진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월지국에 도읍해 삼한을 이끌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 이해하면 삼한이 모두 진국(辰國)에서 나왔다는 말도,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커 진왕의 자리를 마한 출신이 차지했다는 말도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한은 남쪽 땅에 위치해 있어 논농사가 발달하였고, 봄 파종(씨뿌리기)과 가을 수확 시기에 계절제를 지냈습니다.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고, 신성한 지역인 소도가 있었는데, 소도는 천군이 주관하는 곳이고 정치적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어서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가면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천군의 존재 때문에 삼한 사회는 제사와 정치가 분리된 사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도는 선진문물을 가지고 와 정치권력을 장악한 이주한 유이민 세력과 토착세력 간의 세력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곳이라 여겨지기도 하죠. 만약 소도를 이차돈이 절을 지으려고 했던 신성한 숲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요? 이러한 소도의 전통이 남아 있는 지역이라면, 불교의 공인이 다른 곳보다 어려웠으리라는 추정은 충분히 가능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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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나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언제 다음 편이 올라올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