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홍중(弘重)이고, 자는 임보(任甫)이며, 진주인(晉州人)이다. 진주의 강씨는 해동의 여러 종족 가운데 으뜸으로 쳐준다. 원조(遠祖)인 계용(啓庸)이 고려조에서 벼슬하여 국자 박사(國子博士)를 지냈다. 그 뒤에 휘 군보(君寶), 휘 시(蓍), 휘 회중(淮仲) 등이 모두 대관(大官)을 지냈다.
5대조인 휘 형(詗)은 대사간을 지냈는데, 직간(直諫)하다가 연산군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세 아들과 함께 같은 날에 화를 입었다. 이분의 아들인 휘 영숙(永叔)은 별좌(別坐)를 지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대사간의 부인 김씨(金氏)는 여러 달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애통해하다가 죽었는데, 중묘(中廟)께서 반정(反正)하고서 정려문(旌閭門)을 내렸다. 별좌의 아들 휘 온(溫)은 의정부 사인을 지냈다. 사인의 아들 휘 사필(士弼)은 부제학을 지냈는데, 형제 세 사람이 한때에 크게 현달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갑자년의 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였다. 부제학의 아들 휘 연(綖)은 승지를 지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서윤(庶尹) 홍인지(洪仁祉)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정축년(1577, 선조10)에 태어났는데, 기도(器度)가 따스하고 고상하여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 계묘년(160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병오년(1606)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으며, 태상시 봉사(太常寺奉事)를 겸임하였다. 가주서(假注書)가 되었을 때 마침 조사(詔使)를 접견하게 되어 수응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는데, 차질이 없게 기록하였으므로, 제공(諸公)이 모두 칭찬하였다. 실주서(實注書)로 승진하여 설서(說書)를 겸임하였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일찍이 승지공과 서로 알고 지냈는데, 어느 날 승지공을 만나 보러 왔다. 그때 공이 곁에서 모시었는데, 이이첨이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설서를 홍문관 정자로 삼고자 한다.” 하니, 승지공이 답하지 않았다. 이이첨이 돌아간 뒤에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사람을 앞에 놓고 명리(名利)로써 꾀는 것이 무슨 경우인가. 너는 그것을 잘 생각하라.” 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이이첨과 절교하고 통하지 않았다. 이이첨이 처음에서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자신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치므로 크게 유감을 품고는 공을 한림(翰林)으로 천거한 자를 공박하였다.
예조와 형조와 병조의 낭관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평안 도사(平安都事)가 되었으며,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와 병조의 낭관이 되었다. 사간원 정언으로 옮겨졌는데, 당시에 이이첨의 일당이 몹시 기세가 치성하여 사림(士林)에 화를 끼쳤다. 이항복(李恒福)은 선조(先朝)의 어진 재상이었는데도 무함하여 중한 죄에 빠뜨리자, 공이 그 원통함을 극력 진달하니,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기었다. 뒤에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고서 필선(弼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되었다.
고관(考官)이 되어 ‘인봉귀룡(麟鳳龜龍)’이란 제목으로 책문(策問)을 시험 보였는데, 어떤 거자(擧子)가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고 있는 판에 사령(四靈)을 어째서 묻는가?’라는 내용으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고관들이 모두 그 거자를 내쫓으려고 하였는데, 공이 홀로 쟁론하여 1등으로 발탁하였다. 이에 흉도들이 모두 노하여 과거 시험장에서 사사로움을 따랐다는 내용으로 탄핵하면서 해를 넘겨 논계(論啓)함에 따라 마침내 파직되었다. 광해군이 모후(母后)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자, 관직에 제수된 자들이 모두 두려워서 감히 모후에게 숙사(肅謝)하지 못하였는데, 공만 홀로 그 예를 행하니,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겼다.
계해년(1623, 인조1)에 반정이 일어난 뒤에 외직으로 나가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서 수령들을 무신(武臣)들로 바꿈에 따라 판교(判校)에 제수되었다.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의 개사(介使)가 되어 일본에 갔는데, 관백(關白) 및 연로(沿路)에서 바치는 금은(金銀)과 잡화(雜貨)가 아주 많았는데도 하나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오랑캐들이 모두 공경하면서 중히 여기었다. 사행에서 돌아오자 상께서 인견하고는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파도가 이는 만리 먼 길을 아무 탈 없이 잘 다녀왔으니, 참으로 기쁘고 다행이다.” 하고는, 통정대부로 승진시켰다. 일본에서 조정으로 재화(財貨)를 모두 싸서 보내었는데, 상께서 특명으로 공이 직접 받게 하였다. 이에 상소를 올려 세 차례나 고사하자, 약간의 재화를 하사해 주라고 명하였는데, 이를 모두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진년과 정유년에 왜놈들에게 잡혀갔던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해 왔는데, 공이 상주하기를 “이들은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이니, 그 가운데 나이가 젊고 화포(火砲)를 잘 다루는 자들은 훈국(訓局)에 소속시켜서 봉급을 주면서 그 기예를 전수하게 한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이로울 것입니다.” 하니, 곧바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훈국의 화포가 정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무리에게 힘입어서였다.
외직으로 나가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었는데, 정사를 폄에 있어서 청렴함과 간략함을 위주로 하여 다스리자, 고을 사람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기렸다. 계모부인(繼母夫人)의 상을 당하였다가 상복을 벗은 뒤에 병조와 형조의 참의 및 승정원 승지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예묘(禰廟)를 추숭(追崇)하는 의론에 연좌되어 관원들이 서로 잇달아 유배되었는데, 공이 극력 구제하여 주었다.
임신년(1632, 인조10)에 인목왕후(仁穆王后)께서 승하하였다. 공은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계유년(1633) 가을에 강원 감사(江原監司)에 제수되었다가 체차되고서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는데, 염리(廉吏)로 뽑혀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도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공을 좋아하지 않던 자에게 탄핵당하여 체차되고서 총관(摠管)에 제수되어 특진관(特進官)으로서 경연에 입시(入侍)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은 명나라의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의 접반사(接伴使)로서 서쪽 변경 지역에 가서는 상주(上奏)하기를 “서로(西路)의 관방(關防)이 어느 한 곳도 믿을 만한 곳이 없으니, 나라에 저축해 둔 곡식을 실어 보내어 전사(戰士)들을 격려하소서.” 하였는데, 따라 주지 않았다. 그 뒤 병자년의 난리 때 저축해 둔 곡식을 병화(兵火)에 잃게 되자, 조정에서 후회하였다.
다시 외직으로 나가 청송 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가 체차되고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제수되었다. 다시 외직으로 나가 성천 부사(成川府使)가 되었다가 체차되고서 돌아왔다. 임오년(1642, 인조20) 9월 18일에 서울에 있는 집에서 졸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였다. 고양군(高陽郡) 남쪽의 용보원(龍步院)에 있는 선영 곁의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첨정(僉正) 윤기정(尹起禎)의 딸인데, 부덕(婦德)이 있기로 세상에 소문났다.
공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장남 급(
)은 판관(判官)이며, 첨지중추부사 정회원(鄭恢遠)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는데, 석로(碩老)와 석구(碩耈)이다. 차남 전(琠)은 서윤(庶尹)이며, 도사(都事) 한윤겸(韓允謙)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으며, 측실에게서 아들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삼남 욱(頊)은 목사(牧使)이며, 사의(司議) 이창원(李昌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는데, 석빈(碩賓)과 석신(碩臣)이다. 측실에게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무(珷)로, 낭청(郞廳)이며, 목사 홍이일(洪履一)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석로는 현감이고, 석구는 승문원 정자이며, 석빈은 도사이고, 석신은 생원이다.
장녀는 참판 정두경(鄭斗卿)에게 시집왔는데,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차녀는 진사 이석형(李錫亨)에게 시집가서 3남을 두었는데, 이창흥(李昌興)ㆍ이문흥(李文興)ㆍ이수흥(李壽興)이다. 또 측실에게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교위(校尉) 기염(奇恬)에게 시집가서 2남을 두었다.
공은 천성이 화락하였으며, 자신을 단속함에 있어서는 청렴하고 검약하여 문을 닫아걸고 출입을 자제하면서 교유하기를 일삼지 않았다. 항상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나다니기를 좋아하면서도 낭패당하지 않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조정에 있은 지가 거의 40년이었으며,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아 다스렸는데도 항상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다. 염빈(斂殯)을 하던 날에는 상국(相國) 김육(金堉)이 청백함에 대해서 탄복하였다. 내외의 손자 손녀는 모두 50여 명이다.
공의 자급이 가선대부였으나 아들 급(
)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됨으로 해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나 두경은 젊어서 사위가 되어 지금은 이미 머리가 하얘졌는바, 공의 지조(志操)와 내행(內行)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안다.
명은 다음과 같다.
강씨 집안 계통 본디 진주서 나와 / 姜系晉州
그 족속들 해동에서 으뜸 되었네 / 族巨海東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 自昔迄今
대를 이어 명공들이 배출되었네 / 世出名公
연산군 때 하늘 도리 끊어 버리고 / 燕山絶天
보필하던 어진 재상 해치었다네 / 賊虐賢輔
직간하다 죽은 사람 있었거니와 / 有諫而死
실로 공의 오대조 할아버지네 / 實惟公祖
공은 이에 그 조상을 생각하면서 / 公念厥祖
더럽히게 될까 싶어 두려워했네 / 忝厥是懼
세상의 길 험난하고 어려운데도 / 世道險艱
평소 생각 바꾸지를 아니하였네 / 不變平素
뜨거운 걸 알면서도 찬 걸 지켰고 / 知熱守寒
즐거운 걸 알면서도 고난 지켰네 / 知樂守苦
세상 사람 모두들 다 쫓아가는 길 / 世之所趨
공은 홀로 그 길로다 가지 않았네 / 公獨不赴
세상 사람 모두들 다 피하는데도 / 世之所避
공만 홀로 자신의 몸 안 돌아봤네 / 公獨不顧
뭇 소인들 뜻 거슬러 미움 받아도 / 觸忤群小
그 무리들 노여워함 안 꺼리었네 / 不憚彼怒
어진 정승 그들에게 무함 당할 때 / 賢相之誣
공은 이에 곧은 말로 모두 밝혔네 / 是暴是白
곧은 말로 대답하는 선비가 있자 / 策士之直
공은 이에 그 선비를 발탁하였네 / 是取是擢
그 명성을 잇지 않을 수가 있으랴 / 不紹厥聲
이에 이를 빗돌에다 새기었다네 / 以是爲刻
[주-D001] 악군(岳君) : 악장(岳丈)과 같은 말로, 장인(丈人)을 가리킨다. 장인을 빙장(聘丈)이라고도 하고 악장이라고도 한다.[주-D002] 5대조인 …… 입었다 : 강형(姜詗, ?~1504)은 자가 형지(詗之)인데, 1504년(연산군10)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를 왕후로 복위하고 신주를 묘(廟)에 안치하려는 데 대해 반대하다가 그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사위인 허반(許磐)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이때 그의 아우인 군수 강겸(姜謙)도 형의 죄에 연좌되어 북쪽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주-D003] 사령(四靈) : 기린과 봉황과 거북과 용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상서로움을 나타내는 길한 짐승이다.[주-D004] 예묘(禰廟)를 추숭(追崇)하는 의론 :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추숭하는 데 대한 의론을 말한다. 인조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으로서 반정(反正)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뒤, 정원군에 대해 어떻게 대우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친 뒤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조의 뜻에 따라 1632년(인조10)에 드디어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고, 능호(陵號)를 장릉(章陵)이라고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