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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슬프다. 갑오년과 을미년의 변란으로 천지가 뒤바뀌고 해와 달이 그 빛을 잃었으며 사람의 무리가 금수와 다름 없이 되고 말았다. 이에 어질고 충성스러운 조정의 군자들이 종종 갓을 찢고 관복을 벗어 던지고서 바위굴로 그림자를 감추고는 죽는 날까지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의리야말로 족히 무너진 기강을 다시 일으키고 경박한 풍속을 격려할 수 있다 하겠다. 그런데 만약 그런 분들 중에서도 여러 번 승진하여 그 지위가 대관(大官)에까지 이르고, 그 자리가 더욱 높아지고 봉록이 더욱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지조를 지켜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채 수연(粹然)히 한 시대의 완인(完人)이 되었으며, 게다가 그의 존몰(存沒)이 곧장 세도(世道)의 경중(輕重)에 직결되는 분이 있다면, 오직 유미(柳渼) 한공(韓公)이 바로 그런 분이다. 어찌 참으로 훌륭하지 않겠는가.
공은 휘가 기동(耆東)이고 자는 경회(景會)인데, 유미(柳渼)는 바로 그의 호이다. 청주(淸州)에서 세계(世系)가 나왔는데, 태사(太師) 휘 난(蘭)이 시조이다. 그 뒤에 문혜공(文惠公) 휘 강(康), 사숙공(思肅公) 휘 악(渥), 평간공(平簡公) 휘 공의(公義), 문경공(文敬公) 휘 수(脩) 같은 분들이 있었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문간공(文簡公) 휘 상경(尙敬)과 문정공(文靖公) 휘 계희(繼禧)가 있었는데, 모두 덕망과 훈업(勳業)으로 명성이 성대하였다. 그 뒤로 3대를 전하여 휘 여필(汝弼)에 이르러서 군수를 지냈으며 휘 효윤(孝胤)을 낳았는데, 휘 효윤은 한림(翰林)을 지냈다. 한림이 아들 셋을 두었으니, 휘 백겸(百謙)은 유일(遺逸)로서 호조 참의가 되었으며, 휘 중겸(重謙)은 진사인데 생원시에도 합격하였고, 휘 준겸(浚謙)은 영돈녕부사를 지내고 문익공(文翼公)의 시호를 받았는데 이분이 바로 장릉(長陵 인조(仁祖))의 국구(國舅)이다. 참의는 휘 흥일(興一)을 낳았으며, 흥일은 좌의정을 지냈는데 아들이 없어서 좌윤 휘 회일(會一)의 아들 이명(以明)을 양자로 삼았다. 이명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또 아들이 없어서 익찬을 지낸 휘 석명(錫明)의 아들 후상(後相)을 아들로 삼았는데, 후상은 부정(副正)을 지내고 남대(南臺)에 천거되었다. 그런데 좌윤은 문익공의 아들이고, 익찬은 진사공의 손자이다. 부정이 휘 종범(宗範)을 낳았는데, 휘 종범은 바로 공의 6대조이다. 고조 휘 광적(光迪)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증조는 휘가 치영(致永)이고, 조부 휘 진서(鎭序)는 현감을 지냈는데 재종형인 도정 진우(鎭愚)의 아들을 취해서 양자를 삼았는바, 이분이 공의 아버지로 휘가 경원(敬源)이며 병조 판서를 지냈다. 어머니인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군수 유상림(柳相林)의 딸로서 판서 유하원(柳河源)의 손녀이며,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원문 빠짐 - 의 딸이고,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돈녕부 도정을 지낸 - 원문 빠짐 - 의 딸이다.
공의 본생(本生) 아버지는 휘가 계원(啓源)인데 우의정을 지냈으며, 승지 휘 광식(光植)과 증 찬성 휘 치구(致九)와 참판 휘 진호(鎭㦿)는 각각 고조와 증조와 조부가 된다. 참판공은 도정공(都正公)의 동생으로서 출계(出系)하여 승지공의 손자가 되었으므로, 의정공은 판서공과 본생가(本生家)에서 서로 종형제가 된다. 의정공의 배위(配位)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인데, 승지 홍영관(洪永觀)의 딸이며 하의자(荷衣子) 홍적(洪迪)의 후손이다.
공은 헌종 을사년(1845, 헌종11) 9월 17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빼어나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므로 의정공이 매우 사랑하고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판서공이 대종(大宗)으로서 아들이 없었으므로 명하여 그 후사(後嗣)로 삼았던 것이다.
금상(今上) 경오년(1870, 고종7)에 도기제(到記第 반제(泮製))에 뽑히고 이듬해에 전시(殿試)에 합격하였는데, 창명(唱名)할 때에 특별히 풍악을 내렸다. 천거되어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에 제수되었다. 그 뒤 갑술년(1874, 고종11)에 홍문관 부교리에 승진하고 곧 응교에 승서(陞敍)되었다가, 을해년(1875, 고종12)에 모함을 받아 밀지(密旨)에 의해 관북(關北)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 온성은 서울에서 2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서 워낙 춥고 황량한 변방 지역이어서 잠시 이 곳을 지나는 자들마저 근심어린 한탄을 발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에 태연하게 대처하였다. 이듬해에 회양(淮陽)에 양이(量移 감형(減刑)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김)되었다가, 2년 뒤에 상이 공에게 죄가 없음을 살피시고 특별히 용서해 주어 돌아갈 것을 명하였다. 기묘년(1879, 고종16)에 검교를 거쳐 종친부 정과 성균관 사성을 역임하였으며, 임오년(1882, 고종19)에 동궁의 가례(嘉禮)를 행할 때에 상례(相禮)로서 수고하였기 때문에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라 공조 참의가 되었다. 그런데 이 해에 의정공의 상을 당하였으며, 갑신년(1884, 고종21)에 정경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 다시 돈녕부 도정에 제수되었다가 곧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정해년(1887, 고종24)에 다시 공조 참의가 되었다가 병조로 옮겨서 참지에서 참의로 승진되었다. 이듬해인 무자년에 별과(別科)의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는데 사건으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형조 참의에 서배(叙拜)되었다. 그리고 기축년(1889, 고종26)에 특별히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전주(銓注)가 적절하고 공평하였다. 곧 갈리어 호조 참의가 되었다가 다시 경인년(1890, 고종27)에 좌부승지가 되었는데, 이 해에 판서공의 상을 당하였다. 그 뒤 임진년(1892, 고종29)에 거상(居喪)이 끝나고 병조 참의가 되었다가 우승지에 전보되었으며, 계사년에 다시 승지가 되었고, 갑오년(1894, 고종31) 여름에 특별히 동지경연사에 발탁되었다가 이어서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공은 탄식하기를, “지금이 어찌 내가 벼슬을 할 때이겠는가.” 하고는, 사은 숙배도 하지 않은 채 가족들을 데리고 원주(原州)의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때 당국자(當國者)가 관제(官制)를 변경하고는 비중 있는 인사를 선임(選任)함으로써 사람을 유인하고자 하였다. 이에 가장 먼저 공을 공부(工部)의 협판(協辦)에 임명하였으나, 공은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법부 대신(法部大臣)에 초수(超授)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에 승진시켰는데 역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공이 숭품(崇品)을 사양하고 낮은 자리를 편안히 여기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다시 탁지부(度支部)의 협판을 제수하였으나 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공이 혹시 바쁜 자리를 피하고 한가한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닌가 여기고 연이어 특진관(特進官)과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또 을미년(1895, 고종32)과 병신년에 거듭 나주 관찰사(羅州觀察使)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글을 올려 사퇴하였다. 정유년(1897, 광무1)에 계비(繼妣) 권 부인(權夫人)의 상을 당하였으며, 기해년(1899, 광무3)에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칙수(勅授)되었다. 이 때 조신(朝臣)들이 상을 당할 경우 신식(新式)에 따라서 기복(起復)하는 자들이 많았으나, 공은 여전히 아직 상기가 끝나지 않았다 하여 예문(禮文)을 이유로 극력 사양하였고, 상(上)도 또한 강요하지 못하였다. 신축년(1901, 광무5)에 특진관에 제수하였다가 곧 찬정(贊政)에 옮겼으나, 역시 상소하여 사퇴하였다. 갑오년으로부터 이 때에 이르기까지 그간에 제배를 받은 것이 무려 열두 번이었으나 한 번도 나가서 숙배하지 않았다.
을미년의 사변이 있은 이후로는 누추한 방 안의 허름한 자리에서 문을 닫고 홀로 지내면서 제사 받드는 일이 아니면 관건(冠巾)을 쓰지 않고 용변(用便)을 볼 경우가 아니면 툇마루를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마치 슬픔을 안고 죄를 지어 버려진 사람처럼 지낸 것이 8년의 세월이었다.
임인년(1902, 광무6) 3월 1일에 정침(正寢)에서 운명하니 향년이 58세였다. 5월 12일에 여주(驪州)의 부도(釜島)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선영을 따른 것이다. 사림(士林)에서 장례를 주관하였으니, 유현(儒賢)의 예를 따른 것이다. 명정(銘旌)에는 숭정대부의 품계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찬정의 직함 또한 쓰지 않았으니, 바로 공의 유계(遺戒)를 따른 것이다.
배위(配位)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부사 유치장(兪致長)의 딸이고 승지 유이환(兪理煥)의 손녀이며, 판서 유하익(兪夏益)의 후예이다.
공은 후사가 없어서 본생가의 백씨인 승지 시동(始東)의 셋째 아들 경우(畊愚)를 데려다 후사(後嗣)를 삼았는데, 경우는 전임(前任) 참봉이다. 딸은 이종세(李鍾世)에게 출가했으며, 측실(側室) 소생의 두 딸은 어리다.
공은 얼굴이 희고 통통하였으며, 신채(神采)가 준수하고 시원스러웠다. 재능이 통달하고 민첩하여 간능(幹能)함이 있었으며 성품이 강건하고 과감하여 과단성이 있었다.
가정 생활에 있어서는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으며, 의정공을 따라 그 부임지에 갔을 때는 자제로서의 과실(過失)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 뒤 판서공의 후사로 들어온 뒤에는 양쪽 집을 오가면서 같이 받들어 모셨는데, 언제나 그 은미한 뜻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3년 사이에 거듭 본생가의 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공의 백씨(伯氏)가 강교(江郊)에서 궤연(几筵)을 모시고 있었다. 그 거리가 30리가 넘는 곳이었음에도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몸소 찾아가서 제사를 도왔고, 판서공의 상을 당하게 되자 예법에 따라서 상제 노릇을 다하였으며, 어머니의 상에도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만년에 백씨와 서로 떨어져서 살게 되자 편지의 왕복이 한 달 내내 그친 날이 없었으며, 형의 자녀들을 마치 친자식처럼 가르쳐서 이끌어 주었다. 그리고 백씨가 죽을 무렵에는 수백 리 길을 급히 달려가서 임종을 지켜보았다.
종제(從弟) 두 사람이 일찍 죽고 후사가 없었는데, 이를 주선하여 그 후사를 세우고 장가보내 주었다. 또 족자(族子 삼종질) 정우(正愚)는 공의 숙증조(叔曾祖 종증조부(從曾祖父))인 병산공(甹山公)의 제사를 주관하는 자인데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므로,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열심으로 이끌어 가르쳐서 마침내 성장시켜 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래 살지 못하였으므로, 또다시 그 고아와 과부들을 마치 기공친(朞功親)이나 다름없이 돌보아 주었다. 이러하였기에 일가 집안의 가난하고 고단(孤單)한 자들이 친소(親疎)의 구별이 없이 모두 공을 찾아와 귀부(歸附)하였다.
평소에도 반드시 의건(衣巾)을 정결히 하고 궤안(几案)을 반듯하게 하였으며, 일찍이 한 번도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시문(詩文)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시를 짓고 문장을 쓸 때면 붓을 잡는 즉시 글이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이 평담(平淡)하고 아주 시원스러워서 문사(文詞)의 아름다움과 이치의 정연함이 모두 갖추어졌다. 그리고 사람들과 더불어 담론(談論)할 때는 고금의 사례들을 인용하였는데 유창한 논변이 끊기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글깨나 한다고 하는 자들도 다들 공을 따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한결같이 즐겨 서로 교유하였으므로, 문 밖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공은 성품이 청고(淸高)해서 위선적인 행위를 싫어하였으며, 옳지 않은 일을 보면 의분(義憤)이 얼굴에 드러났다. 친구들 중에 혹시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는 일 없이 질책(質責)을 하였으나, 마치 목에 무엇이 걸려서 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그러고 나면 곧 활짝 풀리어서 앙금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들 공을 공경하고 기탄하면서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 당세의 사대부들과 교유를 할 때면 비록 많은 사람들이 빽빽히 모인 자리라 하더라도 수줍어하거나 움츠러드는 일이 없었으며 한가롭고 우아한 자세로 하고 싶은 말들을 반드시 다 하였다. 그래서 비록 평소에 거만한 태도로 지내면서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다들 진심으로 공에게 절복(折服)하였다.
공은 경상(卿相)의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자연 견문이 많았다. 그래서 나라의 고사(故事)나 관직의 제도, 학통(學統)과 당론(黨論), 그리고 씨족(氏族)의 원류(源流)와 사방 각지의 풍토와 요속(謠俗), 군사의 관방(關防)과 지세의 험요(險要) 등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이든 모두 포괄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원근의 친구나 지인(知人)들 가운데 어떤 일을 당하여 의문이 생기고 애매한 것이 있을 때면 으레 공을 찾아와서 물어 보곤 하였다. 그리고 산남(山南 영남)의 도산(陶山)은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사림들이 그 원장(院長)의 직임(職任)을 중시했으므로 숙덕(宿德)과 아망(雅望)을 갖춘 분이 아니고는 아무도 그것을 맡지 못했다. 그런데도 공에 대해서만은 한목소리로 서로 천거하였으며 다들 흡연(翕然)히 따라서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그러니 이것만 보아도 공이 과연 어떤 분이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수응(酬應)과 대처(對處)가 두루 들어맞고 곡진히 타당한 점 따위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모두 기록하여 남길 만한 것들이겠지만, 공에게는 한갓 사소한 것들일 뿐이므로 아울러 이를 모두 생략한다.
아, 슬프다. 대저 사람이 재능과 포부를 가졌을 경우 언제나 그에 따른 지위를 얻지 못할까 걱정하는 법이다. 그러나 공은 이미 그 지위를 얻었다. 그러므로 만약 공이 조정의 정책을 협찬하여 널리 간난(艱難)을 극복하되, 그 얼굴빛을 바로하여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동시에 몸소 앞장 서서 저 사악한 것들을 차단하여 내쳤더라면, 의당 그 패연(沛然)한 기세를 아무도 거역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마치 그러한 능력이 없는 듯이 그 능력을 거두어서 가슴에 품고는 다만 그 자신만을 온전히 하고 말았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공은 본래 타고난 기질이 완전하고 돈후한데다 뜻을 세움이 또한 정밀하고 견고하였다. 그리하여 총명이 가려지는 바가 없고 기욕(嗜欲)으로 인하여 구속을 받는 바가 없었으니, 그 이치로 보아서 당연히 장수(長壽)를 누려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근래 몇 년 사이에 머리털이 모조리 세고 온갖 질병이 갈마들어서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으니, 이 또한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그래서 군자(君子)가 그 이치를 따져서 물어 보다가 납득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하면 다만 ‘명(命)’이라 하고 ‘때[時]’라고만 말할 뿐이다. 누가 혹시 말하기를, “공은 옛것에 얽매여서 변통할 줄을 몰랐으며, 충성이 지나쳐서 그 걱정과 슬픔을 절제할 줄을 몰랐다.”고 한다면, 이는 공을 아는 바가 천박한 자이다.
오늘날은 괴이한 풍속들이 시끄럽고 조급한 풍조가 앞을 다투어서 사람들이 영화(榮華)와 이익만을 찾아서 도도히 내달린다. 그리하여 염치를 허물어서 깨뜨려 버리고는 자신의 성명(性命)을 몽땅 내걸고 척촌(尺寸)의 이익만을 좇아서 서로 다투는데, 이러한 자들도 공의 기상과 인품에 대하여 듣고서 오히려 부끄러워할 줄을 안다면 이것은 공이 세도(世道)에 대하여 맡은 바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이 비록 살아 있을 때에는 미처 큰일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정작 공이 죽고 나자 온 조야(朝野)가 슬퍼하고 아까워하면서 마치 하루라도 공이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듯이 여겼다. 그런데 이것은 또 대체 누가 그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승지공이 나에게 이르기를, “우리 아우를 잘 아는 자는 그대만한 이가 없다. 그러니 그대는 부디 한 말씀 하시어 우리 아우의 이름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도록 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물론 내가 그 적임자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어찌 이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옛날에 우리 선조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은 평간공(平簡公 한공의(韓公義))의 묘명(墓銘)을 지었고, 아성공(鵝城公 이산해(李山海))은 군수공(郡守公 한여필(韓汝弼))의 묘명을 지었으니, 선대(先代)의 계분(契分)이 또한 매우 두텁다고 하겠다. 또 내가 약관 시절부터 공을 따라서 노닐었는데 공의 지우(知遇)를 가장 깊이 받았으니, 의리상 또 내가 어떻게 이를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삼가 이와 같이 찬술하여 장차 입언(立言)할 군자(君子)의 채택을 기다리는 바이다.
[주-D001] 남대(南臺) : 학행과 덕망이 있어서 사헌부의 장령 또는 지평의 관직에 추천받아 임명된 사람을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