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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쓴 신도비라 그런지 역적 연좌제에 걸린 오시겸 선조 후손 이야기는 쏙 빼 놓음
한(漢)나라 때에 천하에 조서를 내려 효렴(孝廉)과 어진 수령이 될 만하고, 먼 나라에 사신으로 갈 만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였다. 한나라는 고대에 가까워서 능히 인재를 취하는 도리를 알았다. 그런데 한나라의 신하들 가운데 이런 조건들을 겸비한 자가 대개 드물었다. 우리나라에서 근세에 찾는다면 이옹(泥翁) 신공(申公) 같은 분이 있다.
공은 본래 고령현(高靈縣) 사람으로 휘는 유(濡), 자는 군택(君澤)이고 이옹은 자호(自號)이다. 대나무숲 속에 집을 지어 죽(竹)으로 편액을 하니 세상에서는 죽당(竹堂)이라고 불렀다. 만력(萬曆)과 숭정(崇禎) 시절에 남쪽과 북쪽으로부터 침략을 받아서 나라가 많이 어려웠는데, 헌문왕(憲文王) 정축년(1637, 인조15)에 세자가 심양관(瀋陽館)에 들어가자 반역자 정명수(鄭明壽)가 오랑캐와 결탁하여 우리나라를 뒤흔들기를 도모하였다. 궁관(宮官) 김종일(金宗一)과 정뇌경(鄭雷卿)은 정명수에게 거슬려 놀라운 사태가 크게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궁관을 바꾸어 보내려 하였으나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는데, 모두 말하기를 “신모(申某)가 적임자입니다.”라고 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17) 봄에 공은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에 임명되어 심양으로 갔는데, 정뇌경은 끝내 죽음을 당하였다. 가을에 문안관(問安官)으로 조정에 돌아왔다가 겨울에 다시 심양으로 가서 경진년(1640) 4월에 돌아왔다. 공이 왕래하고 주선하여 세자를 호위하면서 위험한 지경을 겪었지만 끝내 무사하였다.
계미년(1643)에 일본의 관백(關伯) 원가광(源家光)이 아들을 낳았는데 약군(若君)이라 부르면서, 축하사신을 청하였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크게 피해를 입힌 것이 8년이고 우리가 화평을 허락한 지가 겨우 수십 년이지만 여전히 경계하는 마음이 있는데다가, 또 저들이 우리의 문화(文華)를 사모하니 재지(才智)가 남달리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사신이 될 수가 없었다. 주상께서 명하여 공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고 4월에 배를 출발하여 월말에 보삼(㙛三)에 도착하였다. 공은 교제함에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써 하니 시문과 글씨를 구하여 오는 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공은 좌우(左右)로 응대하는데, 막힘없고 빛났다. 보는 사람들이 경탄하며 폐백으로 혹은 선물로 드린다는 구실을 삼아 기이하고 진귀한 물건들을 많이 바쳤는데 공은 모두 물리치고 하나도 받지 않으니, 오랑캐들이 더욱 그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임도춘(林道春)은 오랑캐의 선비 중에서 뛰어난 사람인데 공이 그 나라의 사적(事蹟)과 인물(人物), 산천(山川)과 물산(物産), 의절(儀節)과 요속(謠俗) 등을 듣고자 요구하니 도춘은 그의 두 아들 서(恕)와 수승(守勝)과 함께 세 권의 책을 찬술하여 바쳤다. 이는 나라에서 엄중하게 금하는 것이나 그 마음을 깊이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11월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3) 8월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12월에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계사년(1653) 겨울 송도 유수(松都留守)로 나갔는데, 지역이 서쪽과 통하는 대로여서 화물(貨物)이 모두 모이는 곳이었다. 칙사(勅使)가 오면 무매(貿賣)와 청구가 절제가 없었으며 공갈하고 매질을 마구 해댔지만, 강화(講和)를 맺은 것이 최근이어서 그 뜻을 따르면서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공이 여러 서리들을 시켜 왕복하면서 회유하고 억제하여 많이 생략하였고, 일 년 중에 여덟 차례 칙사를 맞이하고 보내느라 성시의 백성들이 은화가 축난 것이 수천 냥이어서 공은 여러 가지로 방략(方略)을 베풀어 모두 보상하였다. 옛 궁성(宮省) 터에 부과한 포(布)와, 중강개시(中江開市)의 말의 수와 포목상에게 징수하던 세금을 모두 줄이고, 해마다 바치던 방물(方物)과 말안장과 장식물, 공전(公田)을 경작하는 데 주는 품삯 쌀, 독신 여자에 대한 세금을 아울러 면제하였다. 또한 의국(醫局)을 설치하고 경서(京署)의 약재를 얻어서 질병을 구제하였다.
선조(先朝) 때에는 구도(舊都 송도(松都))에 선비가 많았는데, 국학(國學)을 모방하여 승보시(陞補試)를 베풀고, 제도(諸道)를 모방하여 도회시(都會試)를 베풀었다. 그러다가 중세(中歲)에는 승보시를 없애고 도회시는 정원을 10분의 2를 감하였는데 공이 모두 처음과 같이 회복하였다. 이는 모두 공이 노장(露章)으로 청한 것인데, 간청을 하면 주상께서 그때마다 윤허하였다. 교궁(校宮)에는 전란 후라 서적이 없었는데 재물을 모아 천수백 권을 사들여서 생도들을 학습시켰다. 이에 부(府)의 사농공고(士農工賈)와 곤궁하고 외롭고 잔약하고 병든 사람들이 모두 은혜로운 교화를 입어서 공이 돌아갈 때에 백성들이 큰 돌을 다듬어 이를 기록하였다.
공은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여 회양(淮陽)에서 체직될 때 창고의 재물을 선여(羨餘)할 것이 많다고 담당 아전이 고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회양에서 나온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하겠는가.” 하고 모두 그대로 두고 돌아갔다. 공의 집이 일찍이 화재를 만나서 서가(書架)가 모두 타버렸다. 공이 수령이 되었을 때 책 파는 상인이 마침 왔는데 자제들이 한 질을 살 것을 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관전(官錢)으로는 한 가지 물건도 마련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고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아, 공이 밖에서 베푼 것은 태사(太史)의 기록에 들어 있고 군읍지(郡邑志)에 실려 있으며, 이국의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공이 집안에서 행한 것은 아는 사람은 알지만 깊이 알지는 못한다.
공이 어버이를 섬김은 먼저 뜻을 받들었고 안색은 기쁜 빛을 띠었다. 음식조리는 반드시 입맛에 맞춰 드렸고, 밥을 드리고 다 드시고 나면 반드시 살폈다. 잠자리를 살펴드리고 이불을 개서 싸는 것을 아침저녁으로 오직 정성을 기울였다. 태부인(太夫人)께서 이미 연로해지자 항상 앞에서 유희하기를 어린아이 때와 같이 하였다. 막내아우 교리(校理)가 병에 들어 위태로웠을 때 의원이 말하기를 “인육(人肉)이 아니면 낫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공이 허벅지를 베어 피를 내서 약과 섞어서 먹이니 병이 마침내 나았다.
공의 거처가 본디 인평대군(麟坪大君)과 이웃하였고 심관(瀋舘)에서 또한 오랫동안 함께하였다. 훗날 공이 금령을 어겼다고 하여 궁중의 하인을 잡아다 죄를 다스리고, 마침내 대군에게 죄를 지었다고 스스로 인책하고 서로 만나지 않았다. 주상께서 이를 아시고 일찍이 대군의 집에 행차하셔서 공을 불러 대군과 더불어 좌우에 앉게 하시고 그 손을 잡고 말씀하기를, “심상(瀋上)에서 함께 고난을 겪었음을 생각지 않느냐. 서로 저버리지 말라.” 하셨다. 공이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마는, 귀공자(貴公子)와 교유하는 것은 외신(外臣)의 의리가 아닙니다.”라고 하니, 주상께서 “고집스럽구나.” 하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공이 사사로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대군의 후손에게 반드시 재앙이 미칠 것이니 삼가 서로 교유하지 말라.” 하였다. 공의 조카인 한림(翰林) 선온(善溫)이 있었는데, 이상(二相)인 민점(閔點)의 사위와 점의 아우 암(黯)이 새로 급제하였을 때 공이 가서 보고 돌아와서는 한림에게 말하기를 “그 사람은 장차 세상에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화가 너에게 미칠까 두렵구나.” 하고, 작은 일을 잡아서 편지를 보내 절교하도록 하였는데, 훗날 모두 과연 그러하였다. 공이 어버이에게 순종하고 형제에게는 우애하고 후손에게는 좋은 계책을 드리운 것이, 아, 참으로 지극하다.
공의 문장을 말하자면, 문(文)은 아직 간행하지 않았고 시집(詩集) 10권은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시가의 인물평에서 임염헌(任恬軒)의 말을 제대로 된 평으로 여겼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공의 시격(詩格)은 족히 그 재주를 융섭하고 말은 그 경지를 실증하였다. 고시(古詩)는 한위(漢魏)을 모범으로 하되 구구하게 모방하려 하지 않았고, 율체(律體)는 송시의 체재를 겸해 취하여 도움으로 삼았으나 끝내 자신의 규모와 법도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요컨대 당(唐)의 성률로써 마치고 시작하였다.”라고 하였다. 서법(書法)은 세상에서 백옥봉(白玉峯)과 나란하였으나 재치는 공이 더 낫다.
공의 관직을 말하자면, 21세에 진사가 되었고 27세에 문과에 제 일등으로 급제하여 전례대로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 육부(六部)에서는, 이조와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고, 정랑(正郞)은 이조에서만 지냈다. 이조와 병조와 형조의 참의를 지냈고, 예조ㆍ호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대각(臺閣)에서는 사간원의 정언ㆍ헌납ㆍ대사간을 역임하였고, 사헌부 지평ㆍ집의를 역임하였다. 양관(兩館)에서는 홍문관 부교리ㆍ교리ㆍ부수찬ㆍ수찬ㆍ응교ㆍ부제학ㆍ제학을 역임하였고, 예문관 직제학, 의정부 검상ㆍ사인, 시강원 문학, 그리고 승정원의 승지를 여섯 차례 역임하였다. 경조(京兆) 좌ㆍ우윤(左右尹), 헌문왕실록(憲文王實錄) 찬수관(纂修官)을 역임하였다. 추부(樞府)와 총부(摠府), 주사(籌司), 금오(金吾) 등의 임직을 모두 지냈다. 여러 차례 과거를 맡았고, 지제교(知製敎)를 항상 겸임하였다. 외직으로는 공주 목사, 송도 유수, 회양 부사를 역임하였다.
공의 외모는 아름답고 청수하여 바라보면 마치 그림 속의 선인(仙人)의 모습 같았고, 성품은 자애롭고 성실하며 겸허하여 출셋길을 다투지 않았으며, 자기만 못한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아 오직 한 사람만 섬겼다.
영릉(寧陵) 정유년(1657, 효종8)에 낭선군(朗善君) 우(俁)가 대각 오두인(吳斗寅)ㆍ민유중(閔維重)과 더불어 상호간에 복례(僕隷)에게 치욕을 받았다고 하여 상쟁(相爭)하니, 종부시에서 주상께 아뢰었지만 사실과 다른 것이 많았다. 주상께서 오두인과 민유중 두 사람을 파직하였다. 공은 대사간으로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갑(甲)과 을(乙) 양측의 소장이 크게 상반되니 마땅히 검핵(檢覈)하여 처분해야 하는데 대신(臺臣)에게 죄를 바로 가한다면, 성명(聖明)께서 비록 왕족을 귀중하게 여기신다하더라도 조정에서 누가 더불어 존귀하게 여기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진노하여 두 사람을 북변(北邊)으로 내쫓고 공은 강계(江界)에 유배 되었다. 옥당(玉堂)과 삼공(三公)이 서로 구하고자 하였으나 풀리지 못하였다. 공이 유배지에 있은 지 여덟 달 만에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이 경연에서 아뢰어 천안군(天安郡)으로 양이(量移) 되었다. 기해년(1659) 순문왕(純文王 현종(顯宗))이 즉위하여 사면해주었다.
공의 선계(先系)는 시조인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휘 성용(成用)으로부터 대사간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된 휘 말주(末舟) 호 귀래자(歸來子)까지 8세대가 대대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의판서 보문각대제학(禮儀判書寶文閣大提學) 휘 덕린(德隣) 호 순은(醇隱)에 이르러서는 고려말에 충의(忠義)로서 저명하였는데, 포은(圃隱)과 목은(牧隱) 선생 등과 더불어 당시에 육은(六隱)이라고 칭해졌다. 공조 좌참의(工曹左參議)로 좌찬성에 추증된 휘 포시(包翅) 호 호촌(壺村)은 고려말에 가둔(嘉遯)하여 정학(正學)을 창도하였다. 좌참판으로 영의정(領議政)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에 추증된 휘 장(檣) 호 암헌(巖軒)은, 장헌왕(莊憲王 세종)의 조정에서 처음 집현전(集贒殿)을 설치할 때 선생을 맨 먼저 제학(提學)에 제수하였다. 향리에 살 때에는 강학하고 예를 익히니 제생들이 날마다 배우려고 나아갔다.
귀래자(歸來子)는 단종(端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관작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뜻을 지키고 끝까지 벼슬에 나서지 않았다. 4세가 영호남의 유궁(儒宮)에 모두 제향 되었으니 이는 더욱 성대하게 빛난 것이다. 전하여 진사인 휘 언식(彦湜)에 이르러서는 지행(至行)으로 저명하였으며 정릉(靖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휘 심(淰)은 문예(文藝)가 동락(東洛)을 경도케 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이룬 것이 없었다.
휘 기한(起漢)은 혼군(昏君)이 모후(母后)를 유폐시킬 때에 제생들과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을 소척(疏斥)하였으나 저지당하여 관철하지 못하고 마침내 양근(楊根)의 강굽이에 은거하였다. 계해년의 정사(靖社)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국자 생원(國子生員)이 되고 벼슬이 공조 정랑에 이르렀으니 이분들이 공의 증조와 조부와 아버지이다. 공이 존귀해져서 아버지는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조부는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부는 집의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아버지가 영국(英國)으로 판서를 지낸 신국(藎國)의 아우이다.
공의 수명은 56세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 12월 상순에 태어나서 을사년(1665, 현종6) 10월 상순에 졸하였다. 묘는 공주(公州) 술북리(述北里) 부계(負癸)의 언덕에 있다.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현감 효승(孝承)의 딸로, 부녀자의 행실을 지녀 검소하고 예를 좋아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아침저녁거리를 빌렸으나, 안색에 근심스런 빛을 띠어 공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았다. 성계(星溪) 윤집(尹鏶)이 부인의 만사를 지어 이르기를 “빈한한 선비의 아내와 약소국의 신하가 입으로 탄식과 원망을 발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공보다 9년 먼저 세상을 떠나 공과 합장되었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선호(善浩), 둘째는 진사인 선연(善淵)인데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막내인 선함(善涵)은 도사(都事)이다. 딸은 현감 오시겸(吳始謙)에게 시집갔다. 방실(傍室)에서 둔 아들은 선홍(善泓)이고 딸은 도사 한주상(韓柱相)의 첩이 되었다. 선호의 두 아들은 진(溍)과 초(濋)이고, 두 딸이 있는데 광평군(光平君) 명(溟)과 진사 남준명(南浚明)이 사위이다. 선연은 후사가 없다. 선함은 아들이 하나인데 회(澮)이고, 딸이 셋인데 군수 임명원(任命元), 진사 이정(李濎), 사인(士人) 민구(閔玖)가 사위이다. 선홍은 양자를 들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백여 년이 되었는데 묘도(墓道) 동남쪽에 아직도 현각(顯刻)이 없어서 5세손 현록(顯祿)이 오래되어 점점 민멸될까 두려워하여 유장(遺狀)을 찬차(撰次)하고 나에게 신도비명을 청하였다. 내가 공의 종증손(從曾孫)이라 가정에서 들은 것이 상세할 것이라고 여겨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공의 친한 벗으로서 대문장가와 거경(鉅卿)이 공보다 뒤에 세상을 떠난 이가 많았는데 이 비명이 이제야 비로소 이루어졌으니 그 또한 때가 있는 것인가. 감회가 인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좋은 옥은 / 玉之良者
쓰임에 마땅치 않음이 없네 / 用無不宜
옥잔도 되고 종묘의 제기도 되며 / 瓚之璉之
상서로운 옥도 되고 유리도 된다 / 珪之瑬之
천지와 조상님께 제사 올릴 때는 / 享格郊廟
성왕의 의용을 빛나게 하네 / 儀賁皇王
형옥과 황옥이 부딪쳐 / 珩之璜之
오음이 쟁쟁히 울리는 듯하구나 / 宮角玉將玉將
문채가 빛나는 신공은 / 有斐申公
이옥과 대옥이로다 / 夷玉大玉
산악의 신령이 공을 태어나게 하여 / 維嶽降之
가문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였도다 / 爲家爲國
공이 가정에 있으매 / 公之在室
효성과 우애를 돈독히 하였고 / 孝友卽篤
이미 깊은 근원을 따라 행하니 / 旣濬行源
좌우에서 도의 근원을 알았도다 / 左右皆逢
몸을 옥당에 두니 / 置之玉堂
보불과 생황과 대종이로다 / 黼黻笙鏞
고문하심에 북과 북채처럼 응하니 / 桴應顧問
곤룡포 문양이 환히 빛났네 / 繡煥衮章
몸을 대각에 두니 / 置之臺閣
큰 법도를 올곧게 실천하였네 / 履玆大方
임금께 실정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 恐君有失
그 한 몸 고초를 꺼리지 않았도다 / 身不殫殃
서경에서 근심을 나누면서 / 分憂西京
슬기로운 계책이 어김이 없었네 / 有謨弗咈
경중과 득실을 헤아려 / 輕重嬴縮
가난한 여인 구휼하고 병든 이를 살렸네 / 䘏婺醫札
도시와 시골에서 기뻐하며 박수치고 / 市野歡抃
서당에선 강학하고 글 읽는 소리라네 / 絃誦于塾
사신의 명받아 먼 이역으로 가니 / 啣命絶域
하늘의 남쪽과 땅의 북쪽이로다 / 天南地北
사나운 호랑이가 어금니를 가는데 / 猛虎磨牙
바다는 끝이 없구나 / 積水無畺
충성으로 세자를 호위했고 / 忠衛震匕
문필로써 왜인들을 놀라게 하였도다 / 文驚卉裳
공이 아직 쓰이지 않았을 때에는 / 公之未試
저 조정에 마음이 매였었는데 / 維彼巖廊
참으로 여기 둔다면 / 苟置之此
나라 다스림은 어찌할 것인가 / 經邦以何
이제 알 수 없으니 / 今不可知
식자가 한탄하고 슬퍼할 뿐이로다 / 識者恨嗟
온화한 그 덕망에 / 溫溫其德
눈부시게 아름다운 문채로다 / 燦燦其文
남긴 자취를 서술하여 돌에 새겨서 / 序跡鐫石
무한한 후대에 보여주노라 / 用示無垠
[주-D001] 효렴(孝廉) : 부모에 효성스럽고 청렴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로, 효성 있고 청한한 사람을 추천하여 등용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에 추천된 자를 효렴이라고 한다.[주-D002] 어진 수령 : 원문의 ‘양이천석(良二千石)’은 선정을 베푸는 어진 수령이라는 말이다. 한대(漢代) 태수(太守)의 녹봉(祿俸)이 2천 섬이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한서(漢書)》 권8 〈선제기(宣帝紀)〉에 선제가 이르기를, “서민들이 제 고장에 안착하여 근심 걱정이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정사가 공평하고 송사가 잘 다스려지기 때문인데, 이 일을 나와 함께하는 사람은 오직 어진 저 이천 섬들이다.[庶民所以安其田里, 而無愁歎之聲者, 政平訟理也, 與我共此者, 其惟良二千石乎.]”라고 하였다.[주-D003] 이옹(泥翁) 신공(申公) : 신유(申濡, 1610~1665)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군택(君澤), 호는 죽당(竹堂)ㆍ이옹이다. 1630년(인조8) 진사가 되고, 163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642년에 이조 좌랑이 되고, 이듬해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집의ㆍ동부승지ㆍ우승지 등을 거쳐, 1650년(효종1)에는 도승지가 되었다. 1661년(현종2)에 형조 참판이 되었고, 이어 호조ㆍ예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죽당집(竹堂集)》이 있다.[주-D004] 만력(萬曆)과 숭정(崇禎) : 만력은 명나라 신종의 연호(1573~1619), 숭정은 명나라 의종(毅宗) 때의 연호(1628~1644)이다.[주-D005] 헌문왕(憲文王) : 인조(仁祖)의 시호이다.[주-D006] 세자가 심양관(瀋陽館)에 들어가자 : 왕세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이 1637년 2월에 볼모로 심양으로 출발하여 4월에 도착하였다.[주-D007] 정명수(鄭明壽) : 정명수(鄭命壽, ?~1653)로, 평안도 은산(殷山) 출신의 천례(賤隷)이다. 1618년(광해군10) 명나라가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여, 조선에서 강홍립(姜弘立)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했는데, 그도 이때 강홍립의 군대를 따라갔다. 그 후 청나라에 살면서 청국어를 배우고 청나라에 우리나라 사정을 자세히 밀고해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병자호란 때 역관으로 입국해 청나라의 조선 침략에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청나라 세력을 등에 업고 영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강효원(姜孝元), 정뇌경(鄭雷卿) 등이 그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죽음을 당하였다. 왕을 모독하고 갖은 행패를 부렸으며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歲幣)를 노략질하였다. 1653년(효종4) 심양에서 성주포수(星州砲手) 이사용(李士用)에게 모살(謀殺)되었다.[주-D008] 김종일(金宗一) : 1597~1675.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노암(魯庵)이다. 1624년(인조2) 생원시ㆍ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순찰사의 종사관으로 일하였다. 전쟁이 끝나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갈 때 사서로서 수행하였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청나라에서 벼슬에 올라 조선에 대해 갖은 횡포를 부리던 정명수ㆍ김돌이(金突伊) 등을 청나라로 하여금 제거하게 하는 계획을 정뇌경과 함께 세웠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송환되어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1643년에 풀려나 1651년(효종2) 수찬이 되고, 교리를 거쳐 울산 부사를 지냈다. 문집으로 《노암문집(魯庵文集)》이 있다.[주-D009] 정뇌경(鄭雷卿) : 1608~1639.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이다. 1630년(인조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교리로 왕을 호종하였다. 이듬해 봄 소현세자가 심양에 가자 자청해 수행했으며, 1639년 필선으로 승진해 심양에서 세자를 보위하였다. 당시 청나라에는 정명수ㆍ김돌이 등이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며 갖은 행패를 부렸다. 그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청나라 관헌에 잡혀 처형당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자기 옷을 벗어 염(斂)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찬성을 더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주-D010] 약군(若君) : 관백의 아들로, 왜인들이 관백을 대군(大君)이라고 일컫는 데에서 온 말이다.[주-D011] 임도춘(林道春) : 임나산(林羅山, 1583~1657)으로, 도춘은 승려로 출가한 뒤의 호, 나산은 환속한 뒤의 호이고 이름은 신승(信勝)이다.[주-D012] 서(恕)와 수승(守勝) : 임도춘의 두 아들 춘승(春勝)과 수승(守勝)을 말한다.[주-D013] 무매(貿賣) : 이익을 남기고 팔기 위하여 물건을 사들인다는 말이다.[주-D014] 중강개시(中江開市) : 압록강의 의주 중강(義州中江)에서 봄ㆍ가을 두 차례 열었던 명나라ㆍ청나라와의 공무역을 말한다.[주-D015] 방물(方物) : 관찰사나 수령이 임금에게 바치던 그 고장의 특산물이다. 조선 시대에, 명나라에 보내던 우리나라의 산물을 이르기도 한다.[주-D016] 승보시(陞補試) : 고려 시대에 생원을 뽑던 시험이었고, 조선 시대에는 매년 사학(四學)의 유생과 개성부(開城府)ㆍ제주목(濟州牧)의 유생에게 시(詩)ㆍ부(賦)로써 행했던 시험이다. 합격한 사람에게 생원과, 진사과의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 개성부의 유수(留守), 제주의 목사(牧使)가 각각 시행하였다.[주-D017] 도회시(都會試) : 지방의 유생들에게 학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해마다 각도의 계수관(界首官)에 모아 보이던 시험이다. 제술(製述)과 강경(講經)으로 시험을 보여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생원ㆍ진사시의 회시(會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주-D018] 노장(露章) : 봉함하지 않은 상소로, 소장(疏章) 따위를 공중(公衆)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봉함(封緘)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주-D019] 회양(淮陽)에서 체직 : 1663년(현종4) 4월에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5월에 병으로 체직되었다.[주-D020] 선여(羨餘) : 부세 받고 남은 것으로, 초과 징수된 세금인데 조정에 바쳤다.[주-D021] 인평대군(麟坪大君) : 1622~1658. 인조의 셋째 아들이다.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이다. 병자호란 때에 부왕을 호종(扈從)하였고, 1640년에 볼모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저서에 《송계집(松溪集)》ㆍ《연행록(燕行錄)》 등이 있다.[주-D022] 선온(善溫) : 신선온(申善溫, 1647~1676)으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치량(稚良), 호는 애산(艾山)이다. 1667년(현종8) 진사가 되고 167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672년 설서(說書)에 임명되었고, 1675년(숙종1)에는 홍문록에 추천되었다. 이듬해 12월 정언(正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 전에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왕명을 받들고 영외(嶺外)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왕은 신선온의 사망을 몹시 애석히 여기고 장례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하사하였다.[주-D023] 이상(二相) : 의정부(議政府)의 찬성(贊成)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주-D024] 민점(閔點) : 1614~1680.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여(聖與), 호는 쌍오(雙梧)이다. 형조 판서ㆍ홍문관 제학ㆍ이조 판서 등을 지냈으나, 1677년(숙종3)의 증광시(增廣試) 때 아들 민주도(閔周道)의 과거부정사건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하여 공조 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주-D025] 암(黯) : 민암(閔黯, 1636~1693)으로, 자는 장유(長孺), 호는 차호(叉湖)이다. 1668년(현종9) 문과에 급제하였다. 1680년(숙종6) 대사헌으로 있다가 경신대출척으로 남인(南人)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 1694년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의 폐비인 민씨(閔氏)를 복위하는 음모가 있다는 고변(告變)이 있자, 남인의 영수이던 민암은 훈련대장 이의징(李義徵)과 함께 옥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 숙종은 남인을 쫓아내고 서인을 등용하는 갑술옥사를 일으켰다. 이 옥사로 제주도 대정(大靜)으로 위리안치 되었다가,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의 탄핵으로 곧 이의징과 더불어 사사되었다.[주-D026] 임염헌(任恬軒) : 임상원(任相元, 1638~1697)으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공보(公輔), 호는 염헌,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1660년(현종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65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대사헌ㆍ도승지ㆍ공조 판서ㆍ우참찬ㆍ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문명이 있었으며, 문집으로 《염헌집(恬軒集)》이 있다.[주-D027] 공의 …… 시작하였다 : 《염헌집(恬軒集)》 권29 〈죽당집서(竹堂集序)〉에 나온 말이다.[주-D028] 낭선군(朗善君) 우(俁) : 이우(李俁, 1637~1693)로, 자는 석경(碩卿), 호는 관란정(觀瀾亭)이다. 선조의 열두째 아들인 인흥군 영(仁興君瑛)의 큰아들로 낭선군에 봉해졌다.[주-D029] 영릉(寧陵) …… 파직하였다 : 이우의 아우인 낭원 도정(朗原都正) 이간(李偘)이 우의 종을 빌려 임금의 거둥에 참여하러 가던 중에 그가 탄 말이 마침 지평 민유중이 탄 말과 대궐 문 밖에서 서로 싸워, 양쪽 집의 종들이 싸움을 하였는데, 민 지평이 우의 종을 잡아 가두고 장령 오두인과 함께 잇달아 형신을 하여 끝내는 죽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종부시에서 아뢰어 오두인과 민유중이 체직되었다.[주-D030] 가둔(嘉遯) : 정도(正道)에 합당한, 시의 적절한 은둔을 말한다.[주-D031] 장(檣) : 신장(申檣, 1382~1433)으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제부(濟夫), 호는 암헌이다. 신숙주(申叔舟)ㆍ신말주(申末舟)의 아버지이다.[주-D032] 형옥과 황옥 : 형황(珩璜)은 옛사람들이 몸에 차던 패옥(佩玉)으로, 움직일 때마다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나기 때문에 절도에 맞추어 행동하는 경계로 삼았다.[주-D033] 이옥과 대옥 : 이옥(夷玉)은 미옥(美玉)의 일종이다. 대옥(大玉)은 화산(華山)에서 나오는 미옥이다. 《서경》 〈고명(顧命)〉에 “옥을 오중으로 진열하고 보물을 진열하니, 적도와 대훈과 홍벽과 완염은 서서에 있고, 대옥과 이옥과 천구와 하도는 동서에 있었다.[越玉五重, 陳寶, 赤刀大訓弘璧琬琰在西序, 大玉夷玉天球河圖在東序.]”라고 하였다.[주-D034] 산악의 …… 하여 : 원문의 ‘악강(嶽降)’은 인물의 탄생을 칭송하는 말이다. 《시경》 〈숭고(崧高)〉에 “산악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려 보내, 보후(甫侯)와 신후(申侯)를 태어나게 하였다.[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하였다.[주-D035] 좌우에서 …… 알았도다 : 좌우봉원(左右逢源)을 이른 것으로, 자득한 학문의 조예(造詣)가 깊으면, 일상생활 하는 지극히 가까운 자신의 주위에서 어떤 일을 취할지라도 물의 근원을 만나듯 도(道)의 근원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孟子 離婁下》[주-D036] 보불(黼黻) : 예복으로 입는 치마에 놓은 수(繡)이다. 보는 흑백색(黑白色)으로 도끼 모양을 수 놓은 것이고, 불은 검정색과 파랑색으로 아(亞) 자 모양을 수 놓은 것이다.[주-D037] 생황과 대종 : 원문의 ‘생용(笙鏞)’은 악기의 종류인 생황(笙簧)과 대종(大鐘)을 이른다. 왕정을 행하는 도구나 조정의 귀한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주-D038] 북과 북채처럼 응하니 : 원문의 ‘부응(桴應)’은 향응(響應)한다는 말로, ‘부고상응(桴鼓相應)’과 같다. 북채로 북을 치면 북이 곧 소리를 내듯이 서로 긴밀히 호응함을 비유하는 말이다.[주-D039] 근심을 나누면서 : 원문의 ‘분우(分憂)’는 임금의 근심을 나누어 맡는다는 뜻으로, 지방관이 되어 백성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