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벗 이계승(李季承)이 그의 아들 수찬 군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죽은 지 이미 7년인데, 내가 차마 그대로 자취가 없게 둘 수 없으니, 나를 위하여 그 묘지명을 지어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갑오년(1774, 영조 50) 봄에 벼슬살이 하느라고 도성 서쪽에 우거(寓居)했을 때 군이 고맙게 찾아왔는데, 그 모습을 살펴보니 구슬처럼 윤택하고 얼음처럼 청결하며 그 말을 들어보니 난초처럼 향기롭고 혜초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사랑스러운 마음을 버릴 수 없었는데, 한 해가 채 되지 않아서 군의 부고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행장을 살펴보건대, 군의 휘는 기숭(基崧), 자는 신중(申仲)이고 그 선계는 광주인(廣州人)인데 둔촌(遁村) 집(集)의 후예이고, 선조조 중흥의 명재상인 문익공(文翼公) 한음(漢陰) 휘 덕형(德馨)의 7대손이다. 증조는 봉교 휘 수인(壽仁)이고, 조부는 생원 휘 광세(光世)이다. 부친은 지한(趾漢)인데 계승(季承)은 그의 자다. 모친은 풍산홍씨(豊山洪氏)인데 현감 순보(純輔)의 따님이고 양효공(良孝公) 중징(重徵)의 손녀이다.
군은 영조 갑자년(1744) 1월 21일에 태어났는데, 조부 생원공이 자다가 흰 학이 방 앞에서 춤추는 꿈을 꾼 뒤 얼마 되지 않아 군을 얻고는 매우 기이하게 여겨 사랑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하여 재주가 있어 외증조부 양효공이 칭찬하기를, “이 아이는 대인의 기상이 있으니 이씨의 가문이 다시 번창하리라.”라고 하였다.
11세에 섣달 그믐 밤 어떤 과객이 운을 불러주고 시를 짓게 했는데, 군이 곧바로 응대하여 읊기를,
해가 왔다가 해가 또 가니 / 年來年又去
오고 감이 어느 해 그치랴 / 來去止何年
하니, 과객이 경탄하기를, “한음공이 13세에 양봉래(楊蓬萊 봉래는 양사언(楊士彦)의 호)와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며 읊었을 때 봉래가 붓두껍을 닫았다더니 네가 능히 선조의 아름다움을 이었구나.”라고 하였다.
장성하여서는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한 관계로 경업(經業)을 아울러 익혔는데, 기축년(1769, 영조 45)에 전강(殿講)에 들어가 《주역(周易)》의 계사(繫辭)를 강하여 순통(純通)을 받았다. 시관(試官)이 주상의 하교를 받들어 물어보기를,
“본문에 ‘하늘이 높고 땅이 낮으니 건곤이 정해진다.[天尊地卑 乾坤定矣]’고 했는데, 이미 하늘과 땅을 말하고 또 건곤이라고 하니 과연 다른 점이 있는가?”
라고 하자, 군이 답하기를,
“하늘과 땅은 형체를 말함이고 건곤은 괘체(卦體)로 말한 것이니, 가리키는 바는 비록 다르지만 그 실체는 하나입니다.”
라고 하였다. 주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했는데, 비교하기에 이르러 한 글자를 잘못 지나감에 주상이 깜짝 놀라면서 “운수이다.” 하고, 이어서 머물러 있으면서 후강(後講)을 기다리라고 명하니 특별한 대우였다. 겨울에 전강에 들어가 《서경》을 강하여 또 통(通)을 받았는데 당시에 순통(純通)을 받은 사람이 있어 떨어지게 되었으니 주상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신묘년(1771, 영조 47)에 식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히고, 임진년(1772, 영조 48) 4월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어 하번(下番)으로서 입시하여 누차 주상의 포장을 받았다. 계사년(1773, 영조 49) 2월에 육상궁(毓祥宮)으로 어가(御駕)를 따랐는데 특명으로 승참(陞參)하게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장래에 나의 세손(世孫)을 잘 섬기도록 하라.”고 하였다. 3월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4월에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윽고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었고, 6월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고, 8월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고, 11월에 또 정언이 되었다. 군이 누차 언관의 지위에 있었으나 모두 잠깐만에 체직되었고, 도성 서쪽에 집을 빌려 살면서 문을 닫고 글을 읽어 교유를 좋아하지 않으니, 인망이 돌아감이 많았다.
갑오년(1774, 영조 50) 4월에 온양으로 부모를 찾아뵈러 온 길에 질병에 걸렸는데, 이 때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체직되었다. 8월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병세가 점차 위독해져서 여러 달 동안 기운을 차리지 못한 채 누워서 지내다가 이듬해 1월 14일에 32세로 세상을 마쳤다.
죽기 며칠 전에 쓴 자도문(自道文) 한 편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는데 “일실(一室)에 진루(塵累)를 끼쳤으니 서하(西河)ㆍ기부(杞婦)의 곡성을 차마 듣겠는가. 하늘에 장정(長程)을 시작하니 하계(下界)의 덧없는 상전 벽해를 굽어 보네.”라고 하였고, 또 몽중시(夢中詩)를 읊기를,
오늘 아침 내린 곡우 후 / 穀雨今朝後
청산에 뜻이 두루 감도네 / 靑山意周旋
라고 했는데, 무덤을 정한 날이 바로 곡우일이었다. 아, 이상하기도 하여라. 유언은 상장(喪葬)에 있어서 검약에 따르기를 힘쓰라고 하였고, 남에게 빌려 온 서책을 일일이 지시하여 되돌려 주게 하였으니, 그 마음씀이 자상하고 정신이 차분하기가 이와 같았다. 오호라, 애석하도다. 도가 쇠함으로부터 기화(氣化)가 흐려져 청숙(淸淑)한 기를 받은 사람이 수(壽)를 얻지 못함이 많아 왕왕 요절하고 마니 슬프도다.
군은 파평윤씨(坡平尹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의 부친은 덕중(德中), 조부는 참판 정화(鼎和)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명억(命億)은 광주안씨(廣州安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곧 나의 아우 정록(鼎祿)의 딸이고, 그 딸은 어리다. 모월 모일에 진위(振威) 오룡동(五龍洞) 선영 경좌(庚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다음에 명을 붙인다.
명재상의 훌륭한 자손 / 名相賢孫
용문에 일찍 올랐네 / 早登龍門
하늘이 이 때에 / 天於是時
장차 도를 행할 듯했더니 / 若將有爲
어찌 그렇게 빨리 돌아가 / 胡歸其遄
안자의 나이에 그치고 말았던가 / 顔子之年
보답을 누리는 이치 있으니 / 理有食報
마땅히 그 후예가 창성하리라 / 宜昌厥後
[주-D001] 서하(西河) :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 《사기》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자하가 이곳에서 아들의 상을 당하여 심하게 울다가 실명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후세에 아들의 상을 당한 경우에 ‘서하의 눈물[西河之淚]’ 또는 ‘서하의 슬픔[西河之痛]’이라는 말을 씀.[주-D002] 기부(杞婦) : 춘추시대 제(齊) 나라 기량(杞梁)의 부인. 제 나라 장공(莊公)이 거(莒)를 칠 때 기량이 전사했는데 그의 아내가 길에서 남편의 시신을 맞이하면서 슬프게 울었다는 고사가 있음. 《春秋左傳 襄公 二十三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