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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경전(慶全)이고, 자는 중집(仲集)이며, 석루(石樓)는 호이다. 이씨(李氏)는 본래 한산(韓山)의 저명한 성씨이다. 고려 말 호가 가정(稼亭)인 문효공(文孝公) 곡(穀)과 호가 목은(牧隱)인 문정공(文靖公) 색(穡)이 실로 공의 9대조와 8대조이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문정공의 아들 종선(種善)은 시호가 양경공(良景公)이다. 양경공의 아들 계전(季甸)은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이고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3대를 내려와 휘 치(穉)는 연산군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임금에 의해 풀려났으며 관직은 판관에 이르고 좌찬성 한원군(韓原君)에 추증되었는데, 공의 증조이다. 조부의 휘는 지번(之蕃)이고, 호는 성암(省菴)이며, 퇴도(退陶) 이자(李子 이황(李滉))와 도의(道義)로 사귀었으며 관직은 내자시 정을 지내고 영의정 한천부원군(韓川府院君)에 증직되었다. 부친의 휘는 산해(山海)이고, 호는 아계(鵝溪)이며, 선조 임금을 섬겨 지위가 영의정에 이르고 공훈으로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조언수(趙彦秀)의 따님으로, 융경(隆慶) 정묘년(1567, 명종22)에 공을 낳았다.
토정공(土亭公) 지함(之菡)은 성암공의 아우로서 공을 매우 기특하게 여겼는데, 공의 이름에 ‘전(全)’이라는 글자를 내려 주었다. 이는 대개 세상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먼저 알고 공이 그 문호를 보전할 수 있으리라 점친 것이다.
공은 5, 6세 때 토정공에게 배웠는데, 영기와 지혜를 타고나서 수고하지 않아도 정신이 절로 통하였으며, 〈눈을 읊다[詠雪]〉, 〈귤을 읊다[詠橘]〉, 〈개 짖는 소리를 읊다[詠犬吠]〉 등의 시를 지으니, 의정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만력(萬曆) 을유년(1585, 선조1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한때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 모두 공의 얼굴을 한번 보기를 바랐다. 공은 김공 두남(金公斗南), 이공 귀(李公貴), 정공 광성(鄭公廣成) 등 수십 인과 함께 길에 나가 놀이로 〈등동축저요(登東築杵謠)〉를 불렀는데, 온 세상이 전하고 일컬으며 그것을 동한(東漢)의 풍류에 견주었다.
기축년(1589)에 옥사를 주관하는 자가 죄를 덮어씌우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동암 발(李東巖潑)이 또한 체포되어 오자, 공은 의연히 한강 가로 나가 만나 보려 하였고, 이공이 고문을 받고 유배되자 또한 동문 밖으로 나가 작별하였는데 이때부터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경인년(1590)에 부친의 명으로 증광시에 응시하고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속되었다.
신묘년(1591)에 장악원 직장을 거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를 했는데, 이것은 극선(極選)이었다. 공이 소를 올려 사양하자, 선조 임금께서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그대 집안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두 주옥(珠玉)이로구나.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다음 해에 왜적의 침략이 급박하여 상이 서쪽으로 피난하자, 의정공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어가를 호종하니, 공이 도보로 따랐다. 평양의 행재소에 도착했을 때에 당인들이 기회를 타고 뛰어들어, 의정공이 서울을 버릴 계책을 맨 먼저 아뢴 것을 죄로 삼아 관동의 평해군(平海郡)으로 폄적시키니, 의정공은 평해군에서 4년을 있다가 풀려났다. 공은 비로소 한성 참군(漢城參軍)에 조용(調用)되었다가 이어서 예조ㆍ병조ㆍ형조의 좌랑으로 옮겼다.
이때 남북(南北)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자, 공은 힘껏 외직을 구하여 옹진 현령(瓮津縣令)이 되었다. 다음 해에 병조 정랑으로 관직이 바뀌자,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잊지 않으려는 뜻을 부쳤다. 이로부터 지평에 세 번 제수되어 시강원 사서를 겸하였으며, 홍문록(弘文錄)의 선발에 들고 부수찬에 제수되어 시강원 문학을 겸하였다. 그사이에 암행 어사로서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를 살펴보았는데, 권장과 징계가 모두 알맞았다.
공은 문장으로 주상의 지우를 입었는데, 문장을 구상하지 않아도 글이 군마(軍馬)나 돛단배처럼 나왔다. 이때가 되어 명나라 사신이 잇따라 왔는데, 무릇 사례하는 게첩(揭帖)이나 가요(歌謠) 등의 작품이 공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명나라 장수가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갈 때 선조 임금이 홍제교(弘濟橋)에 나가 전송했는데, 공이 사신(詞臣)으로서 따라갔다. 명나라 장수가 출발할 무렵에 선조 임금이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공에게 명하여 작별시를 지어 전송하게 했는데, 공은 거침없이 명하는 대로 응대하였다. 임금이 또한 그 자리에서 〈비파행(琵琶行)〉에 차운하라고 명하자, 명나라 장수가 그 운에 따라 운자를 불러 주었는데, 운자를 부르는 대로 응대하자 혹시 공이 미리 구상했을 것이라 의심하고 ‘상인부(商人婦)’의 부(婦) 자를 부(夫) 자로 바꿔 부르기까지 했으나, 공이 응대하여 말하기를,
시대 아파한 지사는 예로부터 있었으나 / 傷時自古有志士
이별의 슬픔 앞에선 종래로 대장부 없었네 / 恨別從來無丈夫
하니, 명나라 장수가 말하기를,
“신묘한 작품이다.”
하고, 시를 잘 읽는 가정(家丁)으로 하여금 개선가에 맞춰 외며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게 하였다.
도독(都督) 형개(邢玠)가, 본국(本國)이 제일 큰 공적을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지 않은 것에 성내며 한음공(漢陰公)을 더욱 다급하게 재촉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의정공이 공에게 명하여 즉시 〈군민요(軍民謠)〉를 짓게 하고 한호(韓濩)에게 맡겨 글씨를 쓰게 하며 한음공으로 하여금 손수 올리게 하였다. 도독이 그것을 읽다가 “단상에 올라 깃발에 제사 지내자 천지가 감동하고, 군사를 내어 대중에게 맹세하자 귀신이 그 지휘를 들었네.”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치며 감탄하여, 일이 해결될 수 있었다. 공이 교리로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경자년(1600)에 재차 직강이 되어 교서 교리(校書校理)를 겸하고, 이조 정랑을 거쳐 의정부 사인으로 옮겼다. 이때 홍여순(洪汝諄)이 간사하고 아첨하는 소행을 하므로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여, 공이 인사 행정을 할 때 그를 대사헌에 의망하는 것을 막았는데, 공은 근거 없는 비방을 받아 삭직되고 8년 동안 서용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갑진년(1604)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건강이 몹시 훼손되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복제를 마치고 나서는 세상일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오직 시를 읊고 술을 대하면서 자유롭게 살았다.
무신년(1608)에 정인홍(鄭仁弘)이 합천(陜川)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유영경(柳永慶)이 국본(國本)을 모위(謀危)한 죄를 청했는데, 공은 이때 마침 어머니의 산소에 성묘하였다. 유영경은 공이 합천으로 간 것으로 착각하고 공을 탄핵하여 강계(江界)로 유배 보냈다. 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환되어 사간, 집의, 전한, 사도시 정(司䆃寺正)에 제수되었다.
공은 사간원에 있을 때 기축년(1589)에 억울하게 죽은 여러 명류(名流)를 속히 신원해야 함을 극진하게 말했으나 조정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어서 승정원 동부승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에 발탁되었다. 공은 늘 붕당을 타파하고 피차를 하나로 보는 것이 지금의 급선무라고 여겼으며, 인사 행정을 하게 되자 문득 한 시대의 인망을 얻었다. 이이첨(李爾瞻)이 그것을 미워하여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공이 제멋대로 했다고 탄핵하게 하자, 공은 즉시 사직하여 체차되었고, 이로부터 다시는 전형의 직임을 담당하지 않았다. 이어서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의정공의 상을 당하였다. 이때는 광해군 1년이었다. 한창 부친의 병을 간호할 때는 여러 달 동안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상이 나자 모친상 때처럼 상례를 지켰으며, 제사에는 반드시 몸소 제수를 올리고, 매일 반드시 묘 앞에서 곡을 했는데 아무리 비바람이 크게 쳐도 중지하지 않았다.
신해년(1611)에 복제를 마치고 나자, 다시 승지,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임자년(1612)에 지방으로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한결같이 법대로 안렴(按廉)하였는데, 아무리 오랜 친구일지라도 불법을 저질렀다고 보고를 받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니, 한 도가 엄숙해졌다. 이어서 맏아들의 상으로 사직하여 체직되고,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라 한평군(韓平君)을 습봉하였다.
이때 이이첨이 더욱 권세를 부리며 공을 무신년(1608)의 익사 공신(翼社功臣)에 책록하였다. 이이첨은 유영경을 몰아낸 공로를 자랑하려고 한 시대의 저명하고 박학한 선비인 백사(白沙), 오리(梧里), 한음(漢陰) 등 여러 공 및 의정공까지 아울러 억지로 훈적(勳籍)에 올려놓았는데, 공도 그 속에 들어갔다. 이것은 간사한 신하가 무거운 명망을 빌리려 한 계책이다. 공은 항의하는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의 아버지가 알지 못했는데, 신이 또한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며, 굳게 사양하여 벗어나자, 이이첨이 화복(禍福)으로 꾀었으나 공의 뜻을 빼앗지 못하였다.
아, 만약 공이 단지 작록을 탐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무신년 익사 공신의 일은 당시의 임금이 듣고 기뻐한 것이고 간사한 신하가 총애를 단단히 굳히게 된 것인데, 공이 어찌 훗날을 미리 헤아려서 눈앞의 부귀를 참으로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겨 손을 내저었겠는가. 더구나 공의 상소문은 공의 마음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의정공의 마음도 드러냈으니,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다. 훗날 상론(尙論)하는 자가 어찌 이것으로 공을 살펴보지 않겠는가.
공의 행적이 조정의 반열에서 편치 못했는데, 계축년(1613)에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공이 정사를 볼 때는 문인과 무인이 모두 존경하고 백성과 아전이 모두 좋아하였다. 백성들의 청원에 따라 3년을 더 유임하니,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갑인년(1614)에 자헌대부의 품계로 올랐다.
다음 해에 내직으로 들어와 의정부 좌참찬, 형조 판서에 제수되고, 또한 오도 도순찰사(五道都巡察使)를 겸하였다.
병진년(1616)에 육도 체찰사(六道體察使)가 되어 전주부(全州府)에 가서 머물고, 무오년(1618)에 다시 돌아와서 좌참찬에 제수되었다. 공의 서숙(庶叔)인 산광(山光)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는 사람으로서 시와 술을 잘했는데, 여러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취해 인사불성인 체하면서 이이첨의 얼굴에 침을 뱉으니, 이이첨이 더욱 시기하고 의심하였다. 공은 이해에 다시 관찰사 겸 체찰사로서 전주부에 가서 머물렀다.
대개 임자년(1612)부터 광해군 11년(1619)에 이르는 기간에 조정에 있던 기간은 몇 달이 안 되고, 공이 청빈한 생활 속에 지조를 가다듬어 쓸쓸하기가 벼슬이 없는 선비 같았다. 공이 서울로 돌아와서 보니, 지붕은 뚫렸고 울타리는 무너져 있었다. 거처가 너무 눅눅하고 좁아서 집안사람들이 잠자는 방을 조금 고치려 하였으나, 공이 “나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훗날 조정에서 공을 청백리에 선발하려 했으나 공이 일찍이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보리 10섬을 가져다 굶주린 집안 식구들에게 준 적이 있기에 그 선발을 사양하였다.
경신년(1620)에 다시 좌참찬에 제수되어 지경연사, 춘추관과 홍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셋째 아들 진사 부(阜)가 성균관의 장의(掌議)로서 홀로 소를 올려 이이첨의 머리를 베어 조정을 맑게 하고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할 것을 청했는데, 소는 끝내 처리하지 않은 채 놓아두고 전리(田里)로 쫓아냈다. 공은 이때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져 이소릉(李少陵 이상의(李尙毅)), 이죽천(李竹泉 이덕형(李德泂)) 등 여러 공과 함께 산수 사이를 한가롭게 거닐며 청풍계(靑楓溪)에서 계회(契會)를 열고 첩(帖)을 만들어 간직하니, 사람들이 멋진 일로 여겼다.
공은 관반사(館伴使)로서 유(劉)와 양(楊) 두 명나라 사신을 접대했는데, 유와 양은 공이 수창한 시를 보고 찬탄하고 나중에는 역관(譯官)을 통해서 여러 번 편지를 부쳐 안부를 물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나라에 큰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때는 아주 깜깜한 밤이고 끝내 황급하여 반정(反正)을 일으킨 것을 알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신하는 의리상 종묘를 위하여 죽어야 마땅하다.’
하고, 흰옷을 입고 곧장 종묘 문 밖에 가서 엎드려 기다렸다. 인조 임금이 이날 밤 왕위에 올라 속히 공을 별운검(別雲劍)으로 불러들이고 이전처럼 좌참찬과 홍문관 제학을 맡게 하였다.
조정이 주청사(奏請使)를 보내려 하는데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다. 신상촌 흠(申象村欽), 김 승평 류(金昇平瑬)가 모두, 당대에 문장가로서 전대(專對)할 수 있는 사람은 이경전만 한 이가 없고 평소 중국 일에 익숙한 사람도 이경전만 한 이가 없다고 여기고, 첫 번째로 공을 추천하였다. 이에 공은 사명을 받들고 만 리 요동 길을 달려 중국에 들어갔다.
이전에 모문룡(毛文龍)과 맹추관(孟推官)이 서로 이어서 본국의 일을 보고하면서 비방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과도관(科道官)들의 논의가 자못 옥신각신하였다. 공이 중국에 도착해서 각로(閣老) 섭향고(葉向高)를 알현했는데, 섭향고는 공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공을 매우 대단하게 여기며, 주청하는 것에 대해 대번에 승낙하였다. 이어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면서 조사관이 본국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하며, 국왕의 봉전(封典)을 허락하고 망룡의(蟒龍衣) 1습을 하사하며 사신으로 하여금 옷상자를 감히 열어 보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천자가 국왕을 총애하여 내린 것이니, 그 귀중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배신(陪臣)인 저는 명색이 사신인데 살펴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의리상 감히 할 수 없기에 굳이 열어 볼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열어 보니 칠장복(七章服)이었다. 이에 공이 이치에 의거하여 쟁변하니, 드디어 구장복(九章服)으로 다시 봉하였다.
갑자년(1624)에 비로소 복명(復命)하였다. 인조 임금이 크게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며 상으로 노비와 전부(田賦)를 하사하자, 공이 아뢰기를,
“신이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하고, 단지 종 1구만 받고 나머지는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숭정대부에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정묘년(1627)에 어가를 호종하여 강화도에서 도적을 피하였다.
병자년(1636)에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정축년(1637)에 청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가면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삼전도(三田渡)에 비석을 세워서 그들의 공덕을 송축하게 하자, 상이 관각(館閣)에서 문장으로 명성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글을 지어서 올리게 하였다. 장공 유(張公維), 이공 경석(李公景奭), 조공 희일(趙公希逸) 및 공이 선발되었다. 공이 이에 세 번 차자를 올려 오랫동안 붓과 벼루를 버려두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대개 일찍이 〈척화소(斥和疏)〉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전후로 그 지조를 달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상이 공의 뜻을 알고 또한 강요하지 않으니, 마침내 벗어났다.
공은 호종한 공로로 숭록대부에 가자되고,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판돈녕부사로 옮겼다. 그 뒤로 누차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하였는데, 대평(臺評)이, 청나라에 자식을 볼모로 보내는 일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며 공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혹은 충청도에 가고 혹은 경기에 우거하면서 한가롭고 편안하게 노년을 즐기면서 살다가 갑신년(1644) 5월 2일에 사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상이 매우 슬퍼하며 별유(別諭)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으며, 유사(有司)를 신칙하여 관곽(棺槨)의 상구(喪具)를 하사하게 하고 조묘군(造墓軍)도 보낼 것을 명하였다. 이것은 난리 뒤에 내린 특별한 은총이었다. 7월에 보령(保寧) 고만(高巒)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이 세상을 떠난 날에 집에는 베 한 자도 없어서 나라와 개인이 주는 부의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빈렴(殯斂)을 할 수 있었으니, 공이 이에 진실로 맑은 덕을 마친 것이다.
공은 평생 집안 살림을 다스리지 않았다. 음식과 의복은 처한 대로 맡겨 두고, 오직 서적을 가장 즐겨 보았다. 만년에는 《중용》과 《대학》을 좋아하여 하루에 반드시 한 번씩 외웠다. 자제들을 권면할 때는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고, 혹 일언일구(一言一句)라도 글을 지을 수 있는 자가 있으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며 말하기를,
“삼생(三牲)의 봉양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하였다.
공이 일찍이 하대부(下大夫)로서 집에서 사사로이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북소리로 명령을 하였다. 비록 반시(泮試) 날을 만나더라도 그 북소리를 들으면 성균관으로 가지 않고 공의 집으로 가는 자가 많았다. 후생들이 공이 지성으로 면려하는 것을 알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공은 조정에 선 50년 동안 몸소 많은 고난을 겪었는데, 자제들을 가르칠 때마다 말하기를,
“나는 세상 속에서 득실을 걱정하는 자들을 보면 걸어가는 시체나 달려가는 고기처럼 볼 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불가에서 이르는 중생(衆生)이란 것이니, 또한 불쌍하지 않느냐.”
하였다.
병자년(1636) 이래로 사직을 청했으나 되지 않자, 시골을 돌아갈 곳으로 여기고 패랭이를 쓰고 율무 구슬로 갓끈을 만들고 거친 옷을 입고 말을 타고 나가 노닐며 호수와 산에서 시를 읊조리다가 흥이 다하면 버렸다.
공은 선악(善惡)에 대하여는 그 분별을 더욱 엄하게 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망국의 화는 기축년(1589, 선조22)에 시작되어 병자년(1636, 인조14)에 끝났다. 의복을 왼쪽으로 여미게 된 것은 반드시 그 책임을 지는 자가 있어야 한다.”
하였다.
저술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집에서 개인 문집을 만드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잊고 거두지 않으니, 결국 난리 중에 불타 버려 남은 것이 겨우 약간 권이다.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홍문관 교리 김첨(金瞻)의 따님으로, 남편을 섬기고 빈조(蘋藻)를 받드는 데에 정성과 예절이 모두 지극하여 공이 부인을 공경하였다.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후(厚)는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을 지내고, 둘째 구(久)는 18세에 사마시의 초시와 회시에서 장원급제하고 20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지냈으나, 모두 젊은 나이에 죽었다. 셋째 부(阜)는 19세에 진사가 되자 즉시 이이첨을 벨 것을 청하고 과거 공부를 접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넷째 유(卣)는 문사(文詞)에 능했으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다섯째 무(袤)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종백(大宗伯 예조 판서)을 지냈고 호는 과암(果菴)이다. 딸은 이조 참판 조수익(趙壽益)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 중 장남 취(就)는 진사이고, 차남 수(𣺫)는 사과(司果)를 지냈다.
구(久)의 외아들 상빈(尙賓)은 진사로서 문사에 능했으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부(阜)의 외아들은 수빈(壽賓)이고 딸은 진사 황후석(黃後石)에게 시집갔다. 유(卣)의 두 아들은 양빈(陽賓)과 오빈(梧賓)이고 두 사위는 노형복(盧亨福)과 안두극(安斗極)이다. 대종백의 두 아들 중 장남 인빈(寅賓)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의 관직을 역임하고 첨지중추부사에 그쳤으며, 차남은 용빈(龍賓)이고, 딸은 현령 이행경(李行敬)에게 시집갔다. 조수익의 두 아들 중 변(汴)은 경력(經歷)이고, 면(沔)은 현감이다. 후(厚)는 자식이 없어 오빈을 후사로 삼았다.
상빈의 두 아들 중 창근(昌根)은 어린 나이에 죽었고, 운근(雲根)은 현감이며, 두 사위는 사인(士人) 성담(成燂), 현령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조경창(趙景昌)이다. 좌찬성의 장녀는 실은 경은부부인(慶恩府夫人)으로서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낳았다.
수빈의 장남 석근(石根)은 감역(監役)이고, 차남은 원근(元根)이며, 사위는 판서 유명천(柳命天)이다.
양빈의 아들은 천근(天根)이다.
인빈의 장남 동근(東根)은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사서이고, 둘째 도근(道根)은 교관이고, 셋째는 회근(晦根)이고, 넷째 효근(孝根)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정언이며, 사위는 이만주(李萬柱)이다.
오빈은 자식이 없어 동근을 후사로 삼았다.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으나 덕운(德運)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를 지내고 정랑에 그쳤다. 서손(庶孫) 재운(載運)은 참봉이다. 5대손 건(謇)은 참봉이다. 6대손 수일(秀逸)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고, 수하(秀夏)는 문과에 급제한 전(前) 한성부 좌윤이며, 봉서(鳳舒)는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 7대손 경명(景溟)은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홍문관의 관직을 역임한 전 승지이며, 주명(柱溟)은 전 도사이다. 지금 비문을 부탁한 사람은 정명(鼎溟)으로, 대개 선조의 뜻을 받든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가정과 목은이 태평성대 이끌고 / 稼牧瑞世
봉황의 깃털을 후손에게 남겨 주었네 / 鳳毛貽孫
공이 실로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니 / 公實肯構
아계 노인의 가문이었네 / 鵝老之門
나오는 말이 모두 주옥이라며 / 咳唾皆珠
선조 임금이 가상하다 하였네 / 宣廟曰嘉
시를 개선가에 맞춰 부르니 / 詩和凱歌
명성이 중화에 가득하였네 / 聲滿中華
나그네처럼 살다가 / 有迹如寄
혼란한 세상을 만났네 / 世値昏亂
기린각이 눈앞에 있은들 / 麟閣在前
어찌 족히 손에 들고 가지고 놀랴 / 曷足把玩
짧은 상소문 서릿발 늠름하니 / 尺紙霜凜
두 사람의 뜻을 말로 나타냈네 / 言出貳身
조야는 안색이 변하고 / 朝野色動
큰 간신은 뼛속이 시렸네 / 巨奸骨寒
외직에서 십 년 동안 / 於外十稔
술잔 세고 시 지었네 / 酒籌詩令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져 / 天日重朗
사명을 전대하라는 명이 내렸네 / 專對有命
충성의 돛대 달고 의리의 노를 저으니 / 忠檣義楫
바다 악어가 납작 엎드렸네 / 溟鰐帖伏
황제가 구름 위에 앉아 / 帝坐雲端
동국을 밝게 보았네 / 明見東國
용무늬 빛나고 빛나니 / 蟒龍煌煌
구장복이었네 / 九章其服
공이 돌아와 왕께 바치니 / 公歸獻王
왕이 이에 싫어하지 않았네 / 王庸無斁
무엇으로 상을 주었는가 / 何以賞之
토지와 노비였네 / 土田臧獲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 辭之不受
신이 무슨 힘쓴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네 / 臣有何力
신하 되어 직분 다하고 / 爲臣盡分
그런 후에 옷자락 떨치고 떠났네 / 然後拂衣
나물국에 초라한 옷 / 藜羹布褐
본분에 마땅한 것으로 여겼네 / 本分攸宜
시종 때를 잘 만난 것과 / 始終遭遇
관곽과 염빈 모두 성은이었네 / 棺斂皆恩
당파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는 / 黨界雌黃
저들의 교만과 완악을 아파하노라 / 痛彼驕頑
공의 생애를 살피려는 자가 있다면 / 人如有考
이 글에 증거가 있으리라 / 其在斯文
[주-D001] 휘 …… 풀려났으며 : 이치(李穉)는 1504년 찬성을 지낸 작은아버지 이파(李坡)와 함께 사화에 연좌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에 풀려났다.[주-D002] 개 …… 읊다[詠犬吠] : 이경전이 13세에 지은 시로, 다음과 같다. “개 한 마리가 짖고 개 두 마리가 짖으니 개 세 마리가 또한 따라 짖네. 사람 때문일까, 호랑이 때문일까, 바람 소리 때문일까. 동자가, 산 위에 뜬 달이 정히 촛불 같고 마당에는 오직 찬 바람에 우는 오동나무만 있다고 말하네. 이상한 것을 보면 의당 놀라는 것이 이치이니, 개가 무엇 때문에 짖지 않으랴. 짖는 데는 본래 뜻이 있으나 사람은 알지 못하고, 동자에게 대문을 속히 닫으라고 말하네.[一犬吠二犬吠三犬亦隨吠, 人乎虎乎風聲乎? 童言山月正如燭, 半庭唯有鳴寒梧. 見非常有理宜驚, 犬乎何事無爲吠. 吠固有意人不識, 說與兒童門速閉.]” 《石樓遺稿 卷1 犬吠》[주-D003] 등동축저요(登東築杵謠) : 몽둥이로 땅을 둥둥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로 보인다. 등동은 두드리는 소리인 ‘둥둥’을 표현한 등등(登登)의 다른 글자로 보인다. 이 당시에 정치에 실망한 부유층 자제 30여 인이 주동이 되어 도성 안의 선비들을 천 명 백 명씩 끌고 다니면서, 미치광이나 괴물처럼 노래하고 춤추며 웃다가 울고 하는 등 도깨비나 무당의 흉내를 내며 〈등등곡(登登曲)〉이라고 일컬었다는 이야기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5 〈임진왜란대가서수(壬辰倭亂大駕西狩)〉에 나온다.[주-D004] 사신(詞臣) : 문사(文詞)를 담당하는 신하를 가리킨다.[주-D005] 비파행(琵琶行) :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시이다. 《白氏長慶集 卷12》[주-D006] 상인부(商人婦) : 〈비파행〉의 구절인 “늙어서 상인의 아내가 되었네.[老大嫁作商人婦]”의 일부이다. 《白氏長慶集 卷12》[주-D007] 형개(邢玠) : 1540~1612. 자는 식여(式如), 호는 곤전(昆田), 산동(山東) 익도(益都) 사람이다. 1597년 10월 총독(總督)이 되어 조선으로 출병하였다가 울산(蔚山)에서 대패하고, 이듬해 3월에 귀국했다가 7월에 다시 출병하여 직산(稷山)과 울산에서 왜적을 대파했다.[주-D008] 군민요(軍民謠) : 《석루유고(石樓遺稿)》 문집 권1 〈형군문서귀기로군민등가요(邢軍門西歸耆老軍民等歌謠)〉이다.[주-D009] 한호(韓濩) : 1543~1605.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ㆍ청사(淸沙)이다.[주-D010] 홍여순(洪汝諄) : 1547~1609.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신(士信)이다. 임진왜란 중에 유성룡 등을 몰아내고 북인 세력이 정권을 잡는 데 기여하였다. 난후에는 병조 판서로서 무반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대북을 영도하면서 남이공 등의 소북과 대립하다가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또 대간의 탄핵을 받아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주-D011] 유영경(柳永慶)이 …… 죄 : 선조가 만년에는 광해군을 싫어하고 늦게 낳은 아들 영창대군을 지극히 사랑하였는데, 그것을 안 유영경이 영합하여 광해군의 왕세자 지위를 바꾸려고 음모한 것을 말한다.[주-D012] 청풍계(靑楓溪)에서 …… 간직하니 : 이경전이1620년(광해군12)김신국(金藎國), 이상의, 민형남(閔馨男), 이덕형, 최희남(崔喜男), 이필영(李必榮)과 서울 인왕산의 청풍계에서 계회를 열고, 모임을 기리기 위해 〈청풍계첩〉을 만들어 간직한 것을 말한다.[주-D013] 유(劉)와 양(楊) : 1621년 명나라 광종(光宗)이 즉위한 데 따른 조칙을 반포하기 위하여 조선에 온,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 유홍훈(劉鴻訓)과 예과 급사중(禮科給事中) 양도인(楊道寅)을 말한다.[주-D014] 모문룡(毛文龍) : 1576~1629. 명나라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호는 진남(振南)이다.[주-D015] 맹추관(孟推官) : 이름은 양지(養志)이다. 광해군 말년에 칙명을 받들고 가도(椵島)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왔는데, 한 해가 넘도록 광해군이 병을 핑계 대고 인견(引見)하지 않자 개성부(開城府)에 머물러 있다가, 1623년 서울에 들어오게 되었다.[주-D016] 과도관(科道官) : 명나라 시대에 급사중(給事中)과 각 도의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통칭하던 말이다.[주-D017] 섭향고(葉向高) : 명나라의 관리로, 자는 진경(進卿), 호는 대산(臺山)이다.[주-D018] 옥하관(玉河館) : 조선 사신이 머물던 연경(燕京)의 관소(館所) 이름이다.[주-D019] 국왕의 봉전(封典) : 인조를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한다. 봉전은 천자가 제후에게 작위를 내리는 은전을 말한다.[주-D020] 망룡의(蟒龍衣) : 큰 구렁이 무늬를 놓은 예복이다. 명나라 제도에 외국 임금에게 내려 주던 의복이다.[주-D021] 칠장복(七章服) : 화충(華蟲)ㆍ화(火)ㆍ종이(宗彝)ㆍ조(藻)ㆍ분미(粉米)ㆍ보(黼)ㆍ불(黻) 등 7종의 무늬로 장식한 왕세자의 면복(冕服)이다. 황제는 십이장복(十二章服), 왕은 구장복, 왕세자는 칠장복을 입었다.[주-D022] 조공 희일(趙公希逸) : 조희일(1575~1638)의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이숙(怡叔), 호는 죽음(竹陰)ㆍ팔봉(八峰)이다.[주-D023] 장공 …… 선발되었다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11월 25일 기사에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에게 명하여 삼전도비의 비문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라고 하였다.[주-D024] 척화소(斥和疏) : 1627년 정묘호란 때 형제 관계를 맺고 강화한 후금과 조선 간의 외교는, 1636년에 이르러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군신 관계를 강요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여 악화되고, 조정에서는 척화의 기운이 팽배하였다. 이에 척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화파의 수장인 최명길(崔鳴吉)의 죄를 논한 상소를 올렸는데, 여기서 청나라와의 화의를 비난하고 숭명반청(崇明反淸)을 주장하였는바, 이를 〈척화소〉라고 한다.[주-D025] 대평(臺評) : 어사대(御史臺)의 탄핵, 또는 대간(臺諫)의 평론을 말한다.[주-D026] 조묘군(造墓軍) : 분묘(墳墓)를 조성하는 인부이다.[주-D027] 의복을 …… 것 : 조선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의 “관중이 아니었다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왼쪽으로 옷을 여몄을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로,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 중화의 문화를 버리고 이민족의 습속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주-D028] 빈조(蘋藻) : 선조의 제사를 경건히 지냄을 말한다. 《시경》 〈소남(召南) 채빈(采蘋)〉에 “이에 마름을 뜯기를 남쪽 물가에서 하고, 이에 마름을 뜯기를 저 흘러가는 도랑에서 하도다.[于以采蘋, 南澗之濱. 于以采藻, 于彼行潦.]”라고 하였다. 《시경집전》에 “대부의 아내가 제사를 잘 받드니, 집안사람들이 그 일을 서술하여 찬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주-D029] 인원왕후(仁元王后) : 1689~1757. 숙종의 둘째 계비이다.[주-D030] 봉황의 깃털 : 자식이 훌륭한 아버지를 잘 닮은 것을 비유한 말로, 여기서는 자손이 선조를 닮은 것을 뜻한다. 진(晉)나라 때의 명신 왕도(王導)의 아들 왕소(王劭)가 일찍이 시중(侍中)이 되어 대궐 문을 출입할 적에 환온(桓溫)이 그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대노에게는 본디 스스로 봉황의 터럭이 있었다.”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인데, 대노(大奴)는 왕소를 지칭한다. 《世說新語 容止》[주-D031] 짧은 …… 나타냈네 : 이이첨이 유영경을 몰아낸 공로를 자랑하려고 저명한 인사들과 함께 이경전과 이산해를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의 익사 공신에 책록하자, 이경전이 항의하는 소를 올려 두 사람의 뜻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