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駒城)의 운곡(雲谷)에 은군자(隱君子) 조군(趙君)이 있으니, 행의(行義)로 알려졌다. 내가 한번 방문하고자 했으나 병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을사년(1785, 정조 9) 여름에 군이 형문(衡門)을 찾아왔기에 인사하고 보니 나와는 동갑이면서 나보다 생일이 빨랐다. 한번 보았는데도 마치 오래 사귄 벗과 같아 심간(心肝)을 환히 열어 뜻이 정답고 말이 순순하여, ‘화락한 군자’라고 할 만하였다. 뒤에 만날 약속을 남기고 작별했는데 작별한 지 열 달만에 군의 부고를 받으니, 아아, 애통하도다.
군의 휘는 정중(鼎重), 자는 대수(大受)이고, 관향은 한양(漢陽)인데 국초의 좌명공신 좌의정 양렬공(襄烈公) 인벽(仁璧)의 후예이다. 대대로 벼슬이 계속 이어졌는데 6대를 내려와서는 기묘명인(己卯名人) 증 좌찬성 변(忭)이 있고, 3대를 내려와 봉사 국로(國老)는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나아갔다. 증조의 휘는 구(耉)이고, 조부의 휘는 봉흥(鳳興)으로 문행(文行)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어 숙부 휘 기(耆)의 아들 귀흥(龜興)의 둘째 아들 탁(擢)으로 후사를 삼은 이가 바로 공의 부친이다.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현령 흡(歙)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임진년(1712) 12월 2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빼어나고 학문에 부지런하여 동류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자라서 세도가 위태하고 가업이 쇠락함을 보고 오로지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 뜻을 두어 부지런히 재물을 경리하고 근검 절약하는 생활을 하자 얼마 되지 않아 가산이 풍요하게 되었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는데, 날마다 어버이를 곁에서 모셔 즐거운 안색과 유순한 모습으로 그 뜻을 즐겁게 해드려 한갓 음식만으로 봉양할 뿐만이 아니었다. 저녁에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에 안부를 여쭙고 겨울에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는 예절에 일찍이 혹시라도 태만하지 않았다. 첨지공이 노래와 술로써 즐겨 빈객을 좋아하니, 공이 집안 사람에게 별도로 술을 빚을 재료를 갖추게 하고 자주 어른들과 친지를 청하여 혹 수연(壽宴)을 베풀어 즐겁게 해드리는 일을 만년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정성스럽고 전일하게 하였다. 임신년(1752, 영조 28)에 모친상을 당하여 부친이 계시기 때문에 기년(朞年) 만에 마땅히 궤연(几筵)을 치워야만 하나 공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첨지공께 여쭙고 3년 동안 별도로 하실(下室)에서 조석으로 상식을 드리니 식자가 그르다고 하지 않았다. 계미년(1763, 영조 39)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에 처하는 여러 절차를 늙었다고 하여 조금도 쇠하게 하지 않았다. 복을 벗고 나서 매양 부모의 제삿날을 맞으면 슬프도록 사모하는 심정이 마치 처음 상을 당한 것과 같았다. 그 효사(孝思)를 미루어 선조를 더욱 정성스럽게 받들었는데, 제수와 제기를 갖추어 반드시 먼저 마련하여 구비하고 정성을 다하여 재계하고 목욕하여 정결함을 다하기에 힘썼다. 선조의 분묘가 각기 다른 곳에 안장된 것을 한 곳에 합하여 안장하고, 부친과 조부의 두 산소에는 비석을 세워 묘도에 드러냈으며 또한 선대의 묘전(墓田)을 마련하니,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송하였다.
세 아우와 자매가 있었는데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하여 형제들과 한 골에 같이 살면서 식사 때는 반드시 한 상에서 먹고 잘 때는 반드시 이불을 함께 덮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였다. 두 누님이 50리 거리에 있었는데 자주 가서 안부를 살피고 혹 여러 날 동안 단란하게 모이기도 하였다. 한 여동생이 과부가 되어 빈곤했는데 특별히 더 돌보아 보살펴 주고 3백 금(金)을 내어 전장(田庄)을 사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 무릇 질병에 치료하는 물품과 길흉사에 드는 비용을 몸소 주선하여 다 도와주었으니, 사람들이 그 우애를 칭송하였다.
빈곤한 벗과 곤궁한 친족 가운데 능히 혼례와 상례를 치를 수 없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넉넉히 도와주었다. 아잇적에 글을 배웠던 스승이 늙었을 때는 의복과 음식을 보내드리고 돌아가셨을 때는 부물(賻物)을 보냈다. 종족을 대할 때는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갖추었다. 공은 평소에 술을 즐겨서 항상 술을 빚어 두고 빈객과 함께 대작함에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았다. 좋은날 아름다운 절서에는 온 종족과 단란하게 모여 혹 내외가 함께 즐겼는데, 반드시 시절의 음식으로서 참꽃전을 부치고 회화꽃 넣어 증편을 만들고 개를 잡고 물고기를 장만하여 서로 즐기어 인척과 종족들에게 모두 환심을 얻었으니, 사람들이 공의 친족에게 화목함[睦]과 외척에게 친함[婣]과 붕우에게 미더움[任]과 가난한 이를 도와줌[恤]을 칭송하였다. 이상의 행적을 두고 본다면 공은 육행(六行)을 구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일을 민첩하게 살피고 사무에 능통하니 실로 세상에 쓰일 재능이 있었으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이가 없어 한 고을의 선사(善士)에 그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병오년(1786, 정조 10) 1월 10일에 세상을 마치고 3월에 집 뒤 신좌(辛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전배(前配)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우(佑)의 따님이다. 공보다 3년 먼저 태어나고 무오년(1738, 영조 14) 10월에 죽었는데 운곡의 선영 아래 안장하였다. 중배(中配)는 청주한씨(淸州韓氏)인데 명래(命來)의 따님이다. 공보다 10년 뒤에 태어나고 을유년(1765, 영조 41) 10월에 죽었는데, 처음에는 운곡 동강(東岡)에 안장했다가 뒤에 공의 묘소 왼편으로 옮겨서 부장하였다. 권씨와 한씨는 모두 부덕이 있었다. 후배(後配)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명식(命植)의 따님이다.
공의 세 부인이 모두 자녀를 낳지 못하여 중제 정대(鼎大)의 아들 환(煥)으로 후사를 삼았다. 환은 어진 행실이 있었는데 공의 상을 치르고 성복(成服)한 후에 죽었다. 여산(礪山) 송경운(宋慶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규태(奎泰), 규항(奎恒), 규승(奎昇)이고 다음은 어리며, 심화윤(沈華潤)과 권혜(權僡)는 사위이다.
공의 승중손(承重孫) 규태가 박군 처현(朴君處顯)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상복을 입은 채 와서 묘지명을 청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다음에 명을 붙인다.
공의 덕행은 / 公之德行
고인을 우러르고 / 古人是景
공의 민첩한 재능은 / 公之才敏
고인에게 부끄러울 것 없네 / 無愧古人
이 재능과 이 덕행으로 / 有如是之才之德
초야에서 곤궁하게 마치니 / 而窮歿於草澤
내 누구를 허물하리 / 吾誰咎乎
명이 비색함일세 / 命之否也
[주-D001] 형문(衡門) : 나무를 가로질러 만든 보잘것 없는 문으로 안분자족(安分自足)하는 은자(隱者)의 거처를 뜻함. 《시경》 진풍(陳風) 형비편(衡泌篇)에 “형문의 아래 한가히 지낼 만하다[衡門之下 可以棲遲]”는 말에서 유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