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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이문(履文), 자는 중례(仲禮)이다. 무안박씨(務安朴氏)는 종족이 크고 오래 되었으니, 고려조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현달한 벼슬이 있었다. 고조의 휘는 응선(應善)이니 호는 초정(草亭)이고 단양 군수였는데 경술로 유명했고 뒤에 집의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규(䅅)이니 형조 좌랑 증 이조 참의이다. 조부의 휘는 창하(昌夏)이니 가선대부 부호군 증 이조 참판이다. 부친의 휘는 징(澄)이니 우윤이다. 모친은 증 정부인 사천목씨(泗川睦氏)이니 목사 임형(林馨)의 따님이다.
공은 현종 계축년(1673) 8월 9일에 태어났는데, 자질이 빼어나기가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어려서 취학하여 글을 외우고 읽기에 게을리 하지 않아서, 겨우 열 다섯 살 무렵부터는 이미 명성이 있었다.
20세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채장(菜醬)도 먹지 않은 채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으며 삼년상을 마치는 동안 지나치게 몸을 훼상하여 병이 되고 말았다. 복을 벗고는 더욱 스스로 힘써 학문을 하였는데, 태학사(太學士) 하계(霞溪) 권 선생 유(權先生愈)가 예산(禮山)에 물러나 지내면서 후진에게 고문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가서 종유한 지 8년에 종전에 듣지 못하던 바를 더욱 들어서 크게 문장에 힘쓰니 문예가 날로 진보하였다. 이에 권 선생이 자주 칭찬하기를, “사문(斯文)을 맡길 사람은 이 사람이다.”고 하였다.
기묘년(1699, 숙종 25)에 성균 생원에 뽑히고, 신축년(1721, 경종 1)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혔다. 계묘년(1723, 경종 3)에는 나이 예순으로 관례에 따라 참봉에 오르고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감찰로 옮겼다.
갑진년(1724, 경종 4)에 지평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공에게 질병이 있었는데, 이 때에 경종이 승하하심에 공이 놀라고 슬퍼한 나머지 병세가 더하여 누차 사양했지만 허락이 쉽지 않았다. 마침 감영에서 전갈을 보내어 아사(亞使)의 수연(晬宴)을 돕도록 했는데, 현의 아전이 관례라고 고하자, 공이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추론(推論)하는 거사가 있게 되자, 공이 곧 허물을 이끌어 글을 올리기를, “현궁(玄宮)을 차리고 있는 날은 인신이 술에 취하여 즐길 때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순찰사가 꺾여서 사과했으나 마침내 공의 고과(考課)를 하(下)에 두고는 “다섯 달 동안 관직에 있음에 백성들이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하니, 대개 공의 병을 칭탁하여 앞서의 유감을 갚은 것이었다. 돌아올 때 아전이 화속(火粟) 50포를 가져가서 사용(私用)으로 함이 마땅하다고 고하자, 공이 “자네 읍에 소찬(素餐)이 부끄러울 만한데 어찌 이것을 쓰겠는가.” 하고 장부에 적어서 올려두기를 명하였다. 뒤에 어사가 이 사실을 들어서 포장(褒奬)했다고 한다.
정미년(1727, 영조 3)에 병조 좌랑 겸 기사관에 제수되고, 기유년(1729, 영조 5)에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보다 앞서 적신 임징하(任徵夏)가 선왕을 ‘일란(一亂)’이라는 말로 무고하여 모욕하고 ‘발란반정(撥亂反正)’이라는 말로 매듭을 지었으며, 또 “예악과 정벌이 천자로부터 나올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 피사(避辭)가 더욱 흉악하였다. 심지어 “최초에 비망기(備忘記)가 상검(尙儉)의 손에서 나왔다.” 하고, 또 “상검이 죽은 뒤에 어찌 또 상검이 있는 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에 사대부들이 청토(請討)하고 대성(臺省)이 논집(論執)하여 마침내 ‘법에 따라 바로잡아야 한다’는 계청을 윤허했으나 징하가 완악하여 공사(供辭)를 들이지 않은 것이 이미 여러 해였다. 이 때 공이 정언에 임명되자 법에 따라 바로잡을 것을 청하는 계사를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계사를 올리기 전에 지방에 있다 해서 체직되고, 겨울에 또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소명을 어긴 것으로 파직되었다.
경술년(1730, 영조 6)에 실록청 겸사에 차정(差定)되었는데, 몇 달 만에 사직소를 올리고 체직되었다. 신해년(1731, 영조 7)에 우윤공의 상을 당하여 예제를 지키기를 모친상과 같이 하였다. 정사년(1737, 영조 13)에 지제교에 뽑혔다. 삼자함(三字啣)은 본디 청선(淸選)으로 일컬어져 세상에는 권세가 있는 사람에게 붙어서 그 직분을 얻는 이가 많다. 그러나 공은 간정(簡靖)함을 스스로 지켰고 선발을 주관하는 사람도 또한 동시대의 사람인 탓에 성문(聲聞)이 서로 미칠 수 없었으니, 사람들이 “공의가 민멸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윽고 장령에 임명되어 선친의 산소 이장의 일로써 휴가를 청하고 겸하여 마음에 품은 생각을 붙여서 상소하기를,
“군자가 말하기를, ‘헤아린 뒤에 들어가고 들어간 뒤에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신이 아래로 자신을 헤아려본다면, 학식이 보잘것 없으니 가부를 판단하여 헌의하기에 부족하고 의논이 나약하니 허물을 바로잡기에 부족합니다. 위로 시국에 헤아려본다면, 탕평(蕩平)의 정치가 마침내 문식으로 돌아가고 종핵(綜覈)의 정사가 한갓 번잡함을 더할 뿐입니다. 멀리 있는 신으로서 어리석은 충성에 우려와 탄식만 일삼을 뿐 실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아첨하는 풍조에 대소가 쓰러지듯 하고 알력을 일삼는 습속은 피차가 한가지입니다. 다만 졸눌(拙訥)하게 세상에 붙여 있는 종적으로서 스스로 분수를 지키며 고요히 지낼 뿐 또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앞에는 두 가지 ‘부족함’이 있고 뒤에는 두 가지 ‘어찌할 수 없음’이 있는데, 속절없이 임금의 이목을 맡은 직분을 받아 시속과 함께 부침하니, 신이 비록 보잘것 없으나 이렇게 임명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허락을 받아 이장을 마치고 돌아온 즉시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고, 또 말미에 약간 조목의 권면ㆍ경계의 말을 진달하기를,
“성학을 돈독히 하여 대본을 세울 것이며, 정사(正士)를 택하여 원량(元良 세자(世子))을 보좌할 것이며, 황극(皇極)을 세워서 탕평(蕩平)을 이룰 것이며, 대의를 밝혀 국시를 정할 것이며, 사령(辭令)을 간엄(簡嚴)하게 하여 중외로 하여금 천심(淺深)을 엿보게 하지 말 것이며, 권강(權綱)을 총괄하여 신하로 하여금 위세를 부리지 못하게 할 것이며, 약삭빠른 재주를 지닌 소인을 오로지 총애하지 말 것이며,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영합하여 충성인 듯이 보이는 것에 기만을 당하지 말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가납했으나 마침내 소명을 어긴 것으로 파직되었다. 겨울에 또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정론(停論)의 일로 파직되어 서용되지 않았다.
공이 처음 벼슬에 나간 해는 경종 초년이어서 조정이 일신하여 자못 도를 행할 만한 기미가 있었으나 소론(少論)이 정국을 맡아서는 법령을 각박히 행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함이 전보다 더 심하였다. 또 십수 년 이래로 청의(淸議)가 점차 민멸하고 구차하게 명리의 길을 모색하여 은밀하게 권세에 빌붙는 풍조가 만연하여 친지와 후진 가운데 평소에 이름을 알만한 사람들이 왕왕 옛 자세를 상실하고, 일체 일신을 용납하여 명리를 좇으려고 도모하였다. 이에 공은 당시의 사람들과는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없고 세상에 도를 행할 수 없음을 알고 벼슬길에 뜻을 끊은 채 강교(江郊)에 집을 빌려 살거나 혹 승사(僧舍)에 나아가 지내며 날마다 문도들과 고전을 강론하면서 이로써 여생을 마칠 뜻이 있었다. 조정에 이름을 붙인 지 20년 동안 벼슬에 종사했던 날을 계산해 본다면 2년이 되지 않는다.
계해년(1743, 영조 19) 2월 13일에 역책(易簀)하니 향년이 71세였다. 부고가 들리자 아는 사람들이 애도하며 모두 “이로부터 사문(斯文)이 사라지고 정론(正論)이 그치게 되었다.”고 하였다. 4월 26일에 광주 경안 태봉리 곤좌(坤坐) 언덕에 안장하니 선영의 아래였다.
공은 천품이 매우 높아 청명(淸明)ㆍ온수(溫粹)하고,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함에 모름지기 고인을 준칙으로 삼았다.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는 또한 육경(六經)을 바탕으로 하면서 의장(意匠)과 묵척(墨尺)은 선진(先秦)과 양한(兩漢)에서 취하여 다듬어 반연(班椽)에서 얻은 것이 많았고 그 이하는 논하지 않았다.
일찍이 고심자서(古心子序)를 지어 자신의 뜻을 보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에 태어나서 옛날에 뜻을 두니, 그 몸은 지금 사람이지만 그 마음은 옛날 사람이다.”
하였다. 드디어 자호를 고심자(古心子)라고 하고 찬(贊)을 짓기를,
“그 몸은 기연(畸然)하고 그 마음은 오연(聱然)하니, 지금 사람인가, 옛날 사람인가. 그 행실은 소활(疏闊)하고 그 말은 고원(高遠)하니, 옛날에 항상 고인을 말하면서 말이 능히 그 행실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인가. 명리를 몸 밖에 부치고 시비를 마음 속에서 잊으니, 세상을 피하고 시속을 버려서 홀로 천지의 동쪽에 서 있는 사람인가. 서까래 몇 개의 집이 쓸쓸히 적막한데 만 권의 책을 그 사이에 채워서 갈천씨(葛天氏)의 바람을 향해 정신을 쏘이네.”
하였다. 이어서 그 집을 고심재(古心齋)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그 흉중의 진취(眞趣)이니 시속의 사람과 함께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거의 침식을 잊을 지경이었다. 경서를 많게는 천 번 적게는 삼백 내지 오백 번 읽었고, 역대의 역사와 백가의 서적에 이르러서는 겸하여 조리를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고인의 글은 읽을수록 새로우니 노년에 배는 더 음미할 것이 있음을 깨닫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명(性命)ㆍ이기(理氣)의 설’과 ‘전례(典禮)ㆍ질문(質文)의 의’에 있어서도 또한 모두 근원을 거슬러 전체를 망라하여 “사람이 도가 있음에 가장 으뜸은 덕성(德性)이고 그 다음은 문학(問學)이다. 송 나라 이후로 여러 선생이 강론하여 밝히기를 다했으니, 요는 토론하여 몸소 실행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가정에서의 행실에 더욱 독실하여, 어버이를 섬기기에 뜻을 어김이 없었고, 백씨와는 머리가 세도록 함께 살면서 형제간에 화락한 정을 나누었고, 한 여동생과 한 남동생이 각기 한 식경, 두 식경 거리에 살고 있었는데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서매(庶妹)가 일찍 과부가 되어 자식이 없었는데 때때로 데리고 돌아와 돌보아 주고,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서제(庶弟)도 또한 가르치고 길러서 혼인을 시켰다. 아들 하나가 있는 것을 백씨에게 양자로 보냈는데 혹자가 후사를 세우기를 권하니 말하기를,
“실제로 아들이 없는데 아들이 있음과 실제로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없음이 모두 상리가 아니나, 형제가 한 아들을 함께 아들로 삼는다면 의(義)에 무슨 방해가 되랴. 만약 아들에게 두 아들이 있다면 둘째 손자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반부(班祔)하게 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종족을 대하고 빈붕(賓朋)을 접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 하여 서로간에 구분을 짓지 않으니 각기 그 환심을 얻었다. 옷깃을 여미고 가르침을 청하는 후진이 있으면, 공의 평상시 마음이 겸손히 낮추는 뜻이 있기에 비록 사도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재능을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유액(誘掖)하고 책면(責勉)하니, 이로써 종유(從遊)한 선비들이 격앙하여 명분과 절의로써 스스로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매일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뒤에는 종일토록 경건한 모습으로 단정히 앉아 있었다. 집에 있어서는 내외가 정연하게 질서가 있었고, 자녀를 가르치고 종들을 거느림에 은혜와 의리가 겸하여 지극했다. 집이 본디 청빈하여 혹 끼니를 거르는 때를 당해도 처신함이 태연 자약하였다. 천성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혹 불평한 일이 있거나 혹 친구가 찾아오는 일이 있으면 술을 한껏 마셔 즐거움이 흡족했으나 어지럽기에 이르지는 않았다.
공의 당제 참봉 지문(趾文)이 공의 유고에 서문을 쓰기를,
“우리 나라의 고문은 동고(東皐)에게서 창도되고, 미수(眉叟)에서 완비되었다. 미수의 사후에는 전함이 없었더니 우리 집안의 고심자가 두 선생의 계통을 접속했는데 시는 더 나은 점이 있었으니, 참으로 우리 동방의 집대성이로다.”
라고 하였고, 공의 사위 하정(苛亭) 이덕주(李德胄)가 공에게 드린 제문에서 이르기를,
“고심자 자서의 말은 천추를 흘겨 봄이었으니, 증점(曾點)ㆍ도잠(陶潛)과 손을 잡고 한가히 노닐었네. 거간(居簡)의 간(簡)이고근인(近仁)의 눌(訥)이니, 좌구명(左丘明)이 부끄러워함과 같은 등급으로 현철했다네.
효제(孝悌)의 근본에 독실하고 성명(性命)의 말을 뒤로 하니, 자유(子游)자하(子夏)의 학문이 모두 단지 실학이었네. 자취는 조정에 부쳤으나 심정은 기황(綺黃)과 같았고, 몸이 성시(城市)에 처했으나 경계(境界)는 시상(柴桑)과 같았네.
공이 오직 옛것을 좋아하여 문장에 가장 깊었으니, 아래로 동경(東京 후한(後漢))까지 본받고 이하로 송(宋) 나라는 금하였네. 옛적에는 최허(崔許 최립(崔笠)과 허목(許穆))가 곧 그 문호를 열었더니, 하옹(霞翁 하곡(霞谷) 권유(權愈))이 뒤를 이어 일어남에 공이 실로 함께 치달렸네.
사마천의 《사기》와 한퇴지의 비문을 명하지 않고 구하지 않아, 온축한 채 마치고 말았으니 우리 청구(靑丘)를 슬프게 했네. 남들은 고량진미를 배불리 먹었으나 자신은 시서(詩書)를 만끽하여 무미의 맛을 음미하여 도를 즐기면서 기근을 잊었다네.”
하였다. 두 공은 모두 근세의 장사(莊士)로서 그 문장과 절행이 남들의 신임을 얻으니, 마땅히 그 말을 믿을 만하다.
나의 조부 양기옹(兩棄翁)이 공과 함께 동문 수업을 했는데 조부께서 일찍이 권 선생(權先生)이 하신 말씀을 전하기를,
“후배의 이름은 반드시 선배의 추장(推奬)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젊을 때 문장을 지음에 미수(眉叟)와 백호(白湖) 등 여러 어른이 칭찬하고 기린 덕분에 드디어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지금 박모의 문장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할 만하나 오직 나만 알 뿐이고 남들이 끌어다 일컫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가탄스러운 일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가정에서 들은 것이 이와 같은 까닭으로 또한 참봉과 하정의 말 뒤에 부기한다.
부인은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니 현감 운근(雲根)의 따님이고 영의정 아계(鵝溪) 산해(山海)의 5대손이고 대군 사부 연안(延安) 이심(李襑)의 외손이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고 공보다 4년 뒤인 병인년(1746, 영조 22) 3월 20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74세였다. 공의 묘소 오른쪽에 부장하였다. 숙인은 성품과 행실이 아름답고 유순하여 부덕을 능히 갖추었다.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사정(思正)은 통덕랑이니 즉 백씨 첨지공의 양자로 나갔고, 장녀는 전주(全州) 이덕주(李德胄)에게, 차녀는 여주(驪州) 이재망(李載望)에게, 막내딸은 참봉인 한양(漢陽) 조서(趙恕)에게 출가했다. 사정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처순(處順)과 처현(處顯)이고, 장녀는 나의 아우 광주(廣州) 안정록(安鼎祿)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안동(安東) 김령(金坽)에게 출가했다. 이덕주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반(磐)이고 딸은 광주(廣州) 이동저(李東著)에게 출가했다. 이재망은 시감(是鑑)을 양자로 들였다. 조서의 세 아들은 정옥(鼎玉), 정기(鼎基), 정열(鼎說)이다. 내외의 증손이 약간 명이다. 다음에 명을 붙인다.
그 행실은 높고 깨끗하며 / 其行高而潔
그 뜻은 굳고 곧았으며 / 其志確而貞
그 글은 간이(簡易)하고 굉사(宏肆)했으니 / 其文簡而宏
군자의 덕은 / 君子之德
백대에 정식(程式)이 될 만하네 / 百世可程
또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세상의 운이 기울어지고 / 世運回斡
순박한 기풍 흩어지니 / 淳漓樸散
숙특을 분간하기 어렵고 / 淑慝難分
현우가 하나로 뒤섞였네 / 賢愚同貫
영화를 꾀하고 출세를 기뻐하며 / 媒榮慆進
오직 명리를 좇아 달리는 시속을 / 惟利是趨
달인이 보기에는 / 達人視之
개미떼가 모인 것과 무엇이 달랐으랴 / 蟻聚何殊
원수를 미워하고 친한 이를 기뻐하며 / 怒讐喜狎
같은 무리를 두둔하고 다른 사람을 물리치는 풍조를 / 黨同伐異
정사가 보기에 / 貞士視之
혹 자신이 더럽혀질까 두려웠네 / 懼或浼己
공은 예리한 기량을 안았고 / 公抱利器
공은 크나큰 재능을 지녀서 / 公有偉才
대소과에 급제함을 / 攓蓮摘桂
한결같이 오는 대로 맡겼네 / 一任儻來
자취는 조정에 외로웠고 / 迹孤朝端
마음은 멀리 떠나기를 생각했네 / 心懷遐擧
자신에게 절로 즐거움이 있었으니 / 我自有樂
시속과는 궤도가 달랐네 / 與俗殊軌
종남의 산록과 / 終南之麓
동강의 물가에 / 桐江之濱
지내는 곳을 따라 편안히 처하여 / 隨寓安排
저 시끄러운 속진을 멀리했네 / 遠彼囂塵
옛 마음 진실하고 순수하며 / 古心眞純
옛 모습이 맑고 투명했네 / 古貌淸瑩
상자에는 고문이 가득하고 / 篋富古文
책상에는 고경이 쌓였다네 / 案堆古經
고인과 더불어 견주고 / 與古人稽
지금 선비에 비기지 않았네 / 非今士擬
발휘하여 문장을 지음에 / 發爲文章
이치가 이르고 문사가 힘찼네 / 理到詞馳
반고의 정수, 두보의 골격에 / 班髓杜骨
주공의 정, 공자의 생각이었으니 / 周情孔思
아, 우리 공이여 / 於乎我公
백대의 스승이로다 / 百世之師
[주-D001] 현궁(玄宮) : 임금이나 왕후의 상에 관을 묻는 광중(壙中).[주-D002] 비망기(備忘記) :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承旨)에게 전하는 문서.[주-D003] 공사(供辭) : 죄인의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말. 공초(供招), 초사(招辭)와 같은 의미임.[주-D004] 탕평(蕩平) : 《서경》 홍범(洪範)에서 “임금의 정사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게 한다”는 ‘탕탕평평(蕩蕩平平)’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인데, 조선조에서는 영조가 당쟁으로 인한 일당전재(一黨專制)의 폐단을 제거하고 양반의 세력 균형을 취함으로써 왕권의 신장을 꾀하기 위하여 탕평책(蕩平策)이라는 정책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정조도 이 뜻을 이어 당론의 탕평에 힘쓴 바 있음.[주-D005] 종핵(綜覈) : 일의 본말(本末)을 종합하여 밝히는 것을 말함.[주-D006] 황극(皇極) : 기자(箕子)가 주(周) 나라 무왕(武王)에게 천하를 경륜하는 법을 가르쳐준 아홉 가지 법[九疇] 가운데 다섯째 것으로 임금이 중도를 지키고 서서 천하 백성의 표준이 되는 것을 말함. 《書經 洪範》[주-D007] 반연(班椽) : 동한(東漢)의 안릉(安陵) 사람 반고(班固), 자는 맹견(孟堅). 9세에 이미 문장에 능했고 자라서는 더욱 박식 관통하였음. 아버지 표(彪)가 짓다가 이루지 못한 《한서》를 이어받아 20여 년 동안 각고한 끝에 완성하였음. 반연(班椽)은 반고의 저술을 지칭한 듯함. 《後漢書 卷四十 上》[주-D008] 옛날에……않는 사람 : 공자의 이른바 광자(狂者)를 말함. 공자가 “중도를 행하는 선비를 얻어서 더불지 못할진대 반드시 광견(狂狷)한 사람을 취할 것이다. 광자는 나아가 취하고 견자는 함부로 하지 않는 바가 있다.[不得中道而與之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고 한 말이 있는데, 맹자가 ‘광자’를 풀이하기를, “그 뜻이 커서 항상 고인을 말하지만 평소에 그 행실을 돌아보면 말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다.[其志嘐嘐然 曰古之人古之人 夷考其行而不掩焉者也]”라고 하였음. 《孟子 盡心下》[주-D009] 갈천씨(葛天氏) : 상고에 인욕이 없이 순박했던 세상의 제왕. 세상을 다스림에 말하지 않아도 믿고 교화시키지 않아도 절로 행하였다고 함.[주-D010] 증점(曾點) : 춘추시대 노(魯) 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 자는 자석(子晳).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기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명에 따라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고 말한 바가 있음. 《論語 先進》[주-D011] 도잠(陶潛) : 진(晉) 나라 시상(柴桑) 사람, 자는 원량(元亮), 세칭 정절 선생(靖節先生)이라고 함.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이 되었을 때 군(郡)에서 독우(督郵)를 보냈는데, 현리(縣吏)가 띠 매고 의관을 갖추고 그를 보라고 하자,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구차히 향리의 소아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고 그날로 인끈을 풀고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노닐었다고 함. 《晉書 卷九十四》[주-D012] 거간(居簡)의 간(簡)이고 :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의 제자 중궁(仲弓)이 “간이함에 처하여 간이함을 행한다.[居簡而行簡]”라고 한 말이 있음.[주-D013] 근인(近仁)의 눌(訥)이 :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가 “강의하고 목눌함이 인에 가깝다.[剛毅木訥 近於仁]”고 한 말이 있음.[주-D014] 좌구명(左丘明)이 부끄러워함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교묘한 말, 남보기 좋은 안색, 지나치게 공손함을 좌구명이 부끄러워했더니 나도 또한 부끄러워하고 원망을 숨기고서 그 사람을 벗하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러워했더니 나도 또한 부끄러워한다.[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고 한 말이 있음.[주-D015] 자유(子游) : 춘추시대 공자의 제자인 언언(言偃). 자유는 그의 자임.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자하(子夏)와 함께 문학에 능하다고 일찍이 공자에게 일컬어진 바가 있음. 《論語 先進》[주-D016] 자하(子夏) : 춘추시대 공자의 제자인 복상(卜商). 자하는 그의 자임.[주-D017] 기황(綺黃) : 기리계(綺里季)와 하황공(夏黃公). 진(秦) 나라 말기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상산(商山)에 숨어 살았던 사람으로 상산사호(商山四晧)에 속하는 인물. 나머지 두 사람은 동원공(東園公)과 녹리 선생(甪里先生)임.[주-D018] 시상(柴桑) : 도연명(陶淵明)의 고향. 도연명의 잡시(雜詩) 가운데 “사람이 많은 곳에 집을 지으나 거마의 시끄러움이 없네 그대여 어찌 능히 이럴 수 있는가 마음이 멀면 땅이야 절로 호젓하다오[結盧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라고 읊은 구절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