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숙(明叔) 신상철(申尙哲) 군은 나와 어려서부터 마음이 맞아 서로 친하게 지냈다. 조금 성장해서는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여 또 서로를 아껴 주었다. 나의 외고(外姑) 정씨(鄭氏)는 군의 이모이므로, 매번 함께 안채에 모여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였다.
군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는데, 만력 무오년(1618)에 온 가족이 조령(鳥嶺)을 넘어 상주(尙州)의 영순리(永順里)에 거처를 정했다. 내가 일찍이 사명을 띠고 그의 집에 들렀는데, 군이 대탄(大灘)가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새도록 함께 평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3년이 지난 갑자년(1624, 인조2)에 내가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는데, 군은 그보다 1년 전에 태학의 천거로 출사하여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와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역임하였으므로, 다시 대탄가에서 함께 즐길 수 없어 마음이 무료하였다. 얼마 뒤에 내가 조정으로 돌아왔지만, 각자 관직에 얽매어 조정에 드나드느라 예전과 같은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없었으므로, 매번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한탄하였다.
군은 관리의 업무에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더욱이 간사하게 기만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여 아랫사람들을 젖은 땔감 묶듯 손쉽게 다루었다. 정묘년(1627, 인조5)에 어가(御駕)가 강화도로 피란(避亂)하였는데, 군은 호조(戶曹)의 낭관(郞官)으로서 홀로 남아 자물쇠를 관리하게 되었다. 밤에 도둑놈이 담을 넘어 들어왔는데, 모든 관청의 사람들이 물결치듯 달아나려고 하였다. 군이 수리(首吏)를 불러 이르기를 “만일 도둑놈이 나라의 창고에 접근한다면, 내가 너희들을 먼저 벨 것이다.”라고 하고, 평상시처럼 코를 골며 잠을 잤다. 이에 도적들은 달아나고 이서들은 탄복하였다. 나라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배로 실어 날랐다. 장관이 공의 재능을 보고 천거하여 주야(晝夜)로 행궁(行宮)의 문을 지키게 하였으며, 불시에 마련해야 하는 물건은 대소를 막론하고 군에게 의지하여 마련하였다.
조정에서 복잡한 일로 공의 능력을 시험하려고 전주 판관(全州判官)에 임명하였다. 전주에 부임해서는 자신을 청렴하고 엄격하게 단속하였으며, 과조(科條)를 정해 시행하고 기회(期會)를 준엄하게 지켜서 간사한 무리들을 통렬히 바로잡았다. 그해 봄에 해창(海倉)의 전세를 감독하였는데, 교활한 백성이 세력 있는 사람을 끼고 백성들의 세금을 운반하다가 빼돌려서 이득을 취하므로, 군이 법을 집행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근거 없는 비방을 만들어 “말의 용량을 늘려 받았다.”라고 언지(言地)에 모함하니, 임금께서 도신(道臣)에게 내려 보내 조사하게 하셨다. 조사를 맡은 관리가 근거 없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끝내 그만두고 돌아왔다. 내가 웃으며 이르기를 “그대가 조금이라도 온화함에 신경을 썼다면, 마땅히 비방(誹謗) 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닌가.”라고 하였다. 군이 말하기를 “감히 각박하게 한 것이 아니라, 서리들이 법을 농단하는 데도 관리가 그대로 두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라네.”라고 하였다.
경오년(1630, 인조8)에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서용되었는데, 여러 번 차대(次對)를 통해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말하니, 임금께서 귀 기울여 듣고 받아들이셨다. 얼마 뒤에 승진하여 의흥 현감(義興縣監)에 보임되었으나, 해당 부서에서 그대로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하므로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다.
임신년(1632, 인조10)에 안동 통판(安東通判)이 되고 두 번 대부(大府)를 보좌하였는데, 그 정사는 예전의 신조대로 하였다. 얼마 뒤에 병을 앓게 되었는데, 병이 심해지자 빗질하고 용모를 정돈한 뒤 대부인(大夫人)과 영결하며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는 것을 큰 불효로 여겼다. 아들 숭구(崇耈)에게 대부인을 잘 섬기라고 당부하고 운명하니 향년 48세였다. 문경(聞慶)의 오리동(梧里洞)에 안장하였으며, 그 뒤 정사 원종훈(靖社原從勳)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군은 행실이 완비되고 뜻이 고결하였으며 학문이 뛰어났지만, 운명이 기박(奇薄)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녀 아홉 살 때 예천(醴泉)의 산속으로 왜구를 피했는데, 여러 아이들을 따라 도토리와 밤을 주웠다. 그러나 군은 홀로 먹지 않으며 말하기를 “조모(祖母)께서 굶주리고 계신데, 내가 어찌 입에 대겠는가. 장차 돌아가 조모님께 드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간(大諫) 홍호(洪鎬)도 당시 어렸는데, 군의 그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으니, 대개 군의 천성(天性)이 이와 같았다. 열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므로 편모(偏母)를 극진한 사랑으로 모셨다. 홀로된 고모가 의지할 곳이 없었으므로,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 모시듯이 봉양하니, 군자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자질이 굳세고 바르며 꿋꿋하여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득 미련 없이 내던지고 돌아보지 않았다. 10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며 맡은 관직을 힘써 행하여 일찍이 조금도 사사로운 이익에 물들지 않았으며, 일을 만나면 한결같은 마음으로 행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군은 처음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스스로 덕을 증진시키고 학문을 닦는 데 노력하였다. 직접 《소학》과 《논어》를 써서 날마다 이용하는 데 대비하였다. 당시 여러 사람들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어버이를 영예롭게 하리라 기대하였으나, 살아서는 높은 벼슬을 하지 못했고 죽음은 요절을 면하지 못하여,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한을 품고 운명하였으니,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겠는가.
군의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이 시조(始祖)이다. 좌의정(左議政) 문희공(文僖公) 개(槩)가 대사성(大司成) 자승(自繩)을 낳았고, 이분이 장령(掌令) 숙정(叔禎)을 낳았으니, 군의 고조(高祖)이다. 부사과(副司果) 응원(應元)과 부사과 극효(克孝), 그리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여길(汝吉)과 그의 부인 숙부인(淑夫人) 한씨(韓氏)가 군의 증조(曾祖)와 조부(祖父), 그리고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이다.
신씨는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으로부터 지파가 모두 번성하였다. 오직 군의 가계는 3세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다가 비로소 군이 나오게 되었는데 끝내 운명이 형통하지 못하였으니, 하늘은 기필할 수 있는 것인가. 군은 군수 이문명(李文蓂)의 딸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을 낳았으니, 숭구(嵩耇), 태구(泰耇), 형구(衡耇), 항구(恒耇)이고, 딸 하나는 박승휴(朴承休)에게 출가하여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자라고 있으니, 천도가 과연 여기에 있는 것인가. 숭구는 지금 대구 부사(大丘府使)인데,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므로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하늘은 뛰어난 인재를 쉽게 내리지만 / 天惟輕與之才賢
장수는 쉬 허락하지 않고 / 而重與之久壽
사람도 영달하기는 쉽지만 / 人亦易爲之特達
성취하기는 어렵도다 / 而難爲之成就
아아 신군이여 재주 있고 특달했지만 / 已乎申君得其輕與易
장수하지 못하고 성취하지도 못했으니 / 失其重與難
어쩔 수 없구나 어쩔 수 없어 / 已乎已乎
어이할까 신군이여 / 奈何乎申君
[주-D001] 내가 …… 들렀는데 : 이민구는 1622년(광해군14)에 선유사(宣諭使)의 신분으로 동래(東萊)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당시 오가는 길에 신상철의 거처에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동주집(東州集)》 전집(前集) 권1 선유록(宣諭錄)에 〈숙정현곡효과대탄(宿鄭玄谷曉過大灘)〉이라는 작품이 있다.[주-D002] 아랫사람들을 …… 다루었다 : 이 내용은 《사기(史記)》 권122 〈혹리열전(酷吏列傳)〉에 보인다.[주-D003] 기회(期會) : 일 년의 회계(會計)를 장부(帳簿)에 기입하여 기일(期日)까지 조정에 보고하던 일, 또는 기한 안에 물품을 조정이나 관부에 납부하는 것을 말한다.[주-D004] 비방(誹謗) : 회전(懷磚)은 벽돌을 품는다는 말로, 본래 민심의 향배(向背)가 쉽게 변함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신상철이 모함을 당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이와 같이 풀이하였다. 위 장제(魏莊帝)의 외삼촌 이연실(李延實)이 청주 자사(靑州刺史)가 되었는데, 장제가 “회전의 풍속을 세상 사람들이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니, 외숙께서는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 조정에서 맡긴 뜻에 부응하도록 하십시오.[懷磚之俗, 世號難治, 舅宜好用心, 副朝廷所委.]”라고 하였다. 이때 문하시랑(門下侍郞) 양관(楊寬)이 장제의 옆에 있다가, 회전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여 사인(舍人) 온자승(温子昇)에게 물었다. 온자승이 팽성왕(彭城王)의 빈객이 대답했던 “제나라 백성들의 풍속이 천박하여 태수가 처음 고을 경계에 들어가면 모두 벽돌을 품고 머리를 조아려 그 뜻을 보이다가, 교체되어 돌아갈 때에 이르면 벽돌로 칩니다.”라는 말을 들려주며 “향배를 바꾸는 것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빠르다는 뜻입니다.[向背速於反掌]”라고 하였다. 《天中記 卷34 刺史》[주-D005] 대부(大府) : 일반적으로 조정의 재물을 관장한 천관(天官)의 부서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주-D006] 홍호(洪鎬) : 1586~1646.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숙경(叔京), 호는 무주(無住)ㆍ동락(東洛)이다. 《木齋集 卷8 先考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府君家狀》[주-D007] 정경세(鄭經世) : 1563~163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다. 《宋子大全 卷205 愚伏鄭公諡狀》[주-D008] 신숭겸(申崇謙) : ?~927.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시조로, 초명은 능산(能山), 시호는 장절(壯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