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혁
공은 의령(宜寧) 사람이다. 성은 남씨(南氏)로 휘는 태혁(泰赫), 자는 여휘(汝輝), 호는 주선(酒仙)이며 개국 원훈(開國元勳) 영의정(領議政) 휘 재(在)의 후손이다. 대대로 벼슬하였고 전하여 참봉 휘 두망(斗望)에 이르러 후사가 끊겨서 종조형(從祖兄) 병조 참지(兵曹參知) 휘 두첨(斗瞻)의 아들 증(䎖)으로 후사를 이었으나, 나이 18세에 세상을 떠나서 또 후사가 끊겼다. 그래서 형인 관찰사 휘 훤(翧)의 아들 경훈(景熏)으로 후사를 이어 휘 준명(浚明)을 낳았으니, 이분들이 공의 4세가 된다. 공의 아버지와 조부는 모두 진사로 일찍 세상을 떠나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증조는 승지에 추증되었으며 고조는 집의에 추증되었다. 외조부는 고령 신씨(高靈申氏) 참판 유(濡)의 아들 선호(善浩)이다. 공은 숙종 갑자년(1684) 9월 어느 날 태어나서 기유년(1729, 영조5)에 진사가 되고 을묘년(1735)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기묘년(1759) 3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다.
예조와 병조의 좌랑, 사간원 정언ㆍ헌납ㆍ사간, 사헌부 지평ㆍ장령ㆍ집의, 시강원 필선ㆍ보덕, 종부시와 봉상시, 장악원 세 곳의 정(正), 승정원의 동부승지ㆍ우부승지, 중추와 돈녕 이부(二府)의 동지(同知),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 공조 참판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포천 현감(抱川縣監) 공홍도 도사(公洪道都事), 송도 소윤(松都少尹)을 지냈다. 부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현령(縣令) 경무(景茂)의 딸로, 단숙(端淑)하며 부도(婦道)를 지녔는데 공이 세상을 떠난 30일 후에 세상을 떠나 같은 날 광주(廣州) 직곡(直谷) 좌자(坐子)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석로(碩老)ㆍ현로(顯老)ㆍ기로(頎老)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와 막내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딸은 정언(正言) 이성오(李性吾)에게 시집갔다. 현로는 공의 셋째 형 태길(泰吉)의 뒤를 이어서 이각(履慤)과 이덕(履德) 두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덕은 석로의 후사가 되어서 집중(執中)과 입중(立中) 두 아들을 두었는데 집중은 이각의 뒤를 이었다. 이성오의 아들은 득수(得洙)이고 딸은 정존철(鄭存喆)에게 시집갔다.
아, 공은 6세에 고아가 되어서 어려서부터 모부인으로 하여금 근심하게 한 적이 없었다. 장성해서는 그 마음과 몸을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모부인으로 하여금 슬픔을 잊게 하였다. 모부인께서 돌아가실 때에는 공의 나이가 육순이었는데 한결같이 예제(禮制)대로 하여, 비록 한여름에도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을 풀지 않았고 묘가 멀지만 가서 성묘하기를 반드시 초하룻날과 보름에 하니 사람들이 거상(居喪)을 잘 한다고 하였다. 공은 행동에 있어서 이미 그 근원을 터득하여 일상생활에서도 그 이치를 만났으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다.
가난하여도 안색에 근심하는 빛이 없고 벼슬하면서 추구함이 구차하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평탄하며 온화하고 느긋하였으나 내면은 확고하고 남을 앞지르려고 하지 않았고, 또 사람들에게 동요되지 않았다. 사는 곳이 쓸쓸하고 말을 타고 출타한 것이 드물었으며 문에는 객이 없었다. 항상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는 종일 밖에 조용히 앉아있어 집안사람들이 감히 자잘한 일로 와서 방해하지 못했다.
순박하고 꾸밈이 적었으므로 세상에는 공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성상(聖上)께서만 알아주었다. 일찍이 공을 칭찬하며 말씀하기를 “질박하고 정직함이 귀하게 여길만하다.” 하고, 또 “청빈(淸貧)함이 가상하다.”라고 하셨다. 공이 세상을 떠난 12년 후에 탁지(度支)에 하교하기를 “남태혁(南泰赫)의 자손에게 식물(食物)과 의자(衣資)를 넉넉히 주어 나의 모년(暮年)의 그리움을 표시하라.” 하였다. 2년 뒤에 또 그 집에 쌀과 고기를 하사하라고 명하시고 현로를 전랑(殿郞)에 제수하셨다.
아, 공이 성상으로부터 지우(知遇)를 입음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반드시 태사씨(太史氏)의 기록에 들어가서 오랜 세월 뒤에도 공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공은 일찍 세상을 떠난 3세를 계승하여서, 가운(家運)이 쇠퇴하여 상실되었으나 능히 스스로 떨쳐 일어나 수립함이 매우 컸으니 참으로 훌륭하다.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7세의 사당에서 덕을 관찰할 수가 있다.” 하였다. 후손이 감히 조상을 가릴 수는 없지만 공로가 있고 덕행이 크면 조훼(祧毁)하지 않는다. 대부는 방례(邦禮)와는 다르지만 가히 볼 수 있는 덕은 있을 것이니 이는 공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예법상 의당 명문을 써야 하니,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오늘날에 옛사람을 볼 수 없지만 / 於今古人不可見
오직 공만이 옛사람에 가까울 것이나 / 維公其庶幾
공은 또 옛사람이 되었으니 / 公又爲古人
아 참으로 슬프다 / 吁其悲
[주-D001] 태혁(泰赫) : 남태혁(南泰赫, 1684~1759)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여휘(汝輝), 호는 주선(酒仙)이다. 1729년(영조5) 진사가 되었고, 173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주로 사헌부ㆍ사간원에서 재직하여 집의ㆍ사간에 이르렀으며, 영조의 배려로 경반(卿班)에 이르러 승정원 동부승지ㆍ공조 참판을 지냈다. 영조로부터 청빈하다는 평을 받았다.[주-D002] 수질(首絰)과 요질(腰絰) : 수질은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짚에 삼 껍질을 감은 둥근 테이고, 요질은 상복을 입을 때 짚에 삼을 섞어서 굵은 동아줄처럼 만들어 허리에 띠는 띠를 말한다.[주-D003] 근원을 …… 만났으니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자득하면 거처함이 편안하고 거처함이 편안하면 이용함이 깊고 이용함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함에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득하고자 하는 것이다.[自得之則居之安, 居之安則資之深, 資之深, 則取之左右逢其原. 故君子欲其自得之也.]”라고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말로, 일상생활이 모두 근원적인 것이라는 말이다.[주-D004] 7세의 …… 있다 : 《서경》 〈함유일덕(咸有一德)〉에 “7세의 사당에서 덕을 관찰할 수 있으며, 만부의 우두머리에게서 정사를 관찰할 수 있다.[七世之廟, 可以觀德 ; 萬夫之長, 可以觀政.]”라고 하였다.[주-D005] 조훼(祧毁) : 체천(遞遷)하고 다시 단장함, 먼 조상의 위패를 딴 데로 옮기는 일을 말한다.
남태적
나는 한 해 동안에 어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묘지명을 썼는데 무릇 두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또 남공의 묘지명을 쓰게 되니 슬프다. 이치로 말하자면 안자(顔子)는 어질었지만 요절하였으니 고금에 함께 의심하는 바이고, 만약 기수(氣數)로 귀결시킨다면 주나라가 쇠퇴하여 천지의 화기(和氣)가 유한하니, 안자를 길러주지 못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안자 이후에 자사(子思)는 수명이 110여 세였고 맹자(孟子)는 수명이 84세였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끝까지 캐물을 수 없는 것은 수명의 길고 짧음이다. 덕과 재주가 비록 안자에는 못 미치지만 또한 선인(善人)으로서 족히 한 시대의 쓰임에 이바지할 만한데 중간에 꺾인 사람이 많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남공은 휘가 태적(泰績), 자가 가숙(嘉叔)으로 본관이 의령(宜寧)이다. 아버지의 휘는 준명(浚明), 조부의 휘는 경훈(景熏)으로 모두 진사였으며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모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부는 휘 증(䎖증-훤-두망,두첨-이인,이신-호-응운-세건)으로 18세에 세상을 떠나서 승지에 추증되었다. 외조부인 선교랑(宣敎郎) 신선호(申善浩)는 고령(高靈) 사람으로 참판 유(濡)의 아들이다. 공의 집안 삼세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 사람들이 함께 마음 아파한다. 차고 기우는 이치로 헤아려 보면 공은 반드시 장수해야 했을 것이다.
공의 용모는 수려하면서 넉넉하였고 성품은 강직하고 고결하였다. 안에서는 효우(孝友)로 칭송받고 밖에서는 삼가고 조심함으로써 명성이 있었다. 때로 술잔을 기울이며 문장을 평론할 때면 풍치(風致)가 아정(雅正)하고 준엄(峻嚴)하였으며, 장로들과 공을 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은 반드시 크게 이룸이 있었을 것이다. 공의 선계(先系)가 족보에 차례로 실려 있고 덕행과 공업이 사관의 기록에 드러나 있으며 또한 공의 묘지(墓誌)에 상세하다.
국초에 충경공(忠景公) 휘 재(在)와 충간공(忠簡公) 휘 지(智) 두 세대가 명상(名相)이 되어 왕실에 큰 공훈이 있었다. 이어서 경재(卿宰)로서 나란히 잇따라 아름다운 인덕을 거듭 쌓아 공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번창하였다. 종조(從祖) 형제의 항렬에서는 이부 상서(吏部尙書)ㆍ태종백(太宗伯)ㆍ대사마(大司馬)ㆍ아경(亞卿)ㆍ방백(方伯)이 된 사람이 여덟 명이었으니, 공이 또한 마땅히 그 남은 경사를 고르게 받았어야 하나 수명이 짧았음을 어찌하겠는가.
공은 명릉(明陵) 임술년(1682, 숙종8) 9월 13일에 태어나서 갑신년(1704) 3월 26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23세였고, 광주(廣州) 이왕현(利往峴) 아래 부축(負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홍씨(洪氏)는 남양(南陽)의 대성(大姓)으로 인재(忍齋) 상공(相公) 섬(暹)의 5세손이고 음랑(蔭郞) 성연(聖衍)의 딸이다. 처음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누차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구해냈다. 3년 동안 죽만 마시고 얼굴을 들어 사람들을 대하지 않은 것이 10년이었다. 그러다가 공이 막내아우인 참판 태혁(泰赫)의 둘째 아들 현로(顯老)로 공의 후사를 정하고서야 마침내 일어나 집안을 돌보았다. 시부모를 효로써 모시고 자식들을 가르침에 법도가 있었으며 가산을 잘 다스려서 본래 가난하였으나 능히 살림을 넉넉하게 꾸렸다.
제기(祭器)를 닦고 제전(祭田)을 두었으며 묘도(墓道)에 석의(石儀)를 세우고 재물 베풀어 남의 위급함을 구제해 주기를 좋아했다. 상을 당하여 심히 궁한 사람에게는 백금(百金)의 물자를 주고서도 갚기를 재촉하지 않았다. 공보다 2년 먼저인 경신년에 태어나서 공보다 53년 뒤인 병자년에 세상을 떠나서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현로는 관직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이각(履愨)은 백부인 석로(碩老)의 후사가 되었고, 차남은 이덕(履德)인데 모두 사랑스러웠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덕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집중(執中)과 입중(立中)이다. 집중은 이각의 후사가 되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아, 남공은 선비 가운데 뛰어나 / 噫南公士之秀
선비로서 짧은 생을 마쳤네 / 以士終以無壽
이산의 터에 넉 자 묘를 쌓고 / 崇四尺利山趾
왼편에 여인이면서 선비인 부인을 합장했네 / 於左祔女而士
[주-D001] 이부 상서(吏部尙書) …… 아경(亞卿) : 이부 상서는 이조 판서, 태종백은 예조 판서, 대사마는 병조 판서, 아경은 참판을 이르는 말이다.[주-D002] 넉 …… 쌓고 : 《주자가례(朱子家禮)》 권4 〈상례(喪禮)〉에 “봉분의 높이는 넉 자이다. 그 앞에 작은 석비를 세우는데 역시 높이는 넉 자이다. 받침대의 높이는 1자 정도로 한다.[墳高四尺. 立小石碑於其前, 亦高四尺. 趺高尺許.]”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