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이 진주(晉州)인 정선흥(鄭善興) 군의 자(字)는 경원(慶遠)이다. 그의 선조 공대공(恭戴公)의 세계(世系)로부터 조부 관찰사(觀察使) 휘(諱) 효성(孝成)과 아버지 참판(參判) 휘 백창(百昌)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드러난 충효와 큰 절의, 그리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절조를 지킨 행적은 참판공의 묘갈명에 자세히 실려 있다.
군은 우뚝 기개(氣槪)가 있었으며 호방하고 용기 있는 성품이라 자질구레하게 얽매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에, 기녀들과도 어울리면서 방탕하게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그러나 장성해서는 마음을 고쳐먹고 사림(士林)과 교유하며 의기(義氣)를 중시하고 신의를 지켜서 다른 사람의 다급한 일에 오로지 달려갔으니, 사람들이 모두 군을 아끼고 좋아하였다. 질병에 걸리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경원만이 나를 도와줄 수 있다.”라고 하였다. 풍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워 널리 여러 사람들을 덮을 정도였으니, 아득하기가 마치 붉은 노을이 아침에 물든 것과 같았다.
정축년(1637, 인조15)의 난리에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조부(祖父) 관찰공이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인 한 부인(韓夫人) 및 군의 아내 권씨(權氏), 김씨에게 시집간 군의 누이, 군의 고(姑) 여씨 부인(呂氏夫人), 군의 계부(季父) 필선공(弼善公)이 모두 의열(義烈)을 지켜 목숨을 버렸다. 군이 피바다 속에서 홀로 살아남아 친족들의 상여를 메고 어린 아우를 이끌고 뭍으로 나왔는데, 당시 갑옷 입은 기병들이 늘어서 있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뚫고 지나가니, 많은 오랑캐들이 서로 바라보며 길을 비켜 주고는 보호하여 바다를 건너게 해 주었다.
한 부인은 바로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언니이다. 군은 왕실의 가까운 척족이었지만 터럭만큼도 이를 빙자하여 이익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전후의 국상(國喪)에 몸소 큰일을 맡아 염빈(斂殯)으로부터 모든 절차에 두루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사전(四殿)이 그 노력을 가상하게 여기셨다.
처음에 선공감 감역관(繕工監監役官)에 임명되었다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겨 옥사를 처리하는 데 공로가 있어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발탁되었다. 관직을 맡아 직무를 수행하자,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군은 재주가 뛰어난데도 지위가 낮은 것을 탄식하였다. 그러나 이조(吏曹)의 관리 가운데 군을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고, 왕실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배척받아 등용되지 않았다. 오랜 뒤에 군을 재목감이라고 여긴 대신이 천거하여 훈국랑(訓局郞)에 임명되었다. 초석(硝石)을 구워 화약 만드는 일을 맡았는데, 청렴하게 공무를 수행하여 땔감과 짚 등 자잘한 물건까지도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겨 빼돌리는 일이 없었다.
처음 직책을 맡았을 때, 관청에 곡식 한 말, 베 한 자도 저장한 것이 없어 아침에 들어오면 저녁에 다 나누어줄 정도였는데, 군이 변화시키고 저축하는 한편 아껴 쓰고 잘 저장하여 버려진 자잘한 물건도 거두어서 일신하여 쓸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자 창고에 여유 자금이 수천이었고 쌓인 베가 수백이었는데도, 사람들은 군이 시행하고 조치한 자취를 보지 못했다. 관하(管下)의 높고 낮은 관원들이 처음에는 군의 명성을 두려워하여 감히 털끝만 한 죄도 짓지 않았는데, 오래 지난 뒤에는 장교와 군관들이 군의 신의에 감복하여 말하기를 “공이 대장이 된다면 어찌 감히 목숨을 아끼겠는가.”라고까지 하였다.
군의 집안은 대대로 광주(廣州)에 장사 지냈는데, 묘역에 번듯한 비석이 없었다. 군이 4대 조상의 묘갈을 세우려고 밤낮으로 빗돌을 마련하여 일을 마치고 묘갈을 세웠지만, 군은 이미 병에 걸려 임인년(1662, 현종3) 3월에 끝내 운명하였으니 향년 48세였다. 군이 병을 앓게 되자 임금께서 여러 차례 병세를 묻고 어의(御醫)를 보내 치료하게 하였고 내의원에서 약을 갖다 쓰게 하셨다. 군이 세상을 떠나자 옷가지와 좋은 목재를 내주어 상례를 치르게 하셨으니, 은혜가 매우 두터웠다.
군의 부인 윤씨(尹氏)는 현감 환(瓛)의 딸로, 군보다 먼저 병을 앓았으나 군보다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나 선영 해좌(亥坐)의 등성이에 함께 안장하였다. 첫 번째 부인 권씨(權氏)는 사인(舍人) 심(淰)의 딸이니 같은 기슭에 장사 지냈다.
군이 운명하자 훈련도감의 모든 군졸과 강가의 뱃사공들이 다급히 달려와 곡하였고, 길 가는 사람들도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물 파는 노파는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울면서 말하기를 “어진 분이 돌아가셨는데, 나 같은 사람은 어찌하여 오래 사는 것인가.”라고 하였으니, 군이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조갑(祖甲)은 열다섯 살이고, 세갑(世甲)은 여섯 살이다.
나와 정공(鄭公) 군칙(君則)은 참판공(정백창(鄭百昌))과 교유하여 우의가 매우 깊었으니, 군이 평소에 우리 두 사람을 대하면서 은혜와 예의를 지극히 갖추었다. 정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군이 아쉬움이 없도록 염(斂)하여 보냈으므로, 내게도 그렇게 해줄 것이라고 늘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군이 나보다 먼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늙고 병든 채 오래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묘에 기록하게 하니, 이 또한 나물 파는 노파의 아픈 마음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기량 갖추고 업적도 있으니 / 有器有業
마땅히 영달하고 마땅히 명성 얻어야 하건만 / 宜達宜聞
유독 장수하지 못하였으니 / 獨無年命
어이할까 군이여 / 奈何乎君
[주-D001] 공대공(恭戴公) : 정척(鄭陟, 1390~1475)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명지(明之), 호는 정암(整菴)ㆍ창재(暢齋), 시호는 공대이다.[주-D002] 정효성(鄭孝成) : 1560~1637. 본관은 진주, 자는 술초(述初), 호는 휴휴자(休休子)이다. 1630년(인조8)에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東州集 文集 卷10 公淸道觀察使鄭公墓碣銘 幷序》[주-D003] 정백창(鄭百昌) : 1588~1635. 본관은 진주, 자는 덕여(德餘), 호는 현곡(玄谷)ㆍ대탄자(大灘子)이다. 1631년(인조9)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東州集 文集 卷10 京畿觀察使玄谷鄭公墓碣銘 幷序》[주-D004] 어머니 …… 있다 : 정선흥의 어머니 청주 한씨는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東州集 文集 卷10 京畿觀察使玄谷鄭公墓碣銘 幷序》[주-D005] 군의 고(姑) 여씨 부인(呂氏夫人) : 미상이다. 원문에 君姑라고 하였으므로 우선 정선흥(鄭善興)의 고모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선흥의 부친 정백창(鄭百昌)의 누이여야 한다. 정백창의 부친은 정효성(鄭孝成)이다. 정효성은 슬하에 정백창, 정백형(鄭百亨) 형제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딸은 김이경(金以鏡)에게 출가하였다. 따라서 여씨 부인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 《東州集 文集 卷10 公淸道觀察使鄭公墓碣銘 幷序》 장모도 姑라고 하므로, 정선흥의 장모일 수 있다. 이 글의 후미에 의하면 정백창은 윤환(尹瓛)의 딸, 그리고 권심(權淰)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어머니는 고증할 수 없다. 참고로 정백창의 어머니 한씨(韓氏)는 한준겸(韓浚謙)의 딸인데, 한준겸의 딸 가운데 여이징(呂爾徵)에게 시집가서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운명한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정선흥의 이모인데, 姑와는 맞지 않다. 《西坡集 卷24 領議政雲浦呂公諡狀》[주-D006] 필선공(弼善公) : 정백형(鄭百亨, 1590~1637)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덕후(德後),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을 지냈으며, 강화도에서 운명하였다. 《耳溪集 卷38 侍講院弼善贈都承旨鄭公諡狀》[주-D007] 사전(四殿) : 대전(大殿), 중궁전(中宮殿), 대비전(大妃殿), 동궁전(東宮殿)을 이른다.[주-D008] 정공(鄭公) 군칙(君則) : 정세규(鄭世規, 1583~1661)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군칙, 호는 동리(東里),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歸鹿集 卷17 吏曹判書鄭公謚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