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성朴花城소영(素影)
1904년 -1988녀
본명은 경순, 호는 소영. 1915년목포에 있는 정명여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천안공립보통학교·아산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영광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1926년 숙명여고보 신학년제(4년제)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1929년 일본여자대학 영문학부를 수료했다. 1961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1963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1965년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24년 〈학생계〉에 시 〈백합화〉를 발표하고, 이듬해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단편 〈추석전야〉가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뒤 잠시 작품활동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광수의 추천으로 〈하수도공사〉(동광, 1932. 5)·〈백화〉(동아일보, 1932. 6. 8~11. 22) 등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농민이나 노동자의 궁핍한 삶과 지배계급의 기생적인 생산양식의 모순을 파헤치는 데 힘썼다. 그녀는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과 반항의식을 그렸다. 초기문학을 대표하는 〈하수도공사〉는 실업자 구제를 위한 하수도 공사를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다루었는데, 반항의 형식이 소극적·간접적이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홍수전후〉(신가정, 1934. 9)는 홍수 때문에 생긴 농민의 비극을 그리면서 노동자·농민의 조합과 정치적 조직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담한 문체로 현실성에 뿌리를 둔 작품을 썼으며 1932~37년 주목할 만한 작품활동을 했다. 〈고향없는 사람들〉(신동아, 1936. 1)에서는 자연재난과 일제의식민지정책으로 삶의 터를 잃어버리고 떠도는 농민의 생활을 보여주어 가난이나 유랑을 민족적 문제로 바라보았다. 해방 뒤에는 현실비판보다는 남녀의 애정관계에 관심을 갖는 등 대중성을 띤신문연재소설을 많이 썼다. 소설집으로 〈백화〉(1943)·〈홍수전후〉(1948)·〈새벽에 외치다〉(1966)·〈휴화산〉(1977) 등과, 수필집으로 〈추억의 파문〉(1966)·〈순간과 영원 사이〉(1974) 등이 있다. 1958년 목포문화상, 1966년 한국문학상, 196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요약 : 일제강점기 「백화」, 「고향 없는 사람들」, 「봄 안개」 등을 저술한 소설가.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본명은 박경순(朴景順). 호는 소영(素影). 전라남도 목포 출생. 아버지 박운서(朴雲瑞)의 5남매 중 막내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5년 목포에 있는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를 거쳐 1918년서울의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충청남도 천안과 아산에 있는 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2년전라남도 영광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3년여를 영광에 머무르는 동안 시조작가 조운(曺雲) 등과 사귀면서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하였다. 1925년 「추석전야(秋夕前夜)」가 이광수(李光洙)에 의하여 『조선문단(朝鮮文壇)』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상경,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신학년제 4년)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김국진(金國鎭)과의 혼인 문제 등 개인 사정으로 1929년 3학년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32년 「하수도공사(下水道工事)」가 이광수에 의하여 『동광(東光)』에 다시 추천되어 작가 생활을 재개하였다. 그 해첫 장편소설 「백화(白花)」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38년까지 작품 활동를 계속하는 동안 20여 편에 이르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거의가 일제의 침탈로 고통받는 도시 노동자나 서민 그리고 농민을 다룬 것이어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서도 「하수도공사」·「비탈」(新家庭, 1933)·「헐어진 청년회관」(靑年文學, 1934)·「불가사리」(新家庭, 1936) 등에는 이념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켜 불법을 자행하는 일본인이나 부당하게 치부한 사람들에게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녀가 이러한 작품을 쓰게 된 데에는 오빠 제민(濟民)과 남편 김국진 등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작품세계도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객관적 정세 때문에 더 이상 심화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관심은 일제침탈로 가중되는 가난과 함께 해마다 되풀이되는 자연재해 때문에 더욱 비참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농민들에게로 쏠렸다. 이러한 작품으로 「논 갈 때」(文學創造, 1934)·「홍수전후(洪水前後)」(新家庭, 1934∼1935)·「한귀(旱鬼)」(朝光, 1935)·「고향 없는 사람들」(新東亞, 1936)과 같은 소설을 남기게 되었다. 약자의 편에 서기를 표방하고 줄기차게 이어온 그녀의 작품 활동도 1938년「중굿날」을 발표하고는 조국 광복까지 침묵을 지키기에 이른다. 이 무렵 그녀는 출옥한 뒤 간도(間島)로 가버린 김국진과 이혼하고 천독근(千篤根)과 재혼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6년『민성』에 단편 「봄 안개」를 발표하면서 또다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세계는 광복 전의 그것과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장편소설에 의욕적이었던 그녀의 작품세계는 흔히 대중성을 도입하여 서민들의 세대의식이나 남녀간의 애정문제 등을 다룬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광복 후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에 「광풍(狂風) 속에서」(서울신문, 1948)·「샌님 마님」(現代文學, 1965) 등이 있고, 장편소설에 「고개를 넘으면」(한국일보, 1955∼1956)·「사랑」(한국일보, 1956∼1957)·「벼랑에 피는 꽃」(聯合新聞, 1957∼1958)·「바람뉘」(女苑, 1958∼1959)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58년 목포시문화상, 1966년 한국문학상,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4년 3·1문화상 등을 받았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일제강점기 한국여류소설 연구」(서정자, 숙명여자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7)
- ・ 「1930년대 한국여류소설에 있어서의 빈궁의 문제」(채훈, 『아세아여성연구』 23, 198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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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백 년 동안 한국 사회 전체를 파시스트적 가속도의 변화 속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근대화 계획’ 속에서 여성은 흔히 객체였고, 공공 부문의 온갖 프로젝트에서 소외되곤 하던 타자였다. 여성은 남성이 주도하는 변화의 물결을 싫든 좋든 피동적으로 수렴해야 하는 ‘주변부적 존재’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여성 주체의 삶을 꿈꾸고 여성 억압적 현실과 맞서는 여성상을 내세운 소설이 1930년대에 이미 나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강경애가 「어머니와 딸」을 내놓은 데 이어, 1932년 또 한 명의 만만치 않은 여성 작가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하수도 공사」를 문단에 던진 것이다. 신간회 해체와 카프 1차 검거로 한때 볼셰비키화를 외치며 과격한 태도로 창작에 임하던 카프 진영의 작가들조차 목소리를 낮추고 있을 무렵, 단호하게 사회의 모순을 폭로한 소설 「하수도 공사」는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끈다.
단호한 목소리로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는 소설을 내놓은 여성 작가 박화성ⓒ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박화성은 1904년 전남 목포에서 선창의 객주를 업으로 하던 아버지 박운서(朴雲瑞)와 어머니 김운선(金雲仙) 사이의 5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다. 꽤 넉넉한 집안에서 아쉬울 것 없이 자란 그는 본명이 경순(景順)이며 아호가 소영(素影)이다. 그는 네 살 때 벌써 한글과 천자문을 거침없이 읽을 만큼 명석한 아이였는데, 일고여덟 살 때는 「삼국지」 · 「옥루몽」 · 「구운몽」 같은 고전 소설에 빠져들기도 한다. 목포의 정명여학교 시절에 「유랑의 소녀」라는 소설을 써서 일찍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인 그는 서울의 정신학교에 편입한 뒤에도 같은 반 급우이던 김말봉과 한 학년 위이던 김명순 등과 어울리며 문학 소녀 시절을 거친다. 그러나 이 학교의 엄격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적을 옮긴다. 졸업 뒤 박화성은 잠시 교편을 잡는다. 이 무렵 시조 시인 조운을 만나 시작(詩作) 지도를 받던 도중, 1922년 『부인』이라는 잡지에 수필 「ㅎㅍ 형께」 · 「정월 초하루」 등을 발표한다. 시보다 산문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조운의 부추김에 고무된 그는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의 길로 나선다. 1923년 경향 색채를 띤 단편 「추석 전야(前夜)」를 쓰는데, 그는 이 작품으로 이광수의 “기교는 덜 되었”지만 “눈물로서 쓴 작품이다.”, “우리 누이들 중에서 이렇게 정성 있고 힘 있는 이를 만나는 것은 심히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다.”1) 는 추천사와 함께 1925년 1월 『조선문단』을 통해 문단에 나온다. 「추석 전야」는 작가의 고향에 최초로 세워진 방직 공장을 배경으로 씌어진 소설이다. 박화성은 이 작품에서 공장에 다니는 한 여인의 가난과 고독을 거침없는 필치로 그려낸다.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여주인공은 추석 전날까지 갚아야 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공장에서 돌아온 뒤에도 밤 늦도록 삯바느질을 한다. 그러나 결국 지세(地稅)를 갚지 못해 땅 주인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고, 공장에서는 동료를 희롱하는 감독에 맞서 몸싸움을 벌인다. 추석 전날 밤, 여인은 뼛속 깊이 파고드는 가난의 고통과 여성 모독적인 현실 앞에서 절망한다. 식민지 수탈 경제 구조 속에서 허덕이는 하층민일 뿐 아니라, 가부장제에 따른 억압이 공공연한 봉건적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또 다른 ‘하층민’으로 이중고를 겪으며 살아가는 한 여인의 신산스럽고 심란한 삶의 실상을 포착한 「추석 전야」 발표 뒤, 박화성은 문학에 대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시도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파산으로 도쿄행이 좌절되자 그는 학제가 바뀐 숙명여고보 4학년에 편입해 스물두 살 때인 1926년, 개교 이후 가장 우수한 성적인 평균 98점으로 졸업한다. 이윽고 옛 담임 교사에게 돈을 빌려 도일의 꿈을 이룬 그는 니혼여자대학교 영문과에 들어가 학과 공부를 하는 틈틈이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독서회’에 가입해 토론을 벌이는 등 열정으로 가득 찬 유학 시절을 보낸다. 그는 1928년 1월에 결성된 여성 항일 구국 운동 단체인 ‘근우회(槿友會)’ 도쿄지부 창립 대회에서 위원장으로 뽑힐 만큼 뛰어난 활동성을 보인다. 그러나 얼마 뒤 학비 조달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중퇴를 하고 귀국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문재가 뛰어났던 네 살 위인 오빠 박제민을 유달리 따른다. 이 오빠의 영향은 소설 「북국의 여명」에 잘 나타난다. 이 작품에는 불령 선인(不逞鮮人)인 오빠가 나오는데, 여주인공은 사회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간 오빠가 풀려날 때 “로동총동맹의 기빨을 날리며” 맞는다. 또 「헐어진 청년 회관」에는 ‘ML당의 오빠’가 나오는데, 이 또한 박제민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나 문재를 꽃피우지 못한 “불운의 영웅”인 오빠 박제민에 대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1930년 그는 이 오빠의 친구 가운데 한 명인 김국진과 만나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다. 김국진 역시 나중에 안수길 · 이주복 등과 함께 동인지 『북향(北鄕)』을 내고 여기에 단편 「설」2) 을 싣기도 한 사회주의 문학가다. 오빠에 이어 남편인 김국진도 박화성에게 정신과 사상 면에서 커다란 영향을 준다.
「하수도 공사」에서 「북국의 여명」까지박화성은 결혼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복학하지만 이번에도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와 창작에 몰두, 장편 「백화(白花)」를 집필한다. 이를 신문에 연재하고 싶어하지만 「추석 전야」 이후 한 작품도 발표하지 않은, 더구나 남성 작가도 아닌 무명의 여성 작가에게 선뜻 연재 지면을 내줄 만큼 ‘용감한’ 신문사는 없었다. 이에 그는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증명해 보일 생각으로 원고료도 받지 않고 이광수의 재추천을 받아 1932년 「하수도 공사」를 『동아일보』에 발표한다.
박화성의 장편 소설 〈백화〉여성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신문에 연재한 뒤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수도 공사」는 작가 박화성의 고향인 목포 지방의 대규모 하수도 공사를 배경으로 삼은 소설이다. 상업 학교를 중퇴한 서동권은 일본 도쿄로 가 고학하는 동안 ‘정’이라는 선배를 만나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사상 지도를 받은 뒤 그와 함께 귀국한다. 동권은 생계를 위해 ‘하수도 공사’판의 막노동자로 일하며 동료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불어넣는다. 실업자 구제를 빙자해 실컷 부려먹으며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임금 가운데 상당액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그마저 자꾸 지불을 미루는 관청과 청부업자의 농간에 격분, 동권은 3백여 명의 노동자와 함께 경찰서로 몰려가 쟁의를 벌인다. 여기서 작가는 어떻게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나 싶을 만큼 과감한 대결 의식을 드러낸다.
서장은 체면을 유지하느라 나오지는 않으나 서장실에 섰다 앉았다 하며 좌우를 시켜서 무슨 일인가를 알아 오라고 하였다. 보안계의 주임의 뚱한 얼굴이 나타났다. 금테 안경 너머로 마당에 빡빡하게 박혀선 군중을 둘러보며, “무슨 일이 있으면 조용히 말해라! 시끄럽게 하면 안 된다!” 하고 위엄을 내어 말했다. “조용히 할 말이 못 되오. 두말 말고 서장에게 면회시켜 주시오.” 경찰서가 떠나갈 듯이 삼백 명의 소리는 외쳤다. “서장에게 면회시켜라!” “서장 나오라!” 고등계 주임과 형사들이 한편에서 수군수군하더니 보안계 주임을 불러 가지고 다시 머리를 맞대고 수근거린다. “당신들 의논은 나중에 하고 어서 우리들 청이나 들어 줘요!” 한쪽에서 주먹들이 높직이 오르내리며 또 소리친다. 쟁의를 불러일으킨 임금 문제는 동권과 정이 나서며 해결된다. 그러나 격문이 빌미가 되어 정이 감옥에 들어가고, 동권은 정의 몫까지 제가 해내리라 굳게 다짐한다. 동권은 집안에서 권하는 결혼 상대자마저 뿌리치고 저한테 매달리는 용희에게 “지금 내게는 한가한 결혼 문제보다도 더 절박한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굳은 신념을 드러내 보이고, “스스로 자신을 개척”하라고 당부한 뒤 자신의 길을 떠난다. 첫눈 내리는 날, 용희는 동권이 남기고 간 말을 떠올리며 스스로 각오를 다진다. 「하수도 공사」는 계급적 자각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면서도 감상적인 분위기를 곁들여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는다. 「하수도 공사」로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 박화성은 애초에 뜻한 대로 자신의 장편을 신문에 연재하는 데 성공한다. 여성 작가 최초의 신문 장편 소설인 「백화」는 연재하는 동안 줄곧 화제를 일으키며, 연재가 끝나자마자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박화성은 이에 힘입어 1933년 「두 승객과 가방」 · 「떠내려가는 유서」 · 「비탈」을, 1934년 「헐어진 청년 회관」 · 「논 갈 때」를 발표하고, 1935년에는 자전적 장편 소설인 「북국(北國)의 여명(黎明)」을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북국의 여명」에 나오는 주인공 백효순은 S여학교를 마치고 교원으로 있다가 고향 R읍으로 돌아와 사회 과학 서적과 문학 작품 등을 읽으며 도쿄 유학을 꿈꾸는 미모와 지성을 고루 갖춘 근대 여성이다. 그러나 불령 선인으로 옥에 갇히고 만 오빠가 학비를 댈 수 없게 되자, 효순은 유학을 잠시 유보한 채 여러 남자를 거친다. 처음에 효순은 자신에게 이념을 불어넣어 준 유부남 리창우를 사랑하지만, 얼마 뒤 그가 사고로 죽는 바람에 평소 자신을 사모하던 최진과 약혼한다. 효순은 그가 대주는 학비로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사회주의 단체의 간부로 활동한다. 이런 효순의 활동 때문에 관립 학교 교원 신분인 최진의 처지가 곤란해지고, 그는 효순에게 불온 단체에서 손을 떼라고 권한다. 이에 최진에게 파혼을 선언한 효순은 여러 남자 사이에서 방황의 나날을 보낸다. 얼마 뒤 효순은 사회 운동을 하면서 만난 사상적 동지 준호와 동거하며 아이까지 낳는다. 준호가 감옥에 들어가자 효순은 유모 자리까지 얻어 열심히 옥바라지를 한다. 그러나 준호는 전향할 뜻을 비쳐 가석방된다. 준호에게 실망한 효순은 그의 면전에 비겁자라는 말을 내뱉고, 아이마저 어머니한테 맡긴 채 홀로 북국을 향해 떠난다. 박화성의 소설에는 다른 여성 작가들과 달리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갈등과 억압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념과 사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갈림길에서 박화성의 주인공들은 사랑이나 결혼보다는 흔히 계급 해방 쪽을 따르며, 설령 사랑이나 결혼 쪽으로 흐르더라도 남성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주도하는 양상을 띤다. 작가 스스로 이미 소외되고 핍박받으며 절망하는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쟁취한, 주변부에서 걸어나와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 사회적 위치를 굳힌 여성인 까닭인지 여성의 숙명성에 대한 문제는 깊이 다뤄지지 않는다. 박화성의 문체는 강하고 거침이 없어 한때 김문집과 안회남 같은 평자로부터 ‘여성성에로의 귀환’3) 을 종용받기도 한다. 여성성이 소거된 그의 근육질 문체는 어릴 적부터 수재의 면모를 보이고 유학 시절에 근우회 위원장이 되는 등 여러 단체의 우두머리로 활동한 여장부(女丈夫) 기질에서 생성된 듯하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박화성 소설의 특징은 성의식에서 드러난다. 최진과 파혼을 앞두고 나누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무렵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당당하고 진보적인 면을 보이는 것이다.
하기는 내가 최 선생과 한방에서 밤을 지냈다는 조건만으로 허혼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결코 현명한 태도는 아니엇서요. 일학긔부터 전선에 나서서 실천 운동하는 동무들과 차츰 사괴여 보니깐 아주 그들은 정조 문제에 여간 해방된 게 아니든대요. 그리고 성 문제를 초월한 것처럼도 보이고 이성이란 별다른 게 아니라는 듯이 막우 남녀 동지가 한방에서 뒹구는데 나는 보기가 좀 딱했지만 그들은 뭐 아주 례사로 역여요, 그러구도 일들을 아주 척척 잘들 해나가요. 그걸 보니까 나는 아주 그들에게 비해서 봉건적이고 인습적이고 관념적이예요. 박화성, 「북국의 여명」 150회, 『동아일보』(1935)
그러나 박화성의 수재성과 지도자 기질에서 비롯된 지나친 우월 의식은 때때로 소설 속에서 불필요한 영웅 중심주의로 흐른다. 「하수도 공사」에 나오는 서동권부터 자전적 소설인 「북국의 여명」에 나오는 백효순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외모와 지식, 능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 나무랄 데 없는 이 완벽한 주인공들은 농민이나 노동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상호 작용하기보다 우위에 서서 그들을 계몽한다. 이로 말미암아 전형성과 형상의 개성을 전체와의 유기적 관계망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기 일쑤며, 사건의 전개에 따라 인물들을 너무나 우상화시키고4) 있다는 등 평자들의 비판이 따른다. 작가 자신도 “아모리 높은 의식 수준을 가진 작가라도 산 생활 감정 없이는 그의 작품을 잃게 된다. 나의 작품이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힘찬 그 무엇을 얻지 못하는 것은 결국에 있어 작가의 생활과 창작 행동에 모순이 있는 까닭”이라고 반성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쓴다. 곧 그는 전형적 주인공을 내세워 노동 쟁의나 계몽 운동에 뛰어들게 하는 도식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농민과 농촌 가정이 겪는 빈곤과 고통의 현장을 직접 취재하고 작품에 옮기는 방법으로 창작에 임하게 된다. 이에 따라 「눈오던 그 밤」 등에서 초기의 도식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작가의 각오만큼 실천이 뒷받침되지는 못한다. 이런 까닭인지 작가 박화성은 날이 갈수록 일정한 경향에 매이기보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흥미성을 고려한 창작을 시도하게 된다. 1935년 이후 발표한 「한귀(旱鬼)」 · 「홍수 전야」 · 「고향 없는 사람들」 등에서 그는 심한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 지변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게 되는 극한 상황을 그려낸다. 또 「불가사리」에서는 일제에 빌붙어 자본주의적 향락에 젖어 사는 아버지와 형제 틈에서 홀로 항일 정신을 고수하다 가출하고 마는 젊은 민족주의자를 보여주고, 1937년 이후 발표한 「온천장의 봄」 · 「중굿날」 같은 작품에서는 돈 몇 푼에 팔려가는 여인들의 행로를 담아내는 등 다양한 소재의 소설을 내놓는다. 이 사이, 그는 오빠 박제민과 더불어 자신의 문학 세계에 사상적 입김을 불어넣은 남편 김국진과 불화가 깊어진다. 간도에 있던 문우 강경애가 적극 만류5) 하지만, 1937년에 들어 두 사람은 이혼하고 만다. 같은 해,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끈질기게 구혼하던 한 사업가와 결혼한 그는 날로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낙향한다. 해방 뒤 박화성은 좌익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목포 지부장을 지내는 한편, 단편 「검정 사포」를 비롯해 「봄 안개」 · 「진달래처럼」 · 「파라솔」 등을 발표하고, 단편집 『고향 없는 사람들』과 『홍수 전야』를 펴낸다. 1955년 이후 그는 「고개를 넘으면」 · 「사랑」 · 「벼랑에 피는 꽃」 · 「내일의 태양」 · 「바람뉘」 · 「태양은 날로 새롭다」 등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 또는 연재하며, 1963년에는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 중앙 위원을 맡기도 한다. 이후에도 전기적 장편 소설 『눈보라의 운하』, 장편 소설 『열매 익을 때까지』 · 『창공에 그리다』와 수필집 『추억의 파문』 등을 내놓는다.
박화성의 장편 소설 〈창공에 그리다〉ⓒ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70년 이후에는 문공부 문학상과 서울시 문화상의 심사 위원을 맡는가 하면, 장편 『벼랑에 피는 꽃』 · 『내일의 태양』과 중편 『햇볕에 내리는 뜨락』, 수필집 『순간과 영원 사이』 등을 펴낸다. 이 밖에도 잡지와 신문에 많은 글을 발표하며, 1987년 『한국문학』에 권두 에세이 「참 사랑이 있는 곳에」를 싣는 등 팔순에 이르도록 지칠 줄 모르는 창작욕을 불태운다. 1988년 1월 30일, 박화성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에서 여든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김기진과 자리를 함께 한 말년의 박화성ⓒ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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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자, 「일제 강점기 한국 여류 소설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1987
- ・ 정영자, 「한국 여성 문학 연구」, 동아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1987
글장석주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펼쳐보기
출처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2 | 장석주 |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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