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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 2023년 2월 5일 주일 예배
본문 / 사무엘상 2:12-21
검정색 옛날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다닐 때 규율부에서 등교시간에 복장검사를 하고 점심시간에도 들어와 복장검사를 하며 군기를 잡았습니다. 학교가 무서웠습니다. 지금 군대보다 더 빡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어떤 선생님은 야구 방망이를 들고 다녔습니다. 실제로 맞기도 하고 말입니다.
복장검사에서 걸리면 그날은 괴로운 날입니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도 못 갑니다. 남아서 풀을 뽑든, 돌을 줍던 벌을 받아야 합니다. 복장을 잘 챙겨도 단추 뚜껑이 불량인지 이게 잘 떨어집니다. 그럼 복장불량으로 걸리는 겁니다.
규율부 선배들이 복장검사를 할 때 마침 소매의 단추뚜껑이 없는 겁니다. 오늘은 수업 끝나고 집에 가기는 틀렸구나! 버스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장불량으로 걸렸는데 한 규율부 선배가 나 얘 알아! 그러는 겁니다. 잘은 기억은 안 나지만 동네 선배였던 같습니다.
그 사람이 규율부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었는지 나 얘 알아! 하니까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나 얘가 누군지 알아! 이게 그날 저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규율부에서 제일 높은 그 선배가 최상호가 누군지, 어디 사는지, 부모가 누군지, 형제들이 누군지, 초등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저를 알 때 저는 넘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대도 마찬가질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판대에서 마귀가 아무리 정죄를 해도 하나님이 내가 안다고 하시면 나는 아무리 부족하고 모라자도 하나님이 은혜로 덮여주셔서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하나님을 안 다고 철썩 같이 믿었는데 나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 마귀에 붙잡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안 죽을 사람이 없듯이 죽으면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고 그곳에서 영원한 세계인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이 나를 아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하셨습니다. 머리에 잠시 스쳐가는 생각까지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심판대에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만약에 앞에서 말한 그 규율부 선배가 제가 누군지 너무 잘아도 제가 그 선배의 돈을 도둑질하는 것을 우연히 봤다면 그때에도 내가 아는 얘라고 하겠습니까?
심판대에서 하나님이 내가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살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에서 두 번째였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연히 아는 분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서 첫 번째가 아닌 것이, 하나님이 그 마음과 인생의 주인이 아닌 것이,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분이 아닌 것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인데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말씀합니다. 아니 제사장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국어 선생이 한글을 모르고, 수학 선생이 산수를 모를 수 있습니까? 그런데 목사와 성도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을 모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목사와 성도들 중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훨씬 많다고 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성도들은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그 은혜로 사는 제사장이 하나님을 알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이 시대의 목사와 성도들 가운데 얼마든지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고 심판대에 갔어도 하나님은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할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과연 그날에 하나님이 나를 안다고 하실까 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가 되었다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성도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원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모를 수 있고, 더군다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여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어 존경을 받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모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를 크게 만들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맞아죽겠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정보와 일과 사역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 번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이 다르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정보와 종교적인 행위와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없으면 죽은 지식이고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는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믿지 않는 자, 불법을 행하는 십자가의 원수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역사에서 심판을 받고 망한 이유이고 대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저주를 받은 원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먼저 안 것은 귀신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이 예수님께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안다고 한 것입니다.
귀신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안 다고 믿음 있는 것입니까? 회개를 하였습니까? 순종을 했습니까? 야고보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귀신도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떤다고 일갈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귀신처럼 알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에서 심판을 받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고 대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인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한 것이 아닙니까?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입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될 사람들입니다.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것이 제사하는 것입니다. 제물은 어떻게 잡는지, 피는 어떻게 뿌려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불이 꺼지지 않는지, 성소의 불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떡상은 어떻게 진설하는지,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아버지를 보면서 배웠으니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크건 작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목사도 분명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교인이 수만 명인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목사일 수 있고 교인이 한두 명이어도 하나님을 아는 목사일 수도 있는 겁니다.
대제사장 엘리와 그 두 아들은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어린아이 사무엘은 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다 모른다 하시는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인정하는 그 근거 말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의 두 아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근거로 행실이 나쁘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나쁜 행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였다는 겁니다. 이 시대는 누구나 다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깟 예배로 말입니다. 별스럽지 않는 예배로 말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멸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존귀하고 두려운 분이지 알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존중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고 믿지를 못한 겁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세상에 있는 종교일 뿐이었습니다. 죽은 하나님으로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숭배한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이 시대에 왜 엘리의 두 아들은 같은 목사와 성도들이 없겠습니까?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아도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 안에도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적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적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주여 주여 하며 예배하고 헌금을 하고 가니 다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과 뜻을 다하는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과 진심은 없는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적당히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뜻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와 싸우고 그 죄를 끊어내는 결단은 없는 것입니다. 수십 년째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육체가 원하고 그 죄가 주는 재미와 즐거움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으로 있으면서 하나님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두 주인으로 섬기는 영적인 간음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그 두 아들에 대해 나를 존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고 심판하는 분으로 믿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죽은 신으로 알고 그 하나님을 이용하여 타락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섬기는 삯군과 종교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교회에 오셔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그 마음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구원을 받지 못하는 가짜 믿음을 갖고 평생 교회를 들락거리는 것이 말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두렵고 순간순간 기도가 됩니다.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굉장히 두렵습니다. 하루에도 순간순간 제발 나를 버리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저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저는 한 번도 나는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하면 어쩌나 여러분보다 더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목사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에 대해 수도 없이 말했지만 심판대 앞에 갔을 때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 어쩌나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에게 이것보다 더 두려운 게 있겠습니까? 교회가 작아도, 성도들이 한 명도 없어도, 가난해도, 병들어 죽어도,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아도, 심지어 가족에게 버림을 받아도, 죽어 심판대 앞에 갔을 때에 하나님이 네가 나를 알고 나도 너를 안다고 하시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완전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날을 위해 살아가는 겁니다.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위해 그때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날에 하나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시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와 영광을 누린들 무슨 소용입니까? 그 영원한 저주와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일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는지, 무엇을 원치 않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무엇을 마음 아파하시는지 아십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가 적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찾는 이가 없다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이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과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버리고 부인하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이 전부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같아야 하는 겁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곧 네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라는 말씀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합니까? 우리는 하나님도 섬기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적당히 믿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것도 믿음이라고 미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들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에 대해 성경이 그렇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히 여기는 믿음은 십자가에 자신을 죽기까지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홀로 섬기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산 지식인 겁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음과 영으로 준비하고 미리미리 나와서 기도로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전화 오면 핸드폰을 받고 카톡 들여다보고 졸리면 자려고 힘씁니다. 내 사정과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예배는 양보할 수 있는 겁니다. 예배를 드리는 날이 시아버지 장례와 겹치자 예배를 양보하지 않은 어떤 성도님의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듣고도 무심하게 흘려버리면 후회하는 날이 올 겁니다.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을 경멸이 여기는데 어떻게 삶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또 다시 십자가 앞에 서게 됩니다. 십자가를 만나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주님이 내 죄를 대속해 주신 그 한량없는 은혜를 믿지 못하면 즉 회개하고 거듭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죽음과 대속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의를 나타내고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교회에 있는 목사나 성도들이나 다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그 대속의 십자가를 만나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거듭나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진짜로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겁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베드로가 주님의 그 십자가를 대적할 때에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믿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 의를 계시하고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뿐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그 믿음을 알지 못하면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그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 십자가의 믿음이 아니라면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눈물을 흘리고, 고상한 지식으로 말씀을 전하고, 천사의 말을 하고,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예언을 하고, 큰 능력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기에 하나님도 도무지 알지 못 하는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은 두려운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 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축복하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힘없는 자를 긍휼히 여기고, 나를 낮추어 남을 높이고 섬기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죄와 싸우고, 죄를 끊어내는 거룩한 삶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대에서 그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이름으로 사는 것이 쉬운 것이겠습니까? 뻔히 알아도 하고 싶어도 안 될 때도 많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넘어지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넘어지면 나를 십자가에 못을 박고 다시 일어나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만을 생각하며 준비하며 삽시다. 다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그 믿음 하나만이 가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날 부인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순종하는 그 좁은 길만을 가다가 내가 너를 안다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칭찬을 받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