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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저주 속 습관 사수하며 하나님 믿기(?)>의 줄거리 :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생래적으로 저주받은 사형수들입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관계하게 된 사람들이 바로 선민입니다. 그런데 선민들 중에서 하나님을 관계하는 중에도 저주에 빠졌을 때의 습관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상태가 저주인데 그런 속에서 익숙하게 된 습관을 하나님과 관계하게 된 상태에서도 사수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요?
저주 속 습관 사수하며 하나님 믿기(?)
(히브리서 3:7~19)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저주 속 습관을 사수하며 하나님 믿기가 과연 가능할까요? 사수한다는 말은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수의 대상이 저주 속 습관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죽더라도 저주 속에서 살던 때의 습관을 놓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관계하는 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주 속에 살던 때의 습관을 사수하며 하나님 믿기를 감행합니다. 본문은 바로 그러한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저주란 타인에게 불행과 재앙을 비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혹은 그렇게 해서 불행이 임하게 된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다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저주의 의미는 이와는 다릅니다. 12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저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저주의 상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벌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끼는 의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회사에서도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과장이라면 회사에서 사장님의 있음을 느끼고, 부장님의 있음을 느끼고, 부하 직원들의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또 업무의 있음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살아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저주라는 재앙 속에 빠져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저주의 무서움은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저주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재앙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셨기에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한 채 풍랑만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죽음의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비교하면 저주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세상일들에 반응하고 있다면 풍랑 속의 제자들과 같은 경향의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또한 저주의 무서움은 좋음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직장인들이 바라는 것은 월급 인상이나 승진일 뿐 하나님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에 대해서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저주 속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주의 상태에서는 주체성의 문제도 생깁니다. 본래 회사라는 장소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여있습니다. 회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생김새나 말과 행동의 결과까지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체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기에 자신의 주체성을 우선시하게 됩니다.
이렇듯 저주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있음도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좋음도 바랄 줄 모르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저주 속에서 살던 때의 습관입니다. 으레 있음을 의식하는 대상은 하나님 이외의 피조물들입니다. 으레 바라고 소원하고 욕구하는 대상도 하나님 이외의 피조물들입니다. 어디에나 하나님의 주체성이 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으레 내가 주체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이런 저주 속에서 살던 습관이 무서운 이유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후에도 이것을 지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이 선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민에게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저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으로부터 차단되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전혀 인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게 저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선민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저주는 무관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살던 때의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저주에 빠져 살 때의 습관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50대 남성과 40대의 여성이 느지막이 결혼을 했다고 해보겠습니다. 결혼했으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혼자 산 기간이 너무 길었던 나머지 결혼을 하고도 혼자 살던 때의 습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결혼 생활은 당연히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봅니다. 10년 백수 생활을 하던 청년이 대기업에 취직을 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취직하고도 백수 때의 생활 습관을 고스란히 사수하고자 한다면 어떨까요?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저주가 이러한 상황들과 닮았습니다. 다만 저주 속에 살 때의 습관에서 오늘 불행함은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늦은 결혼에서 오는 낯섦이나 백수 생활하던 청년의 회사 적응의 어려움에 비할 수 없이 큽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선민들이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름 받은 사건을 언급합니다. 애굽의 노예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시기는 저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써 모세를 통해 애굽이라는 저주 바깥으로 빠져나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민들에게서 이상한 모습이 발견됩니다. 자꾸만 하나님을 시험하고 거역합니다. 결과적으로 사십 년 광야 생활을 통해서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이었던 모든 장정이 죽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언급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나타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출애굽의 구원을 받았던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임했습니다. 이들은 저주 속에서 살던 습관을 버리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출애굽을 경험한 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한 명도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60만 장정과 그들이 이룬 가족들 중에 성인들은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 수 있고, 저주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가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구원에서 떨어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저주로 복귀하게 되는 이유는 저주 속에서 살던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버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의 습관을 목숨 걸고 사수하려 했습니다. 바로 완악함과 완고함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짐을 저주의 내용으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13절을 보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저주의 이유가 죄의 유혹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을 하던 선민들을 향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완악하고 완고하다’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이러한 모든 표현은 저주 속에서 살던 습관을 목숨 걸고 사수하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출애굽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시는 듣도 보도 못한 기적을 통해 노예의 저주 속에 빠져있던 자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으로 지나게 하시는 신이 바로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의 아버지이다.’라고 소개하고 계신 셈입니다.
선민들이 애굽의 노예라는 저주에서 나왔다는 것은 이러한 전능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을 구원해 주신 반면에, 애굽이라는 초강대국의 운명까지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애굽은 제도와 조직이 잘 정비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나라를 한순간에 망하게 하실 수도 있으며,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며, 있던 것을 없게도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지식과 이해력과 논리로는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일들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주에 갇혀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신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좋음을 결정하여 추진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상상도 할 수 없고, 이해력과 논리로는 모순 없이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삶을 이끌어 가시는 중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결정하고 추구하는 주체성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기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셨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출애굽에 분노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불길처럼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13절을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무기도 없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생각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우왕좌왕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가만히 있을 것을 요구합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다시 말해 죽으라는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대해 죽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을 보았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이고, 저주 속에서 살던 모든 습관을 죽이는 죽음입니다. 그럴 때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됩니다.
홍해가 가로막고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일은 하나님이 없을 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희의 아버지이다. 내가 너희의 생을 이끌어 가는 주권자다.’라는 것을 기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홍해가 가로막고 애굽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과 같은 위기의 상황이 크고 작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판단하여 두려움에 쫓겨 생각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구원을 찾아 움직이려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바로 저주 속에 있을 때의 습관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습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해야 할 유일한 있음이시고, 우리가 욕구해야 할 유일한 좋음이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유일한 주체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을 때 하던 짓을 반복한다면 광야에 나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에 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거역합니다. 물이 없어 목이 마르면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고기가 먹고 싶으면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몸이 처한 상황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온전하지 못하다고 느껴질 때면 여지없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들처럼 행동합니다. 하나님과 끊어져서 살던 때의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에게서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타날 뿐만 아니라 사수하려고 합니다. 몸이 놓여있는 생활 현장의 상황을 스스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이 상황을 극복하여 안정되고 좋은 상태를 마음에서 그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한 과정을 하나님께 문제로 제시합니다. ‘내가 보기에 이 상황은 좋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그림대로 이 상황을 이끌어 가셔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목이 마르니 물이 풍부한 상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당신이 정말로 전능한 신이라면 우리를 물이 풍부한 상황으로 이끌어 가시오!’라고 문제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 문제를 내는 출제자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문제 수행 능력을 채점하는 사람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구약의 선민들은 이러한 짓거리를 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무능한 신이다. 신으로 믿을 가치가 없다.’라고 채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 이유는 저주 속에 있을 때의 습관을 그대로 사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주 속에 있을 때의 습관을 사수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관계할 때, 나는 채점자가 되고 하나님은 수험생이 되십니다. ‘내가 삶에서 느끼는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해 내느냐?’라고 하나님께 제시합니다. 내가 원하는 답이 나오면 좋은 점수를 주고,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낮은 점수를 줍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가?’라는 의심까지 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과 영생을 내걸고 저주 속에 있을 때의 습관을 사수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어떤 분들은 ‘맞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일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에 대해 간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저주 속에 있을 때의 습관을 사수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거울을 보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런저런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또 몸이 좀 안 좋을 때도 이런저런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돈이 좀 안 벌리면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딱히 하나님께 어떻게 해달라고 간구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태도는 모두 저주 속에 있을 때의 습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생사를 주관하시고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아버지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마음가짐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이끌어 가실 때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고백입니다. 저주 속에 있을 때의 습관을 고수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부족함이 없다는 마음가짐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범사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감사합니다. 항상 아버지 하나님 때문에 기쁩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직면하기 때문에 쉬지 않는 대화로써의 기도가 가능합니다. 반대로 불평스럽고, 원망스럽고, 짜증이 나고, 크고 작은 이 세상일에 대한 바람이 생기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과 떨어져서 저주 속에 있을 때의 습관을 고수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관계할 방법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떨어져서 저주 속에서 살던 때의 습관을 사수할 경우에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졌음이 내 인생의 불행과 재앙의 근원입니다. 나의 의식은 하나님의 있음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나의 욕구는 하나님의 좋음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나의 주체성 대신에 하나님의 주체성만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저주의 불행과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수하는 저주의 상태가 불행과 재앙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주 속에 있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에서 모세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한 것은 바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루빨리 저주 속에서 나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저주 속에 있을 때 최고의 일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저주 속에서는 일분일초라도 더 사는 것이 손해이고 재앙입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마주한 구약의 이스라엘 선민들처럼, 홍해 앞에서 가만히 있기를 요구받았던 선민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인정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최고인 이유는 우리가 저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대통령이 되어도 저주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재벌이 되어도 저주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울대에 합격해도 저주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건강하게 100세까지 살아도 저주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저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저주의 축적이며 저주의 연장일 뿐입니다. 저주 속에서 최고의 일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어서 저주를 빠져나오는 것뿐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저주 속에서 벗어났다면 저주 속에 있을 때의 습관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혀 갖지 않고 있을 때에 보이던 습관을 고수하며 사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무한한 어리석음에 빠져 살아왔습니다. 저주 속에서 살던 때의 습관을 사수하며 하나님 믿기를 감행하는 이 어리석음으로부터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