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날에
이 의 영
안개꽃에 맺힌 물방울
지나가는 바람이 흔들면
물안개 되어 흩어지며
파노라마를 일으키는 날
흰 구름이 꽃처럼 피어나는
옥색 하늘 드리운
수양버들 늘어진 둠봉에 핀
연꽃 위에서
물잠자리
꿈이 깊은 날
단풍나무들이
다홍치마 노랑 저고리를 팔랑이며
길손을 유혹하고
코스모스 꽃밭 위에서
고추잠자리들의 날렵한 유영이
아름답던 날
그런 날들이
LED 형광 아래 탁자 위에서
구르는 진주 구슬처럼 반짝이며 흐를 때
나는 꽃들이 만발한 들판에서
꽃마차를 타고 달리며
물망초 위에 새겨 놓은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아
너는 우리의 이런 날들을
기억하는가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이 의 영
지하철 출구에서 나와
사거리 건널목 근처에 서서
그 사람 오기를 기다린다
사거리 신호등 지시에 따라
앞으로 뒤로 왼쪽 오른쪽으로
질주하는 각양각색의 차들은
허기져 먹이 찾아 달리는 야차 같고
파란불 노란불 빨간불 따라
가고서며
건널목에서는 맴도는 사람들은
고단한 삶의 규율에 순응하는 순례객 같다
순환하는 건널목 신호등 불이
열 바퀴를 돌아도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미련 때문에
뙈약 볕 아래 아직 서 있는 나는
어설픈 정에 묶여있는 못난이
야차와 순례객과 못난이
어울리지 않는 군상들이
어울려 지구의 하루를 장식한다.
◎ 떠나는 이의 탄식
가시오 가
염주 알 같은 눈물을 뿌리며
무너져 내리며 탄식하는 그대를 놓고
뒤돌아
은행잎들이 가랑잎이 되어 흩날리는
길을 따라 떠난다
나에 대한 그대의 바램이 너무 과했던가
그대에게 걸었던 나의 정이 약했었는가
그도 아니면
모이라이의 장난인가
무거운 발길을 떼며
쏟아지는 의문들
그러나
는개 내리는 허한 가슴엔
납득 할 만한 답은 없고
검은 하늘만
미어져 내려앉는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모이라이(Moirai)'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여신들이다.
그리스어로 '할당된 몫(들)'이라는 뜻을 지닌다고 한다.
◎ 봄 이야기
매화꽃이
연지로 엷게 단장하고
성긴 가지에 앉아 춘향을 바람에 날리면
봄은 남쪽 동산에 쫑긋 얼굴을 내밀고
진달래가
붉게 홍조를 띠고 산길에서
팔랑팔랑 손 흔들며
길손을 맞으면
봄은 다름질을 시작하고
철쭉꽃이
붉은 선혈을 토하며
하늘 향해 품었던 열정을 활활 태우면
봄의 뜀박질은 더 급해지고
라일락이
종다리 노래 듣고부터 갈무리해오던
청옥색 하늘빛을 꽃잎에 듬뿍 물고
한껏 자태를 뽐내며 오렌지와 향기를 다투면
봄은 어느덧 서산에 다다라
타오르는 태양이 된다.
◎ 장미의 계절
펄펄 끓는 태양이
꽃잎에서 난만히 부서지는 햇빛이
여름은 장미의 계절이라 합니다
태양을 머금고 햇빛을 닮은 우리는
열정적인 빨간 얼굴을 하고
아폴로를 바라고 얼굴을 듭니다
태양이 귀애하는 우리를
시기하는 이들이 있어
우리는
우리의 자태와 정열을 지키려고
가시를 품습니다
꽃가지에 가시를
간혹 지나가는 거센 비바람이
우리의 정열을 쇠하게도 하지만
날이 들면 우리의 열정은 전보다 더 뜨게 달아오릅니다
그래도
내가 눈물비를 참지 못하는 것은
이제 곧 이 계절이 끝나고
가랑잎 날리는 가을이 오면
우리도 속절없이 사위어 버릴텐데
우리가 기억되게 한 것
우리를 기억하는 이
얼마나 될까
하늘이 파랗습니다
그래도
하늘을 볼 수 있는 동안은
희망을 잃지 말라는군요
◎ 초록의 꿈을
연분홍 살구꽃에서
꽃잎 물고
잠이든 노랑나비의 꿈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마른 가랑잎이 흩날리는
저무는 들판에서
가버린 날을 우는
갈까마귀 울음소리의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태양보다 더 뜨거운
빨간 장미의 정열을
타는 듯한 칸나의 열정을
예전엔 몰랐습니다
삭풍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벌거벗은 나무
삭정이가 부러지는 날
이제야
초록의 꿈을 알 것 같습니다.
◎ 그때 그 노래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창문에는 내 마음의 슬픔같이 빗물이 흐른다
날개 꺾인 사랑 때문에
핏물을 철철 흘리며 길 떠난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그 길에서 찾아든 어느 시골의 작은 찻집
한복을 곱게 입은 삼십 대 중반의 고은 마담
손님은 나 하나
잠시 후
전축에 쏠베지 쏭을 틀어 놓고
눈을 감고 듣고 있는 여인
나도 노래에 심취했다 눈을 드니
판을 갈려고 눈을 뜬 여인의 눈에
눈물방울이 흐른다
무엇일까?
저 여인을 눈물 나게 하는 것이
사랑하던 여인 쏠베지를 버리고 방황하다
백발이 되어 맨손으로 돌아온 페르퀸트가
평생 그를 기다리던
쏠베지의 무릎을 베고 평화롭게 죽었다는
쏠베지 쏭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창문에는 우리 둘의 슬픔같이
빗물이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