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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연대 3.1운동의 자재단 (한.위키)
물밤 추천 0 조회 107 24.07.09 21:51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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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7.11 07:31

    첫댓글 박중양(朴重陽, 일본식 이름: 朴忠重陽 호추 시게요,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고위정치인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다. 작위는 백작이다. 194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이다. 일제시대의 신념적인 친일파이다. / 1897년(건양 1년) 일본 유학 후 1903년(광무 6년)부터 1년간 일본의 관료로 생활하다가 귀국, ,,,, 1908년(융희 2년) 경상북도 관찰사, 1910년(융희 4년) 8월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경북관찰사 재직 중 단발령을 강제로 감행하였다. / 독립 후 친일파로 몰려 규탄받았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49년 1월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체포되어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만년에는 대구 오봉산 근처에 은거하며 이완용에 대한 변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을 공공연히 드러냈으며,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문인이다. (한.위키) * 2024년 7월 5일 (금) 14:32에 마지막으로 편집

  • 작성자 24.07.11 07:41

    신석린(申錫麟, 일본식 이름: 平林麟四朗히라바야시 린시로, 1865년 1월 9일 ~ 1948년 2월 14일)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이를 진압, 시위대 해산을 독려하던 단체인 자제단의 대구지부 창립에 참여했다. / 구한 말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을사조약 이후 1906년에는 웅천군 군수, 1908년에는 창원부 부윤을 역임했다. 한일합방 후 경상남도 참여관, 경상북도 참여관, 1921년에 강원도 지사, 1923년 중추원 참의, 1929년에 충청남도 도지사 등을 지냈다./../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고 미군정에 의해 중추원이 해체되었을 때까지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이었으며, 80대의 고령으로 생존해 있었다. *2023년 9월 26일 (화) 19:38에 마지막으로 편집

  • 작성자 24.07.11 07:44

    권중익(權重翼, ? ~ 1927년 12월 16일)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경찰 겸 관료로,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 대한제국 육군 부위 출신이다. 1908년 2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에 일어난 의병 활동 탄압을 목적으로 조직된 제1순사대 경시로 재직했으며, 당시 강원도에서 활약했던 의병장 민긍호와 부대원들을 사살했다. 전라남도 광주경찰서(1909년 1월)와 경상북도 경무부(1910년 ~ 1920년)에서 경시로 근무했고,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9년 4월 7일 대구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경상북도 영양군수(1921년 ~ 1922년)와 경상북도 고령군수(1922년 ~ 1926년)를 역임했다. 1927년 7월 31일 조선사편수회 촉탁위원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16일에 사망하였다. *2022년 9월 26일 (월) 21:07에 마지막으로 편집.

  • 작성자 24.07.19 15:50

    서경순(徐?淳)/김승훈(金承勳)/김자현(金子賢) : 흔적 찾을 수 없음
    참조: 최경호(崔京鎬, 1893-1956), 함경북도 종성군 동면 출신. 그는 1920년 여름 독립운동가 최조륙(崔助陸)의 부하가 되어 경호원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해 7월 중순에는 연길현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명화(李明花)의 명령에 따라 일본관헌의 밀정으로 생각되는 김승훈(金承勳)의 장남 김주연(金周蓮)과 성명이 알려지지 않는 23~24세 학생을 유인해 용정촌 지인사 의란구에 있는 이명화에게 인도했다. 이후 다음날 아침 이명화와 함께 위재촌 산속에서 그들을 총살했다. / 이 일로 1920년 7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1923년 6월 5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공소했지만 12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1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경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자재단의 김승훈(金承勳)과 동일인물일까?]

  • 작성자 24.07.20 12:10

    /서병조(徐丙朝)/장상철(張相轍)/양자익(梁子益)
    - 서병조(徐丙朝, 1882-1952): 1882년(고종 19) 7월 28일∼1952년 2월 29일. 일제 강점기 실업가‧관리‧정치가. 창씨한 이름은 대봉병조(大峰丙朝)이다. 본관은 대구(大丘). 본적은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계산동(桂山洞)이다. / 정치계에서의 활동도 활발히 하였는데 1919년 대구자제단(大邱自制團)을 조직하여 대구 지역에서의 3‧1운동을 탄압하였다.
    - 장상철(張相轍, 1870-1930): 1870년(고종 7) 10월 17일∼1930년 10월 20일. 일제 강점기 관료. 본적은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덕산정(德山町)이다. / 1919년 3‧1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대구자제단(大邱自制團)이 조직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 양자익(梁子益, ?-?) :

  • 작성자 24.07.27 22:58

    김병제(金秉濟)/배상직(裴相直)/이영석(李永錫)
    - 김병제(金秉濟, 1894-?) 1894년(고종 31) 7월 19일∼미상. 일제 강점기 종교인. 필명은 추강(秋岡)이고, 도호는 국암(菊菴)이고, 창씨한 이름은 김강병제(金岡秉濟)이다. 본적은 서울 종로구(鍾路區) 가회동이다. / 1919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교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천도교청년당 중앙집행위원과 천교도중앙종리원 지도관서(知道觀書)를 지냈다. / 1943년부터 1944년까지는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 주최 강연회에서 육군지원병 격려 강연을 수행하였으며, ...일제 침략을 옹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 기록에는 자재단의 이야기는 없다.]
    - 배상직(裴相直, ?-?)
    - 이영석(李永錫, ?-?) - [동명이인: 이영석(李永錫, 1875∼1932) : 본관은 영천으로 호(號)는 매와(梅窩)이다. 기국과 도량(度量)이 헌활하였으며, 풍채(風采)가 우뚝하였고, 뜻을 독실(篤實)히 하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였다. 저서(著書)로는 「매와집」(梅窩集)이 있다.

  • 작성자 24.08.06 00:03

    1920년대 대구지역 자재단 참여 인물의 정치진출 과정, 노규선(경북대), 『한국민족문화』 84, 2023. 3., 141~170
    주: 33) 「朴重陽 書翰」, 『寺內正毅關係文書 381』, 1919. 4. 11. 자제단 발기인 명단과 그 수는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자제단 결성을 보도한 『每日申報』(1919. 4. 9.)에서는 그 수를 72명으로 기재하였고, 박중양이 데라우치에게 보낸 서한(1919. 4. 11.)의 명단에는 이름과 함께 67명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경상북도 장관의 보고(1919. 4. 28.)에서는 자제단 발기인이 102명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개인의 이름을 작성한 명단인 박중양의 서한을 따라 67명으로 기재하였다. (151쪽)
    / 당시 현직 경북도청 참여관(參與官)이던 신석린이 주동이 되어 안동, 성주, 군위, 영일, 김천, 문경 등지에 자제단 지부가 조직되었다. (152쪽) (57SKA)
    << 위 논문은 노규선, 「1910~20년대 대구지역 조선인 자본가의 활동과 특성」,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2.의 증보판인 셈이다.> .

  • 작성자 24.08.05 23:54

    임병대(林炳大)/한세동(韓世東)/이호연(李鎬淵)
    임병대(林炳大, ?-?) [동명이인: 임병대(林炳大, 1868?-), 전라북도 정읍군 옹동면 매정리. 대동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비를 수취하여 송금하고 대동단 가입을 권유하였다. (1920,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
    한세동(韓世東, ?-?)
    이호연(李鎬淵, ?-?)

  • 작성자 24.08.15 23:22

    김기필(金基弼)/최찬우(崔瓚羽)/서철규(徐喆圭)
    - 김기필(金基弼, ?-?)
    - 최찬우(崔瓚羽, ?-?)
    - 서철규(徐喆圭, ?-?)
    <서철규: 대구부협의회의원으로 활동한 자제단 출신 인물은 최만달(1914~16), 이일우(1914~18), 정해붕(1914~23), 서병조(1914~26), 이병학(1918~20), 이장우(1918~23), 한익동(1920~32), 서철규(1923~26)까지 8명이 있다. 노규선(2023), 162쪽>
    <서철규는 1923년 의원으로 당선된 바가 있다. 그는 대구의 대지주로 이미 1913년 논을 50마지기 이상 소유한 대지주로 소개된 바가 있다. 이후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합자회사인 공호상회(公湖商會)에서 같은 자제단 발기인인 이영면 등과 이를 운영한 것이 확인된다. 163쪽> (57SKI)

  • 작성자 24.09.25 14:48

    조세열@choseyoul·24m - 2024 09 25 14:48
    일제의 한국 침략과정에서 일제의 편에 섰던 친일·보수 한국인 자위단. 3·1 운동 때도 138개 군에 자위단 조직 만세운동에 맞불. 대표 인물 이진호, 조선총독부 국장, 중추원 부의장,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으로 승승장구. 오늘날 토착왜구들의 원조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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