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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향한 마음의 몰입도 높이기>의 줄거리 :
모세와 하나님 관계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이 관계의 기간이 거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떨기나무 불꽃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난 뒤 곧바로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역사에 투입됩니다. 이렇게 엄청난 역사는 하나님과 모세 사이가 정말 친밀하여 모든 순간에 호흡이 척척 맞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에게는 현실적으로 출애굽에 투입되기 전에 이렇게 하나님과 친해질 수 있는 기간이 거의 없었던 셈입니다. 두 분의 이렇게 희한한 관계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향한 마음의 몰입도 높이기
(출애굽기 3:11~12)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몰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몰입의 강도를 가능한 최고점으로 높일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의 사명을 위임하시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출애굽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홍해가 갈라지는 모든 사건들의 의미를 앞으로 보겠습니다만 줄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대역사와 광야 40년의 역사를 2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약속의 명단에 있는 자들인 교회 이스라엘을 이끌어 갑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기 위해서는 모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호흡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하고도 친밀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단지 출애굽을 위한 용도로 쓰시다 버리시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단 모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사람은 그 용도 이전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요구됩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이 나타나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르익어 가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경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서 볼 수 있는 관계가 무르익어 가는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아 곧바로 출애굽에 투입되고 40년 광야 생활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말년의 야곱과 같을 수 없다면 모세는 하나님과 호흡을 맞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과 이러한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11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러한 반응을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는 초강대국 애굽의 왕이고 모세는 40년간 처가살이로 양을 치던 사람입니다. 떨기나무에 비유될 정도로 무능하고 형편없는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와 모세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권력의 차이를 생각하면서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거부했을 거라 여깁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담긴 모세의 심경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자신의 처지가 바로와 다른 것을 이유로 하나님께 반문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생각해 봅니다. 형을 피해 도망친 야곱은 루스 들판에서 미래가 깜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시자 미래에 대한 꿈과 포부가 되살아났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갈 때 하나님이 조력자가 되어주시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하층민에 속해있었습니다. 자기들 힘으로는 로마 제국의 힘을 극복하여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능력을 보면서 독립의 꿈을 꾸게 됩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경우는 어떨까요?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다면 야곱이나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 그래도 기다렸습니다. 오히려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40년 만에 찾아오시다니요. 우리 동족이 바로의 밑에서 노예로 학대를 받으며 고통 중에 있는 걸 아시죠. 어서 가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처지는 루스 들판의 야곱이나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전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살인의 추억입니다. 모세는 살인자의 트라우마에 의해 주체성이 꽁꽁 묶인 상태였습니다. 주체성의 활성화가 제로인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 세상을 향하여 주체성이 발동되지 않는 상태였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의욕을 부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몰입도를 올리기 위한 필수 전제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주체성이 묶인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는 모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땠는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요소가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리니”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를 목격한 호렙산은 이후에 언급되는 시내산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면서 계약을 맺습니다. 시내산 계약은 쉽게 말해 약속의 명단에 등록된 교인들과 하나님의 결혼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내산 계약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을 섬기리니”라는 표현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에서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떻게 깊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섬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는 ‘종살이 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으로 관계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인 가정이나 직장이나 이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종으로 관계하신다는 것은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만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기대하시며 400년 노예 프로젝트를 실시하셨습니다. 애굽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현장에서 자기 뜻대로 살 수 없고 오직 바로의 뜻대로만 살아야 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소원하고 뜻하여 달려갈 수 없는 멍청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삶을 향한 주체성이 제로가 되는 것이고, 이러한 조건 위에서만 오직 하나님의 지시만을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지시만을 따라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두 번째 의미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섬기리니”라는 말씀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마음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로서 바로를 섬겼습니다. 바로가 삶의 주인이었기에 바로의 지시를 따라서 말하고 행동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약속의 명단에 포함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섬긴다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을 삶의 주인을 섬긴다는 뜻과 함께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서 섬긴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마음의 주인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내 주체성이 꽁꽁 묶여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일 수 있는가를 보면, 하나님이 마음의 주인이 되심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시면 또한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럴 때 나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채워져야만 합니다. 다만 아무것으로나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좋다고 확신하는 대상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내가 가져야만 마음이 채워지고 만족하겠다.’라고 여겨서 좋다고 확정하는 대상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됩니다. 마음의 주인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을 섬김이란 마음에서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확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섬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삶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섬김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섬김은 좋음에 있어서 하나님을 가장 중하게 여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나는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섬깁니다.’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마음의 주인이란 하나님이 좋음이라고 확정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좋음으로 확정하여 살아가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좋음으로 확정하여 살아갑니다.
마음의 주인을 섬기는 방식은 재물을 좋음으로 확정하여 섬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섬기는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에서 재물을 너무나 좋게 여깁니다. 이제 너무 좋은 재물을 반드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재물을 실제로 갖고자 의지를 가지고 뜻을 세워서 추구합니다. 그 모습이 노력하고 수고함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곧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김이고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섬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좋아하듯이 하나님을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섬기는 자입니다. 그 좋아하는 대상을 이루거나 가지고 싶어 하고, 그것을 실제로 갖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섬길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시시각각 돈에 대한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경청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마음의 주인이 되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회사에서 부장님을 대하는 중에 ‘내가 어떻게 하면 부장님을 기쁘게 하여 보너스를 더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목표로 삼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회사에서 부장님을 대하는 중에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더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더 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작동된다면 부장님과 관계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이 알려집니다. 이처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서 좋음으로 확정하고 하나님을 벌겠다고 기를 쓰다 보면, 하나님과 관계없어 보이는 대상들을 상대하는 것도 하나님을 버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가 열립니다.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 돈 벌기를 포기하지 않듯이,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섬기는 자는 하나님 벌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늘 돈이 안 벌렸다고 해서 내일 벌 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일도 돈을 못 벌면 포기하지 않고 모레를 기약합니다. 심지어 10년간 적자만 보았어도 돈 벌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70~80세가 되어도 돈에 대한 애착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돈을 벌었으면 돈에 대한 애착은 포기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벌었으면 지키려 하고 더 벌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기에 오늘 하나님을 못 벌었다면 내일 또 벌려고 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벌었다고 해서 좋아함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내일 하나님을 더 많이 벌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생 돈 벌려고 애쓰는 것처럼, 평생 하나님을 벌려고 애씁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돈이 안 벌려서 걱정하고 근심하느라 위궤양이 생길 정도라면,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안 벌려서 걱정이고 하나님을 못 벌어서 안타깝고 하나님을 더 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시 모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지금 모세의 주체성은 꽁꽁 묶여 있습니다. 주체성을 몰입할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상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모세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자신은 살인자입니다. 스스로 살인자의 트라우마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해서 자기 주체성을 발동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 점을 좋게 보셨습니다. 출애굽이라는 대역사가 일어날 삶의 현장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노예가 되고 종이 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모세는 단순히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확정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일대일로 만나주십니다. 모세의 주체성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묶여 있고 활성화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만나십니다. 출애굽이라는 대역사를 위하여 사무적이고 공식적인 대화만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가 재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을 힘이자 에너지로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의 주체성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인간이라면 좋음을 확정하고 주인을 발견한다면 누구나 주체성이 치달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모세는 이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마음의 주인으로 여기고 좋음이라고 확정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자기가 주체적으로 추구해 나갈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좋다는 것은 다 경험한 왕자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것들이 있는 인간 세상으로는 복귀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40년 동안 처가살이하며 양치기를 하는 동안 무엇을 좋아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체성은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던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직면하자 본능적으로 주체성이 들썩거리기 시작합니다.
모세의 40년 처가살이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살인자의 트라우마에 주체성이 꽁꽁 묶여서 세상에 보이는 것들을 좋음으로 삼고 나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불러주시고 만나주십니다.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서 출애굽이라는 대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오고 가고 있지만 모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황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왕자가 된 후에도 친모 요게벳의 양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도 다른 종교가 있었기에 왕자였던 모세가 생각할 때 하나님은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음의 주인을 이 세상 것으로 확정한 채 살아갑니다. 애굽에서 신을 믿음이란 그렇게 확정된 마음의 주인인 좋음을 향하여 주체성을 발동시킵니다. 그러면 신은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마음의 주인을 얻기 위하여 뛰어나갈 때 그 상황을 돕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랬던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마음의 주인으로 섬길 하나님을 보자 마음의 주체성이 풀려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좋음으로 여기자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출애굽이라는 사건은 삶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체성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는 반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대화가 오고 가는 중에 모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기 시작합니다. 모세의 주체성이 마주하게 된 하나님은 세상 속에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는 자기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세상이 아닌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모세는 세상에서 떨기나무에 비유될 수 있는 무능한 자였기에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 주체성이 풀려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이제 의문은 한 가지만 남습니다.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보았을 때 얼마나 강하게 몰입했기에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 약속의 명단 속에 있던 교인들을 이끌어 출애굽이라는 대역사와 광야 40년 역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예를 볼 있습니다. 혈루병 여인을 생각해 봅니다. 혈루병 여인은 삶이 불가능했습니다. 자기가 접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가 쓴 물건을 다른 사람이 만지기만 해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종교 행사에서 부정한 자를 배제했습니다. 종교가 중심인 사회에 살면서 종교 행사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양치기로 살며 세상과 떨어져 있던 것처럼, 혈루병 여인은 사회로부터 쫓겨나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만져보겠다고 밀치는 가운데 옷자락을 만진 혈루병 여인에게만 예수님의 능력이 들어갑니다. 예수님께 접촉한 사람이 많았기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냐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혈루병 여인은 이 세상에서 누구와도 관계가 성립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몰입도는 엄청났습니다. 관계를 위한 주체성의 역량이 예수님 한 분께 몰입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혈루병 여인은 옷자락을 한 번 만졌을 뿐이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집중도가 극단에 이르자 허락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이 나가 병이 낫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전도가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전도 학교를 찾아다니며 전도에 대해 배우려 합니다. 선교사가 되려면 얼마나 오랜 기간 훈련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수가성 여인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동네로 가서 마을 전체를 전도합니다. 수가성 여인은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로부터 부정하게 여겨져서 완전히 소외되었습니다. 무엇을 좋아할 수도 없고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6~18절을 보면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수가성 여인은 형식상으로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수가성 여인에게 마음의 주인은 될 수 없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의 주체성은 마음의 주인으로 확정할 대상을 찾지 못한 채 꽁꽁 묶여 있었고 활성화 되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몰입하게 됩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마음의 주체성이 누수되지 않는 상태였다가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확정한 순간 그 주체성이 예수님을 향해 질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의 만남으로 마을을 뒤집을 정도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에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성숙해 가는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살인 사건을 통해 사람이 피범벅이 되도록 때려죽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살인자의 트라우마에 갇혀버립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의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주체성이 위축되고 묶여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듯이,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듯이, 모세는 하나님을 직면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제시해 주십니다. 이로부터 모세의 주체성은 마음의 주인을 찾게 됩니다. 이제까지 모세의 마음에서 좋음을 추구하고 찾아내려는 마음의 힘은 한 방울도 누수되지 않고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힘이 하나님을 직면하는 순간 발휘될 방향을 찾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 몰입합니다. 그 몰입의 강도는 혈루병 여인이나 수가성 여인과 마찬가지로 전폭적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숙해 가는 과정이 없음에도 이 몰입의 강도에 의해서 출애굽이라는 대역사와 광야 40년 역사를 이끌어가기에 충분한 인물로 거듭납니다. 한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친밀해지고 무르익은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음의 힘을 모아 하나님께 쏟을 수 있습니다. 그 힘을 모으도록 해주시는 역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음을 느끼고 달려가려는 주체성을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심지어 점심 때 먹을 음식에 대해서조차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점심 때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순간만큼은 의지가 음식에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상황까지도 십자가에서 다 죽여가면서 마음의 누수를 막고 힘을 모으고 모아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몰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몰입의 강도를 자꾸자꾸 높여가면 갈수록 짧은 기간에도 하나님과의 친밀도는 깊어지고, 농후해지고, 무르익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대전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한 주체성이 묶이는 것입니다. 내 주체성은 철저하게 묶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마음을 몰입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이 마음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내 주체성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만 몰입합니다. 돈이 좋아 안달이 난 사람은 무엇을 보든, 누구와 만나든 돈만 찾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좋아 안달이 난 사람은 하나님만 찾습니다. 십자가에서 마음을 모아서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이 한 방울도 흘러가지 않도록 막고,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고 하나님께 몰입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하나님께 몰입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몰입도만큼 깊어지고 친밀해집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갖고 계신 뜻과 지시가 투명하고 또렷하게 들려오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로 하나님께 마음을 몰입하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로 몰입의 강도를 높이고 있습니까? 그 몰입의 강도에 비례하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지시를 듣고 뜻을 깨달음이 증가합니다.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는 무르익을 수 있는 과정이 없었으나 무르익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살인자의 트라우마에 갇혀서 괴물 같은 자기 모습을 보며 주체성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묶여 있던 주체성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비로소 고개를 들고 몰입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출애굽의 대역사가 시작됩니다.
모세는 삶의 현장에서 주체성이 묶여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좋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좋아함이 지속되는 동안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지시가 또렷하게 알려졌고, 250만을 이끌어 출애굽을 하고 모세오경을 기록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또한 십자가로 마음의 흐름을 모으고 또 모아야 할 것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하여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몰입하는 강도를 날마다 높여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지시만을 또렷하게 듣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종들이 될 수 있습니다. 명실공히 하나님을 삶의 현장의 주인이자 마음의 주인으로 섬기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심으로 삶의 현장에서도 마음에서도 하나님이 주인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향해서는 주체성을 꽁꽁 묶게 하시고, 오직 하늘을 향해서만 주체성이 몰입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지시가 또렷이 들릴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