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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대 제삿밥이 선민의 일용할 양식>의 줄거리 :
만인 제사장 시대에 사는 모든 선민에게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시는 이유는 오직 평생 제사만을 날마다 행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제사를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얻었고, 일용할 양식을 먹고 한 일이 제사였습니다. 우리도 삶을 제사로 삶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얻고 또한 일용할 양식을 먹고서 하는 일이 제사여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그리고 모든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제사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얻는 모든 소득은 제삿밥입니다.
오대 제삿밥이 선민의 일용할 양식
(레위기 6:8 ~ 7:38)
7장
7. 속죄제와 속건제는 규례가 같으니 그 제물은 속죄하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8. 사람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가질 것이며
9. 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냄비에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모두 그 드린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10. 소제물은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5대 제사의 규례를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5대 제사가 언급됩니다. 여기서는 제사장의 직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제사장의 직무라는 주제로 묶을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실제 내용은 제사장의 소득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가 화제(火祭)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불로 태우고 남은 제사물을 제사장이 갖는 것에 대한 말씀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제사장이 제사를 드림으로써 얻게 되는 소득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7장 7~10절을 보면 화목제를 제외한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에 관해서 제사장에게 주어질 소득에 관한 말씀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번제에서는 번제물의 가죽이 제사장의 소득이 됩니다. 또 소제를 드릴 때는 기념물이라는 이름으로 한 움큼의 밀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얹어서 불에 태웠습니다. 그 외에 화덕에 굽거나 철판에 부치거나 물에 삶은 소제물은 제사장의 소득이 됩니다. 10절에서 “소제물은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7장 29~33절을 보면 마지막으로 화목제를 드렸을 때 제사장에게 소득으로 돌아갈 부분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오대 제삿밥이 선민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선민의 삶 전체가 제사를 드리는 일이므로 제삿밥이 일용할 양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인 제사장 시대를 사는 우리는 각자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에게 주어지던 몫이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레위기 1장부터 6장 7절까지는 5대 제사의 규례가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6장 8절부터 7장 38절까지는 다시 5대 제사가 언급되며 제사장의 소득에 관한 내용이 제시됩니다. 제사 후에 남은 부분은 제사장들이 성막 뜰에서 먹었습니다. 제사장들의 일용할 양식인 셈입니다. 제사장의 가족들은 선민이 내는 십일조를 통해 생활했지만, 제사장들은 화제를 드리고 남은 제물들을 먹음으로써 일용할 양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제사장들이 계속 제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만인 제사장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 전체는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내용이란 5대 제사의 생활화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5대 제사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에서 얻는 모든 소득은 쉽게 말해 제삿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따르자면 직장 생활은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의 모든 활동은 제사이기에 이로부터 얻는 소득은 제삿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화제를 드릴 때 희생 제물의 내부에 있는 기름을 떼어내 번제단에서 태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가슴살이나 다리는 제사장의 몫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직업 활동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직업 활동을 통해서 얻게 되는 소득은 제삿밥이어야 합니다. 주부가 가정을 돌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이혼할 때 남편의 소득에 대해 아내의 기여도가 인정되듯이 결국 집안일도 나의 활동이기에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선민의 삶의 현장이 어떤 곳이든 그 내용은 제사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방법 또한 제사였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에게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본문은 이것이 모든 선민의 삶에서 나타나야 할 모습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여러분은 일상생활을 제사로 드리며 제삿밥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사십니까? 우리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제삿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소득은 제삿밥입니다. 하나님이 제삿밥을 허락하신 이유는 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고 제삿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또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제사장 뿐만 아니라 선민 모두가 육체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삶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 생활화는 5대 제사의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5대 제사 속에 담겨있는 취지와 의미가 다 충족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5대 제사의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사의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제삿밥을 일용할 양식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렇다면 실제 삶에서 5대 제사의 생활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5대 제사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5대 제사의 제삿밥을 먹고 살아가는 셈입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5대 제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이러한 5대 제사가 일상에서 어떻게 실제로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으로 허락하시는 제삿밥을 먹을 수 있는 제사의 삶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5대 제사의 첫 번째는 번제입니다. 5대 제사의 연관성 속에서 번제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내 마음이 세상을 향해 날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감이 발생합니다. 번제는 이 빗나감을 죽이는 제사입니다. 번제가 문제시하는 것은 마음이 육체와 연합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들에 마음을 다 쏟기 때문입니다. 번제는 마음과 육체의 연합상태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화목제나 속죄제나 속건제에서도 반복되는 의미입니다만 그중에서도 번제는 마음의 방향 전환에 의미를 둡니다. 사람의 마음은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마음이 세상을 향해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번제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 방향으로 날아감이 끊어져야만 소제의 의미대로 하늘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애초에 시작될 수 없기에 번제는 중요합니다.
세상을 향해 날아가도록 정해진 죄적 체질을 번제로 끊을 수 없다면 나머지 네 가지 제사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는 의지가 유지되는 바탕에서만 나머지 네 가지 제사의 의미도 있습니다. 번제가 없다면 소제도 화목제도 속죄제도 속건제도 드려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번제를 통해 세상으로 날아가려는 마음의 방향을 끊었기에 나머지 네 가지 제사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6장 8절부터 나오는 번제에 대한 말씀에서는 특별히 상번제에 대한 제사장의 직무가 강조됩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양을 바치는 상번제가 다른 모든 제사의 바탕이 됨을 가르쳐줍니다. 9절을 보면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 있는 석쇠 위에 두고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라고 했고, 또 12~13절을 보면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 불은 끊임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상번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려졌습니다. 저녁에 상번제를 드리기 위해 번제단에 불을 피웁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가죽을 벗기고 조각내어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웁니다. 번제단의 어린양이 다 타서 재가 되었더라도 그 불은 다음 날 아침 제사까지 꺼지면 안 됩니다. 아침이 되면 꺼지지 않은 불에 다시 나무를 올리고 어린양을 잡아 상번제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불도 저녁에 상번제를 드릴 때까지 꺼지지 않게 합니다. 번제단의 불은 상번제를 통하여 일 년 365일 24시간 켜져 있었습니다. 마치 성소의 분향단의 향불이 24시간 지속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상번제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24시간 진행된다면 이제까지 살펴본 소제나 화목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도 불로 드리는 화제인데 이러한 제사를 어떻게 진행했다는 것일까요? 바로 상번제를 드린 불로 개인적으로 드리는 번제나 소제나 화목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도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상번제 어린양의 불은 모든 제사의 기본 바탕이었습니다.
상번제의 번제단 불이 24시간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마음이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24시간 지속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내 마음에서 번제단의 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불이 꺼질 때 마음은 다시 세상을 향합니다. 죄적 체질의 방향성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5대 제사의 연관성 안에서 보면 번제의 죽음이란 방향성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삶에서 얼마든지 체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을 보니 건강에 대해 너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번제로 죽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번제는 세상을 향하려는 마음의 방향을 죽이는 제사이며, 다른 모든 제사의 기본이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번제를 통해 제사장은 가죽을 얻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1장 6절을 보면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가죽이란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빠진 지정의육을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때, 세상에는 지정의육이라는 껍데기가 남습니다. 이 가죽이 제사장의 몫이 된다는 것은 나의 지정의육을 하나님께서 사용하게 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지정의육을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뜻과 계획대로 나의 지정의육을 사용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삶의 모든 현장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마음의 방향을 번제로 죽임으로써 삶의 현장에 지정의육이라는 껍데기만 남게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표하여 세상에서 하나님 있음의 증거가 되는 존재입니다. 가죽이 제사장의 몫이었다는 것은 나의 지정의육이라는 껍데기를 하나님이 가지시고 당신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증거하는 사역을 해나가심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에 번제는 무척 중요한 제사였습니다. 번제의 불이 꺼지지 않음이란 내 마음이 세상을 향해 날아가지 않는 상태가 지속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 삶의 모든 현장에는 지정의 육이라는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그럴 때 내 지정의 육이라는 껍데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편이 되십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자였던 것과 같습니다.
한편 이렇게 번제를 통해 세상을 향한 마음의 방향이 죽고 나면 해야 할 일이 소제를 통해 제시됩니다. 소제에서는 기념물이라 불리는 한 움큼의 밀가루를 태워야 했습니다. 기념물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함을 의미합니다. 번제로 죽은 내 마음은 더는 세상으로 가지 않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번제의 다음 단계로 소제가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소제의 의미 또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수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는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의 삶을 실제로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사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하든 궁극적으로 그 일은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는 업무에 맞는 전문성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문성은 나의 지정의육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감과 기쁨을 추구하는 내 마음은 번제의 의미대로 세상에 대해 죽었기에 직장 일에 가담할 수 없습니다. 소제의 의미대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나의 지정의육이라는 껍데기를 하나님이 장갑처럼 끼시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하나님께 가지 않고 세상에 머물러 있다면 번제에서 남은 가죽과 같은 나의 지정의육이라는 껍데기를 당신의 것으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믿음을 가진 의식의 작용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하늘에 올라간 마음이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과 마주하여 친교를 더해가는 화목제의 의미는 성취됩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번제로 세상에 대한 방향을 죽이고 소제로 드려지는 기념물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함을 통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러한 번제와 소제의 기본 틀 안에서 화목제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관계하려면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번제와 소제로 마음 외부의 작용을 바꾸긴 했지만, 마음 내부에는 여전히 비곗덩어리들이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영이신 거룩한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이 비곗덩어리의 성분을 보니 세상의 기쁨거리들입니다. 돈, 건강, 형통, 성공, 인기, 명예, 안락함, 편안함, 취미 생활 같은 세상의 기쁨거리들이 마음 내부에 가득 차서 영이신 거룩한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화목제는 마음의 내부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의 기쁨거리들을 긁어내는 제사입니다. 그렇다면 삶 속에서 어떻게 화목제를 드릴 수 있을까요? 가정이든 직장이든 삶의 모든 현장에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기쁨거리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족들의 형통을 기쁨거리로 삼을 수 있고, 직장에서는 성과나 승진 혹은 더 많은 급여를 기쁨거리로 삼을 수 있고, 모임에서 으뜸이 되는 것을 기쁨거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삶의 모든 현장마다 달라지는 기쁨거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이것들을 제거하는 화목제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거룩하시고 진짜 기쁨거리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기쁨과 만족이 실제로 내 마음 안에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세상의 기쁨거리들이 비곗덩어리처럼 꽉 차 있다면 하나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없는 상태이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감이 생길 수 없고, 거룩하신 기쁨이 생길 수 없고, 거룩하신 주권자 되심이 인정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화목제를 드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화목제로 세상의 기쁨거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기쁨거리로 요구하는지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에 불만을 갖는지로 쉽게 드러납니다. 기대하는 기쁨이 오지 않을 때 불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세상의 기쁨거리를 찾아내 화목제로 제거하지 않는다면 십자가 생활화를 해도 기쁨이 없고 정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속죄제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부자 관계에 비유하자면 내가 세상의 기쁨거리에 끌려가는 상태는 영적인 탕자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부부 관계에 비유하자면 내가 세상의 기쁨거리에 끌려가는 상태는 영적으로 간음한 아내입니다. 세상의 기쁨거리는 내 마음 내부에 비곗덩어리처럼 유착되어 있습니다. 이 비곗덩어리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움직임은 세상을 향해 되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 내부의 기쁨거리를 제거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일이 부지중에 범죄 하게 됩니다.
내가 번제단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24시간 작동하지 않고 잠깐이라도 꺼진다면, 세상의 기쁨거리는 부지중에 마음을 세상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십계명을 어길 뿐만 아니라 지금 하늘에서 내려오는 실시간 계명을 어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가 말하고 행동하기 원하시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기에 이로부터 속죄제가 필요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내 마음이 세상을 향해 달라붙었고, 마음의 배를 뱀처럼 땅에 붙이고 기쁨거리를 찾는 상황을 발견했다면 얼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내가 치러야 할 죗값을 예수님이 죽음으로 속해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함을 통해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번제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드리고, 소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연합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화목제와 속죄제와 속건제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로부터 속건제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부지중에 세상의 기쁨거리를 추구하며 끌려다닐 때 말과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손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에게도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이로부터 속건제의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릴 때 ‘세상의 기쁨거리를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물까지도 내 것으로 삼기에 주저함이 없었구나. 내 마음이 세상에 내려오는 바람에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루시려고 하는 뜻과 계획을 좌절시키는 손해를 끼쳤구나. 또한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이웃에게 내려와야 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손해를 끼쳤구나.’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웃에게 물질적 손해를 끼치지 않았더라도 나를 통해 이웃에게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점에서 손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나 때문에 이웃들은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보시기에 좋은 자발적인 뜻이 이루어질 기회를 상실하게 된 것이 문제입니다. 정작 이웃들은 이러한 내면의 싸움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내가 선민이라면 속건제의 필요성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이웃입니다. 동서남북 교회 모임에서 만나는 분들도 나의 이웃입니다. 내 마음이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의 의미대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화목했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도 이루어지고, 나의 이웃들 또한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아버지의 뜻 안에 포함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러한 제사의 의미를 성취하지 못함으로써 이웃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접적으로라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게 된 것입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상황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면 내 삶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때 세상에는 나의 지정의육이라는 껍데기가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지정의육으로 맺어지는 관계의 확장을 통해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시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관계를 확장해 보면 그 관계에는 대한민국 전체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내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의 의미를 충실하게 이행하지 못하고 마음이 세상으로 되돌아가서 부지중에 범죄 할 때, 나와 관계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좌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관계를 확장하면 대한민국 전체도 포함될 수 있기에 나 때문에 대한민국 전체가 손해를 보는 상황까지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속건제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어마어마하게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사는 동안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5대 제사의 의미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나 한 사람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의 지정의육이라는 껍데기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끼실 수 없게 된 것이고, 이로부터 관계 속에서 이루실 창조적이고 주권적인 계획들도 상실하게 됩니다. 내가 5대 제사를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이웃과 대한민국과 인류에게 끼치는 손해가 막대하다는 사실은 실감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인류 전체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냐?’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 한 사람이 5대 제사의 취지와 의미를 충족시킬 때 관계의 확장을 통해 대한민국과 지구 전체도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뜻과 계획 속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 한 사람이 5대 제사의 취지와 의미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그 기회도 상실되고 맙니다. 내가 속한 가족이 손해를 보고, 내가 속한 직장의 모든 사람이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를 쓰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삶의 현장에서 5대 제사의 의미를 실현해야 합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배상의 의미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번제에서는 예수님과의 연합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세상에 대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연관하여 속죄제와 속건제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죗값을 속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화목제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내 마음 내부의 기쁨거리들을 확인 사살하는 죽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화함으로써 5대 제사를 생활 속에서 실현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일용할 양식을 먹고 사는 이유는 이러한 제사의 의미를 실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제사를 통해 주어진 제삿밥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은 제삿밥입니다. 그 제삿밥을 먹고 힘을 얻어서 언제 어디서든 5대 제사를 실현하는 제사장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 가지셨던 사랑의 마음, 욥을 향해 가지셨던 사랑의 마음이 이제는 여러분들이 그 대상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삶의 현장에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5대 제사를 실현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므로 힘을 얻어 세상을 살기 위한 일용할 양식이 우리 여생의 마지막 날까지 제삿밥이 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