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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을 켜고 믿음을 행하는 법>의 줄거리 :
요단강 도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당신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을 이스라엘 백성들 눈앞에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을 드러내신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하나님을 의식에서 놓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일을 막기 위해서 본문은 하나님을 기억하여 의식하게 하는 표시를 만들도록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오감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제6의 감각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을 켜놓고 믿음을 행하는 법을 함께 살펴봅니다.
믿음을 켜고 믿음을 행하는 법
(여호수아 4:1~24)
1.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3.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 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7.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8.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
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요단강 도하를 기념하여 지파 수 대로 열두 돌을 세운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는 순조로운 요단강 도하의 광경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모든 백성이 요단강을 다 건넌 후에 제사장이 법궤를 메고 올라오자 요단강이 원래대로 회복되었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또 다시 열두 돌로 기념비를 세운 것이 언급됩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믿음을 켜고 믿음을 행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믿음을 켜야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은 내면의 행위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이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믿음은 없는 것이고, 믿음을 행하려면 믿음을 켜야 합니다. 믿음을 켠다는 것은 내가 의식적으로 해야 함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이것저것에 신경을 쓰며 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고,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좋음이며, 내 머리털까지 다 세시며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산다면 믿음이 꺼진 상태입니다. 내가 의식에서 믿음을 켜놓지 않으면 믿음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집안에 TV가 있고 냉장고가 있고 에어컨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TV도 냉장고도 에어컨도 켜지 않는다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믿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켜지 않은 냉장고로 냉장 효과를 볼 수 없듯이, 켜지 않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2,000년 교회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 오류가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전하지만 믿음을 갖고 믿음을 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집에서 자녀를 보며 반응할 때 하나님의 있음도 좋음도 주권자 되심도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을 켜지 않는 한 하나님은 없음이 되고, 좋음도 아니며, 주권자 되심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해도 믿음을 켜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켜놓지 않은 믿음에 구원은 없습니다.
믿음을 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자녀에게 개입하려고 한다면 믿음이 꺼진 상태입니다. 믿음이 켜있는 상태에서는 내 마음대로 자녀에게 개입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계시고, 유일한 좋음이고, 주권자 되심이 분명하다면 자녀에게 의식을 빼앗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대하는 중에도 하나님이 항상 먼저입니다. 마음을 빼앗겨서 의식이 자녀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면 얼른 십자가를 봅니다. 그럼으로써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반응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권자 되심을 기억함을 통해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삶에서 2~3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보고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고,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켜는 것이 믿음을 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2~3초도 걸리지 않지만, 문제는 이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꺼진 상태에서는 하나님은 없음이고, 좋음이 아니며, 주권자도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몸으로 대하는 대상들에 관여한 다음에 뒤늦게 십자가를 보려 하지만 요단강이 범람하듯이 세상이 범람한 상태이기에 십자가에서 죽으려 해도 안 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못 죽었다는 후회만 남을 뿐입니다.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믿음을 켜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다 저질러 놓고, 마음에 세상을 가득히 담아놓고, 뒤늦게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죽을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 놓고 죽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켜놓고 믿음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행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열두 돌을 두 곳에 세웠습니다. 법궤를 메고 제사장들이 서 있던 자리에 열두 돌을 세웠고, 또 요단강 바닥에서 열두 지파의 대표가 돌을 하나씩 들고 와서 도하 후에 첫 번째로 진을 친 길갈에 세워 표징으로 삼았습니다. 본문에서 표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오트(אוֹת)는 ‘표시하다, 나타내다’라는 뜻의 동사 우트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표징으로 남긴 열두 돌은 단순히 요단강 도하 사건을 역사적으로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그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계셔서 선민을 사랑하셨음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열두 돌을 보면서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모세오경을 끝내고 여호수아서에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내용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난 대목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 할례가 등장했습니다. 몸에 할례를 행한 이유는 표시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에서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례의 표시를 볼 때마다 지금 이 자리에 살아계시며 주권자로서 나의 삶을 계획하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고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돌을 쌓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에서 돌로 제단을 쌓기를 반복했습니다. 오가다가 돌로 쌓은 제단을 볼 때마다 하나님 만난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는 표시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식하게 하는 표시였습니다. 법궤, 분향단, 떡상, 등잔대 등의 성막의 기구들은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오감각이 닿을 수 있는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는 표시를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절기도 열두 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절기를 행함이란 단순히 과거에 하나님이 역사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만나야 할 하나님을 의식하도록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 만나야 하는 하나님은 선민을 사랑하셔서 열 가지 재앙으로 출애굽을 시키셨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여 살리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절기를 지킨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이야기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잊지 않고 의식하며 사느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몸부림을 치듯이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의식하기 위해 각종 표시를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선민이라면 어쨌든 하나님과 관계해야 합니다. 관계하려면 하나님을 상대자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안 나고, 맛볼 수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상대자로 포착하여 관계하려면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대상만을 의식하며 살다 보면, 상대적으로 오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하나님은 포착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꾸 망각 속으로 빠져버리고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오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각종 표시를 제시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막 안에는 십계명 돌판을 담은 법궤가 있습니다. 분향단에서 피어오르는 향에서는 냄새가 납니다. 떡상은 맛볼 수 있는 떡이 올라갑니다. 등잔대에서는 불을 켜서 빛을 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감각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간의 의식 구조를 이해하시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모든 차원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고, 냄새 맡을 수 없고,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는 표시를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약에 등장한 모든 표시의 완성으로써 주님의 십자가가 제시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의식하는 믿음이 켜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고백이 없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식할 수 없습니다. 설령 24시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함이 없다면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의식할 뿐이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론자들이 평화라는 개념에 사로잡혀서 자나 깨나 평화만 생각하고, 성평등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서 자나 깨나 평등만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개념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간이 길게 유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념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해서는 실제 하나님과 마주하는 관계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믿음을 켜서 하나님께로 가야만 실제 하나님을 마주하여 의식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기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대자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감각입니다. 사람에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각이 있습니다. 이에 더해 믿음은 제6의 감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시각을 잃는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다양한 색깔을 인지할 수도 없습니다. 또 청각을 잃는다면 아무리 큰 소리여도 들을 수 없고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미각을 잃는다면 산해진미의 맛을 볼 수 없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라는 제6의 감각을 잃으면 예수님도 하나님도 성령님도 천국도 성경의 내용도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도 뜻도 안개처럼 동시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제6의 감각이 없거나 꺼져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이루고 계신 삼위일체, 천국, 성경의 모든 장엄한 영적 내용들의 세계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육체의 오감각에 의존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계 안에 갇히고 맙니다.
방에 전등을 끄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깜깜함이 임하듯이, 믿음을 꺼버리면 그 장엄한 영적 세계는 다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마치 바퀴벌레가 어둠 속에서 감각에 의존해 먹이를 찾듯이, 오직 육체의 오감각으로 느껴지는 대상들에만 반응하는 벌레같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어둠 속에 갇힌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장엄함 대신 참혹함과 참담함과 비참함으로 결국 지옥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삶 속에 갇혀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휘황찬란한 번영을 이루었다고 해도 믿음이 꺼진 상태라면 저주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제6의 감각으로서의 믿음이 꺼진 상태를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오감각으로만 만나는 세상 속에 갇혀서 하나님과 전혀 관계하지 못하는 상태를 상상해 보면 믿음이 꺼진 상태가 얼마나 큰 저주인지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제6의 감각인 믿음을 켭니다. 그러자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질 수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장엄한 영적 세계의 실체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 머물면서 삽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6의 감각인 믿음은 내가 의식적으로 켜야 합니다. 사람의 오감각은 자동적입니다. 눈을 뜨면 저절로 보이고, 귀에 저절로 소리가 들리고, 코는 저절로 냄새를 맡고, 입에 들어온 음식에서는 저절로 맛이 느껴집니다. 손에 닿는 대상의 질감이 저절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제6의 감각인 믿음만은 예외입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믿음을 켜지 않으면 하나님은 저절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천국도 저절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6의 감각인 믿음은 내가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켜야만 합니다.
이로부터 믿음을 행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행함이란 제6의 감각인 믿음을 켜놓은 상태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감각이 켜있는 바탕 위에서 보며 행동하고, 들으며 행동하고, 냄새 맡으며 행동하고, 맛보며 행동하고, 만지며 행동합니다. 일단 믿음의 감각이 바탕인 상태에서 무엇이든 해나가는 것이 믿음을 행함입니다.
사람에게는 오감각이 존재하지만, 특정 감각에 대한 선호도나 민감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눈으로 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고, 귀로 듣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코로 냄새 맡는 것, 입으로 맛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냄새를 맡는데 집사람은 못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 좋은 냄새만 잘 맡기 때문에 집사람이 저에게 저주받은 코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오감각 중에서도 특히 민감하거나 선호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민감도는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행함이란 하나님을 의식하는 제6의 감각인 믿음을 켜놓은 상태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만지면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로부터 믿음을 켜놓고 오감각을 작동하며 사는 사람과, 믿음이 꺼진 상태에서 오감각만으로 사는 사람과의 차이가 생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갔습니다. 다만 당시의 제자들은 제6의 감각인 믿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오직 육체의 오감각으로만 예수님을 보고 들으며 따르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의 감각이 없던 제자들에게 권능으로 영적 세계인 천국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번역을 하듯이 육체의 오감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천국이라는 세계를 눈에 보이게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랍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랍어를 볼 때는 꾸불꾸불한 글씨로 보일 뿐입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예수님께서는 마치 번역을 하시듯이 제자들이 육체의 오감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천국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을 본 제자들은 황홀경에 빠져서 산 아래 세상에서 추구하던 일들을 다 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그만큼 세상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너무 좋은 것을 마주하면 그 외의 것은 다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자꾸 잊어버리는 이유는 세상을 그만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문제가 생겨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결국은 문제의 해결을 좋아함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해결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천국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번역해서 보여주시자, 제자들은 세상일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가족도, 미래의 꿈도, 동료 제자들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궁극적 좋음을 마주했을 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다른 것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변화산 사건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번역해 보여주신 것이지 실제 천국의 모습은 아닙니다. 다만 정확하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일을 까마득하게 잊을 정도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좋음이고 천국이 좋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영적 세계인 천국의 좋음을 번역하여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육체의 오감각 대신 믿음의 감각을 켜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좋음과 천국의 좋음을 믿음으로 붙잡습니다.
믿음을 켜면 우리의 의식 속에는 삼위 하나님과 천국의 좋음이 새겨지게 됩니다. 이로부터 행함에서 믿음을 켜지 않는 사람들과의 차이가 생깁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믿음을 켠 상태에서 행함이 이루어집니다.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의 권능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의 좋음이란 세상일이 이렇든 저렇든 아무 상관 없게 만드는 좋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켬으로써 이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 남편의 수입이 없어진 상황을 마주한다면 어떠한 반응이 나올까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켜놓자, 남편의 수입이 없어진 상황은 나의 행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내 마음에서 잊힐 정도로 티끌 같은 일로 여겨집니다. 이것이 믿음을 켜고 행함입니다.
우리는 변화산 사건에서 제자들이 천국을 보았듯이 천국이 육체의 오감각으로 느껴지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의식적으로 제6의 감각인 믿음을 켜고 믿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듯이 천국의 좋음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천국의 좋음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귀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좋다고 느끼듯이 천국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천국이 나쁨이 되는 것은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의 좋음은 언제나 사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천국을 믿음으로 느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감각이 없다면 육체의 오감각을 통해 저절로 느낄 수 없는 천국은 나와 무관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드시 믿음을 켤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감각으로 천국의 좋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을 통해 천국의 좋음을 가질 수 있는 자로 선택을 받았다면 이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의 좋음을 의식적으로 믿으면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돈을 못 벌어 왔다는 상황에 대해 믿음을 적용해 봅니다. 천국이 좋음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내 마음이 아버지를 마주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내게 천국을 주시기로 이미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의식적으로 믿음을 작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행함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국이 좋다고 하니 그러려니 합니다. 변화산이 황홀했다고 하니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조금도 적용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인간을 인격체로 만드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하여 믿음을 켜서 믿음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보는 것과 똑같이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변화산 사건을 통해 천국의 좋음을 느꼈듯이, 우리는 믿음을 통해 천국의 좋음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천국의 좋음이 내 것이 된 상태는 눈으로 보듯이 육체의 오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감각으로 느껴집니다. 의식적으로 믿음의 내용을 활성화할 때 ‘천국은 세상을 잊을 만큼 좋음이다. 천국의 좋음이 내 것이라면 지금 남편이 돈을 못 벌어 오는 것은 잊어버릴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라고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 같은 상황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이 났어도 천국을 봤다면 전쟁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천국의 좋음은 전쟁 따위를 잊어도 되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켜놓고 믿음을 행할 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안 한 채 저절로 느껴지면 좋겠다고만 여긴다면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을 켜놓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켜놓고 행해야만 합니다. 미래가 걱정이 되는 상황에서 믿음을 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머리털까지 다 세시고 나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획하시는 주권자이시다. 그렇다면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은 광야에서 40년 이스라엘 백성도 다 먹이셨다.’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믿음을 행할 때 사용하라고 주신 재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재료들을 활용하여 믿음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이 먹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머리털까지 세시고, 참새 한 마리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내의 전화번호, 남편의 전화번호를 외울 수 있다면 이것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본적인 사실들을 켜놓고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의식한다는 것이고 의식적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죽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서 하나님을 마주함으로써 알게 된 내용들은 믿음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믿음의 내용을 인격적으로,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써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행함은 싸움입니다. 싸울 수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꺼진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켜진 믿음으로 믿음을 행할 때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믿음을 적용하는 것에 구원받은 감격이 있습니다. 믿음의 적용이 처음에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내 마음의 느낌도 점점 강화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열두 돌과 같은 표시를 반복하여 만들게 하신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켜게 하고, 믿음이 퇴화하지 않도록 자극하시기 위함입니다. 쓰지 않는 감각이 퇴화하듯이 믿음이라고 하는 제6의 감각도 켜놓고 자꾸 자극하여 활성화하지 않으면 퇴화하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죽음인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부활 승천하여 마주하는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삶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이 무엇보다 크게 느껴질 수 있어야 합니다. 회사에서 하나님보다 사장님이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믿음을 켜놓고 하나님의 존재감이 더 커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적용하는 것이 믿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장이 나를 어찌하랴? 사장은 나를 해고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장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주권자 하나님이 나를 이 회사에서 나가게 하시려고 하는 일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하다 보면 믿음의 불빛은 점점 강렬해집니다. 믿음의 내용들의 강도도 점점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희미한 상태에서 시작하지만 믿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눈으로 보고 귀로 듣듯이 실질적 느낌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들어왔습니다. 믿음을 켜고 믿음을 행하는 일을 계속해 왔다면 이제는 믿음이라는 제6의 감각이 굉장히 민감하고 강력하게 활성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쯤이면 저나 여러분이나 천국을 실감하며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믿음을 켜지 않고 믿음을 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의식적으로 믿음을 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을 계산하고 고려하고 적용함으로써 믿음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24시간 믿음이 켜져 있는 상태에서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계산에 넣는 믿음의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꺼져있는 제6의 감각인 믿음을 켜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따라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며, 하나님에 대해 배운 모든 지식이 믿음이 되어서 삶에 적용하는 믿음의 행위가 끊이지 않게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