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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빨리 하나님 이름 버려야 할 자>의 줄거리 :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것이 하나님 이름입니다.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하나님 이름입니다. 하나님 이름은 어마어마한 축복의 근원이자 동시에 삶에서 만나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름은 그 이름과 상극인 마음을 가진 인간에게는 정말 무시무시한 방사성 물질과도 같습니다. 절대로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이렇게 상극인 두 요소를 버젓이 끌어안은 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름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부터 신앙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빨리 하나님 이름 버려야 할 자
(사무엘상 5:1~12)
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3.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5.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8.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9.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11.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본문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두고 어떤 씨름을 했는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빨리 하나님 이름 버려야 할 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빨리 버려야 할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고, 하나님의 이름을 가까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빨리 버려야 할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가능한 빨리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이 그나마 그리고 잠시나마 훨씬 더 유리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은 양면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유익함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것이 하나님 이름입니다. 반면 실질적인 유익함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하나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빨리 버려야 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란 마치 체르노빌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과도 같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하나님의 이름과 상극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상극은 만나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는 관계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가짐이 하나님의 이름과 상극을 이루고 있는 상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도 하나님의 이름과는 상극인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과 상극의 마음 상태가 되는 것은 엄청나게 쉽습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 상태를 절대로 바꿀 수 없거나 포기할 수 없다면 빨리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이 최고입니다. 하나님 이름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올바른 믿음의 뿌리입니다. 이 깨달음이 없으면 십자가 복음도 제대로 받아서 생활화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이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이유도 하나님 이름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간구가 첫 번째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너무나 쉽고 자연스럽게 상극인 상태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하나님의 법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두었습니다. 그러자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습니다. 신상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이튿날에는 신상이 법궤 앞에서 또 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습니다.
주석을 보면 이러한 상황을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다곤 신을 굴복시키셨음을 보여준다.’ 혹은 ‘다곤 신이 여호와 앞에 항복했음을 상징한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주석들은 다곤이 엎드러졌다는 말에 집중했습니다. 엎드러졌다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나팔(נָפַל)로써 ‘굴복하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모독적이기까지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곤을 상대로 한판 대결을 겨루기라도 하셨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다곤은 일개 신상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물건인 것입니다.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물건과 힘겨루기를 했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말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물건에 대해 승리를 쟁취하시고 굴복시키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전리품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법궤가 정교하게 만들어진 상자로 보였기에 자기들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다곤 신전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겼다는 이방인다운 생각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신보다 강하다! 우리가 다곤 신을 의지했으므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이스라엘을 굴복시켰다!’라는 의도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다곤 신전에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법궤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합니다. 신명기 12장 5절을 보면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택하신 곳이란 법궤를 둔 성막을 가리킵니다. 또 열왕기상 8장 29절에 솔로몬의 간구가 기록되어 있는데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라고 했습니다. 성막이나 성전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를 두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가 블레셋의 다곤 신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공존할 수 없는 다곤 신이 상징하는 바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다곤은 인간이 만든 일개 신상입니다. 이러한 다곤은 바알이나 아세라와 마찬가지로 블세셋 족속이 숭배하던 풍요의 신입니다. 인간이 가진 풍요로움에 대한 바람과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믿었던 신이 다곤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다곤 외에도 다양한 신들이 있었습니다. 바알, 아세라, 아스다롯, 아낫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풍요를 관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아데미 신이 언급되기도 하고, 고린도에서는 아프로디테 신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풍요의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우선적인 소원과 열망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스를 보면 전부 돈과 관련되었습니다. 돈과 무관한 뉴스는 하나도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의 다곤 신전의 의미를 풀어봅니다. 블레셋의 아스돗이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풍요로움에 대한 열망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다곤 신상은 풍요로움에 대한 아스돗 사람들의 소원과 바람의 결정체였습니다. 눈에 보이게 신상을 만든 것은 아스돗의 사람들이 풍요로움을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다는 표시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세상적 풍요로움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는 다곤 신전 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를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러자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뚱이만 남았습니다. 이 사건이 뜻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다곤 신과 싸워서 이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 풍요로움에 대한 바람이나 소원을 품은 마음과 하나님의 이름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 이름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궁극적 이유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좋음의 대상으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추구한 것입니다. 이들이 추구했던 것은 세상적 풍요로움이었습니다. 풍요로움은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소원이자 열망입니다. 그 위에서 건강을 바라고, 형통을 바라고, 명예나 인기를 바라고, 성공을 바라고, 재미와 즐거움을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에 풍요로움이 전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원인은 풍요로움에 대한 열망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곤 신전이란 사람들의 풍요로움에 대한 열망이 응축된 곳이고, 인류에게 보편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바람을 공유하고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가 들어오자마자 다곤 신상이 박살이 납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바람과 하나님의 이름이 공존할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기존 영적 지도자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루에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시려고 할 때, 제일 먼저 손을 봐야 한다고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하나님 이름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어떨 때 사람의 마음이 다곤 신전이 되어버리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게 돈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월급이 좀 올라갔으면 좋겠다. 주식이 올라갔으면 좋겠다. 계좌에 돈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정말 돈벼락이라도 한번 맞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갖고 삽니다. 그렇다면 나의 인격 자체가 다곤 신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이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에 세상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품는다면 너희의 인격은 다곤 신전이 된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마음이 다곤 신전이 된 상태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풍요로움을 바라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면서 입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담습니다. 이것은 다곤 신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가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상극인 두 요소를 동시에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시작하시기에 앞서 이러한 상태의 문제점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열망은 뭐니 뭐니 해도 물질적 풍요로움입니다. 건강은 몸이 아플 때 갖게 되는 소원이지만, 풍요로움은 자연스럽게 제일 먼저 갖게 되는 소원입니다. 자녀를 마음에 품을 때는 그냥 품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풍요롭기를 바랍니다. 직업을 마음에 품을 때도 그냥 품는 것이 아닙니다. 직업을 통해서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쉽게 말해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내 인격은 다곤 신전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다곤 신전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다곤 신전 안으로 법궤가 들어온 상태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삶이 평안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세상적 풍요로움에 대한 바람이 면면히 흐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상극의 대상을 동시에 품고 있기에 삶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다곤 신상은 풍요로움을 바라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법궤가 들어 오자 다곤 신상이 엎드러지고 사지가 잘려서 몸뚱이만 남았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풍요로움을 바라는 마음의 목과 손목을 치시고 엎드러지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에서 풍요로움에 대한 소원이 끊이지 않는다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세상적 풍요로움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고서 일시적으로라도 평안하기를 원한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훨씬 더 일관되게 세상을 향해 집중하여 살 수 있습니다.
아스돗에서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난리가 나자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가드로 옮깁니다. 그러자 가드에서도 독한 종기가 발생해서 또 난리가 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법궤를 에그론으로 옮기는데 그곳에서도 난리가 납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블레셋 사람들로서는 아주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이들은 다곤 신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 대해 풍요로움을 소원하고 희망하고 열망하는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를 내보냅니다.
이와 대비되는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자들은 기독교 종교인들입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은 세상에 대한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바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풍요로움과 연관하여 자녀, 건강, 배우자, 직업에 관한 열망과 희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끝까지 부릅니다. 이러한 상태라면 오히려 블레셋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세상적인 풍요로움으로 대표되는 성공이나 형통 등에 대한 바람과 소원을 마음에서 끊어버리고 지워버리고 없애버릴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빨리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사는 동안이라도 충돌로 인한 소모전을 치르지 않고 일관된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블레셋은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다곤 신상과 신전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를 버리기로 합니다. 여러분도 따져 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한 풍요로움의 소망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당 다니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자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세상을 향한 바람과 소망도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뒤에 어차피 천국에 못 갑니다. 평생 마음속으로는 세상을 담고 세상을 좋아했습니다. 마음에 담은 세상 것을 제대로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 세상에서 비전이다 뭐다 하며 마음에 품고 살며 하나님을 수단으로 동원했습니다. 그렇게 살고서 죽은 다음에 천국 가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세상 것을 바라기만 하다가 죽은 사람보다도 더 큰 벌을 받고 더 큰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지금도 지구에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평생 입에 담지 않고 세상 것을 향한 풍요로움에 대한 소원과 열망만을 가진 채 평생을 일관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소원과 바람을 끊어낼 수 없어서 어차피 천국을 못 갈 바에야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이 유익합니다. 천국을 가려면 사는 동안 마음에서 세상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열망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풍요로움에 대한 열망이 들어와 있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대신 들어와야만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할 수 없다면 굳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어리석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앞서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은 결국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좋음에 대한 열망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에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본문의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에는 블레셋처럼 독한 종기의 재앙과 사망 같은 직접적인 환난을 주시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이름과 세상적 풍요를 바라는 마음은 상극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세상적 풍요를 바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블레셋처럼 격렬한 충돌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선민일지라도 인격이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민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볼 수 없는 하나님보다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적 풍요로움을 더 먼저 좋아하고 사랑할 것을 아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주셨고, 세상적 풍요로움과의 상극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사 제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상번제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제시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 종일 풍요로움에 대한 소원을 품고 살았습니다. ‘좀 더 벌었으면 좋겠다. 좀 더 가졌으면 좋겠다. 좀 더 여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좀 더 재미를 누렸으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명품을 좋아하고, 좋은 아파트에 살기를 바라고, 비싼 자동차를 바라고, 자녀들이 여유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블레셋과 같은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성막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어린양이 상번제로 드려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세상적 풍요로움에 대한 바람에서 비롯되는 충돌의 힘이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 해소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양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바람과 열망을 더 먼저 가지고 있고, 더 깊이 가지고 있고. 더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어린양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번제 어린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합니다. 우리도 세상적 풍요로움을 바라는 것은 블레셋과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처럼 하나님보다 물질적 풍요로움에 대한 바람이 은근히, 지속적으로, 더 깊이, 더 먼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는 본래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세상적 풍요로움을 바라는 마음과 하나님의 이름은 상극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풍요로움을 바라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마치 체르노빌 원전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을 안방 한가운데에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것과 똑같이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험한 일이 블레셋이나 이스라엘이나 우리에게나 똑같이 일어날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상번제 제도를 만드셨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이 방사성 물질이 아니라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의식을 떼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이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비롯한 모든 은혜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고백 안에 포함된 것이고 따라오는 것들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고백이 이러한 내용들을 다 포함하고 있기에, 따로 죄를 사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대신 잠시라도 십자가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눈을 떼면 내 속에서 더 깊이, 더 지속적으로, 더 먼저, 발생하고 있는 세상적 풍요로움에 대한 소원과 열망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은 축복의 근원이 아니라 방사성 물질이 되어버립니다. 십자가를 끝까지 의식에서 놓치지 않고 ‘나는 죽은 자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무슨 세상의 풍요로움을 바라느냐.’라고 고백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이름이 어떤 축복을 가져다주는지 한번 경험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기를 쉬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풍요로움에 대한 소원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잠자는 중에도 풍요로움에 대한 소원은 지속됩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고 하는 의식이 끊이지 않고 지속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삶을 인도해 나가십니다. 예를 들어 재정적인 측면만 꼬집어 본다면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하실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 풍요로움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고,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어렵게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정적인 상태가 갖는 근본적인 의미는 제로입니다. 재정 상태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으면 아무 의미도 없을 세상 물질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과 상극인 상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을 다곤 신전으로 만든다면 일평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나오는 충돌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풍요로움을 바라는 나의 열망의 목이 잘리고, 양손이 잘리고, 양발이 잘리고, 자빠지고 넘어지면서 마음의 평강과 감사와 즐거움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은 방사성 물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고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의 이름은 축복의 근원입니다. 여러분들에게서 어떤 삶이 이루어지는가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삶을 위한 조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은근히 바랬든 노골적으로 바랬든 그 바람이 지속적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붙잡으면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름보다 큰 선물은 달리 없습니다. 그 이름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축복인 만큼 동시에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깨달음 위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의 빌딩을 새롭게 지어 나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축복이 되는 유일한 비결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붙잡되, 이제까지 돈을 향해 가졌던 바람만큼 강렬하게 붙잡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