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追憶의 옛 西部映畵 鑑賞]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kyobobook.co.kr%2Fnewimages%2Fmusic%2Flarge%2F3724%2F2427389.jpg)
[追憶의 옛 西部映畵 鑑賞]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1962)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1부
www.youtube.com/embed/_wr7DwSbJr8"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2부
www.youtube.com/embed/NlTec86FlxA"
감독 : 존 포드
각본 : 제임스 워너 벨라, 윌리스 골드벡, 도로시 M. 존슨
촬영 : 윌리엄 H. 클로디어
출연 : 존 웨인, 제임스 스튜어트, 리 마빈, 베라 마일즈,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앤디 데빈
줄거리:
영화광들이 좋아하는 영화 명단이란 변덕스럽게 뒤바뀌는 것이다. 내가 특히 그렇다. 내가 영화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게 해 준 <터미네이터2>는 지금은 그저 그렇다(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걸까?). <포레스트 검프>도 뭔가 유치해졌다. 맹렬히 지지하던 이창동의 <오아시도>도 얼마전 다시 보고 순위를 한참 하향 조정했다. 그러나, 찾아보면 몇십년 동안 용하게도 그 변덕의 파도 위에서 버티고 서 있는 작품들이 있다. 그런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조강지처이자 든든한 친구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그 정도쯤 되면, 거의 영화적 기준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 되기까지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그런 작품이 딱 셋 있다. 앞선 두 편의 영화들에 대한 글은 먼젓번에 썼다. <록키>와 <졸업>이다. 그리고 이 지면에 정말 소중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려 한다. 벌써부터 떨린다.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다.
나는 이 영화를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보았다. 나는 그때 이 영화를 가장 사랑하는 영화의 리스트에 올렸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더더욱 많은 영화들을 보게 된 후로,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보기 두려워졌다. 그때만큼 좋은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를 넘어서서, 위대한 영화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 영화가 나의 졸렬한 명단에서 끝끝내 지워지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존 포드는 감독들이 가장 존경하는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그 절대적인 권위의 카리스마와 쉴틈없이 영화를 만들어내면서도 강대한 생명력을 가지도록 한 불가사의한 창조력(그런 면에서 존 포드와 비견될 만한 감독은 알프레드 히치콕 밖에 없다. 혹스조차 그를 대신할 수는 없다) 때문일 것이다. 몇장면으로도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스탠리 큐브릭조차 능가하는 영화적 서명은 말할 것도 없다. 허나 무엇보다 뛰어난 것은 따로 있다. 그는 삶을 대신할 수도 있는 영화를 만들었던 정말 몇 안되는 감독들 중 한명이다. <수색자>에서 그토록 그리워하고 사랑하던 조카를 마침내 찾아냈을 때의, 환희와 상실이 뒤섞인 이중주. 군상들과 함께 비비며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여행으로서의 삶을 담은 <역마차>. 잃어버리고 난 뒤에 깨닫고 나면 너무 늦다는 것을 담담하게 회고하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까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은 계속된다.
사실상 존 포드 자신의 손으로 막을 내린 서부극이라는 장르의 황혼이라는 측면에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21세기에도 선사하고 있는 감정적 정취는 상상 이상이다. 영화는 세개의 운명을 담고 있다. 서부극 달인 존 포드의 마지막과, 서부극의 아이콘 존 웨인의 (사실상)마지막, 그리고 서부극이라는 장르 자체의 마지막. 영화는 <용서받지 못한 자>와 앞서서 장르 달인의 손으로 장르를 묘지에 안치시킴으로서 종결로서의 회한이 보여주는 극치를 담아낸다. 시간이 흐른 미래에 이 영화를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가슴아프다는 점에서 존 포드는 이 영화 하나로 서부극을 불멸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서부극은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고, 우리가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존 포드를 생각할 때마다 영원히 '사라져간다.' 지지 않을 일몰. 꺼지지 않을 잿더미.
영화에는 가슴 아픈 순간들이 있다. 방 안에 외로이 놓인 도나폰의 관이 보여질 때, 할리가 톰의 집 주변에서 보았던 선인장 꽃을 그녀가 왜 애틋하게 생각하는지 알게 될 때, 톰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인 집을 불태울 때, 혹은 결국에 서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혹은 (미래에 이 영화를 볼때)서부극이라는 장르 운명과 존 웨인이라는 배우의 생명력이 어떻게 끝나갔는지 우리가 이미 예상하기 시작할 때 말이다. 그때마다 이 영화는 정말 고문적인 감정 착취로도 얻어낼 수 없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숨은 회한과 노스탤지어를 끌어내어 존 웨인과 함께 쓸쓸히 퇴장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랜스가 신본으로 다시 돌아와서 살아야겠다고 말하고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할 때, 열차의 관계자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분에게 못해드릴 건 없죠'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랜스는 성냥불을 그냥 꺼버린다. 우리는 둘의 표정에서 아픈 마음을 읽어낸다. 그럼에도 열차는 계속 달린다. 시대는, 할리는, 관객은 도나폰을 잊었었지만 우리는 결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간결하게 묘사하는 나머지 우리의 가슴이 다 미어지는 것이다.
존 포드는 원래 무뚝뚝한 사나이다(자신을 추앙했던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그의 영화가 가진 예술성을 들먹이며 포장할라치면 그는 언짢아했다.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난 존 포드요, 서부극을 만들었지'라는 멘트로 시작한 것도 유명하다). 그는 주변을 담담하게 둘러본다. 그는 카메라 무빙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감독이다. 할리의 마음이 완전히 랜스에게 갔다는 것을 알고, 고주망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가 황량한 집을 바라볼 때 카메라는 그의 슬픔을 존중하기 위해 약간의 움직임을 허용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인물의 움직임을 따르는 무빙이다. 공간성의 변화는 다이렉트 컷을 통해서 간결하게 표현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물 간의 심리적 뉘앙스와 은근한 정취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잔재주를 선호하지 않으므로 영화는 시선 자체가 아닌 시선의 대상을 존중한다. 그건 곧 인생에 대한 존중이다. 영화에 담기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존 포드가 그런 것처럼 카메라도 진중하고, 엉덩이가 무겁다.
그 단단한 형식은 영화 속에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간결한 장치들로도 파악이 가능하다. 토요일 밤에 도나폰이 할리의 주점으로 찾아올 때, 그는 검은 옷에 하얀 모자를 쓰고 있다. 그가 어떤 남자인지 간결하게 설명하는 장치다. 그는 거친 남자이지만, 이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본질적으로 악할 수 없는 위인이다. 할리와 도나폰, 랜스 이 세사람은 공간적 흐름을 위한 풀샷을 제외하곤 한꺼번에 화면에 잡히는 일이 없다(이것은 곧 영화의 내용이기도 하다. 셋은 결국 모두가 행복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은 잊혀져야 한다). 리버티 밸런스가 주점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곤, 도나폰과 눈이 마주치는 장면을 보자. 밸런스의 눈은 거의 화면 정면을 쳐다본다. 도나폰의 눈은 화면 측면을 향한다(둘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존 포드는 피상적인 외부의 드라마에 집착하지 않는다. 보여주는 방식은 곧 인물의 심리를 그리는, 그만의 존중 방식이다. 이것들은 존 포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는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는 말하려 하지 않은 감독이다. 그가 맞다.
시나리오의 명쾌함과 거기 숨은 감각적 명쾌함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마지막 찬가로 손색이 없다. 영화가 시작하며 보여지는, 안쓰러운 노쇠한 인물들은 랜스의 회상에서 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들이 어떻게 변해버렸는지, 어떻게 늙어버렸는지를 보았다. 왜 그토록 가슴을 흔드는 상실감이 이 간결한 서부극을 감싸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오즈와 존 포드는 결국 동서양의 영화 쌍둥이이다. 그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 하지만, 끝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담담하게 퇴장해서 스크린 밖을 지킨다.
노인의 고집처럼 꿋꿋하게 지켜 나가는 형식의 굳건한 규칙과 삶을 바라보는 저 따뜻하고 사려깊은 시선, 총에 맞은 인간들이 보여주는 저 안쓰러운 몸짓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끝내 붙잡지 못한 아쉬움과 회한. 이것들로도, 존 포드의 영화가 왜 위대한지를 아주 조금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의 가슴에 남는 것은 항상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대만을 보고, 혹은 영화만을 보고 진실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왜 지금의 시대에 이 영화가 나와야만 했는가, 시대와 영화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를 둘러싼 진실의 대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슴아픈 영화는 시간을 부정하고 영속성을 얻음으로서, 존 포드가 영화사에 지워지지 않을 이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위대한 영화는 시대를 불문하고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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