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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京都) "千年 상인들의 고향 "
■교토의기업
{세라믹 콘덴서 분야의 세계 1위인 무라타 제작소,/ 첨단 센서의 대명사 옴론, /콘덴서 세계 1위의 니치콘,/ 아메바 경영으로 유명한 교세라,/ 정밀모터 분야의 세계 1위 일본전산, /반도체 제조설비 세계 1위 로옴 등이 모두 교토의 기업이다.}
이들 기업들은 1000년 전통 교토 상인들의 商道에 현대식 경영을 접목, 추종불허의 세계 1위 중소기업
으로 성장했다.
★도쿠가와 이에아스/오사카성
[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군대에 압승, 사실상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는 1603년 교토에 니조성(二?城), 지방 성주들에게 에도성을 지으라고 지시하고, ★막부를 오사카에서 에도(도쿄)로 옮긴다고 포고했다.]
그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로 가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오사카와 그 영향권인 교토에 있기 싫었던 것으로 오사카나 교토가 있는 간사이 지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령이 살아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오사카 상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열렬한 추종자들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의 상권을 모조리 오사카 상인들에게 주었다.
그것은 오사카 상인들에게 뿐만 오사카와 인근 백성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기에 오사카 상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만큼이나 미운 존재로 여겼다.
■《오늘날에도 오사카 시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싫어하는 반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들에게 부를 가져다 준 데 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부를 뺏어갔기 때문이다.
1615년, 최후까지 항거하던 오사카 성이 함락되면서 천하통일이 이루어지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城(성)을 부수고 새 오사카 성을 지으라고 명했다.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던 곳이므로 그의 이미지를 오사카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서다.
그는 막대한 돈이 드는 오사카 성의 건축 비용을 자신
에게 비우호적인 도자마(外樣)다이묘들로부터 400만 석을 공출, 10년간 개축공사를 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령을 제거하고, 도자마 다이묘의 힘을 빼기 위한 이중 전략이었다.
■{이렇게 해서 오사카 성은 본래 크기의 4분의 1로 축소되어 개축된 지금의 오사카 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 지은 것이다.}
★교토의 부엌, 니시키 시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로 가기 전 교토에 니시키
(錦)시장을 만든다.
니시키 시장의 설치는 첫째는 자신의 교토 출장소에 해당하는 니조성에 각종 식자재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경제중심이었던 오사카 상인을 견제
, 오사카 상권을 최대한 교토 쪽으로 옮겨 오사카 상인
의 힘을 빼기 위한 것이었다.
교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니시키 시장을 만들기 전부터 이미 관록 있는 수많은 점포들이 있었지만
그는 거기에 음식재료나 주방용품 등을 공급하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최신식의 니시키 시장을 설치함으로써 천하의 상권을 교토 쪽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시장이 설치된 것은 1603년경, 당시로서는 일본 최대, 최고의 시장이 수도인 교토에 만들어지자 전국의 내로라하는 상인들이 니시키 시장과 교토에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했다].
채소 , 생선 , 쌀 , 부엌칼 , 어묵 장수등 상인들이 새로운 신천지 교토의 니시키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그 무렵 교토로 상경했던 상인들 중에는 오늘날까지 니시키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집안이 여럿 있다.
[시코쿠(四國)에서 이요마타(伊豫又)라는 사람이 1617년 교토로 상경, /니시키 시장에 가게를 내고 생선장수를 하다 지금은 사바 스시(고등어 초밥)를 팔면서 392년째 영업 중이고/, 주방용 칼등 부엌용
품을 전문적으로 파는 아리쓰쿠(有次)가 1619년에 개업, /일본을 대표하는 칼 가게로 지금도 영업중이 다.]
★또 니시키 시장 외, 교토 시내 곳곳에 새로운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1624년에 벽지 가게 가라죠(唐長), /녹차 가게인 리큐인(一休園)이 1626년에 개업했으며,/두부 가게
오단(奧丹)과/ 청주의 대명사인 월계관이 같은 해인 1637년,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를 파는 양념 가게 시치미야(七味家)가 1655년/인형 가게 나카야마(中山)가 1657년, /팥빵의 음우옥(音羽屋)이 1658년, 칠기그릇 가게 조히코(象彦)가 1660년,/ 문방구 구거당(鳩居堂)이 1663년, /사와야 떡 가게가 1680년,/ 야스이 목공소가 1688년,/ 니시오(西尾)야쓰야바시 떡 가게가 1689년, /1700년에는 후쿠다 금박,/ 1711년에는 같은 금박 가게인 호리킨 박분이 개업했다.]
♡[여관 미노키치(美濃吉) 1716년, / 오차 가게, 잇포도(一保堂) 차포 1717년,/ 젓가락 가게, 이치하라(市原) 1764년,/ 핫토리 직물,1788년,/ 두부 피(皮)인 유바로 유명한 가라나미기치(唐波吉) 1790년,/ 가이세키 요리, 긴마타(近又·1801년 개업) 등이 일본 각지에서 올라와 가게를 새로 열었다.]
이들 신흥상인들은 꿈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가게를 일으켰다.
☆1617년 니시키 시장 안에서 생선 가게를 하다가 사바 스시(고등어 주먹밥) 가게로 바꾼 이요마타는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이요마타의 400년
교토에서 392년째 고등어 초밥을 만들어 팔고 있는 이요마타의 20대 주인 부부.
니시키(錦) 시장에는 모두 123개의 점포가 있다. 교토에서 가장 전통 있는 시장으로,이곳에서 파는 생선과 채소, 밑반찬, 어묵 등은 일본 전체에서 가장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특히 교토 지방에서 나는 채소로 만든 쓰케모노
(밑반찬)는 맛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있다.
이요마타(伊豫又)는 탁자 4개와 조그마한 방 하나, 전체 식탁이 약 20여 석 정도의 작은 식당으로
가게 앞에 생선초밥 진열장이 놓여있다.
진열장 뒤에 젊은 부인이 오가는 손님들에게 생선
초밥을 먹고 가라고 권한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벽에 메뉴의 종류가 다양
하다. 대체로 생선초밥 종류인데 이 가게의 대표적인 음식은 역시 사바 스시(고등어 초밥)이다.
오후 3시, 주방에서는 저녁 장사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사바 스시 1인분을 주문하고 주인 도요타 마타시게(豊田又成ㆍ53) 씨와 얘기를 나누었다. 들은 대로 개업은 1617년. 자신이 20대째라고 한다.
교토학원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후 도쿄의 초밥집에서 3년간 근무했고, 1980년 가업을 잇기 위해 교토로 내려와 지금까지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 가게의 1대 조상은 이요마타. 그는 시코쿠(四國)지방의 에히메 현에서 교토로 상경, 이 가게의 문을 처음 열었다고 한다.
식당 이름이 이요마타(伊豫又)인 것은 1대 조상이 자신의 이름으로 가게 문을 열었기 때문.
400년 전 일본의 평민은 성(姓)이 없고, 요즘 식으로 하면 ‘철수’, ‘영희’와 같은 이름만 있었다. 20대 사장이 도요타라는 성을 갖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 무렵 사민평등(四民平等) 정책에 따라 자신의 조상이 처음으로 자신의 성을 지어 호적에 등록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상경한 이요마타는 니시키 시장 골목에서 처음에는 생선 장사를 했다.
그러다 후손이 1696년경 오늘날의 장소로 옮기면서 지금까지 영업을 해 오고 있다. 생선초밥으로만 20대째, 교토에서는 가장 오래된 초밥집이다.
이 초밥집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400년 초밥집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일반 초밥집과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주인 도요타 씨에게 고등어 초밥을 만들 때 고등어 선별의 조건에 대해 물었다. 그의 대답은★《 고등어는 30cm 전후의 것이 가장 맛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현재 그가 사용하는 ★《고등어 중 최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제주도와 쓰시마 사이에서 잡히는 것》으로, 자신의 가게는 제주도산을 쓴다고 했다.
그는 생선의 경우 산지가 어디인가, 공급자가 누구
인가보다는 자신이 직접 맛을 보고 가장 맛이 뛰어난 생선을 고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스시를 만들 때 통상 햅쌀과 묵은 쌀을 8 대 2 정도로 섞어 쓰는데 》이 가게의 경우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똑같은 논에서 생산되는 쌀도 해마다 맛이 다르다. 왜냐하면 강수일수, 일조량, 햇빛의 강도, 태풍의 횟수 등이 매년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8 대 2라는 방식은 맞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쌀의 산지나 종류보다는 그때그때 쌀 도매상이 가져오는 ※쌀알을 씹어보고, 거기에서 나오는 쌀의 맛과 향기, 수분의 정도 등을 판단한 후 햅쌀과 묵은 쌀의 배합을 최종 결정한다》는 것이 도요타 사장의 결론이었다.
또 쌀 맛을 볼 때 쌀 도매상 주인과 함께 쌀을 씹어보고 논의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속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우선 쌀 도매상과 함께 맛을 보면서 자신의 가게에 딱 맞는 좋은 쌀을 공급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 거래를 중단할 수 있다는 저의가 있는 것이다.
고등어의 경우도 생선 도매상이 최상의 고등어만을 납품할 수 있도록 늘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소비자에게 언제나 최상의 맛을 제공하지 못할 경우, 거래는 하루 아침에 중단될 수 있다는 무서운 질서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간 철도 업체에서 운영하는 에키벤(역도시락)
에서도 납품 제의가 왔으나 도시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에 언제나 균일한 맛을 낼 수 없어 사양했다고 한다.
또 지점을 내는 문제도 생각해보았으나 자신 혼자서 지점까지 관리하기에 벅차 그것도 포기했다고 한다. 즉 돈을 더 벌기 위해 가게도 늘리거나 아무 곳에나 납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400년간 이 가게를 잘 운영하여 대대로 생활을 해결했듯이 앞으로도 이 가게 하나만 잘 운영하면 400년은 더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
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게를 잘 운영하는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밤이고 낮이고 연구한다”고 답했다.
손님에게 최상의 맛을 제공하기 위해 아침 6시부터 재료를 직접 손질하고 다듬는다고 했다.
실제로 다음날 아침 6시 5분에 가게를 방문했을 때 그는 도마를 닦으면서 재료를 다듬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아침 6시부터 부지런하게 해온 일을 그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장차 21대 주인이 될 그의 아들은 대학교 2학년인데, 그 아들도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400년 니시키 시장 상인의 노하우는 간단했으나,무서운 자기 절제와 끝없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 이것은 일본 최고의 부엌칼 가게인 아리쓰쿠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쓰쿠
아리쓰쿠 역시 400년 전 개업을 한 후 지금까지 단야정의 본점과 니시키 시장 지점 두 곳만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400년간 장사를 해오면서 자신들만의 상도를 만들었다.
▣ 교토 상인의 33계명
1. 진짜 상인은 지나간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이나 늘 거기서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
2. 한 사람의 고객이 곧 1만 명의 고객이라고 생각
하라.
3. 참을 ‘忍’(인) 자가 내 자신의 주인이 되도록 마음 속에 늘 새겨라.
4. 가게를 지키는 길은 오직 근면과 검소뿐이다.
5. 검소하게 살되 꼭 필요한 데는 써라.
6. 마음이 성실하면 ‘神’(신)도 지켜준다.
7. 先義後利(선의후리): 신용이 우선이고 이익은 나중이다.
8. 상품의 장단점을 반드시 고객에게 알리고, 손님을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말라.
9.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
10. 늘 고객의 입장에 서라.
11. 큰 이익이 있는 곳에는 늘 큰 손해가 도사리고 있다.
12. 무리한 승부를 버리면 마음이 편하고 번영한다.
13. 늘 물건의 질을 따져라. 많이 판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14. 먼 길로 행상을 떠나는 사람이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15. 물건은 각기 때가 있다.
16. 한번 만족시킨 고객은 최고의 세일즈맨이 된다.
17. 말에 탄 장수를 죽이려면 먼저 말을 죽여라.
18. 돈 장사가 최고의 장사다.
19. 모르는 쌀 장사보다 아는 보리 장사가 낫다.
20. 고객 서비스의 으뜸은 늘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21. 가난도 부도 모두 내 마음에 달렸다.
22. 직접 하고, 말하고, 시켜 보고, 칭찬해 주지 않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23. 두 개의 화살을 갖지 말라. 두 번째 화살이 있기 때문에 첫 번째 화살에 집중하지 않게 된다.
24. 고생은 즐거움의 씨앗이지만, 즐거움은 고생의 씨앗이 된다.
25. 조심하는 것이 탈 없음의 지름길이다.
26. 돈이 없으면 지혜를 보여라, 지혜가 없으면 땀을 보여라.
27. 가장 무서운 것은 술에 취하는 것, 그리고 이자에 안주하는 것이다.
28. 해보지 않고 인생을 끝내지 마라.
29. 돈이라는 글자의 뜻은 ‘돈’과 ‘창’ 두 개를 모두 얻는 것이다.
30. 사업을 할 때 70, 80퍼센트 정도의 승산밖에 없으면, 그만 두는 것이 낫다.
31.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32. 빌린 돈을 제 날짜에 갚으면 신용이 두 배가 된다.
33. 사이 좋게 지내는 것처럼 귀한 것도 없다.
★천 년 이상의 노포들
서기 790년에 창업한 부채가게 마이센도.
교토에는 니시키 시장 안의 400년 노포보다 더 오래된 점포들이 부지기수다.
교토는 과거 794년부터 1100년간 일본의 수도로 어느 나라나 수도에는 관록 있고 전통 있는 가게가 많은 법. 교토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부터 번성해온 노포들이 있다.
★《 천 년 이상의 역사/지금도 영업 중인 가게》
[우선 가장 오래된 가게는 서기 771년에 창업한 혼수용품 가게, 겐다(源田)로 오늘날까지 1038년간 영업 중이다./ 두 번째는 서기 790년에 창업한 부채 가게 마이센도(舞扇堂)/. 세 번째는 793년에 창업한 화과자 가게 도라야(虎屋)/, 네 번째로는 889년의 다나카 불교용품점, /다섯 번째가 한약방인 히라이죠 에이도(平井常榮堂)가 971년에 문을 열었고/, 그 뒤로 꼬치 가게인 이치와(一和)가 서기 1000년에 오픈해서 올해로 1008년째 영업을 해오고 있다.]
★《현재 교토에서 천 년 이상 역사를 가지고 영업 중인 가게는 6곳 정도》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자신들의 창업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문서가 남아
있지 않은 가게까지 합치면 이보다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아마 전 세계 도시 중 교토처럼 오래된 가게가 많은 도시는 없을 것이다.
♥전세계 41개국에 200년 이상의 장수기업(점포 포함)이 5586개가 존재하는데 ★《일본이 3164개로 전체의 56.3%를 차지하고 있고 독일이 837개(15.0%), 네덜란드가 222개사(4.0%), 프랑스가 196개(3.5%), 영국 186개(3.3%), 러시아 148개(2.7%) 순이다.》
★그 중 은 오사카에 있는 건축회사 공고구미(金鋼組)로 서기 578년에 창업, 무려 14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2위 역시 일본의 경운관 여관(서기 708년 창업. 야마나시현), /3위는 일본의 법사 여관(718년. 이시카와현) 순이었다.
■《현재 일본 전국에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가게가 9개인데 그 중 6개사가 교토에 있다》.
또 일본 전체에서 500년 이상의 가게나 기업은 32개사이며, 200년 이상은 3146사, 100년 이상은 5만 개가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교토의 경우 300년 이상 된 가게의 숫자는 확실한 집계가 나오지 않고 있으나 최소한 수백 개 이상으로 일본 전체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황이 이러니 ★《교토에서는 300년 이하 된 가게는 가게로 쳐주지 않으며 3대 이상을 교토에서 살지 않은 사람은 교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교토의 물과 공기를 3대쯤 마셔야 교토 사람으로 본다. 1200년간 일본의 수도였다는 유별난 자존심이 있기도 하지만,☆
★상인 정신의 핵심은 ‘신용’이고, 이는 교토의 요정에서까지 찾아볼 수 있다.
[교토에는 5대 하나마치(花町ㆍ요정거리)가 있다. 기온히가시, 기온코부, 혼토초, 가미시 치켄, 미야가와초 등인데.
★《이곳 요정에서는 요리 값과 화대 등 그날의 유흥비를 요정에서 손님 대신 치르고 나중에 손님이 지불하는 것이 수백 년간 이어온 전통이다]
그날 유흥을 대접하는 사람이 손님이 보는 앞에서 계산을 하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날의 술값은 한두 달 후 우편으로 통지되며, 그때 가서 계산하면 된다. 이것은 손님과 업소 간의 신용을 담보로 한다.
☆
요정은 후불제
★[교토의 유명한 요정인 이치리키(一力)]
회원제로 운영한다. 회원이 되려면 회원 중 최소한 한 사람의 추천이 필요하다. 또 회원 자격도 대학에서는 총장급, 대기업은 사장급 이상, 공무원은 장차관급, 정치가는 3선 국회의원 이상, 예술가는 노벨상 수상자 등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므로 후불제가 가능한 것이다.
이는 문화적으로 교토 사람들이 직선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교토 사람들은 직선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촌스럽게 본다.
★{이런 우회적인 의사표현 중에 “오차쓰케를 드시겠습니까” 라는 말이 있다, }
이 말은 “이제 그만 돌아가 달라”는 뜻이다. 오차쓰케란 밥을 간단히 물에 말아 먹는 대용식으로 겨자가루에 김과 약간의 과자가 들어있는 간단한 음식이다.
이런 음식을 손님에게 내놓는 것은 사실상 모욕인데 그걸 내놓음으로써 그만 돌아가 달라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고맙다는 표현도 상대 표정을 잘 보고 판단해야 한다. 고맙다는 표현이 긍정적이 아니라 부정적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싫어하면서도 고맙다고 둘러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얼굴엔 미소를 띠면서 고맙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양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교토는 다분히 귀족취향이다.
교토 상인들은 그런 환경에서 적어도 1000년 이상을 살아왔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그 땅에서 결속을 다져온 사람들끼리 거미줄처럼 뿌리가 얽혀있기에 .
금의환향이란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출세한 사람이 귀향할 때 쓰는 말인데, 교토는 예부터 일본의 수도였으므로 돌아온다 해도 금의환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전통을 중시하는 교토의 요정도 경영패턴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여관이나 요정에서 자신들이 직접 만든 음식을 손님에게 접대했으나 최근에는 요리의 종류별로 아웃소싱 하고 있다.
즉 생선회는 생선회 전문점에서, 스테이크는 스테이크 전문 식당에서, 채소반찬은 채소반찬 전문 회사에서 오리, 닭 요리 등은 해당 전문 업소에서 모두 납품 받는다.
교토의 하나마치도 모든 음식을 전문 회사에서 납품 받는다. 교토의 상인들은 전통을 중시하지만, 반면에 새로운 것을 기가 막히게 잘 도입하는 특징도 있다. 하나마치 경영의 아웃소싱은 교토의 첨단기업으로
부터 배워온 것이다.
이제 교토의 노포 중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가게인 도라야 구로카와(虎屋)가 어떻게 1200년간 가게를 경영해왔는지 보자
우리는 천 년을 일해왔습니다─도라야
양념가게 칠미가.
일본 떡의 역사
떡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241년경
이다. 당시 중국의 송나라에 다녀온 성일국사(聖一國師)는 후쿠오카의 숭복사(崇福寺)에 거주하면서 중국에서 배워 온 만두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
당시 만두 제조소의 이름이 어만주소(御饅頭所)였는데, 바로 이 기술이 변해서★
이 무렵 도라야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당시에 만두피를 만드는 가게로 간판을 단 것이다.
그러나 도라야 측의 주장에 따르면 1241년, 만두피를 만드는 가게를 하기 전, 이미 도라야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조상이 이미 나라시대 때 조정에서 일하면서 음식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것이 서기 793년경이었
다고 한다. 그 후 따라왔다는 것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구전으로 그렇게 전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도라야는 만두로 시작했지만 1500년대에 들어 화과자로 아이템을 바꾸는데 거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포르투갈인이었다.
★《1543년 일본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種子島)라는 섬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은 *일본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꾸게 되는 @조총과 함께 과자 만드는 기술도 일본인에게 가르쳐주었다.》
이때부터 만두는 과자나 떡으로 변신하게 되고, 도라야 또한 그 기술을 전수받아 그 명성이 전국적
으로 알려져 도라야가 과자가게로서 처음으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다.
즉 교토의 묘심사(妙心寺)가 소장하고 있는 정법산지(正法山誌)에 도라야의 상호와 그 가게 주인인 도라야 엔주(黑川圓仲)의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도라야의 개업 연대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한데, 도라야 측에서는 약 450년 전인 1543년경에 정식으로 창업했다고 주장하나 학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경에 창업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600년대에 들어서서 도라야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 본래 양갱은 기원전부터 중국에서 먹던 음식이었다. ☆인데, 이것이 가마쿠라 시대에 일본에 전래됐다.
그 당시 일본 사회에도 양갱이라는 양고깃국이 인기를 끄는 음식이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절의 스님도 입맛을 다셨는데 당시 일본의 선종(禪宗)에서는 승려에게 육식을 금하고 있었다.
따라 당시 과자 가게에서는 스님들을 위한 양갱을 별도로 만든다. ★즉 . 이때 도라야에서 만든 연양갱이 일본의 지방토후인 다이묘(大名) 등에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구로카와 엔주는 오늘날 도라야를 일으킨 중흥조로 꼽힌다.
그 후 구로카와 엔주는 도라야를 아들에게 물려주었
는데, 2대인 구로카와 요시미기(黑川吉右ㆍ1635~)를 필두로 도라야는 자손들에게 대대로 대물림을 하기 시작했다.
도라야는 3대 光成(광성ㆍ1657~), 4대 光淸(광청ㆍ1671~), 5대 光富(광부ㆍ1700), 6대 房壽(방수ㆍ1716~), 7대 迪光(적광ㆍ1735~), 8대 光治(광치ㆍ1757~), 9대 光利(광리ㆍ1782~), 10대 光廣(광광ㆍ1816~), 11대 光寶(광보ㆍ1840~), 12대 光正(광정ㆍ1844~)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을 과자 만드는 일로 대를 이어왔다.
그러다 광정의 시대에 면서 도라야도 도쿄로 옮겨가게 된다. 이것이 1869년의 일이다.
1869년 3월 말 도쿄의 간다(神田)에 문을 연 도라야는 이후 여러 번 매장을 옮기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도라야의 사장은 17대인 구로카와 히카리부미
(黑川光博ㆍ1991년 취임)다. 매장은 도쿄, 교토 등 일본 전국에 수십 곳을 가지고 있고 1980년에는 파리에, 1993년에는 뉴욕에 지점을 냈다.
파리와 뉴욕에 지점을 개설함으로써 도라야는 일본의 문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첨병 역할도 하고 있다. 2006년 4월 현재 871명의 종업원이 근무하고 있고(남자 308명, 여자 563명) 169억 4900만 엔(2005년)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발전했다.
도라야가 이처럼 17대를 이어오기까지에는 나름대로의 상도가 있었다.
그 중 문서로 남아있는 한 가지를 소개한다.
현재 17대 당주의 아버지인 16대 당주 구로카와 미쓰토모가 후손들에게 남긴 ‘주인의 도리’란 상인 철학이다.
교토의 노포들은 나름대로의 商道(상도)를 만들어 자손들이나 종업원들에게 가르쳤다. 교토의 노포들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가훈 내지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후시미 상인들도 그러하다.
▣ 일본의 과자가게 ‘도라야’의 商人철학
주인의 도리
▲ 상인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것.
▲ 한 우물을 팔 것.
▲ 낭비를 하지 말 것.
▲ 금전을 빌릴 때는 신중하고 엄격할 것.
▲ 교제는 필요 이상으로 하지 말 것(손님을 유치한답시고 여기저기 술자리에 끼지 말라는 뜻).
▲ 취미를 갖되, 그 방면의 일류가 될 것.
▲ 선조에 대한 공양을 잘 할 것.
▲ 놀 때는 확실하게 놀 것.
▲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가게 앞을 장식하고 청소할 것. 궁중 납품 시 부정함이 없도록 명심할 것.
▲ 궁중은 말할 것도 없고 여타의 손님을 뵈러 갔을 때는 오래 머물지 말며, 정중히 공경하는 자세로 대하고 용무가 끝나면 즉시 돌아올 것. 멀리서 일로 찾아오는 고객은 물론이고, 우리 지역의 고객들에 대해서는 자상히 응답하고 접대에 부실함이 없도록 주의할 것.
▲ 가게 일에 관해서는 각자 특기를 갖도록 노력하고 무엇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잘 가르칠 것. 장을 보러 가는 일은 위로부터 3~4인에게만 시킬 것. 종업원 25명당 1명의 지배인을 두고 도구관리를 시킬 것. 고용인 중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은 확실히 파악하여 주인에게 알릴 것.
▲ 모든 종업원은 상중하를 막론하고 서로 노력하여 글씨와 산술을 배울 것. 손님이 와서 주연을 제공할 때는 어떠한 상황이라도 저녁 7시를 넘기지 말 것. 종업원들은 일하면서 잡담을 금지할 것.
▲ 모든 종업원은 신고 없이 외출을 삼갈 것. 어린 고용원은 담배를 피울 수 없으며 적발 시 즉시 지배인에게 보고할 것. 항상 불조심할 것. 고용인 모두에게 매월 2회씩 주연을 베풀되 소박하게 할 것.
후시미(伏見)상인
★과자가게 도라야의 노렌.
학자들은 이 가게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창업한 것으로 추정한다.
후시미는 오늘날 교토의 구(區)다.
한때는 후시미 시(市)였으나 지금은 28만 8000명의 인구를 가진 구로 격하됐다. 1594년 후시미 성을 신축할 건축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후시미 항이 개항되면서 교통의 요지가 됐다.
그 후 오사카, 나라(奈良), 오미(近江) 등 인근 대도시에서 운하를 통해 교토로 올라오는 모든 물산이 여기에 집하됐다.
당시 후시미 항에는 막부가 공인한 ‘30석선’과 ‘20석선’이 주로 통행했는데, ‘30석선’이란 쌀을 30석 실을 수 있는 배이고, ‘20석선’이란 쌀을 20석 실을 수 있는 배를 말한다.
이러한 곡식 운반선 외에 세토 내해에서 잡은 신선한 생선이 후시미 항으로 들어왔고, 1611년 이후에는 동남아로 나가는 주인선(무역선)들이 이 항구를 통해 출항했다.
주인선은 일본의 은과 비단 등을 싣고 오키나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심지어 버마와 태국까지 가서 팔았고, 동남아로부터는 물소 뿔, 상아, 향료, 토산품을 수입했다.
그것들이 입하되던 항구가 후시미였다.
후시미는 막부시대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에 모든 물산을 입하하는 창구였던 것이다.
후시미 상인들은 예부터 이미 상도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장사를 하는 것이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인가를 오랜 경험과 지혜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토에서 출발해서 오늘날 일본 최고의 백화점이 된 다카지마야(高島屋)의 경영원칙, 즉 초기의 가훈을 보면 ‘좋은 물건을 싸게 판다. 이것은 사는 쪽인 손님과 파는 쪽인 점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상품에 결점이 있으면 미리 손님에게 알려라. 절대 속여서 팔지 마라.
손님을 대할 때 貧富(빈부) 차이, 복장, 신분으로 차별하지 마라’였다.
‘고객에게 얼굴을 찌푸리거나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고객을 길에서 만났을 때도 공손히 인사하라’
이것은 도라야 구로카와가(虎屋黑川家)의 가훈이다.
포목점인 시타무라가(下村家)의 경우를 보면 ‘
먼저 고객에게 신의를 지켜라,
이익은 그 후에 생각하라’이고,
포목점인 야시가(矢代家)에도 ‘단골손님은 말할 것도 없고 한치의 옷감이라도 사주는 사람은 바로 우리의 주인이다. 그가 우리의 생활을 일부라도 꾸리게 해준다면 그는 바로 우리의 부모나 다름없는 것이다’라는 가훈이 있다.
이런 원칙들의 공통점은 그들은 일조일석에 떼돈을 벌려고 하는 것보다는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손님과 더불어 번영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손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맞았지만, 자신들에게도 엄격했다.
이노우에가(井上家)의 가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주인이라 할지라도 늦잠을 자고, 저녁엔 놀러 다니며, 사업에 몰두하지 않고 제정신을 차리지 않을 경우 점원은 주인의 행동거지를 친척에게 보고하여 자본과 장부를 조사한 후 주인에게 약간의 급료를 지급한 후 은퇴시켜야 한다.’
교토 상인들은 점원이나 주인이나 가릴 것 없이 이처럼 엄정한 상인정신을 가지고 그들의 장사를 발전시켜왔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후시미는 일본의 대표적인 상인도시가 됐다. 1700년대에 이러한 교토 상인들의 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이 있다.
일본 商道를 만든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
그의 이름은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ㆍ1685~1744)이다. 그가 쓴 (석문심학)이라는 책이 교토 상인의 상도, 더 나아가 오늘날 경제대국 일본 상인의 상도를 만들었다.
이시다 바이간은 교토 근처에 있는 구와다(桑田)군의 도게촌(東懸ㆍ지금의 교토부 가메오카시)이라는 소도시에서 농부인 이시다곤에몬(石田權右偉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는 이시다 바이간이 8세 때 교토의 작은 포목점에 견습사환으로 내보냈다.
불행하게도 그가 포목점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가게가 망했다. 점포가 망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부친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주인을 한 번 모시면 어버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 주인의 부끄러운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부친의 말에 따라 그는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때부터 가게 주인을 부모님처럼 모시며 살았다.
이시다 바이간의 아버지는 비록 가난했으나 성실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어린 이시다 바이간이 산에 갔다가 밤을 주워왔다. 아버니는 자식이 주워온 밤을 보고 그 밤이 산 경계의 어느 쪽에 떨어져 있느냐고 물었다. 오른 쪽에 떨어져 있다고 하자 그는 한밤중에 그 밤을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보냈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다시 가게에 남아 주인을 봉양했다. 8살 때부터 13살 때까지 5년간 가게주인을 봉양했지만 고생이 심했다.
어린 나이의 그가 너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한 동리사람이 그를 다시 고향집에 데려주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그가 다시 교토로 나온 것은 그의 나이 23세 때다.
이번에는 구로 야나기(黑柳)라는 일류 포목점에 취직했다. 과거의 경력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견습점원이었다.
당시엔 수명이 짧았으므로 40세만 되어도 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였는데, 뒤늦은 나이에 견습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물건들이 거리에서 잘 보이도록 가지런히 놓았고, 밤에는 잠이 들기 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루 종일 가게 일을 하느라고 고단했지만 밤에도 쉬지 않았던 것이다.
유학, 불교, 神道(신도) 등에 대해 나름대로 책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쳐 나갔다.
그로부터 견습생활은 무려 17년간이나 계속됐다. 40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반토(番頭) 즉 지배인이 되었다.
반토 생활을 하면서 그는 더욱 더 깊은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산으로 들로 스승을 찾아 다녔다.
그때 만난 사람이 은자(隱者) 오구리 료운(小栗了雲)이다. 오구리 료운을 만난 후 이시다 바이간은 그의 제자가 되었고 가게 일을 그만 두었다.
오구리 료운으로부터 배운 것은 도(道)와 심(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참선과 수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욱 깊게 다져 나갔다.
반토 생활은 2년 남짓으로 길지 않았다. 점원생활 20여 년은 그에게 장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실천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42세쯤 되었을 때 은퇴했다. 은퇴 후 그는 교토의 구루마야정(車屋町)에 있는 그의 집에 심학(心學)을 가르치는 학교를 연다. 학교를 연 첫날, 그는 자신의 집 앞에 서서 행인들을 상대로 공개강의를 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귀담아 들어주었던 사람은 손에 무를 든 농부 한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15년간 그는 제자를 가르치고 여행을 다니면서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리고 그 시기에 유명한 을 저술하게 된다.
상인정신을 체계화한
이시다 바이간이 쓴 사상서로 ‘都鄙問答’(도비문답)과 齊家論(제가론)을 합친 내용을 말한다. 석문은 그의 아호다. 은 오늘날 일본 상인의 바이블이자, 일본인의 상도를 최초로 체계화한 책이다. 오늘날 일본이 상인국가로 탄생하게 된 바탕이 여기서 비롯됐다.
1700년대 일본은 쌀을 경제단위로 하는 사회에서 화폐가 경제단위로 바뀌는 와중에 있었다. 모든 쌀은 오사카로 와서 화폐로 교환됐는데 이시다 바이간은 이런 시대를 맞아 상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깨달았다.
이시다는 상인은 왜 존재하는가, 이익은 어떻게 남기는 것이 좋은가 등등의 내용을 에 썼다. 심학이란 ‘마음으로 반성해 몸으로 실천한다’는 뜻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1. 노동은 정신수양이며 자기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즉 노동은 힘들고 고단한 것이 아니라 인격수양의 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빈둥거리고 노는 것보다는 공짜로라도 일을 하는 것이 정신수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 6시간 일해서 한 달에 쌀 석 섬을 얻는다. 우리는 하루 8시간 일해서 쌀 석 섬 1되를 얻는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시다 바이간의 생각이었다. 오늘날 일본인들의 DNA 속에는 이시다 바이간의 영향을 받아 노동은 매우 좋은 일이며,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일함으로써 자신의 인격 수양에까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2. 진정한 상인은 상대방과 자기가 모두 잘 되게 하는 것이다.
즉 물건을 팔 때 ‘소비자인 상대방도 납득하고 상인인 자신도 납득하는 것’이다. 당시 상인들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것이 상대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시다는 상대와 자신이 모두 잘되는 것이 진정한 상도라고 설파해서 그간의 상인관을 뒤집었다. 좋은 물건을 작은 이문만 붙이고 팔아서 소비자가 만족을 얻고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상도였다. 그렇다고 이윤을 남기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이익을 남기되 이윤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하는 데서 상행위 목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며, 소비자를 이익 확대의 수단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인은 작은 부를 꾸준히 쌓으면서 만족해야지, 일확천금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 에 담겨 있다.
3. 감사하는 마음에서 출발해 80% 벌이에 만족해야 한다.
장사는 키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장사의 질이 어떤가가 문제라는 뜻이다. 무조건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객의 만족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가게는 머지않아 망한다는 것이다.
4. 마음이 허하고 정신수양이 안 된 자들이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소비에 열중한다.
사치를 극도로 경계
이시다 바이간
이시다 바이간은 사치를 극도로 경계했다. 당시의 일본 사회는 사치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상업의 발달로 부가 쌓이면서 벼락부자가 출현했다. 돈은 많은데 마땅한 투자처는 없었다. 저축에 비해 투자할 곳이 없으니 자금이 남아 돌았다. 남은 돈을 쓰기 위해 귀족들은 기모노 패션대회를 여는가 하면 외식산업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또 가부키나 분라쿠(文樂)와 같은 공연예술이 전성기를 맞았고, 공예, 다도, 꽃꽂이 등이 극성기를 이루었다. 겐로쿠(元錄ㆍ1688~1703) 시대의 일본의 모습이다.
이 시기에 이시다 바이간은 구로야나기(黑柳) 포목점의 견습사원이었다. 그는 견습사원으로 있으면서 당시 일본인의 사치를 직접 목도했다. 그 당시의 사치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사례가 있다. 에도의 목재상인 기노쿠니야분자에몬(紀國屋文左衛門)은 에도의 한 동네를 몽땅 사서 거기에 거주했다. 그는 손님이 한 번 앉았다 일어난 다다미는 모두 교체했는데, 그 때문에 돗자리를 새로 까는 기술자가 항상 7명씩 대기해야 할 정도로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결국 일본은 재화가 비생산적인 분야로 과다하게 소비되어 얼마 후에는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 1707년에는 후지산이 대폭발, 연기와 분진이 도쿄에까지 날아왔고, 햇빛을 받지 못한 농작물이 자라지 못해 일본 경제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겐로쿠 시대의 17년은 이렇게 사라졌다. 이시다 바이간은 한때의 사치가 결국 훗날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5. 仁義禮智信(인의예지신)을 추구해야 신뢰를 얻는다.
이시다 바이간은 상인은 반드시 인의예지신을 갖추라고 설파한다. 仁(인)은 타인 즉 고객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며, 義(의)는 사람으로서 바른 마음, 禮(예)는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 智(지)는 지혜를 상품으로 만드는 마음, 信(신)은 돈을 빌리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라는 내용이다. 그는 마치 군자에게나 가르칠 법한 내용을 상인들이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물욕을 버려 눈앞의 이익보다는 상대를 이롭게 하는 것이 오랫동안 장사를 할 수 있는 길이며, 모든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좋은 물건을 이익을 조금 남겨서 파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이시다 바이간이 추구했던 것은 상인의 존재 의미와 이윤의 정당성, 검약과 정직이었다. 그의 사상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됐는데, 제자들은 각지에서 심학 강습소를 열었다. 교토의 슈세이사(修正舍), 지슈사(時習舍), 메이린사(明倫舍) 등이 세워졌고, 오사카에도 메이시사(明試舍), 세이안사(靜安舍), 이코사(衝舍), 에도에는 산젠사(參前舍) 등이 문을 열었다.
이시다 바이간은 60세로 사망하기까지 15년간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교토와 오사카 등지를 돌면서 강연회를 열었고 ‘도비문답’과 ‘제가론’을 저술했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일본국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쓴 심학과 도비문답은 당시 일본의 상공업자를 위한 저술서였지만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일본 경영의 고전이다.
이 책은 저술한 이래 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대를 뛰어넘어 일본의 유수한 대기업 경영자들에게 지침이 되고 있다. 예컨대 오사카 출신으로 일본 굴지의 기업을 일으킨 내셔날, 파나소닉 그룹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의 경영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살아 생전에 자신의 경영 철학의 80%는 이시다 바이간으로부터 배운 것임을 고백한 바 있다. 또 근면ㆍ절약ㆍ정성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국민성도 그로부터 출발해서 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교토 强小기업들
오늘날 교토에는 세계를 제패한 强小(강소)기업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일개 주임 연구원이 노벨상을 수상한 시마즈 제작소도 교토에 있는 기업이며 세라믹 콘덴서 분야의 세계 1위인 무라타 제작소, 첨단 센서의 대명사 옴론, 콘덴서 세계 1위의 니치콘, 아메바 경영으로 유명한 교세라, 정밀모터 분야의 세계1위 일본전산, 반도체 제조설비 세게 1위 로옴 등이 모두 교토의 기업이다. 이들 기업들은 1000년 전통 교토 상인들의 상도에 현대식 경영을 접목, 추종불허의 세계 1위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세계 최강 교토 기업들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의 불황 속에서도 연간 30% 성장을 이루어내 일본 경제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무라타 제작소는 흉내낼 수 없는 상품, 흉내낼 수 없는 조직의 창조로 유명한데 그들은 다른 회사를 의식하지 말고, 오직 우리만의 길을 가는 기업으로 기술과 관리의 독창성으로 유명하다.
시마즈 제작소는 연구 주제는 연구원 스스로 선택하도록 재량을 주며, 연구원들에게 회의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독특한 시간관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상식의 반대는 독창성’이라는 슬로건으로 상식에 얽매여서는 창의적인 제품이 나올 수 없다고 강조한다.
첨단 센서의 대명사 옴론은 ‘고객이 즐거워야 우리도 즐겁다’며 ‘돈만 좇는 것은 죽은 목표’라는 철학을 갖고 있고, 사원의 아이디어는 현금으로 보상하고 있다.
세계 1위의 콘덴서 업체 니치콘은 ‘내 사전에 빚은 없다’는 부채 제로의 기업으로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 한다’, ‘속도가 최고의 무기’라는 슬로건으로 1엔짜리 상품도 만들어 판다는 기업이다.
호리바 제작소는 세계 최강의 분석장비 업체로 ‘현장에 神(신)이 살고 있다’는 슬로건으로 유명하다. ‘모든 업무 시간을 반으로 줄여라-타임 원 하프’, ‘중요한 일은 오전에 한다-집중타임제’, ‘3분 야단치기 전에 3시간 고민하라’ 등이 이 회사의 대표적인 경영모듈이다. 社訓(사훈)은 ‘재미있고 엉뚱하게’이다.
세라믹 필터 세계 1위, 아메바 경영으로 유명한 교세라도 교토의 기업이다. 교세라는 이익단위 3000개의 아메바가 모인 회사로 이익을 내기 위한 시간당 채산표를 통해 매월 3000개 아메바의 실적을 평가, 지원과 도태를 결정하는 피 말리는 시스템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PC 등에 들어가는 정밀모터의 세계 1위인 일본전산은 도시락을 빨리 먹는 사원을 뽑는 회사로 유명하다. 이들은 한 사람도 자르지 않는 무혈혁명, 죽어가는 협력업체를 살리는 무혈재생과 ‘반드시 한다, 될 때까지 한다’는 집념의 기업이다.
신입사원은 1년간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하는데 ‘청소를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회사방침 때문이다. 화장실 청소는 이 회사의 대표적인 철학인 4S(정리, 정돈, 청소, 청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제조설비의 세계 최고봉인 로옴은 기술을 섞는 것도 창조라는 개념하에 ‘개별기술을 묶어 하나로 만들라’,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기술을 만들라’, ‘인재양성은 365일 하라’, ‘환경보전과 비용절감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철학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반도체 부품제조의 황제라는 삼코는 ‘사물을 쪼개 보면 길이 보인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삼코는 엉뚱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런 사람만이 새로운 기술을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장이 없으면 새로 만들라’라는 독창성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여성내의로 유명한 와코루는 ‘사원이 재산이다’, ‘브래지어를 입어보는 고객에겐 10엔을 준다’, ‘실버시장에서 황금을 캐라’, ‘시대가 원하는 몸으로 바꿔주라(체형보정속옷)’, ‘공주 패션으로 승부하라’ 등으로 일본 1위를 달리고 있다.
전기 커넥터 세계 1위의 히로세 전기도 독특한 기업이다. 총 매출의 30%는 신제품으로 유지한다는 ‘초3M 룰’, ‘고객이 좋아하는 제품은 생산하지 말라’(금세 유행을 타기 때문), ‘적자제품을 없애야 산다’, ‘성공하면 사장과 골프, 실패하면 공장 페인트 칠’과 같은 경영방식을 가지고 있다.
지난 1000년간 교토의 상인들은 100년 이상 된 기업 수백 개가 교토의 상인정신을 만들어냈고, 그 상인정신이 진화하여 요즘에는 세계 1위 강소기업의 모태가 되었다. 세계 1위 교토 중소기업의 경영철학은 다음과 같다.●
▣ 교토 중소기업의 경영철학
▲ 다른 가게의 제품을 모방하려면 죽어라.
▲ 혼을 실은 상품을 만들어라.
▲ 반골기질이 회사를 바꾼다.
▲ 사장은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 사원을 해고하려면 경영자가 먼저 할복하라.
▲ 유목민형 기업전사를 키워라.
▲ 경쟁력을 갖춘 가게전통을 유지하라.
▲ 핵심부품에 주력하라.
▲ 전통 속에서 경영을 배워라.
▲ 세계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마라.
▲ 기술자 출신만이 사장이 된다.
▲ 사원의 개성을 존중하라.
▲ 하청업체와 발주업체가 대등하다.
▲ 빚은 한 푼도 없다.
▲ 현금 흐름의 경영을 중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