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재 최문한은 고려 27대 충숙왕의 부마(駙馬:사위)로 삼한삼중 판군기시사(三韓三重 判軍器寺事:병기를 제조하고 무기를 조달하던 관청의 종2품직)를 지냈다. 선덕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된 최문한은 장래가 보장된 고려왕실의 기둥이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공격을 받자 일단 개경의 만수산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부인 선덕공주와 함께 강화도로 피신하여 여러 유신들과 함께 고려의 재건을 도모하려 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다시 강릉의 마상리(馬上里:지금의 옥천동)로 내려와 은신처를 잡고 세가를 형성하니 후손들이 그를 강릉 최씨의 시조로 받들었다.
"선영이 강릉대학교 쪽 유천동 어디라고 들었는데요?"
최찬규 전 대종회장이 일러준 대로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홍제동 시외버스 터미널 건너편에 위치한 대종회 사무실을 찾았다. 최원길 대종회장과 최은길 총무가 먼저 나와 있다가 필자를 만났다.
"유천동 마명산에 모셨지요. 2세 극림 공, 3세 온 공의 설단비도 함께 있지요. 저 건너편 홍제동 북바우에도 3세 윤 공과 4세 자점 공의 묘소가 있습니다. 2천년 11월에 종암재사(鍾岩齋舍)를 짓고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는 등 대역사를 이뤄 후손된 도리를 하는 체
했지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최은길 총무가 대형 창유리 밖의 북바우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는 이어서 거칠현동(居七賢洞)에 관한 고사를 꺼내놓았다.
江華系 시조 충재공 崔文漢 고려 충숙왕 부마
■ "우리 시조 충재 최문한 공이 한때 정선군 남면 현재 낙동리, 거칠현동에서 고려 왕조를 섬기던 여섯 분의 유신들 즉 이색, 전오륜, 서진, 원천석, 구홍, 길재 등과 함께 은거하며 도원가곡(桃源歌曲)을 지어 망국의 한을 달랬었습니다."
충재의 후손인 최찬제가 도원가곡의 목판 탁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정선문화원의 주선으로정선아리랑의 시원임이 밝혀졌고 1987
년 정선 역광장에 오석으로 노래비를 세우게 되었다.
“도원가곡 하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는 한시 아닙니까?"
"맞습니다.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면서 서민들의 애달픈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민요가락으로 나타나게 되었지요. 그게 바로 정선아리랑 아닙니까?"
■ 강릉으로 낙향한 이후에도 충재공 최문한은 개경을 여러 번 왕래하였다. 그때 타고 다닌 준마가 있었다. 개경에서 이틀 동안 부지런히 말을 달려 강릉에 도착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말을 못가의 버드나무 가지에 매어놓고 물을 마시게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못속에서 안개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말이 크게 울면서 못으로 뛰어들었다.
"문자한자 최문한 어른의 애마가 글쎄, 용으로 변해 운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랍니다. 어른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 연못을 용지라 부르게 되었지요. 바로 옥천동 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가 보셨나요?"
필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원길 대종회장이 고맙다는 눈길을 보내왔다. 아기장수 설화가 욕망의 좌절을 의미한다면 용마전설 또한 고려 부흥의 좌절을 의미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강릉 최씨 대종회보 "용지"를 보면 조선 영조 30년(1754년) 강릉부사 이현중이 연금을 털어 연못을 다시 넓게 팠다고 한다. 1920년 3월 후손들이 연못을 공원으로 조성하고 기념비, 유적비와 함께 용지각(龍池閣)을 세우고 시조의 얼이 깃든 용지를 문중의 발원지로 정성스레 돌본다고 최은길 총무가 말했다.
후손들로는 충재공의 손자 최윤(崔允)이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를 역임한 후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세 형제 중에 둘째 최자호(崔自湖)는 대사간과 이조판서를 지냈고, 막내 최자점(崔自霑)은 세조 때 문과에 올라 교리, 정언, 이조참판을 거쳐 평강, 고성, 금성 군수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최세건(崔世楗), 그의 둘째 아들 연(演)은 시조의 6대손으로 중종 때 호당에 뽑히고 공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조정에 공을 세워 동원군(東原君:동원이란 고성에서 울진까지의 동해안 지방을 가리킴)에 봉해지고 문양공(文襄公)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목사를 지낸 최응천(崔應天)은 문장과 서예, 음율에 능했던 인물로 소문나 있다.
"그래서 문한계 강릉 최씨를 강릉지방에서는 동원 최씨라고 부르는 군요."
"동원 최씨로 불리는 건 잘못된 겁니다. 그냥 강릉 최씨 문한계 정도로 부르던가 아니면 충재공파로 불러야 되지요."
가문을 빛낸 주요 인물로는 성균관장을 역임한 최찬익. 제헌 국회의원과 강원 경기지사를 지낸 최헌길, 국회의원을 지낸 최준길, 최우근,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낸 최선정, 초대 과농대학장을 지낸 최병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