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연가
삼성동에서 시작한 문구 사업장을 청산하고 충무로 문구골목으로 이사 온 지도 벌써1년이 지났다. 지금도 특별이 사업경기가 나아진 것은 없지만, 이런 줄 알았으면 진작 시내로 들어올 것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강남에서 시작한 사업이라 강북(충무로)으로 건너올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은 그곳에서의 사업상 환경이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감도 강남 쪽 은행관련 일들이 훨씬 많기도 했으며, 납품처가 회현동이었고 15분에서 20분 정도면 건너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충무로에서 생활하다 보니 업종 연관성 관계로 편리한 점이 참 많다. 일단 충무로 일대는 온갖 문구와 인쇄관련 소규모 업소가 밀집되어 있어서 접근성과 편리성이 매우 좋다. 광고 기획사부터 각종 인쇄소를 비롯해 인쇄와 관련되는 모든 업종이 전국을 상대로 하는 이곳이기에 정말 많은 관련업소들이 소재하고 있다.
그런데 일터도 일터이지만 내가 느끼며 살아왔던 충무로라는 곳은 어딘지 모를 추억으로 만 가득치 있는 거 같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육칠십 년대를 거치면서 영화산업이 한창 전성기였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서울이 발전하기 전에 나는 청소년기를서울에서 보냈으며 내가 본 영화는 극히 드물었지만, 충무로라는 동네에서 많은 국내영화와 외화를 많이 상영했으며 영화와 관련 산업들이 충무로를 중심으로 번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유명배우를 꿈꾸는 젊은이들도 많았을 것이며, 대중가요 가수라든지 예술 활동에 관한 꿈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많이 모여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명동입구에서부터 시작해 광희동에 이르는 충무로는 당시 영화(榮華)를 상징하듯 많은 영화관이 있었다. 명동에 명동극장과 삼일로에 중앙극장. 한 블록 지나 스카라 극장과 명보극장 그리고 을지로4가에 국도극장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진고개라는 유명한 식당은 아직도 내국인이나 외국인을 상대로 지금도 크게 영업을 하고 있으며 명보극장은 개봉되는 요즘 영화는 상영하고 있지 않으나 과거 명화(名畵)를 시니어 고객을 상대로 방영하고 있으며 명보극장 지하에서는 뮤직컬(주로 중국인)을 계속 공연하고 있다. 주변 도로에 외국인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가 항상 주차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대로 괜찮게 되는 거 같다.
충무로 일대라고 하면 남산 1호 터널을 기점으로 을지로 2가 사거리까지 오고 중구청
에서 을지로 4가 지하철역까지 이르는데 그 지역 안에 소규모 인쇄 관련 업소가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주변에 근린생활 시설로 인현 시장을 비롯해 각종 음식업소도 있으며 나름대로의 사업장을 운영하며 생활터전을 일구고 있다 하겠다. 충무로역에서 내려 진양상가를 우로 하며 왼쪽 방면에 특히 업소들이 많이 산재하고 있다. 아마 규모가 작은 건물에 두 세평에서부터 수십 평까지에 공간을 두고 업소가 수 천 곳은 될 것같다. 저마다의 사업의 특성을 살려 원고나 디자인을 부탁할 것이며 이름도 모를 인쇄종류는 나도 잘 모른다. 기껏해야 마스터와 오프셋인쇄를 비롯해 명함과 명판 등등 자기가 하는 사업만 알기에 말이다. 또한 퇴계로나 을지로 방향에서 조금 들어오면 수많은 실핏줄 같은 작은 골목들이 많은데 작은 골목에 잘 다닐 수 있도록 골목에 맞는 이동수단들이 꽤 많다. 속칭 리어카 보다 조금 큰 딸딸이라고 하는 소형 운반차와 전지(종이)를 비롯한 복사지 등 무거운 것을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지게차는 어지간한 좁은 골목이나 인쇄소까지 들어 갈 수가 있다. 골목이 좁아 편도로만 운행할 수 있는 각종 짐차들이 각종 짐을 부릴 때는 뒤따라오는 차량들은 무한정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기다려도 줄줄이 따라 정차한 차량들은 빵빵대거나 삿대질 하며 항의하지 않는다. 모두다 이곳에 환경들을 알기에 서로 기다려 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다리는 차량으로 인해 하역하는 사람들은 가급적 신속히 일처리를 하며 가급적 기다리는 피해를 덜 주려고 서로가 노력하며 양해를 구하기도 빠른 일처리를 한다.
또한 거의 모든 사업장이 업종 특성상 종업원 몇 명과 단독사업장인 관계로 주변여건이 열악한 형편인거 같다. 아무리 영세하더라도 먹고는 살기에 음식 값도 어느 동네보다도 비교적 싸다. 모든 업소가 그렇지는 않지만 김치찌개를 비롯해 생선구이 참치구이 고등어구이가 오천 원이다. 순댓국도 마찬가지고 조금 더 주는 특이 육천 원이다. 물론 명동성당 쪽으로 가는 큰길가에 식당은 그렇지 않지만, 아무튼 서민들과 자영업을 하는 대표적인 충무로 일대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이곳이 마치 삶의 현장 모두인 것 같기도 하다. 경쟁이 매우 치열한 관계로 납품가격 올리는 것은 사업장 거두라는 것과 같다.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전에 가격으로 납품하고 있는 곳이 허다하고 그것마저 유지하며 살아가는 자영업 사업장 사장들은 말이 사장이지 웬만한 월급쟁이보다도 훨씬 수입이 열악한 것 같다.
충무로는 옛날 선술집도 그랬을 것 같은데 저녁에 자신의 일을 마치고 고객이나 가까운 동업자들끼리 식사하며 하는 소주나 맥주 값도 이천 원대 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다른 번화가나 젊은이가 많이 가는 동네에서 벌어지는 술로 인한 추태나 사건은 볼 수가 없다. 공깃밥을 추가해도 더 받지 않는다. 업소 주인과 고객들이 묵시적으로 주고받는 생각이 거의 같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나뿐 만은 아닌것 같다. 그져 서민다운 모습에 그들 나름대로의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일전에 주말 인쇄관련 소모품을 판매하는 거래처 사장과 명보극장으로 향했다. 마무리 못한 일로 사무실에 잠시 들렸다가 거래처에 분무기를 사려고 잠시 들렸는데 이얘기 저얘기 하다가 시니어를 상대로 상영하는 명보극장 광고물을 보고 함께 들어가 보자고 하니 그러자는 것이다. 1950년대 영화 애심(哀心)인데 예민한 청소년기때 음악방송 들으며 당시 영화를 보았던 어른들에 영화줄거리가 생각났다. 정말 나의 감성과 감정을 준 맬로물인데 모처럼 가치있는 시간을 영화를 보며 느꼈다. 동행한 사장도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나보다 일곱 살 정도 많은 사장인데 세월가는 나이테 만큼이나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이런 것이 예술의 힘인가 보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고전이었지만, 당시 영화팬들에게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던 영화였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사랑했던 연인의 연 이은 죽음을 두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죽는 모습보다 정겨운 죽음을 보았다. 이것이 진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영화를 통해 진하게 느꼈다. 내일도 오늘과 같이 다람쥐가 채 안에서 돌듯 반복되지만 나나 저들이나 서민들에 삶이 어쩌면 귀할 수도 있겠다. 남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충무로에 가로등은 옛적 추억이 담긴 그날에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왠지 모르게 간직하고 싶다. 현실의 삶은 앞뒤 좌우를 보아도 여전히 녹녹치 않지만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다짐을 또 해야겠다. 충무로에 연인처럼 수줍게 물들어 가는 나의 모습은 어떻게 비춰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