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미션
개 한 마리가 제 머리통만 한 뼈다귀를 물고 도도하게 내 옆을 지나간다. 살점도 제법 붙어 있는 돼지 족발이다. 인심 좋은 족발집 아저씨한테 하나 얻은 모양이다. 아니면 주인이 한눈 파는 사이 슬쩍 했거나. 개선장군마냥 으스대며 시장통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저 녀석은 오늘의 저녁 메뉴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곳에는 시끌벅적한 삶의 활기가 있고
오감 자극하는 색과 향과 소리들이 있고
누군가의 고단함과 즐거움이 뒤섞여 있다'오늘은 또 뭘 해 먹지?'
가난한 내 레시피! 혹시나 저녁 메뉴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시장 좌판을 기웃거려본다.
탁, 탁, 탁. 닭집에서 생닭을 토막내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사정없이 내리찍는 거대한 식칼이 아찔하다. 자칫 잘못하면 손등에 찍힐 것만 같다.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칼을 내리찍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어찌보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생닭에 대해 말하자면 실은 나도 공범자일 때가 많다.
"토막내 주세요!"
이 한 마디에서 닭볶음탕 요리는 이미 시작된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닭에겐 미안하지만.
이번엔 비릿한 냄새가 풍겨 온다. 바다의 체취를 안고 있는 생선 가게다. 주인 할머니가 부지런히 부채질을 하며 파리를 쫓고 있다. 생선 구이를 그리 즐기지 않는 나는 이곳을 별로 이용할 일이 없다. 하지만 꼭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발길을 멈추게 되는 것은 아름답고도 슬픈 시 한 구절 때문이다.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박재삼 '추억에서' 중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유명한 시인데, 언젠가 이 시를 읽은 후로부터는 생선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한 끼 반찬거리가 아니라, 어느 누군가의 인생과 한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만 같다. 저 할머니의 온 몸에 배어 있을 바다 냄새를 쓸어 모으면 아주 긴 소설 한 편이 또 만들어지지 않을까.
채소 가게에는 언제나 손님이 많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점상이지만 시장 내에서 노점과 점포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어느 시장이나 그렇듯 이곳 양정시장도 원색의 파라솔을 세워 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은 촌스러운 듯도 하지만 그런 원색의 파라솔은 전통시장의 상징물 같기도 하다. 그 앞에 서서 흥정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시장을 더욱 생기있게 만들어준다.
나도 저녁 반찬거리를 준비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오늘의 미션을 수행할 차례다. 감자, 무, 가지, 오이, 호박, 고추, 파, 피망, 부추…. 그 가운데 양파가 눈에 띈다. 본래 좋아하는 것이 눈에 잘 띄는 법. 사실, 나로 말하자면 양파 귀신이다. 절여 먹고 튀겨 먹고 생으로 먹고.
아무래도 저녁 메뉴에 대한 창의적 영감은 쉽사리 나오지 않을 것 같고, 익숙한 재료를 골라 익숙한 방식으로 조리하는 것이 안전한 식사를 담보하는 길이라 합리화하며 오늘도 결국 양파를 집어 든다.
· 우리 동네 과일 가게언제나 내 시선을 사로잡는 색채의 향연. 과일 가게 앞이다.
주인 할머니는 오늘도 가게로 '마실' 나온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일흔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박영자 할머니. 벌써 50년이 다 된 양정 시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자신의 인생에 담고 있다.
"내가 스무 살에 시집 와가 이 시장에 들어 왔는데 그기 벌써 오십 년이라."
할머니의 눈에 얼핏 젊은 날의 추억들이 스쳐간다. 그 세월 동안 1남 2녀가 장성했고 이제는 벌써 손주들이 시집 장가갈 나이가 되었다.
50년 전 양정시장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시절,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렵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북적거리고 시끌시끌하고 에너지 가득한 장소이지 않았을까 싶다.
"갈수록 어려버. 시장 사람들 다들 그란다."
요즘 장사가 어떠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이다. 어쩌면 바보 같은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곳곳에 마트가 들어서니 시장의 규모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할머니는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아침 7시면 가게 문을 열고 과일을 내놓는다. 동녘으로 떴던 해가 기울고 달이 뜰 때까지 과일을 판다. 때론 시장 사람들과, 때론 가게를 찾은 손님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눈다. 그리고 밤 11시가 되면 가게 문을 닫는다.
'과일 가게'를 생각하면 어쩐지 낭만적이기도 하고 다른 장사에 비해 편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생물'이다 보니 빨리 팔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려움이 있다. 주인을 만나지 못한 과일은 금세 물러진다. 아무리 품질이 좋고 맛있는 과일이라도 그렇게 되면 돈을 받고 팔 수가 없다.
"흠난 거 쬐매 넣어 주까?"
복숭아 다섯 개를 샀다. 이미 멀쩡한 것으로 덤을 하나 넣어 주고도 할머니의 넉넉한 마음은 복숭아 바구니에 머물러 있다.
"좋죠."
거절할 이유가 없다.
"흠난 데만 비이 내고 무라. 먼저 가아가는 사람이 임자지."
할머니는 조금씩 물러 있는 것들을 골라 봉지에 몇 개 더 넣는다. 열 개가 됐다. 시장에서 과일을 사면 이렇게 가끔 횡재할 때가 있다. 복숭아 다섯 개를 사면 열 개가 되는 기적!
그런데 그런 덤을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공짜라면 그저 감사합니다, 할 것만 같은데 아무리 덤이라도 흠집 있는 것을 넣어 주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도 요즘은 먼저 물어보고 준다고.
나는 복숭아가 든 비닐 봉지를 받아들고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추석 대목이라 좋으시겠네요."
"아이고마, 나는 명절이 제일 싫다."
의외의 대답이다. 장사하는 분들은 명절 대목을 다들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명절 되믄 과일도 여러 종류 갖다 놔야 되제, 배달도 해야 되제…. 갖다 놓은 과일들 다 안 팔리까 봐 걱정도 이만저만 아이고, 힘은 힘대로 들고…. 내는 마 돈도 싫고, 그냥 이래 쪼깨씩 팔고 맘 편히 있는 기 좋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누리며 마음 편히 사는 것이 최고라는 박영자 할머니. 머리가 아닌, 삶에서 우러난 철학이어서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박영자 할머니의 과일 가게는 간판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 곳을 '우리 동네 과일 가게'라고 부른다. 시골집 같은 푸근한 인심이 가득한 곳, 언제나 고운 빛깔의 과일들이 내 눈을 사로잡는 곳, 주인 할머니의 70년 인생에 깃든 여유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곳이 바로 우리 동네 과일 가게다.
· 즐거운 시장 '마실'시장 좌판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보면, 걸어서 15분 거리인 퇴근길은 어느 새 두 배, 세 배로 늘어나 있다. 하마정 사거리에서 큰 길로 곧장 가면 될 것을, 나는 굳이 시장길로 둘러 갈 때가 많다.
꼭 뭔가를 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괜시리 우울하거나 일에 지쳐 있을 때, 의욕이 없어지고 어떤 일도 재미가 없을 때, 그런 때에 나는 '마실' 가는 기분으로 시장길을 거닌다.
그곳에는 시끌벅적한 삶의 활기가 있고, 오감을 자극하는 색과 향과 소리들이 있고, 누군가의 고단함과 누군가의 즐거움이 뒤섞여 있다.
양정시장은 비교적 소규모의 시장이지만 내가 필요한 것들을 사거나 구경꾼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특히 시장 건물 안에는 꽃시장이 있는데, 도심 속에서 자연의 황홀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그만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꽃들 사이를 거닐며 향기에 취하고 그 고운 꽃잎들을 보며 실컷 눈을 호사시키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꽃 한 단을 사오는 것은 내 삶의 소박한 사치이다. 비록 화려한 포장 없이 신문지나 투명한 비닐로 둘둘 말아 가져오는 것이지만, 그 꽃 한 단으로 내 마음은 일주일 넘게 풍요로울 수 있다. 밖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집 바로 옆에 시장이 있다는 점에 언제나 감사한다.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의 교육을 위해 시장을 떠났다지만,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변해버린 이 시대에는 시장이야말로 좋은 교육 현장이 아닐까.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고, 정이 있고, 온몸의 감각을 깨워주는 소리와 냄새와 빛깔이 있다. 아이의 손을 잡고서 시장에 가 함께 저녁 반찬거리를 고르고, 단골 가게에 가서 이야기도 나누고, 마음에 드는 꽃 한 다발 사들고 들어오는 오후의 '마실'. 그것이 아이에게 학습지 한 장을 더 풀게 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엄마와 시장을 함께 거닐면서 사람살이의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보고 느끼며 풍성한 내면을 갖게 될 것이다.
시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는 시간이다. 오늘도 그곳에선 크고 작은 물건들이 사람들의 손을 오고가며 따뜻한 온기를 빚어내고 하루 분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시장 안을 채우고 있는 온기와 이야기들은 이 밤을 넘어서 또 다른 하루를 여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양정시장의 불빛은 어느새 전부 잠들었지만, 오늘 하루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던 시장길에는 그들의 흔적이 꽃으로 피어나 고요를 지키고 있다.
서정아 소설가
◇약력=200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주요 작품 '풍뎅이가 지나간 자리' '나를, 알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