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무)신교총연합회ㅡ사)한국신교협동조합 원문보기 글쓴이: 소서노
배달국 18대 환웅천황의 역사와 통치강역
한민족사를 바르게 알게되면
초대 환웅천황께서는 환국 말기인 약 6천년 전 환국의 마지막 환인인 지위리 환인으로 부터 명을 받은 환웅(桓雄)께서 정통의 증표인 천부(天符)와 인(印)세 개를 전수받아 풍백, 우사, 운사를 비롯한 문명개척단 3000명(제세핵랑군)을 거느리고동방 태백산(백두산)아래 신시(神市)에 와서 토착족인 웅족과 호족을 통합하여
배달국을건국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동물이 아닌 토템사상에 의해 족호를 나타낸 것임]
이때 환웅천황은 신교 신앙을 기반으로 신시에서 배달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에게 천경신고(天經神誥: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삼신상제(三神上帝)님의 진리로
백성을 교화하였습니다.
배달 환웅천황의 가르침
(환단고기 태백일사 - 소도경전본훈)
일신강충 - 하나님이 참마음을 내려주셨으니성통광명 - 너의 본성이 광명을 통하게하라홍익인간 - 인간세계를 널리 이롭게하고제세이화 - 신교의 삼신진리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라 이로써 상고시대 동방 한민족사의 최초의 도시국가인 제정일치의 신시(神市)를 열고
민족사의 첫 기원을 열었다. (5903년前, 2006년 기준)
한민족의 정기가 서린 민족의 영산 - 태백산(백두산)
환웅은 큰 스승이란 뜻이며.
배달은 하늘의 광명이 비친 땅이란 뜻이며,
신시란 신의 도시란 뜻이다.
환웅천황 께서는 환국의 종통을 계승하여 친히 제단을 쌓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으며 삼신상제님의 신교로써 백성을 다스렸다.
우리 민족을 배달 민족, 배달의 후예라고 일컬어 온것은 단군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환웅의 배달국 신시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 배달국이 실질적으로 한민족 역사의 시조이다.
월드컵을 통해 크게 알려진 ‘치우천황’이 배달국 14대 환웅천황이며,
인류문명의 시조인 태호복희씨, 의학의 시조인 신농씨 등 중국인들이 신화로 모셨던
인물들이 사실상 모두 배달국시대 실존했던 우리의 선조들인 것이다.
중국사의 실체중국 한족의 시조로 알려진 황제헌원으로부터 소호, 전욱, 제곡, 요임금, 순임금과
그 뒤를 이은 하나라의 주임금, 상(은)나라의 탕임금,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모두 100% 동이족 혈통이다.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불렀다.
(동이족 - “동방에 큰활을 잘쓰는 민족” )
중국 고전 <초서>를 보면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라 기록하고 있다.
또 <맹자>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순임금은 동이인(東夷人)이다’, 라고 전한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고대사는 바로 우리 배달 조선민족이 직접 현지에서 개척하여 나라를 건설한 창업의 역사이다.
즉, 중국의 고대사는 바로 우리 배달 조선민족의 역사이며, 오늘날 중국은 한민족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중국 한족역사의 계보(혈통)
단군조선 건국이념으로 잘못 알고 왜곡된채 세뇌되어 온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의
3대 건국이념은 본래 환국의 환인께서 환웅에게 내려 주신 배달국 건국이념 이다.
또한 지금의 개천절(음력 10월 3일)은 단군조선 건국일이 아니라 배달국 건국일이다.
그리하여 동방 한민족사의 시원을 연 환웅천황은 인류 시원 문명국가인 환국의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한 한민족 적통 장자족이다.
신시배달국 환웅 계보 (18대, 재위년수 : 1,565년)
1대 거발한 환웅(居發桓, 94, B.C 3897, 120세, 일명 배달 환웅)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86, .C.3803, 102세)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99, B.C.3717, 135세)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107, B.C.3618, 129세)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93, B.C.3511, 115세)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98, B.C.3419, 110세) 7대 거련 환웅(居連, 81, B.C.3320, 140세)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73, B.C.3239, 94세) 9대 양운 환웅(養雲, 96, B.C.3166, 139세) 10대 갈고 환웅(葛古 또는 독로한(瀆盧韓), 96, B.C.3070, 125세) 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92, B.C.2970, 149세) 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105, B.C.2878, 123세) 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67, B.C.2773, 100세)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15대 치액특 환웅(蚩額特, 89, B.C.2597, 118세) 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56, B.C.2453, 99세) 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72, B.C.2452, 97세)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48, B.C.2380, 일명 단웅(檀雄), 82세)
배달국 14대 치우천황의 동방 대통일 전쟁사
2002년 월드컵 온 국민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다같이 응원하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설레입니다.
붉은악마 그 깃발의 주인공 치우천황을 아시나요?
그 깃발의 주인공이 바로 배달국 14대 치우천황 이십니다.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치우천황은 누구인가?
동방 한민족의 고대사가 송두리째 뿌리 뽑힌 지난 2천여 년의 세월속에서 잊혀졌지만,
치우는 바로 동방의 배달국을 다스리면서 당시 우리의 영토를 가장 넓게 개척한 배달의 14세 자오지 환웅천황이다.
병법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8대 유망이 쇠퇴의 길을 겆자,
치우천황은 웅도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이때 서방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던 황제헌원이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방 최초의 국제 전쟁인 '탁록 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탁록대전 상상도
10여 년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 이 전투에서 치우천황은 쇠로 만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뛰어난 도술로 큰 안개를 지었다.
이 안개술법에 대항하기 위하여 헌원은 지남차를 만들어 싸웠다한다.
당시 치우천황의 군대는 갈로산에서 쇠를 캐어 금속무기를 만들었는데 이 내용이
춘추전국시대에 기록된 [관자]에 전해져 온다.
마침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의 시조가 되어
수천 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중국 한족에게까지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사기]에 주석을 붙인 응소는 '치우는 옛 천자였다(蚩尤古天子)'라고 했고 ,
[사기정의]는 치우 군대가 '동두철액', 즉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 등
각종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조작한 중국
그런데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금살치우'로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동북아 역사와 문명의 뿌리를 황제 헌원으로 조작하고,
'중국이 천자국으로 천하의 중심이며 주변민족은 모두 야만족' 이라는
중화사관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중화사관 즉, 중국사대주의 발원의 시작이다.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탁록 대전
한중 고대사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날조한 기록상의 첫번째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무제(BCE 141~BCE 87) 때의 사관, 사마천(BCE 145~?)이다.
그가 왜 한민족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는지는 당시의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북방 흉노족을 정벌한 한 무제는 동북아 전역에 한나라 군현을 설치하여 명실상부한 중화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위만조선(BCE 194~BCE 108)을 멸망시키고 이어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BCE 239 해모수가 개국)의 영토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동방 조선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그 야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사마천은 중국 25사의 첫머리인 [사기]를 편찬했고,
그 첫 번째 왜곡작품의 상징적 문구가 [오제본기] 서두에 나오는
'금살치우(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이다.
신시배달은 동방문명의 뿌리: 교화敎化 시대
환웅 천황께서는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의 3대 이념을 토대로 민중들에게
신교의 경전이었던,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설하고 하늘의 진리로 교화하였다.
배달국 시대는 교화의 시대로서 초대 거발환 배달환웅은 화백(고대의 민주주의 제도)으로
선정을 베풀면서 역법(달력)을 만들어 1년을 365일로 정했으며,
BCE 3898년, 신지(神誌=사관)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鹿圖)문자’를 만들게 했는데,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녹도문자라고 불렀다.
또한 음양, 오행, 팔괘, 십간십이지 및 청동기와 불을 발견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신시 배달문화의 생생한 증거들
1. 홍산문화(紅山文化, BCE4000~BCE 2300)
신시(神市) 환족(桓族)의 일원이 되어 중원지역에 신시문화를 전파시킨
웅씨국(熊氏國)의 유적으로 추정됨
2. 홍산유적: 1930년대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동북쪽 홍산에서 발굴됨
중국학계에서 양상: 채도(彩陶)문화나 삼황오제에 연결시키려 했으나
1979년 본격적인 발굴결과 전혀 다른 문화임이 확인3. 우하량(牛河梁)유적(BCE 3630) : 능원(凌源縣)과 건평현(建平縣) 경계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고 있음
4. 돌무지무덤(적석총: 고대 한민족 전형적인 능묘구조), 성터, 옥기(玉器) 발굴 :
바이칼호의 것과 일치, 바이칼호 주민들은 연옥 가공기술이 뛰어남
배달국 시대의 주요인물과 업적
태호복희太昊伏犧 (BCE 3528 ~ 3413): 역사상 최초로 우주관 정립
배달의 동방 9족(九夷) 가운데 풍이(風夷)족 출신으로
인류역사상 최초로 풍씨 성(姓)을 썼음.
「태백일사」의「신시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제5대 태우의 천황의 12대 막내아들임 ‘태호’는 복희의 호이며 ‘크게 밝다(대광명)’는 뜻임.
송화강에서 하도(河圖)를 계시받아 태극기의 팔괘를 최초로 그으신 분임
우주의 변화원리를 음양논리로 처음 밝혀 역철학(태극·음양·오행·팔괘)의 창시자가 됨
복희팔괘
따라서 주역은 중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뒤에 역학을 계승 발절시켜 나간 성인들이
문왕, 주공, 공자, 소강절, 김일부 인데,
모두 동이족 혈통출신이다.
주역이라 불리게 된 것은
복희 8괘가 후일 신농씨를 거쳐 주나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태호복희의 하도
하도는 상생의 순환도
염제신농
배달국 제8대 안부련 환웅의 신하로서 웅씨족의 후손이었던 소전(少典)의 아들임.중국 섬서성 강수(姜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강(姜)씨로 정함.
풍씨 성이 15대에서 단절되어 염제신농의 강씨 성姓이 현존하는 인류최초의 성씨가 됨쟁기와 보습을 처음 만들어 경농을 시작함.
백가지의 약초를 맛보아 동양의학을 창시하여 경농과 의학의 창시자로 불림
즉 그는 중국의 농업 ·의약 ·음악 ·점서(占筮) ·경제의 조신(祖神)이며,
중국문화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헌원
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의 후손 지파중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공손의 후손중에 황제헌원(BC 2692~2592)이 나왔다.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 (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중국: 초사-
제14대 자오지 치우천황(BCE 2706 ~ 2598): 배달문화의 최고 전성기
- 도읍을 청구(산동반도에 소재)로 옮김
중국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함
중국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는 황제 헌원(기원전 2692~2593년)과 그 유명한 탁록(하북성 소재)에서
10년간 73회의 전투를 벌여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신하로 삼음.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치우천황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고, 그를 무신(武神)의 원조로 섬기게 됨.
한고조 유방도 무신의 원조(兵主)인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낸 후 군사를 일으키며, 항우에게 이긴 뒤에는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지금의 서안)에 짓고 제를 올리고 공경함.
당시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 선사는 황제헌원에게「삼황내문」을 전하고
창힐에게는 문자를 가르쳐 줌으로써 한족의 황하문명의 뿌리역할을 함
신교의 대도를 전수받은 황제 헌원은 ‘황노학(黃老學)’ 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됨
결론적으로 위대한 우리 한민족은
인류 최초의 시원역사인 환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아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신시 배달국을 열어 동방문명의 뿌리가 되었으며,
중국 한족이 그토록 자랑하던 황하문명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소위 발해연안문화인 홍산문화, 요하문화, 우하량문화가 그 확실한 증거다.
이 배달국을 이어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으로 국통맥이 이어져 한민족 상고문화의 최고 전성기인 47대 단군(2,096년)의 찬란한 역사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 한족과 일본에 의한 상고역사의 왜곡으로
이러한 우리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하여
한민족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배달국 18대 환웅천황의 역사와 통치강역
한민족사를 바르게 알게되면
초대 환웅천황께서는 환국 말기인 약 6천년 전 환국의 마지막 환인인 지위리 환인으로 부터 명을 받은 환웅(桓雄)께서 정통의 증표인 천부(天符)와 인(印)세 개를 전수받아 풍백, 우사, 운사를 비롯한 문명개척단 3000명(제세핵랑군)을 거느리고동방 태백산(백두산)아래 신시(神市)에 와서 토착족인 웅족과 호족을 통합하여
배달국을건국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동물이 아닌 토템사상에 의해 족호를 나타낸 것임]
이때 환웅천황은 신교 신앙을 기반으로 신시에서 배달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에게 천경신고(天經神誥: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삼신상제(三神上帝)님의 진리로
백성을 교화하였습니다.
배달 환웅천황의 가르침
(환단고기 태백일사 - 소도경전본훈)
일신강충 - 하나님이 참마음을 내려주셨으니성통광명 - 너의 본성이 광명을 통하게하라홍익인간 - 인간세계를 널리 이롭게하고제세이화 - 신교의 삼신진리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라 이로써 상고시대 동방 한민족사의 최초의 도시국가인 제정일치의 신시(神市)를 열고
민족사의 첫 기원을 열었다. (5903년前, 2006년 기준)
한민족의 정기가 서린 민족의 영산 - 태백산(백두산)
환웅은 큰 스승이란 뜻이며.
배달은 하늘의 광명이 비친 땅이란 뜻이며,
신시란 신의 도시란 뜻이다.
환웅천황 께서는 환국의 종통을 계승하여 친히 제단을 쌓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으며 삼신상제님의 신교로써 백성을 다스렸다.
우리 민족을 배달 민족, 배달의 후예라고 일컬어 온것은 단군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환웅의 배달국 신시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 배달국이 실질적으로 한민족 역사의 시조이다.
월드컵을 통해 크게 알려진 ‘치우천황’이 배달국 14대 환웅천황이며,
인류문명의 시조인 태호복희씨, 의학의 시조인 신농씨 등 중국인들이 신화로 모셨던
인물들이 사실상 모두 배달국시대 실존했던 우리의 선조들인 것이다.
중국사의 실체중국 한족의 시조로 알려진 황제헌원으로부터 소호, 전욱, 제곡, 요임금, 순임금과
그 뒤를 이은 하나라의 주임금, 상(은)나라의 탕임금,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모두 100% 동이족 혈통이다.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불렀다.
(동이족 - “동방에 큰활을 잘쓰는 민족” )
중국 고전 <초서>를 보면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라 기록하고 있다.
또 <맹자>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순임금은 동이인(東夷人)이다’, 라고 전한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고대사는 바로 우리 배달 조선민족이 직접 현지에서 개척하여 나라를 건설한 창업의 역사이다.
즉, 중국의 고대사는 바로 우리 배달 조선민족의 역사이며, 오늘날 중국은 한민족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중국 한족역사의 계보(혈통)
단군조선 건국이념으로 잘못 알고 왜곡된채 세뇌되어 온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의
3대 건국이념은 본래 환국의 환인께서 환웅에게 내려 주신 배달국 건국이념 이다.
또한 지금의 개천절(음력 10월 3일)은 단군조선 건국일이 아니라 배달국 건국일이다.
그리하여 동방 한민족사의 시원을 연 환웅천황은 인류 시원 문명국가인 환국의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한 한민족 적통 장자족이다.
신시배달국 환웅 계보 (18대, 재위년수 : 1,565년)
1대 거발한 환웅(居發桓, 94, B.C 3897, 120세, 일명 배달 환웅)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86, .C.3803, 102세)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99, B.C.3717, 135세)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107, B.C.3618, 129세)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93, B.C.3511, 115세)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98, B.C.3419, 110세) 7대 거련 환웅(居連, 81, B.C.3320, 140세)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73, B.C.3239, 94세) 9대 양운 환웅(養雲, 96, B.C.3166, 139세) 10대 갈고 환웅(葛古 또는 독로한(瀆盧韓), 96, B.C.3070, 125세) 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92, B.C.2970, 149세) 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105, B.C.2878, 123세) 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67, B.C.2773, 100세)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15대 치액특 환웅(蚩額特, 89, B.C.2597, 118세) 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56, B.C.2453, 99세) 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72, B.C.2452, 97세)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48, B.C.2380, 일명 단웅(檀雄), 82세)
배달국 14대 치우천황의 동방 대통일 전쟁사
2002년 월드컵 온 국민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다같이 응원하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설레입니다.
붉은악마 그 깃발의 주인공 치우천황을 아시나요?
그 깃발의 주인공이 바로 배달국 14대 치우천황 이십니다.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치우천황은 누구인가?
동방 한민족의 고대사가 송두리째 뿌리 뽑힌 지난 2천여 년의 세월속에서 잊혀졌지만,
치우는 바로 동방의 배달국을 다스리면서 당시 우리의 영토를 가장 넓게 개척한 배달의 14세 자오지 환웅천황이다.
병법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8대 유망이 쇠퇴의 길을 겆자,
치우천황은 웅도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이때 서방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던 황제헌원이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방 최초의 국제 전쟁인 '탁록 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탁록대전 상상도
10여 년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 이 전투에서 치우천황은 쇠로 만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뛰어난 도술로 큰 안개를 지었다.
이 안개술법에 대항하기 위하여 헌원은 지남차를 만들어 싸웠다한다.
당시 치우천황의 군대는 갈로산에서 쇠를 캐어 금속무기를 만들었는데 이 내용이
춘추전국시대에 기록된 [관자]에 전해져 온다.
마침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의 시조가 되어
수천 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중국 한족에게까지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사기]에 주석을 붙인 응소는 '치우는 옛 천자였다(蚩尤古天子)'라고 했고 ,
[사기정의]는 치우 군대가 '동두철액', 즉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 등
각종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조작한 중국
그런데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금살치우'로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동북아 역사와 문명의 뿌리를 황제 헌원으로 조작하고,
'중국이 천자국으로 천하의 중심이며 주변민족은 모두 야만족' 이라는
중화사관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중화사관 즉, 중국사대주의 발원의 시작이다.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탁록 대전
한중 고대사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날조한 기록상의 첫번째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무제(BCE 141~BCE 87) 때의 사관, 사마천(BCE 145~?)이다.
그가 왜 한민족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는지는 당시의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북방 흉노족을 정벌한 한 무제는 동북아 전역에 한나라 군현을 설치하여 명실상부한 중화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위만조선(BCE 194~BCE 108)을 멸망시키고 이어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BCE 239 해모수가 개국)의 영토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동방 조선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그 야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사마천은 중국 25사의 첫머리인 [사기]를 편찬했고,
그 첫 번째 왜곡작품의 상징적 문구가 [오제본기] 서두에 나오는
'금살치우(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이다.
신시배달은 동방문명의 뿌리: 교화敎化 시대
환웅 천황께서는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의 3대 이념을 토대로 민중들에게
신교의 경전이었던,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설하고 하늘의 진리로 교화하였다.
배달국 시대는 교화의 시대로서 초대 거발환 배달환웅은 화백(고대의 민주주의 제도)으로
선정을 베풀면서 역법(달력)을 만들어 1년을 365일로 정했으며,
BCE 3898년, 신지(神誌=사관)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鹿圖)문자’를 만들게 했는데,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녹도문자라고 불렀다.
또한 음양, 오행, 팔괘, 십간십이지 및 청동기와 불을 발견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신시 배달문화의 생생한 증거들
1. 홍산문화(紅山文化, BCE4000~BCE 2300)
신시(神市) 환족(桓族)의 일원이 되어 중원지역에 신시문화를 전파시킨
웅씨국(熊氏國)의 유적으로 추정됨
2. 홍산유적: 1930년대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동북쪽 홍산에서 발굴됨
중국학계에서 양상: 채도(彩陶)문화나 삼황오제에 연결시키려 했으나
1979년 본격적인 발굴결과 전혀 다른 문화임이 확인3. 우하량(牛河梁)유적(BCE 3630) : 능원(凌源縣)과 건평현(建平縣) 경계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고 있음
4. 돌무지무덤(적석총: 고대 한민족 전형적인 능묘구조), 성터, 옥기(玉器) 발굴 :
바이칼호의 것과 일치, 바이칼호 주민들은 연옥 가공기술이 뛰어남
배달국 시대의 주요인물과 업적
태호복희太昊伏犧 (BCE 3528 ~ 3413): 역사상 최초로 우주관 정립
배달의 동방 9족(九夷) 가운데 풍이(風夷)족 출신으로
인류역사상 최초로 풍씨 성(姓)을 썼음.
「태백일사」의「신시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제5대 태우의 천황의 12대 막내아들임 ‘태호’는 복희의 호이며 ‘크게 밝다(대광명)’는 뜻임.
송화강에서 하도(河圖)를 계시받아 태극기의 팔괘를 최초로 그으신 분임
우주의 변화원리를 음양논리로 처음 밝혀 역철학(태극·음양·오행·팔괘)의 창시자가 됨
복희팔괘
따라서 주역은 중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뒤에 역학을 계승 발절시켜 나간 성인들이
문왕, 주공, 공자, 소강절, 김일부 인데,
모두 동이족 혈통출신이다.
주역이라 불리게 된 것은
복희 8괘가 후일 신농씨를 거쳐 주나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태호복희의 하도
하도는 상생의 순환도
염제신농
배달국 제8대 안부련 환웅의 신하로서 웅씨족의 후손이었던 소전(少典)의 아들임.중국 섬서성 강수(姜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강(姜)씨로 정함.
풍씨 성이 15대에서 단절되어 염제신농의 강씨 성姓이 현존하는 인류최초의 성씨가 됨쟁기와 보습을 처음 만들어 경농을 시작함.
백가지의 약초를 맛보아 동양의학을 창시하여 경농과 의학의 창시자로 불림
즉 그는 중국의 농업 ·의약 ·음악 ·점서(占筮) ·경제의 조신(祖神)이며,
중국문화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헌원
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의 후손 지파중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공손의 후손중에 황제헌원(BC 2692~2592)이 나왔다.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 (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중국: 초사-
제14대 자오지 치우천황(BCE 2706 ~ 2598): 배달문화의 최고 전성기
- 도읍을 청구(산동반도에 소재)로 옮김
중국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함
중국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는 황제 헌원(기원전 2692~2593년)과 그 유명한 탁록(하북성 소재)에서
10년간 73회의 전투를 벌여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신하로 삼음.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치우천황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고, 그를 무신(武神)의 원조로 섬기게 됨.
한고조 유방도 무신의 원조(兵主)인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낸 후 군사를 일으키며, 항우에게 이긴 뒤에는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지금의 서안)에 짓고 제를 올리고 공경함.
당시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 선사는 황제헌원에게「삼황내문」을 전하고
창힐에게는 문자를 가르쳐 줌으로써 한족의 황하문명의 뿌리역할을 함
신교의 대도를 전수받은 황제 헌원은 ‘황노학(黃老學)’ 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됨
결론적으로 위대한 우리 한민족은
인류 최초의 시원역사인 환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아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신시 배달국을 열어 동방문명의 뿌리가 되었으며,
중국 한족이 그토록 자랑하던 황하문명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소위 발해연안문화인 홍산문화, 요하문화, 우하량문화가 그 확실한 증거다.
이 배달국을 이어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으로 국통맥이 이어져 한민족 상고문화의 최고 전성기인 47대 단군(2,096년)의 찬란한 역사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 한족과 일본에 의한 상고역사의 왜곡으로
이러한 우리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하여
한민족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 47대 단군(단황)의 주요 업적
청춘열사 | 2015.11.28 15:01 | 조회 1190 | 추천 4
조선 47대 단군의 주요 업적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요 어머니는 웅씨왕의 따님이다. 신묘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태어나시니 신인의 덕이 있어 원근 사람들이 모두 경외하여 따랐다 (환단고기 ,상생출판)
무진년 당요때에 단국에서 돌아와 아사달의 박달나무가 우거진 터에 이르시니 온 나라 백성이 천제의 아들로 추대하였다. (환단고기, 상생출판)
비서갑에 사는 하백의 따님을 맞이하여 황후로 삼고 누에치기를 맡기시니 백성을 사랑하시는 어질고 후덕한 정치가 사방에 미치어 천하가 태평하였다 (환단고기,상생출판)
초대단군 재위 51년 무오년에 왕검께서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시니 지금의 참성단이 그것이다 (환단고기 상생출판)
(단군)왕검께서 천하의 땅을 일정한 지역으로 경계를 정해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리셨다. 삼한에는 모두 5가 64족이 있었다 (환단고기,상생출판)
(초대단군이 붕어하시자) 모든 백성이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였고 단기를 받들어 아침저녁으로 모여앉아 경배하여 항상 단군왕검의 덕을 가슴에 품고 잊지 않았다 (환단고기,상생출판)
(2세 부루단군 시절) 임금께서 어질고 복이 많아서 재물을 많이 쌓아 큰 부를 누리셨다. 백성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시니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환단고기,상생출판)
(부루단군이 붕어하시고) 백성들이 제사지낼 때 집안에 자리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항아리에 곡식을 담아 재단위에 올려놓았는데 이것을 부루단지라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다. (환단고기,상생출판)
(3세 가륵 단군 시절) 삼랑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짓게 하시니 이것이 가림토이다. 글자는 다음과 같다
3세 가륵단군 재위 3년 신축년에 신지 고설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환단고기,상생출판)
3세단군 재위 6년 갑진년 임금께서 열양 욕살 삭정을 약수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셨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환단고기,상생출판)
4세 오사구 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신년이다. 임금께서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셨다. 혹자는 지금의 몽고족이 그 후손이라 말한다 (환단고기,상생출판)
5세 구을단군 재위 4년 을축(BCE 2096)년에 갑자를 으뜸으로 사용하여 책력을 만드셨다.
6세 달문단군 재위 35년 임자(BCE 2049)년에 여러왕을 상춘으로 모아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지내고 신지 발리로 하여금 서효사를 짓게 하시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환단고기,상생출판)
7세 한율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인(BCE 2047)년이다. 재위 54년 정미(BCE 1994)년에 임금께서 붕어하셨다.
8세 단군 우서한 단군께서 ‘20분의 1 세법’을 정하시고 물자가 풍부한 곳과 부족한 곳을 서로 통하게0 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셨다. (환단고기,상생출판)
8세 단군 갑인년에 삼족오가 동산에 날아들었는데 그 날개 길이가 석자나 되었다 (환단고기,상생출판)
9세 아술단군께서 어진 덕이 있어 백성중에 금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분지가 비록 더러우나 비와 이슬을 가리지 않고 내리느니라”하시고 죄를 논하지 않으셨다. (환단고기,상생출판)
10세 노을단군 재위 5년 을미년 궁문밖에 신원목을 세워 백성의 하소연을 들으시니 모든 백성이 크게 기뻐하였다. (환단고기,상생출판)
11세 도해단군께서 오가에게 명하여 12명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을 택해 국선소도를 설치하게 하셨다. 그 둘레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택하여 환웅상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셨다. (환단고기,상생출판)
12세 아한단군 재위 2년 가을 8월에 임금께서 나라를 순행하시다가 요하의 왼쪽에 이르러 순수관경비를 세우고 역대제왕의 명호를 새겨 전하셨다. (환단고기,상생출판)
13세 흘달단군 재위 16년(BCE 1767) 이해 겨울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치자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께서 읍차 말량에게 구환의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돕게 하셨다. (환단고기,상생출판)
13세 흘달단군 재위 50년 무진(BCE1773)년에 오성이 누성에 모이고 황학이 날아와 금원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오성취루 현상
14세 고불단군 재위 6년 이해에 큰 가뭄이 들어 임금께서 친히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셨다. 하늘에 바친 서고문은 이러하다
15세 대음단군 재위 28년 정미(BCE 1622)년에 임금께서 태백산에 올라 옛 성조들과 여러 제후국 왕의 공적을 새긴 비석을 세우셨다.
16세 위나단군 재위 28년 무술(BCE 1583)년에 임금께서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제사 지낼 때 환인천제,환웅천황,치우천황과 단군왕검을 배향하셨다. (환단고기,상생출판)
17세 여을단군 재위 52년 경신(BCE 1501)년에 임금께서 오가와 함께 두루 나라를 순수하셨다. 개사성 부근에 이르시자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찬미의 노래를 지어 바쳤다.
오랫동안 선인의 나라에 살면서 기쁜 마음으로 선인 나라 백성이 되었네. 임금님 밝은 덕 어긋남 없고 임금님 훌륭하신 도 치우침 없으니 백성이여 이웃이여 근심과 괴로움을 볼 수 없어라. 믿음으로서 책화를 하고 은혜로써 관경을 하셨네. 성이여! 나라여! 전쟁과 정벌을 볼 수 없어라.
19세 구모소 단군 재위 54년 기미(BCE 1382)년에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을 지었다.
20세 고홀 단군 재위 36년 병신(BCE 1345)년에 영고탑을 개축하시고 별궁을 지으셨다. 재위 40년 경자년에 공공인 공홀이 구환지도를 만들어 바쳤다.
21세 소태단군 재위 47년 경인(BCE 1291)년에 은나라 왕 무정이 전쟁을 일으켜 이미 귀방을 물리치고 나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삭도 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22세 색불루 단군 재위 원년 병신년 임금께서 녹산의 성을 개축하게 하고 관제를 개혁하셨다. 가을 9월에 장당경에 행차하여 종묘를 세우고 고등왕에게 제사를 지내셨다. #고조선
23세 아홀단군 재위 원년 아우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시고 웅갈손을보내어 남국왕과 함께 남방을 정벌하는 군대를 살피게 하셨다. #고조선
24세 연나단군 재위 2년 신축년에 여러 왕이 조칙을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지내고 국가에 대사가 있거나 재앙이 있으면 곧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고조선
25세 솔나단군 재위 37년 정해년(BCE 1114)에 기자가 서화에 살면서 인사를 거절하였다. #고조선
27세 두밀단군 재위 원년에 수밀이국,양운국,구다천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고조선
29세 마휴단군 재위 9년 병술년(BCE 935)에 남해 조수가 석자 후퇴했다 #고조선
30세 내휴단군 시절 임금께서 남쪽으로 순수하여 청구의 정치 상황을 돌아보고 돌에 치우천황의 공덕을 새기셨다. 서쪽으로 엄독홀에 이르러 분조의 여러 왕을 모아 열병하신후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와 수교하셨다. #고조선
34세 오루문 단군 재위 원년 오곡이 풍성하여 잘 익어 만백성을 기뻐하여 [도리가]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하늘에 아침 해솟아 밝은 빛 비추고 나라에 성인이 계셔 덕과 가르침 널리 미치도다. 큰 나라 우리 배달성조여! 많고 많은 사람이 가혹한 정치 못보았네. 밝고 환한 노랫가락 늘 태평성대로세! (환단고기,상생출판) #고조선
35세 사벌단군 재위 50년 무오(BCE 723)년에 임금께서 장수 언파불합을 보내어 바다위의 웅습(구마소)을 평정하였다. #고조선
36세 매륵단군 38년 갑인(BCE 667)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해상의 적을 토벌하게 하셨다. 12월에 삼도(일본을 구성하는 세섬)를 모두 평정하였다. #고조선
43세 물리 단군 재위 36년 을묘(BCE 426)년에 융안의 사냥꾼 우화ㅏ충이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임금께서 군사를 보내셨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에 이 역적이 도성을 포위하고 급히 공격하므로 임금께서 좌우궁인과 더불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해두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지 않아 붕어하셨다.
44세 구물단군 재위 원년 구물이 병사 1만명을 이끌고 가서 토벌하자 역적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궤멸하였다. 마침내 우화충을 잡아 참수하였다. 이에 구물이 모든 장수의 추대를 받아 3월 16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에 즉위하였다. 구물단군께서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셨다.
45세 여루 단군 재위 17년 (BCE 380) 신축년에 연나라 사람이 변방을 침범하자 그곳을 지키던 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서 물리쳤다.
45세 여루단군 재위 33년 정사(BCE 364)년에 연나라 사람들이 패한 뒤에도 연운도에 주둔하면서 배를 만들어 장차 쳐들어오려 하였다. 우문언이 추격하여 대파하고 그 장수를 쏘아죽였다.
46세 보을 단군 재위 19년 무술(BCE 323)년 정월에 읍차 기후가 병사를 이끌고 번조선 궁에 진입하여 스스로 70세 번조선 왕이 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윤허하시고 연나라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게 하셨다.
47세 고열가 단군 재위 58년 3월 제천을 행한 날 저녁에 임금께서 오가와 더불어 의논하여 말씀하셨다“ 옛날 우리 성조들께서 처음으로 법도를 만들고 국통을 세워 후세에 전하셨노라. 덕을 심으심이 넓고도 멀리 미쳐 만세의 법이 되어왔느니라 그러나 이제 왕도가 쇠미하여 모든 왕이 세력을 다투고 있도다. 짐이 덕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능히 다스릴 수 없고 이들을 불러 무마시킬 방도도 없으므로 백성이 서로 헤어져 흩어지고 있느니라. 너희 오가는 현인을 택하여 단군으로 천거하라” 옥무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포로를 석방하셨다. 이튿날 임금께서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여 선인이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