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종교개혁의 시대 (4/4)
롤란드 베인턴, 「세계교회사」 (파주,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2020)
2025년 11월 2일/ 박 영신
1. 이어:
지난 주일, 종교개혁, 개신교, 칼빈주의 신앙인, 퓨리턴/청교도의 윤리 지향성과 자기를 절제하는 ‘금욕주의/합리로운 자본주의 정신’ 사이에 친화성과 인과관계가 있다는 논지를 펼친 막스 베버의 관심과는 달리, 이 지향성이 ‘ 정치’ 영역에서도 나타났다는 논지를 들고나온 아메리카의 정치학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책을 쓴 왈저입니다(Michael Walzer, The Revolution of the Saints: A Study in the Origins of Radical Politics, 1965). 몇 해 전 우리가 출애굽기를 공부할 때, 제가 그의 책(Exodus and Revolution, 1985)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우리말로 옮겨 나왔다는 말도 함께 나눴습니다. 저는 베버에 관심을 가져온 학도로서 오래전부터 왈저의 연구와 생각을 귀히 여겨왔기에, 선생으로 가르칠 때는 그의 글을 학생들에게 읽기를 권하고 함께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두 해 전에도 책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아흔이 되는 나이에도 그의 연구 활동은 왕성합니다. 저는 이 책이 흥미롭다고 여겨 제 관심에 따라 풀이하여 발표하기도 했습니다(박 영신, “정치의 품위와 시민의 자격: 왈저가 말하는 그림씨 ‘리버럴’의 뜻과 힘/Michael Walzer, The Struggle for a Decent Politics: On “Liberal” as an Adjectiv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23). 이러한 공부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베인턴이 9장 끝부분에서 논한 헨리 8세(1491-1547/1509년 제위)를 중심으로 하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역사에 특별히 마음 끌리었습니다.
2. ‘헨리 8세’에 이르는 개혁 역사:
유럽 대륙을 개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거기에 이른 개혁의 전초 운동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럽 대륙에서 떨어진 섬나라 잉글랜드의 종교개혁도 여러 개혁 운동의 발판 위에서 전개되어 나왔습니다.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보고자 합니다. 베인턴의 책 ‘8장 교황권의 쇠퇴’를 공부할 때 교회 안팎에 여러 일이 벌어졌다는 역사를 살폈습니다. 다시 그 내용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종교개혁의 실마리를 갖다준 두 개혁가에 대한 기억을 불러올 필요는 있습니다. 하나는 잉글랜드 옥스퍼드의 존 위클리프(1320년-1384년)(240-242)이고, 다른 하나는 체코 프라하대학의 얀 후스(1369–1415년)(242-244)입니다.
위클리프는 성 어거스틴이 제창한 ‘예정론’을 받아들여 교회 안에 양들도 있고 염소도 있다고 하고는, 그 품행에서 구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윤리 차원에서 교황들의 품행은 사도들의 계승자들로 볼 수 없는 ‘적(敵)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라고 규탄했습니다(240-241). 그는 모든 판단의 근거와 권위를 ‘성경’에 두고, 이 자명한 성경을 직접 읽도록 자국어로 번역하도록 했습니다(241). 그는 가난한 사제들로 구성된 ‘롤라드파’(the Lollards)라는 수도회를 이끌었습니다. 그에게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였지 교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중세 교회의 여러 교리와 의례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롤라드파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하로 숨어들어 있다가 종교개혁의 기운이 일던 16세기 초 이를 뒷받침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Carlos M. N. Eire, Reformations: The Early Modern World, 1450-1650, Yale University Press, 2016: 51-52).
위클리프의 개혁 신앙은 섬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보헤미아 왕가와 잉글랜드 왕가 사이에 혼인이 성사되어 두 지역의 교류가 시작되고, 옥스퍼드와 프라하의 학생 교류도 빈번해졌습니다(240). 위클리프의 개혁 정신이 얀 후스에게 전해졌습니다. 후스는 미사 때 평신도가“하나님의 피[=포도주]”를 흘릴 수 있다는 이유로 포도주잔을 금하고 사제에게 한정시켰던 의례를 부정하고 평신도에게 잔을 주는 의식을 되살렸습니다(242-243). 위클리프와 후스 모두 성경이 권위의 궁극 기준이며 교회는 성경에 맞춰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Eire, 윗글: 52).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말할 때, 루터가 불붙인 대륙의 종교개혁에 앞서 벌써 잉글랜드에 롤라드파가 있었고, 가톨릭교회가 요구하는 ‘성인 숭배’를 비판하고 성경을 자국어로 읽고자 했고, 그리스도의 몸이 그 자리에 임재한다는 성찬식의 교리도 부정하는 개혁 운동이 있었습니다. 개혁의 분위기가 교육을 받은 교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번지고 있었다는 풀이입니다(윗글, 320).
3. ‘헨리 8세’의 종교개혁:
베인턴이 적었듯이,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개혁 신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이 펴 나오기 두 해 전(328, 332), 이제로부터 꼭 508년 전 10월의 마지막 날에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 조항’을 내걸었던 루터의 종교개혁(304)이 시작된 지 17년이 되던 1534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해 잉글랜드의 왕이 자국 교회의 수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과 결별했습니다. 이 역사의 대사건이 일어나기 전, 대륙과 떨어진 잉글랜드에 어떤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앞에 적었습니다. 앞서 뿌려진 개혁의 씨를 받아 왕이 개혁의 정책을 펼쳐나갔습니다.
헨리 8세가 (그의 자문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주도해 간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국가 권력이 한 가운데 들어서 있었다는 특유한 의미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베인턴은 이를 “민족주의와 종교적 격변이 혼합된 가장 현저한” 보기라고 했습니다(332). 로마 교황청에 맞서 잉글랜드의 주권을 내세운 ‘민족주의’와, 교황이 수장이 되어 다스리던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부정한 개혁 신앙 운동이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풀이입니다. ‘혼합된’이라고 옮겨놓은 원말은 ‘fused’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분간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는 ‘용해’ 상태를 말합니다.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을 바꾸기 위해서는 저 부분도, 아니 모든 부분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용해된’ 구조를 이릅니다. 국가와 종교 영역이 분리되지 않고 뗄 수 없게 붙어 있어 상호침투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헨리 8세가 우두머리였던 잉글랜드뿐 아니라 교황이 우두머리였던 교회도 ‘용해된’ 혼합 구조였던 셈입니다. 앞서 이 책에서 읽었듯이, 두 영역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이 있었고 때로는 왕권이 우위를 차지하고 때로는 교황이 우위에 서 있기도 했지만, 이 두 영역은 뗄 수 없게 ‘용해된’ 혼합 구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영역의 변화를 일구기 위해서는 다른 영역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짜임새였습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이 구조 밑에서 가장 강력하게, 가장 인상 깊게 치른 역사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과 같은 사상가의 깊은 연구의 결과로 빚어지지 않았습니다. 왕이 ‘남자 후계자’를 갖기 위한 혼인 문제로 로마 교황과 갈등하고, 드디어 로마 교황 대신에 캔터베리 대주교를 세워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끊었습니다(332-334). 어찌 보면 왕의 후계 구도와 왕권이라는 “정치” 문제 때문에 일어난 종교개혁이었습니다(Alister McGrath, Christianity’s Dangerous Idea, HarperOne, 2007: 112). 이 때문일 것입니다. 개혁 신학자들도 생각을 바꾸기는 했지만, 헨리 8세는 자문한 자들의 신학 노선에 따라, 상황의 변화에 따라 더욱 크게, 더욱 빈번하게 지신의 개혁 노선을 바꾸었습니다.
예배 의례를 자국어로 옮기고 ‘공동기도서’를 지은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가 이 기도서를 고친 데서도 잘 드러난다고 합니다(336). 가톨릭이나 루터의 색깔이 두드러졌던 ‘제1공동기도서’와 달리, ‘제2공동기도서’에는 츠빙글리의 색깔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제’(priest)라는 말 대신에 ‘사역자’(minister)라는 낱말을 쓴 것이 보기라고 합니다(같은 쪽).
그런가 하면, 왕 자신의 의견도 흔들리곤 했습니다. 그는 1537년 교회 지도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가 권력을 통하여 자국어로 옮겨진 성경을 교회에 배포하게 했으나 저변의 민중이 성경 읽기에 보여준 열광과 격정을 보고는 두려운 마음이 생겨 1543년에는 의회를 통하여 고위 신분에 속한 국민만이 읽을 수 있도록 제한코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재와 제약에도 불구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성경에 대한 열망은 퍼져나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을 잉글랜드말로 옮겨진 틴들의 성경이 밀반입되고 있었는데, 한 연구자의 글을 보면 그가 성경을 번역했다고 해서 이단으로 몰려 순교한 1536년 이전에 인구가 2백50만이 채 안 될 그때 16,000권이 넘는 성경이 이미 잉글랜드 땅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Diamaid MacCulloch, The Reformation: A History, Viking, 2003: 198).
헨리 8세가 세상을 떠난 다음 에드워드 6세가 대를 이으면서 그를 자문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 노선에 따라 개신교 신앙 전통을 지켜오다가, 1553년 그가 죽자 매리가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다시 로마 교황 쪽으로 끌어가는 격동기가 벌어졌습니다.
4. 맺으며:
기독교 문명권에 들어서 있었던 만큼 대서양에 떠 있는 이 섬나라도 대륙의 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앞에 적어둔 바입니다. 하지만 루터 이전부터 ‘안으로부터’의 개혁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는 역사 사실이 있습니다. 로마 교황의 지배 체제를 도전하고 교회의 부패를 비판한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이 점도 앞에 적었습니다. 이러한 운동에 뒤이어, 헨리 8세를 통한 ‘위로부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나라는 대륙의 루터와 칼빈이 이끈 개혁 운동과는 달리, ‘중도’ 노선을 걷고자 했습니다. 하여, 잉글랜드 국(가)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름하여 ‘잉글랜드(의) 교회’(The Church of England)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퍼진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라는 이름의 교회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전통과 조직을 받아들이는 개신교를 말합니다.
이 잉글랜드 종교개혁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신앙고백의 시대’라는 표제를 단 10장에서 함께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