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어들이 마을, 대항은 강서구 가덕도 동쪽의 연대봉 기슭과 남쪽의 국수봉 기슭이 목덜미처럼 잘록하게 이어지는 목안 마을이다. 큰 목, 한 목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남쪽 고개를 넘으면 가덕도의 최남단 외양포 마을에 이르고 길은 곧장 가덕도 등대길로 이어진다. 가덕 앞바다는 1천300리를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이 이곳저곳의 땅을 적시며 토해 놓은 미네랄 덕분에 최상급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예부터 '가덕수도(加德水道)'라 부르면서 예서 잡은 고기를 최상품으로 쳤다. 가덕도 숭어는 봄이 제철이다. 육질이 부드럽고 향긋한 단맛이 일품이어서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되었던 가덕도 특산물이다. 약으로도 썼을 만큼 영양이 풍부해 겨울철 달아났던 입맛과 영양을 보충하는 데 더없이 효과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대항 마을의 숭어들이는 3월부터 5월까지 잡는 봄철 숭어들이다. 봄 숭어는 고기 맛도 뛰어나고 수족관에서의 내구성이 높다.
겨울 동안 바다에서 태어나 자란 어린 숭어 '모쟁이'는 무리를 지어 연안으로 몰려와 플랑크톤을 먹으면서 성장 속도가 급격히 빨라진다. 해양대학교 앞바다에서 다대포 몰운대로 몰려온 숭어가 이곳에서 민물 냄새를 맡고 먹이를 찾아 섬의 동쪽 끝 바다에 모여 큰 떼를 이룬다. 그리고 이 숭어 떼는 가덕도 등대가 있는 동두말에서 포구나무개~큰내 끝~내동섬으로 이동한다.
"탁월한 예감·적중력으로 어로 진두지휘
어로장 생활 20년…숭어 떼 포획 '달인'
평생 고기 잡으며 자식 뒷바라지에 최선"
어로장 지시 후 20초 만에 상황 종료
2009년 3월. 가덕도 외양포 남쪽 내동섬 어장의 벼랑 위 망대에는 정적이 흘렀다. 팽팽한 긴장감이 동반한 정적이었다. 마흔 살 무렵 조망(助望) 시절부터 어로장 일을 배워 최고의 어로장으로 오른 허창호(許昌浩·70) 씨의 눈길이 숭어 떼를 쫓아 바다 위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예감과 적중력으로 어로를 지휘하는 그의 판단이 숭어들이의 승패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순간 어로장의 눈에 광채가 번뜩이며 우렁찬 고함이 어장을 뒤덮는다.
"바라(봐라)!"
숭어 떼가 그물을 쳐둔 밖목선과 안목선 사이로 들어오고 있으니 선원들에게 하던 일 멈추고 그물 당길 준비를 하라는 신호다. 숨 가쁘게 다음 명령이 내리꽂힌다.
"밖목선 해라."
"안목선 해라."
물 밑에 고정해 놓은 밧줄을 풀고 당겨 올릴 수 있는 준비를 하란다. 쉴 틈 없이 다음 지시가 내려진다.
"안잔등 나온다. 밖잔등 나온나. 뒷배 나온나."
"밖귀잽이 조지라. 안귀잽이 조지라."
고기가 그물에 완전히 들었으니 지체하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해 그물을 당겨올리라는 말이다. 바쁘게 지시하고 어로장도 망대에서 연결된 또 하나의 줄을 부망과 함께 당겨 숭어들이에 힘을 보탠다.
뒷그물과 옆그물을 순식간에 물 위로 들어 올려 숭어 떼를 그물 속에 가둬 버린다. 6척의 배가 거리를 좁히면서 숭어는 물속 그물에 든 신세가 된다.
"바라" "해라" "나온나" "조지라"라는 가덕도 뱃사람 말이 이렇듯 빠르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던 거다. 어로장의 지시가 떨어지고 불과 20초 만에 상황은 종료된다.
수습 과정 조망부터 시작해 어로장 돼
어로장 허창호 씨는 가덕도에서 3대를 살아온 외양포 토박이다. 선대 묘소도 외양포에 있다. 1904년 일본이 외양포에 요새사령부를 주둔시키면서 주민을 강제로 소개할 때 대항 마을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그게 벌써 100년이 넘었다.
대항 마을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편모슬하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뱃일을 배웠다. 억척스럽게 배만 탔다.
스물여섯 살 때 두 살 터울인 거제도 장목 처자 김두선과 결혼해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가방끈'이 짧은 것이 못내 서러워서 악착같이 뱃일을 해 딸 둘과 아들을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자녀는 명석해 제 몫을 하고, 결혼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고기잡이해서 번 돈으로 집도 번듯하게 새로 지었지만, 그는 야트막한 어촌 집을 지키면서 자식들에게 모든 걸 투자했다.
대구잡이 배를 비롯해 연안 어선만 주로 탔다. 그물도 손수 짜서 썼다. 그래서 아는 일이라곤 뱃일뿐이다. 마흔 살 무렵 숭어들이 배를 탔으니 그렇게 흐른 세월이 30년이다. 선원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고인이 된 구삼석 어로장에게 물 보는 일을 기초부터 배웠다. 고기가 그물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그물을 들어 올릴 것을 지시하는 어로장이 되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 수습 과정의 조망(助望)부터 시작해 부망(副望·차석 어로장) 과정을 통과해야 최고의 어로장인 원망(元望)에 이를 수 있다. 그 역시 5년 동안 조망으로 일하다가 부망을 거쳐 어로장이 됐다.
부망으로 일하던 시절, 포구나무개와 큰개 끝에 가서 숭어가 노는 것을 지켜보다가 숭어가 이동하는 기척이 보이면 내동섬 어장까지 산비탈을 뛰어서 어로장에게 숭어가 오고 있음을 알려 주면서 어로장 기술을 익혔다. 그렇게 어로장이 돼 숭어들이를 진두지휘한 시간만 얼추 20년이 넘었다.
선원들이 쉴 때도 눈은 항상 바다 주시
가덕도 신항이 들어서면서 천수대 어장도 없어지고 포구나무개와 큰개 끝 어장도 빛을 잃었다. 오로지 내동섬 어장으로만 출어한다. 부망에게서 고기 움직임을 통보받은 어로장은 눈을 화등잔같이 크게 뜨고 바다를 주시한다. 숭어 떼가 3천~4천 마리에 이르면 바다 물색은 갈색으로 변한단다(보통사람의 눈으로는 감지하지 못하지만). 이렇듯 어로장은 고난도의 어로기술을 현장에서 익혀야 한다.
선원들이 한가롭게 쉴 때도 어로장의 눈길은 바다에서 떠나지 않는다. 눈도 쉬 피로하고, 정신적으로 예민해지고, 육체적으로도 고된 중노동의 연속이다. 그래서 대항 마을 사람들의 어로장에 대한 대접은 융숭하다.
대항 마을 사람들은 숭어들이의 역사를 170여 년으로 꼽는다. 2001년 어촌계장을 지냈던 김형수 씨의 고조부 김국진 씨가 초대 어로장을 맡으면서 숭어들이가 정착됐다고들 이야기한다. 역대 어로장을 모두 꼽을 수는 없지만 김형수 씨의 고조 어른 이래 김성만-김국만-김종수-김인걸(김형수 부친)- 주정식-김성관-주평헌-구삼석-현 어로장 허창호 씨로 이어진다. 허 씨 외엔 모두 고인이 되었다.
대항마을 숭어들이 문화재적 가치 지녀
전국에서 유일하게 마을이 공동체를 이루어 전통(원시)적인 방법으로 어로행위를 계승하고 있는 대항 마을의 숭어들이는 가히 문화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숭어들이에 동원되는 배는 노(櫓)가 두세 개 있는 1~2톤급 범선(돛단배) 6척이다. 밖목선(6), 안목선(4), 밖잔등(1), 안장등(2), 밖귀잽이(3), 안귀잽이(3) 등 어장에 배치되는 배의 위치에 따라 배 이름도 다르게 부른다(괄호 내 숫자는 승선 선원 수).
숭어들이에 동원되는 선원은 어로장과 부망을 합쳐 21명 정도. 큰 발동선 두 척이 범선을 내동섬 어장 근처까지 끌고 가면, 거기서부터 범선들은 노를 지어 어장까지 간다. 소리에 예민한 숭어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발동선 기계 소리와 기름 냄새도 금물이다. 어장에 이르면 휴대폰도 끈다. 배 위에서 발소리도 죽이고 말소리도 죽인다. 망대에서 내려다보아 안목선부터 시계방향으로 밖목선-밖잔등-밖귀잽이-안귀잽이-안장등으로 어선을 배치하고 그물을 물에 드리운다.
이젠 숭어가 들기를 기다릴 차례다. 새벽같이 출어를 했기 때문에 모자라는 잠을 자거나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숭어가 올 때까지 그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건너편 벼랑 위의 망대(望臺)에서 내릴 어로장의 지시를 기다린다. 산 중턱 벼랑 위에서 망을 보는 어로장의 식사는 안목선에서 망대까지 밧줄로 연결한 도르래로 실어 나른다. 어로장이 망대에 오르내릴 때도 이 안목선을 이용한다.
한 손에 두 마리 들고 '하나'라고 헤아려
잡은 숭어를 헤아리는 방법이 독특하다. 어로장이 한 손에 한 마리씩 두 마리를 한꺼번에 들고 '하나'를 헤아리는데, 그렇게 '열'을 세어 스무 마리가 되면 주판알 두름에서 주판알 한 개를 접어 헤아린다. 곧바로 뜰채에 든 고기를 물 칸에 쏟는다. 100알인 주판알 한 통을 모두 접으면 숭어 2천 마리를 헤아린 셈이다.
하루에 네댓 차례 잡은 숭어는 육지 어판장으로 보낸다. 판매한 수익금은 선원과 어촌계가 5 대 5 비율로 나누었지만, 요즘은 8 대 2의 비율로 선원 수입이 높아졌다. 그중에서도 어로장은 한 짓 반(1.5배) 수익금을 배당받는다.
170여 년 전통, 기록과 연구 이뤄져야
부산의 좌수영 어방놀이와 다대포 후리소리가 뱃일을 하면서 고된 일과 신명을 소리로 풀어내는 데 비해 대항 숭어들이에는 소리가 없는 것이 아쉽긴 하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물이 끌어 올려지는, 그래서 한꺼번에 젖 먹든 힘까지 보태야 하는 어장 일이고 보면 일 소리는 애당초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그뿐 아니라 숭어들이 준비 작업에서조차 말과 소리를 극도로 아껴야 한다. 발소리도 죽여야 하는데, 이 어장 일에 일 소리가 도입되길 바라는 것은 관심 있는 이들의 바람일 뿐이다.
낙동강이 흐름을 멈추는 곳, 가덕수도는 낙동강이 몰고 온 민물의 영양소가 바닷물을 만나면서 훌륭한 어장을 탄생시키는 곳이다. 대항 숭어들이도 이런 해양 조건 아래에서 170년가량 십여 명의 어로장에 의해 전통적인 뱃일로 전승됐다.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신항 곁에 우직하게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전승되는 대항 숭어들이에 대한 기록과 보존에 관한 연구가 때를 놓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부산민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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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들이 배의 배치도. |